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1부 나비, 내려앉다 Prologue 달빛과 별빛이 창을 통해 드리워진 한밤중이었다. 「그」는 수반을 향해 다가갔다. 검은 돌로 만들어진 수반에는 미려한 조각이 아로새겨져 있었으며, 안에는 투명한 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그 앞에 멈춰선 「그」는 손을 내밀었다. 하얀 손이 수면 위에서 멈추자 옅은 파랑이 일었다. 그 파랑이 멎자 돌의 색을 비추어 검기만 했던 수면 위에 누군가의 옆모습이 드리워졌다. 10대 후반의 소년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자른 소년의 안색은 창백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투과한 햇살이 그의 몸을 색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광경은 어딘지 성스러워 보였다. 지친 얼굴의 소년은 두 손을 마주 움켜쥔 채 이마에 대고는 쉴 새 없이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 그는 손에 나무로 만든 팔찌 비슷한 것을 들고 있었다. 손가락이 움직여 한 알 한 알 나무알을 넘겨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에 서렸던 간절함도 깊어갔다. "무엇을 그리도 기원하고 있는 것이냐." 수면에 드리워진 환영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흥미로워하는 느낌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는 환영의 소년이 지니고 있는 선이 뚜렷한 눈매를 보았다. 「그」의 단정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태양이 눈부시게 작렬하는 한낮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수면에 환영을 불러일으켰다. 오늘의 소년은 검은 옷을 입고있었다. 하얗게 튿어진 실밥과 여기저기 바랜 것이 검은 옷감 위에 두드러졌다 . 그의 근처에는 거칠고 누리끼리한 모자를 쓴 남자가 술에 얼근히 취한 얼굴을 한 채 누워있었다. 보기 좋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광경에 얼굴을 찌푸린 「그」가 시선을 돌렸다. 송이가 커다란 국화꽃이 소년의 곁에 피어있었다. 「그」는 그것이 소년의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며칠을 꼬박 수반에 붙어 수면을 지켜보던 「그」의 앞에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띤 채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새하얗게 질린 손가락 마디마디가 묘하게 눈에 들어온다. 피가 몰려 검붉게 변한 남자의 굵은 목을, 소년은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 소년의 눈동자에 선 핏발은 소름이 돋도록 붉었다. 잠시 후 남자의 고개가 툭 꺾였다.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깨달은 소년은 퍼드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크게 뜨인 눈동자 가득 절망과 경악이 서려있었다. "어떻게 할까." 죽었는지 미동도 없는 남자와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인 소년을 번갈아보던 「그」는 머리 속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그」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마침 시기가 좋군." 「그」는 다시 수면 위로 손을 뻗었다. 고요하던 수면이 격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제 1장 내밀어진 손 -1- 열중한 이마에서 땀이 솟아나왔다. 뺨을 타고 흐른 그것이 바닥에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우현은 그것을 내버려둔 채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쉴 새 없이 달싹거리는 입술의 움직임과 더불어 손가락은 로사리오의 나무알을 하나씩 넘겨갔다. 몰두한 눈앞이 새까맣게 몰려 정신이 아득했지만 마음은 더욱 간절해질 뿐이었다. '제발...' 입술로는 기도를 읊고 마음으로는 기원을 되새긴다. 우현은 기원이란 언제나 이루어지라고 있는 법이라는 할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성당의 고요한 공기가 그의 간절함에 전염되어 흔들렸다. 우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십자가에 못박인 그리스도는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평온했다. 그 얼굴로 스테인드 글라스의 화사한 빛이 쏟아져내렸다 . 우현은 스테인드 글라스를 바라보았다. 나팔을 든 천사는 날개를 힘껏 펼치고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목소리의 끝이 미묘하게 잦아들었다. 로사리오를 붙든 손가락이 옅게 떨렸다. 이 떨림만큼 만이라도 하늘에 닿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덧 아르바이트를 갈 시간이 되었다. 우현은 성당을 빠져나왔다. 2월 초의 거리는 살을 에도록 강한 바람을 품고 있었지만 그가 일하는 피자집 근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치인 그는 간신히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타임 카드를 체크한 후 홀에 나갔다. 내내 바빴는지 채 치우지 못한 테이블이 널려있었다. 우현은 음식 찌꺼기가 지저분하게 붙은 접시들을 쌓아올리고 테이블을 닦았다. 코를 통해 들어온 음식 냄새가 텅 빈 속을 거칠게 훑고 지나가자 머리가 띵하고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우현 오빠, 괜찮아? 얼굴이 창백한데.」 샐러드바를 채우던 수경이 걱정스레 물었다. 우현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임마. 얼레? 얼굴 펴. 손님 다 도망가겠다.」 우현은 수경의 이마를 톡 밀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것이 귀여워 이번에는 진짜로 웃자 뒤에서 야유가 터져나왔다. 「어이, 거기 알바들. 연애는 그만 하고 이리와서 주문이나 받아.」 익숙한 목소리다. 우현은 소리가 터져나온 테이블로 걸어갔다. 척 봐도 뭐하는 녀석들인지 금세 알 수 있을 만큼 건들거리는 포즈로 앉아있던 소년들이 킥킥 웃었을 때였다. 누군가의 발에 걸린 우현이 휘청거렸다. 「우, 우현 오빠?!」 수경의 당혹한 목소리가 들린다. 우현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쿠당탕, 하는 소리에 홀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돌아보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릎의 아픔이나 넘어졌다는 당혹감, 누군가가 보고있다는 창피스러움보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눈앞에 다른 이의 신발이 있다는 것이었다. 툭툭 털고 일어난 그는 무표정을 가장한 채 말했다. 「뭘 주문하시겠습니까, 손님.」 「야, 가난뱅이. 너 여기서 일하고 얼마나 받냐?」 「주문하시겠습니까, 손님.」 「이 씹새가! 너 얼마 받냐니까?」 「아르바이트에 관한 상담이라면 홀 마스터에게 여쭤보시기 바랍니다. 주문 없으십니까?」 고집스레 자기 할말만을 하는 우현과 어떻게든 비웃어보려는 소년들 사이로 험악한 기류가 형성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너 이 새끼! 봐주니까 기어오...」 한 소년이 테이블을 후려치며 일어나려는 때였다.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있던 소년 하나가 말했다. 「시끄러워. 불렀으면 주문을 해야 할 것 아냐? 배고프다는 내 말은 껌이냐?」 「상원아, 하지만...」 「시끄럽댔다. 저 새끼 손봐주고 싶으면 학교에서 하면 될 것 아냐.」 어쩐 일로 편을 들어주나 했다. 우현은 잠시나마 놀랐던 자신을 비웃었다. 주문지를 들고 주방으로 가자 수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가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내밀어진 손에는 우유가 한 잔 들려있었다. 「일단 이거라도 마셔, 오빠.」 「어어, 고맙다.」 싱긋 웃은 우현은 우유를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어찔어찔했던 머리가 조금은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나직한 한숨을 쉬는 그를 향해 수경이 말했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녀, 우현 오빠. 그러다가 쓰러지겠다.」 「지금 나를 얕보는 거냐? 이 싸나이 우현이 이 정도에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때 누군가 우현의 뒤통수를 갈겼다. 억,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은 그의 귀에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주접 떨지 말고 이거나 처먹어라. 그렇게 비실거리니까 저런 놈들이 시비를 거는 거 아냐.」 「인영 형?」 낙엽빛 갈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인영이 우현의 앞에 주먹밥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꼬들한 밥에 묻혀진 참기름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인영이 말했다. 「얼른 먹어라. 테이블 세팅은 내가 할 테니까. 참고로 이건 점심 먹고 남아서 처치 곤란했던 밥으로 만든 거니 사양할 것 없다.」 인영은 우현이 무어라 말을 할 사이도 없이 포크며 접시를 들고 휭하니 나가버렸다. 그것을 본 수경이 킥킥 웃었다. 우현은 머쓱한 동작으로 주먹밥을 집어들어 한 입 깨물었다. 「맛있다.」 마요네즈에 버무린 참치까지 들어간 주먹밥은 차가웠지만 맛있었다. 어느덧 밤 11시가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내 서있어서 퉁퉁 부운 다리를 간신히 이끌고 집이 돌아오니 12시가 거의 다 되어있었다. 신발을 직직 끌며 집안에 들어선 우현의 코끝에 술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는 찡그려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펴고는 짐짓 밝은 미소를 지었다. 「다녀왔습니다. 할머니, 주무세요?」 대답 대신 술병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식구가 함께 쓰는 단칸방 아랫목에는 할머니가,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술에 취해 쓰러진 아버지가 있었다. 우현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빈 술병을 치우며 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때 그의 기척에 깨었는지 할머니가 눈을 떴다. 「우현이 왔냐?」 「네. 괜찮으세요?」 아파서 골골하는 할머니의 이마를 얼른 짚으며 우현이 물었다. 쭈글쭈글한 손이 다가와 그의 손을 덮었다. 그 메마름에 담긴 온기가 일순 그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밥은 먹었냐?」 「그럼요. 가게에서 잘 먹고 왔어요. 할머니는요? 차려놓고 나간 것 다 드셨죠?」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잔기침을 내뱉었다. 우현은 얼른 할머니의 가슴을 문질러주었다. 머리맡에 보이는 약병은 거의 다 비어 있었다. 수중에 있는 돈과 들어올 돈, 그리고 나갈 돈을 생각하며 안색을 어둡게 한 그는 곧 다른 일감을 꺼냈다. 인형의 눈을 붙이는 것은 한 개당 몇 원 안 했지만 모이면 제법 큰돈이 되었다. 검은 눈 조각에 열심히 풀칠을 하는 그를 물끄러미 보던 할머니가 불쑥 말했다. 「네 어미는 아직 소식이 없냐?」 우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도대체 어딜 가서 무얼 하는지. 제 자식을 이리 내팽개치고 가다니, 매정한 것 같으니라고.」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겠죠. 전 괜찮아요.」 할머니는 그렇게 대답하는 우현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가여운 것'이라는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곧 할머니의 입에서 깊은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주변이 적막에 싸이니 드는 것은 분심이다. 그는 다시 돈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방세도 밀려있는데. 쌀은 아직 남아있고. 아, 외상값 갚아야지.' 보충수업용 문제집에 생각이 미친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지만 학교 근처에 있는 헌 책방에 가면 조금 싸게 책을 살 수 있었다. 지금은 2월 초. 개학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풍족한 편이었지만, 3월이 되어 새 학기가 시작되면 쪼들리게 될 것이 뻔했다. 한숨을 쉰 그는 졸린 눈을 부비며 인형을 치웠다. 캄캄한 어둠이 방안에 내려앉았다. 싸구려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었다. 할머니가 깨실까 얼른 그것을 끈 우현은 고양이 세수를 한 후 신문을 돌리기 위해 나갔다. 「에휴우. 이걸 언제 다 돌리나.」 묵직한 신문 뭉치가 다리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신문을 모두 돌리고 집에 오면 밥을 해야 했다. 얼른 쌀을 씻어 앉히고 신 김치를 썰어 냄비에 넣고 찌개를 끓였다. 다행히도 할머니는 김치찌개를 좋아했다. 말하자면 그는 소년 가장이었다. IMF 직후보다 더욱 경기가 좋지 않다는 요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은 전부 우현의 아르바이트 덕분이었다. 몇년 전 실직한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우현이 돈을 주지 않으면 마구 후려쳤으며, 심지어는 할머니에게까지 손을 대곤 했다. 그런 남편에게 질린 어머니가 집을 나간 것이 바로 3년 전이었다. '콩가루 집안이겠지, 역시.' 우현은 한숨을 포옥 내쉬며 손을 닦았다. 말은 그래도 드문 상황은 아니었다. 힘들어 다 내던져 버리고 싶을 때에는 TV에서 본 다른 아이들을 떠올렸다. 적어도 그에게는 학비를 대고 옷을 해 입혀야 하는 동생들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곧 고3이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대학을 졸업만 한다면 어지간한 직장에 들어가 편하게 살 수 있으리라. 아버지가 아무리 그만두라고 해도 끈질기게 학교를 다니는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코 여기서 주저앉지는 않겠다는 생각은 거의 독기에 가까웠다. 차디찬 바람이 얇은 교복 바지를 흔들고 지나갔다. 우현은 심호흡을 하고 뛰기 시작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1장 내밀어진 손 -2- 등골에 오도독 돋아난 소름이 추위를 가중시키는 느낌이었지만 우현은 달리 갈만한 곳을 알지 못했다. 그는 옥상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빵을 뜯어먹었다. 「으으윽... 뻐근해라.」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빵 봉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넣은 우현은 몸을 쭉 펴 돌렸다. 내내 혹사시켰던 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풀어졌다. 「뭐 하는 거냐?」 그때 누군가 우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그러모으며 돌아보았다. 상원이 문에 기댄 채 삐딱하게 서있었다. 상당수의 여학생들에게 각광을 받을 만한 자세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우현이 남자라는 점에 있었다. 「너야말로 무슨 개 후까시를 그리 잡고 있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상원은 피식 웃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기럭지가 긴 다리가 보기 좋게 움직여 우현에게 다가온다. 우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볼일이라도?」 우현이 이 추운 겨울날 옥상에 올라와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상원 패거리에게 있었다 . 은근히 배척하는 분위기에 '똥이 무서워 피하냐'는 심정으로 기어나온 그가 찾은 장소가 결국 옥상이었던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고운 말투가 나올 리 없었다. 그렇게 퉁명스레 물은 우현을, 상원은 그저 미소를 띤 채 바라볼 뿐이었다.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고 우현을 직싸게 후려팼던 1학기 때의 상원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현이 다시 물었다. 「볼일 없으면 난 간다.」 「볼일 있어.」 몸을 돌리는 우현을 얼른 붙들며 상원이 말했다. 우현은 붙잡힌 팔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미적거리며 떨어져나가는 상원이 어쩐지 미심쩍었다. 붙잡아놓고도 한참을 말이 없다. 추운 곳에 세워놓겠다는 심보의 신종 괴롭힘인가. 결국 우현은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볼일이란 게 도대체 뭔데?」 「아르바이트. 도대체 몇 개나 뛰는 거냐?」 「뭐?」 우현의 짙은 눈썹이 보기 좋게 찌그러졌다. 상원은 쿡쿡 소리를 내어 웃더니 이번에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피자집에 신문 배달, 주말 새벽에는 편의점. 혹시 또 있냐?」 「대답할 의무 없지?」 간단하게 말하고 손을 흔들어준 우현은 몸을 돌렸다. 그 팔을 다시 상원이 붙들었다. 얼어붙은 팔목이 강하게 조여지자 통증은 배가되었다. 우현이 버럭 소리쳤다. 「도대체 뭐야, 너?!」 「그런 거 하지마.」 기가 막힐 소리다. 우현은 허, 소리를 내어 웃었다. 「뭐냐? 내 사정은 뻔히 알 텐데? 굶어 죽으라는 얘기냐?」 「아냐. 내가 괜찮은 일자리를 알려줄게.」 「...간다.」 더 듣고 있다가는 짜증이 북받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상원은 그를 놓지 않았다. 「그렇게 일하다가는 몸 상한다고, 너.」 고양이가 쥐를 생각한다 해도 이보다 더 우스울 수는 없을 것이다. 우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순간 상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드디어 한 대 칠 생각인가, 싶었던 우현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칠 테면 치라는 그 동작을 보면서도 상원은 주먹만 부들부들 떨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앙 다물린 입술 사이로 내쏘는 듯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너라는 인간은 정말 사람 열받게 하는데 도가 텄구나.」 그것은 괴롭히는 인간의 전형적인 변명 아니던가. 우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픽 웃었다. 상원의 눈동자에 순간 살의 비슷한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움켜쥐었던 주먹이 세찬 소리를 내며 바람을 가르고, 콰직 소리를 내며 우그러진 것은 우현의 머리가 아닌 옥상문이었다. 「끝까지 재수 없는 새끼.」 상원이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에 한 말이었다. 우현은 벌겋게 부어오른 손목을 어루만지며 상원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건 오히려 자신 쪽에서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낮부터 운이 좋지 않더니 저녁까지 재수가 없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술을 마시고 피자집에 들어와 난동을 부린 탓에, 그것을 치우느라 한 시간 이상이나 늦게 끝나버린 것이다. 우현은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니까... 수학 숙제가 있었던가?'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지경이건만 집에 들어가면 다른 일거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현은 높디 높은 비탈길을 한없이 걸어올라가며 주머니를 뒤적거려 열쇠를 찾았다. 「여기에 있... 어라?」 다 녹슨 금속을 대강 대어 만든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우현은 집안에 발을 딛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열어놓은 것인지 떠도는 공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집안을 지배하는 불길한 침묵에, 그는 신발을 벗는 둥 마는 둥 하며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할머니, 다녀왔어요.」 우현은 깊이 잠이 들었는지 깨어나지를 않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바깥에 있다 들어온 손가락에 느껴지는 할머니의 차가운 어깨가 그를 불안하게 했다. 「하, 할머니?」 우현은 조심스레 할머니를 돌아눕혔다. 밀랍처럼 창백해진 채 누워있는 할머니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여 할머니의 코끝에 댔다.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잠이 든 채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를 치러준 것은 동네 사람들이었다. 우현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기운 내라 어깨를 두드려주던 사람들은 그러나 술병을 입에 단 채 쓰러져 잠이 든 아버지를 향해서는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이 추운 겨울날에 문을 열어놓은 채 밖으로 나간 사람이 누구인지는 너무나 자명했다. 「우현이를 저런 몹쓸 작자 옆에 남겨두고는 세상을 떠나다니, 우현 할머니도 정말...」 「누가 아니래요. 게다가 들었어요? 손님용으로 사다놓은 술을 몰래 숨겨놓고는 다 마셔버렸다네요.」 「애 엄마도 없고...」 「쉿! 우현이가 들어요.」 검은색의 낡아빠진 교복을 입은 채 멍하니 앉아있는 우현의 해쓱한 얼굴은 국화 송이의 흰빛을 받아 더더욱 창백해 보였다.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며 혀를 츳츳 찼다. 우현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힘을 내라는 말도 걱정을 해주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쓰러운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단지 어딘지 머리가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수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우현을 누군가가 붙들었다. 우현은 멍한 시선을 들어 상대방을 보았다. 낯익은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 얼굴이 쟁쟁거리며 무어라 지껄였다. 「야? 정신이 붙어있는 거냐? 어이?」 「...시끄러워.」 우현은 상원을 뿌리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하자 그제야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옷자락으로 대강 얼굴을 훔치며 돌아서는데 곱게 접힌 손수건이 눈앞에 내밀어졌다. 우현은 고개를 들어 상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 받고 뭐해?」 상원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러나 우현은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무엇인가를 걷어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우현은 그것을 흘려들었다. 할머니의 시신을 화장하여 뿌리고도 며칠이나 지났다. 누가 죽었든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한다. 우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밥을 먹고 학교를 다니는 자신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안 끝났냐?」 그러나 문제가 어떤 인간에 이르면 쓴웃음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우현은 상원을 내려다보며 감정을 싣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문하시죠, 손님.」 「언제 끝나? 끝나면 같이 밥이나 먹자.」 「아직 못 정하셨으면 다음에 오겠습니다.」 돌아서는 우현의 등에 '기다린다니까'라는 목소리가 닿았다. 능글맞게 히죽거리는 웃음이 담긴 웃음이었다. 우현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중얼거렸다. 「웃기는 새끼.」 상원의 참견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럼에도 상원은 우현을 제멋대로 끌고 다녔다. 정말로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그는 우현을 제대로 된 한정식 집에 끌고갔다. 싫다, 싫다 하면서도 힘의 차이로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우현은 상원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동정이라면 그만 해주셔. 역겨우니까.」 상원의 즐거운 표정이 금세 굳어버리는 것을, 우현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라보았다.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던 상원은 곧 낮게 중얼거렸다. 「그런 거 아냐. 게다가 나는 남을 동정해줄 정도로 좋은 녀석도 아니라고.」 「그건 넘치도록 알고 있다만.」 이 말에는 상원도 어이가 없었는지, 입을 딱 벌리고 우현을 바라보았다. 그때 밥이 나왔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따끈따끈 밥에 맛깔스런 반찬들이 우현의 허기진 배를 자극했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왜 내가 너를 동정한다고 생각해?」 상원은 음식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우현을 향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우현의 눈썹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다음 순간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있었다. 「야? 우현아?!」 우현의 뒷모습은 곧 어둠에 묻혔다. 상원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넘치게 차려진 2인분은 어딘지 외로웠다. 우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 몇 번이고 비틀거리면서도 고집스레 달려갔다. '왜 동정한다고 생각했느냐고?' 상원의 말을 떠올리자 수치심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우현은 근처의 깡통을 걷어찼다. 까앙, 하는 맑은 소리가 밤거리에 퍼졌다. 「제기랄!」 우현은 산소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분에 차 씨근덕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집으로 향했다. 삐그덕거리며 열리는 문이 을씨년스럽다. 우현은 멋대로 나동그라진 신발을 정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단칸방의 아랫목을 차지하고 누운 아버지를 보니 한숨만 푹푹 나왔다. 근처에 뒹굴고 있는 술병들이 한숨을 배가시켰다. 우현은 빈 병을 치웠다. 「하나, 둘, 셋... 아, 이건 좀 더 비싸게 받겠...!」 팔면 얼마나 나올까, 를 생각하며 병을 치우던 우현의 말이 흠칫거리며 잦아들었다. 한동안 아버지에게 돈을 주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설마?' 우현은 얼른 주저앉아 서랍을 열었다. 켜켜이 쌓인 옷가지 아래를 뒤지던 손가락이 통장을 끌어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쉰 그는 다음 순간 얼굴을 뻣뻣하게 굳혔다. 등골을 타고 벼락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어떻게...」 대학에 들어가면 장학금을 받을 생각이었지만 맨 첫 학기의 등록금은 필요했다. 그것을 위해 조금씩 조금씩 모아왔던 돈이었는데, 통장의 잔고는 몇 원 안 남아있었다. 인출할 수 없는 원 단위가 아니었더라면 그나마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순간 그의 머리 속에 향긋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우현이 초등학교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직장에 다니던 시절, 어머니는 우현에게 통장을 하나 만들어 주었다. 열심히 저축하라며 웃던 어머니는 비밀번호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아버지의 생신이야. 이렇게 해 두면 절대로 안 잊겠지?」 '비밀번호도, 아버지의 생신도'라고 덧붙이며 웃었더랬지. 향그럽던 기억은 어느새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통장이 우그러졌다. 분노는 증오는 격정은, 어느새 가슴을 치고 올라와 손끝까지 가 닿았다. 「어떻게...!」 추억의 아름다움은 모조리 잊은 주제에, 남아있는 것은 눈앞이 뒤집어지도록 강한 욕심뿐인 주제에 어떻게 그 기억을 잊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일까. 지극히 소중히 여겨왔던 것이 철저하게 더럽혀진 기분에, 우현은 치를 떨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강하게 졸라진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어느새 눈을 뜬 아버지는 그러나 술에 취해 제대로 거동조차 못하고 있었다. 눈을 까뒤집으며 허우적거리는 아버지의 숨결에서 우현은 지독한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어떻게 그 돈을!」 조금만 더 참으면. 그 돈은 우현의 마지막 희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게 생각하며 버텨 왔다. 조금만 더 참으면. 자신에게는 딸린 식구도 얼마 없고, 동생도 없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대학을 졸업하여 제대로 된 직장을 얻으면 고생은 끝이 나리라고 생각해왔다. 그의 희생을 요구하는 사람은 없으니 괜찮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니까 미워하면 안 된다고 , 할머니라는 가족이 있기에 버틸 수 있는 거라고, 거추장스럽게 여기면 안 된다고. 그러면 언젠가 신이 행복을 허락해줄 테니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디까지 참아야 할까. 어떻게 견디라는 걸까. 이렇게 만들어 놓고, 여기까지 이끌어 놓고. 도움은커녕 짐만 되는 아버지에 죽이고 싶도록 미운 어머니, 누워만 있는 할머니. 할머니조차 실은 걸림돌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억눌러왔었다. 사실은 계속 계속 벗어나고 싶었다. 이 상황과 이 가족관계가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자신을 구해주지 않는 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할머니가 죽었을 때에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얼굴이 질려 가는 것을 보면서도 증오와 비틀린 쾌감 이외에는 다른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귀신같은 얼굴을 하고 아버지의 목을 조르던 우현은 어느 순간 그 고개가 툭 꺾이자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아... 아...」 우현의 까칠한 입술 사이로 공포에 질린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살인을 한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으로 찾아든 공포는 살인 자체에 대한 감정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아버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바들바들 떨며 한 걸음 두 걸음 물러섰다. 그때 그의 눈앞에 찬란한 빛이 작렬했다. "마침 시기가 좋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우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에게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신의 벌일 거야.' 우현은 머리 속 깊이 파고드는 빛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1장 내밀어진 손 -3- 숲은 어두웠다. 한겨울이라 잎을 단 나무는 없었지만 삐죽삐죽한 가지들만으로도 충분한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올빼미가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들쥐 한 마리가 뀌엑, 하는 단말마를 남기고 발톱에 채여 죽었다. 올빼미는 죽은 쥐를 둥지에 가져가 맛있게 식사를 했다. 그 와중에도 노란 눈은 주변을 연신 핼금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금세 내리감겼다. 곧 주변은 적막에 싸이고, 올빼미가 간간이 고기를 물어뜯는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곧 숲 사이에 난 소로를 따라 세 대의 포장마차가 달려왔다. 선두로 달리고 있는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있는 것은 여자였다. 구불구불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과 거무스름한 올리브빛 피부가 아름다운 그녀는 대략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빳빳한 속눈썹에 둘러싸인 눈동자는 밤처럼 새까맸는데, 그녀는 그것을 이리저리 움직여 방향을 살피고 있었다. "이 숲은 멋대로 움직여서 골치란 말야." 조금 투덜거린 여인은 그러나 곧 방향을 잡았는지 말을 재촉했다. 그 뒤를 다른 두 대의 마차가 뒤따랐다. 지고이네르의 숲이라고도 불리는 그 숲의 정식 명칭은 엘 티에르였다. 엘 티에르는 스스로 움직여 지리를 바꾸는 대지로 유명했다. 덕분에 매년 이 숲을 찾아와야 하는 지고이네르들은 길을 찾느라 고심하곤 했다. 그러나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엘 티에르에는 「검은 호수」가 있는 것이다. 한참을 달린 그들은 이윽고 조금 익숙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검은 호수의 주변만큼은 모습이 바뀌지 않았다. 늘 표지로 삼는 키 큰 미루나무를 본 그들의 얼굴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녀가 호수 주변에 마차를 세우자 다른 두 대의 마차도 그 근처에 멈추어 섰다. 그와 동시에 포장이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졌다. "으아, 드디어 온 거야?" 그 중 한 소녀가 지겨웠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소녀의 짧은 고수머리가 목덜미에서 경쾌하게 물결쳤다.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여인은 소녀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래. 수고했다, 티티." "뭘. 수고는 에코 마마가 했지." 여인, 에코는 티티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어서 야영할 준비를 해! 타나, 뭘 꾸물거리고 있어? 에라레스, 너는 장작을 주워오고! 티티, 넌 물을 떠와." 무리의 어머니(마마)인 에코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들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티티 역시 커다란 물동이를 들고 검은 호수를 향해 걸어갔다. 그들이 야영 준비를 하는 동안 에코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그녀는 포장을 젖히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호수에 도착한 어머니는 다른 것보다 먼저 그들의 신인 지고이나에게 감사를 드려야 했다. 그것은 매년 바뀌는 숲을 뚫고 검은 호수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준 신에 대한 예의였다. 마차 안에서 검은 돌을 깎아 만든 작은 제단을 꺼낸 에코는 그 위에 가시덤불의 잘 마른 가지를 놓고 불살랐다. 매캐한 연기가 퍼져나갔다. 이것은 지고이나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그네들의 1년도 함께 점치는 것이었다. 연기가 잘 올라가면 지고이나가 만족했다는 의미로, 신이 한 해 동안 그들을 돌봐준다는 뜻이 된다. 반면에 연기가 마구 흩어지면 그 해 안으로 무슨 일인가가 생긴다는 의미였다. 에코는 연기가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곧바로 올라가는 것도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연기는 검은 호수를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세웠다. 예상대로 조금의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고이나의 뜻을 깨달으려 애쓰는 그녀의 귀에 티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에코 마마! 여기 사람이 있어!" 다급한 목소리였다. 에코는 얼른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달려갔다. 검은 호수가 차츰 가까워지며 물위에 떠오른 실루엣이 뚜렷해졌다. 호수는 수없는 동심원들을 그리고 있었다. 그 검은 동그라미의 중앙에는 기묘한 옷을 입은 사람이 하나 누워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뒤덮인 얼굴은 창백했다. "어떻게 하지?" 티티가 말했다. 신기해하는 것이 역력한 목소리다. 에코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건져내야지." 그 말과 동시에 기묘한 옷의 사람이 호숫가를 향해 스르륵 미끄러졌다. 멀리서 보았을 때에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은 열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이것이 지고이나의 뜻?' 에코가 손을 내밀어 소년을 건져낸 그때, 그가 눈을 떴다. 드러난 눈동자는 흠 하나 없는 검정이었다. 에코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동족이야?" 에코의 생각을 대변하듯, 티티의 순진한 목소리가 울렸다.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수면을 방해했다. 우현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올렸다. 그 파르르한 움직임을 본 티티가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녀는 달음박질쳐 에코에게 가 외쳤다. "에코 마마! 눈을 떴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접한 우현은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거워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이마를 짚으며 일어난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사위를 감싼 나무를 보고 축축한 공기를 맛본 그는 어리둥절하여 눈을 크게 떴다. "괜찮니?" 키가 큰 여인이 다가오자 우현은 저도 모르게 조금 움찔했다. 여자는 외국인이었다. 머리와 눈이 검다지만 거무스름한 피부가 낯설었다. 게다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우현을 당황하게 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Can you speak English?」 "뭐?" 에코는 미간을 좁혔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그녀의 얼굴을 살핀 우현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래?」 에코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언어였지만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에라 르페리토 대륙에서 공인된 언어로는 세 가지가 있었다. 공용어인 이핀트와 귀족어인 레판트, 그리고 신성어인 로퀀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레판트는 공식석상을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귀족들 중에서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이가 허다했다. 신성어인 로퀀트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여,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문 실정이었다. 두 언어 모두 다 낡은 옷을 입은 소년이 구사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소년의 발음은 에코가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레판트나 로퀀트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레판트는 물이 흐르듯 부드럽고 흐느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로퀀트는 바람이 속삭이듯 우아하나 강한 힘이 깃들인 소리를 낸다. 그러나 소년의 발음은 분명하고 또박또박했다. "이름이 뭐니?" 에코는 간단한 말에도 당황하는 우현을 보며 그가 이핀트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는 이 대륙의 사람이 아니다. 에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우현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에라 르페리토 대륙은 넓었지만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지는 종족은 떠돌이 지고이네르뿐이었다. 그 검은색이 가져다주는 매력과 가슴을 지피는 정열 덕택으로 대륙 각지에는 지고이네르와 타민족의 혼혈이 많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검은색의 머리카락은 자식에게 전해지곤 했지만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물에서 건져낸 우현이 잠시 눈을 뜬 것을 본 티티가 동족이냐고 물었던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에코. 나는 에코. 너는?" 우현은 자신을 에코라고 소개한 여자가 손가락을 되돌려 모호한 단어를 내뱉자 그것이 이름을 묻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상황을 알 수 없어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우현.」 "우현?" 우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코가 손짓을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던 티티가 기다렸다는 달려와 나무 그릇을 내밀었다. 그 안에 담겨 모락모락 김을 내는 수프를 보며 우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역시 나무로 만들어진 수저를 그의 손에 쥐어준 에코가 웃었다. "먹어." 손으로 떠먹는 시늉을 하는 에코를 보며 우현은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티티는 기분이 좋았다. 몇 번이고 들었던 검은 호수의 전설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자신보다 한 두 살 위로 보이는 우현을 보며 방긋방긋 웃는 그녀의 머리를 에코가 툭 두드렸다. "얼른 자." "저기, 에코 마마." 모포를 꾸물럭대고 펴며 티티가 입을 열었다. 에코가 말없이 돌아보았다. "저 오빠는 역시 신비한 존재겠지? 혹시 지고이나께서 보내신 걸까?"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잖니. 네가 할 일은 지금 당장 자는 거야." 에코는 티티의 모포를 빼앗아 넓게 펼쳐주었다. 소녀에게 잠을 종용하는 에코는 그러나 역시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민족을 만들어낸 신이 창조신 에다마트라면 지고이네르를 만들어낸 신은 지고이나였다. 검은머리와 눈동자의 여신은 흑요석을 깎아 인간을 만들어 숨결을 불어넣고 상냥함의 온기를 전해준 후 검은 호수를 통해 세상에 내보내었다. 그래서 검은 호수가 있는 엘 티에르를 지고이네르의 숲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1년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만난 검은 눈동자의 소년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검은 호수를 통하여. 생각하면 호수 위에 떠있던 것도, 그럼에도 옷자락 하나 젖지 않았던 것도, 건져야겠다고 말한 순간 근처까지 밀려온 것도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지고이나께 드린 감사의 나무가 뿜은 연기가 검은 호수의 방향을 가리켰던 것과 연관하여 생각하니 단지 우연이라고 여길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우현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뜬 채 에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신들과는 달리 창백한 피부를 가진 그를 동족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듯 싶었지만 검은 눈동자는 다시 없을 증거였다. 사시사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지고이네르는 폐쇄적이었지만 그만큼 동족 내의 단결은 공고했다. 동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현은 지고이네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혜택을 누리게 되리라. 반면 내친다면 이곳에 그냥 두고 가게 될 것이다. 에코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현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길고 새까만 속눈썹에 둘러싸인 그의 눈은 선이 뚜렷했다. 에코는 그것이 묘하게 성숙하고 강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얼른 말부터 배워야겠다. 안 그러면 살아가기 불편할 테니." 모포 속에 머리를 박은 채 에코의 말을 엿듣던 티티가 소리 죽여 웃었다. 다음날 아침, 새로 추가한 일행을 보기 위해 포장마차 세 개 분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마치 오빠를 지키겠다는 듯 버티고 선 티티를 보며 에코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한편 우현은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어찌 된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하는 와중인데, 모두가 몰려들어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었다. 여자들이 아무렇게나 손을 뻗어 어루만지려는 것에 질겁한 우현의 앞을 티티가 막아섰다. "뭐니, 티티. 보호자라도 된다는 거야?" "내가 발견했으니까 내가 보호해야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에는 악의가 없었고 티티는 보호하려는 것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우현은 조금 마음을 놓고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우현은 이곳이 그가 살던 곳과 전혀 다른 장소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작렬하는 빛을 보며 신의 벌이라 생각했었지만, 어쩌면 이것은 신이 내린 다시 없을 기회일지도 몰랐다. '단지 꿈일지도 모르지.' 우현은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앞에 있던 현실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이곳이 다른 세계든 아니면 꿈이든 상관없었다. 자신의 앞에 작렬했던 빛의 밝음을 떠올린 우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머릿결이 좋구나. 쭉 곧은 것이 참 예쁘네." 마흔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이 그렇게 말하며 우현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염색이니 스타일링이니 하는 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인 우현은 직접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잘라왔었다. 덕분에 조금은 들쭉날쭉한 머리카락을 비벼 감촉을 확인한 여인이 웃었다. "예쁜 가발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길러볼래?" 안온한 웃음이었다. 그녀의 웃음을 마주한 우현은 그것에 이끌리듯 미소를 지었다. 다른 세계든 꿈이든 상관없다. 다시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손에 선명한 감촉을 떠올리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1장 내밀어진 손 -4- 타달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퀴가 튀어오른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흙먼지를 뚫고 세 대의 포장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지고이네르의 마차임을 확인한 아이들이 한껏 들떴다. 지고이네르는 어딜 가나 환영받는 존재들이었다. 젊은 여인들은 진귀한 장신구를 생각하며 지갑을 뒤졌고, 아이들은 어떤 묘기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얼굴을 상기시켰으며, 나이 든 사람들은 약이 거의 떨어져감을 기억해냈다. 요란한 북소리에 섞여 쟁이 시끄럽게 울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유지로 뛰어갔다. 넓은 광장에 멈춰선 세 대의 포장마차를 발견한 아이들이 얼른 뛰어가 안을 엿보았다. 안에는 커다란 칼을 든 남자가 있었다. 그가 험상궂게 바라보자 아이들은 와악, 하는 함성을 울리며 도망쳤다. 짐짓 인상을 구겼던 남자는 그것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에코는 무대를 만드느라 바빴다. 가장 큰 마차의 포장을 벗기고 뼈대를 뺀 후 나사를 몇 개 풀면 멋들어진 무대가 완성된다. 남자들을 호령하며 자신도 바삐 움직이던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다른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건 이쪽이야, 오빠." 티티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 말을 따라 누군가 짐을 내려놓았다. 여기저기 뻗친 머리카락이 목덜미께에서 산뜻하게 움직였다. 에코는 슬슬 자라기 시작한 우현의 머리카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년쯤 만들어질 아름다운 가발이 떠올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같이 들자, 오빠. 무겁걸랑." 티티가 얼른 달려들어 우현을 거들었다. 우현은 눈앞을 가린 머리카락을 입으로 훅 불었다. 얼굴을 가리도록 긴 앞머리가 어두운 인상을 주지 않는 까닭은 소년의 표정이 밝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그은 얼굴로 웃은 그는 묵직한 상자를 낑낑대며 옮기기 시작했다. 초여름의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그것이 뺨과 드러난 목덜미를 스쳐 지나자 우현은 고개를 들었다. 먼 곳에는 구름 몇 점과 흐릿한 산이 있을 뿐인데도 자꾸만 시선을 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득한 곳을 바라보는 그의 옷자락을 티티가 움켜쥐었다. "왜?" 우현이 미소를 짓자 티티는 그것을 슬그머니 놓아주었다. 그러더니 볼을 한가득 부풀린다. "나 배고파." 괜히 심통 맞은 어조를 섞어 말하는 티티에게 우현이 웃어주었다. "밥... 얼마 전 먹었어. 이제 배고파?"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핀트를 조금은 어눌하게 내뱉는 그를 보며 티티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티티의 이마를 툭 두드린 우현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지고이네르의 무리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스무 살 이하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가 맡는데, 올해 열 다섯 살인 티티는 우현이 오기 전까지는 3년째 맏언니였다. 아이들에게 딱딱거릴 수 있는 위치의 이점을 만끽하고 있었겠지만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우현이 온 후 부쩍 어리광이 늘어버린 티티를 보며 에코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침에 먹다 남은 말린 무화과를 티티에게 건네준 우현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다른 좌판을 보러 갔다. 아직 지고이네르의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그에게는 그들의 물건이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화려한 돌과 세공이 섬세한 금속을 이어 만든 장신구, 무늬가 복잡한 천, 가는 서클렛 등을 구경하던 그의 눈에 아름다운 금발이 비쳤다. "이거, 내 머리카락으로 만든 거다?" 티티가 자랑스레 말했다. 지고이네르들은 손재주가 좋았으며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한 지식들을 쌓고 있었다. 우현은 지고이네르의 먹물같은 머리카락이 약간의 과정을 거쳐 눈부신 삼베빛으로 변하던 때의 놀라움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지고이나가 내려준 검은 머리카락에 자부심을 가진 지고이네르들은 결코 머리를 물들이지 않았다. 그 빛깔은 색색가지 머리카락들 사이에서도 금새 눈에 띄곤 했다. 미소를 지은 채 지고이네르들을 둘러보던 우현은 자신의 곁을 지나쳐 뛰어가는 초록색 머리카락의 남매를 보았다. 몇 달 전, 처음으로 들른 마을에서 파란색의 머리카락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보고 있었다. 저런 색의 머리나 눈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는 '아아, 다른 세계구나'라고 새삼 생각했던 것은 이미 과거였다. 그는 잘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이런 게 언어도 배운 거고 말이지."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은 조금 이상한 말투였지만. 공연 준비가 다 끝나면 우현은 할 일이 없어진다. 몇몇 어린아이들과 함께 조금 비켜 앉은 그는 다른 지고이네르들의 공연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현악기가 연주하는 빠른 음악에 맞추어 옷자락이 화려한 춤을 추었다.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진 치맛자락 아래로 미끈하게 빠진 종아리가 드러나자 남자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근육이 우락부락한 남자가 올라와 칼춤을 추었다. 날이 없는 칼이라는 것을 알고있는 우현조차 조마조마해질 정도로 칼은 그럴싸했다. 나무로 둥글게 테를 만들고 그것에 현을 친 악기인 라리나를 들고 무대에 올라온 에코가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높지는 않았지만 맑아서 지고이네르의 거무스름한 살갗과 잘 어울렸다. 달리 할 일이 없는 시간에는 상념이 찾아든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저지른 짓을 보는 듯 펼쳐진 장면에 우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상념 속에서의 그는 귀신의 얼굴을 하고 아버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선명하게 떠오른 붉은빛 가운데에 힘을 잔뜩 주어 하얗게 질린 손마디만이 유일하게 결백한 듯 느껴지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악귀의 웃음과 다름없었다. 자신은 살인자다. 우현은 그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있었다. 가끔은 그날 폭발했던 분노와 증오를 떠올리고 몸서리를 치곤 하지만 그래도 미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과거 그가 드라마나 영화, 책에서 보았던 우발적인 살인자들은 괴로워했고 자신의 악함에 고뇌하며 아주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었다. 그런데 그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으며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정말로 악독한 놈일지도.' 자식 새끼를 버리고 도망친 어머니의 피를 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어머니를 가리켜 매정한 것, 독한 것이라 말했었다. 그것을 떠올린 우현은 괴상하게 웃었다. 시원한 바람이 뺨에 닿았다. 그것으로 인해 상념에서 빠져나온 우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꾸벅꾸벅 졸고있었다. 초여름이라고는 하지만 밤바람은 제법 차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우현은 근처의 짐에서 모포를 꺼내어 아이들에게 덮어주었다. 이곳의 한 달은 30일이었다. 1년은 12달이니 360일인 셈이 되지만 묵은 해와 새해의 사이에는 열흘간의 「암흑의 주」가 있었다. 30일은 달이 변하는 주기였는데, 암흑의 주에는 달이 뜨지 않는다. 양력이 아닌 음력을 따르는 계산이었지만 양력과도 얼추 맞아떨어졌다. 지구의 공전주기를 생각한 우현은 곧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다른 세상이었다. 1년의 시작은 겨울로, 우현이 이곳에 도착한 것은 1월의 열 한 번째 날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새 5월이다.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간다고 생각하며, 그는 제멋대로 뻗친 머리카락을 흐트리듯 쓸어올렸다. 또다시 바람이 불어 그를 한 번 감싸고 지나갔다. 공연은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다. 하늘이 새까맣게 되어도 좌판과 무대 근처는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한껏 들뜬 공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지고이네르가 온 날만큼은 늦게 자도 되는 아이들은 잔뜩 고조된 즐거움을 안고 팔딱거리고 있었다. 반면 지고이네르의 아이들은 지쳐있었다. 아빠 엄마는 바빴고, 고조된 공기에 목이 말랐다. 우현은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는 아이들의 입에 빵을 뜯어 넣어주었다. 그러나 잔뜩 말라붙은 입이 빡빡한지 아이들은 다시 칭얼거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티티마저 지쳐 엉덩이 밑에 짐을 깐 채 앉아있었다. 우현은 물동이와 가죽부대를 들여다보았다. 물도 우유도 포도주도 없었다. "티티, 우물 어디에 있는 알아?" "우물? 저 길로 쭉 가면 있어. 오빠 혼자 찾아갈 수 있겠어?" 공유지에서부터 뻗어나간 길은 훤하다. 우현은 피곤해 보이는 티티의 안색을 살핀 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도 피곤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아이들을 괴롭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피곤한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은 이곳에 오기 전의 일상이 아니던가. 밤이라 그런지 우물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허리 즈음까지 닿는 높이의 우물을 들여다본 우현은 두레박을 던졌다. 첨벙, 하는 시원한 소리가 들려오자 갈증이 솟구쳤다. 얼른 두레박을 올린 그는 손으로 물을 떴다. 시원한 물이 마른 목구멍에 닿자 기침이 나왔다. 「아, 시원하다.」 기침을 섞어 물을 넘긴 그가 중얼거렸다. 이곳의 말에 제법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간간이 튀어나오는 원래의 언어는 어쩔 수 없었다. 달아오른 얼굴에 물을 끼얹은 그는 다시 두레박을 던졌다. 낡은 도르래가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이 찰랑찰랑한 두레박이 올라왔다. 맑은 물이 가득 들어찬 물동이에 아이들이 환호했다. 우현은 내밀어진 그릇들에 물을 따라주며 미소지었다. 이런 작은 수고로도 기뻐하는 지고이네르들의 모습은 그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었다. "물 있니?" 몇 번이나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른 에코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현은 얼른 그릇에 물을 부어 내밀었다. "캬아, 시원하다. 네가 떠 온 거야?"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코는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그 웃음에 자랑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이곳이 너무도 좋아서, 우현은 웃음을 되돌렸다. 밤이 으슥해지면 지고이네르의 일 중에서도 가장 음습한 부분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들을 찾아든 여인들은 낙태 약이나 저주의 약, 사랑의 묘약 등을 사갔다. 미워하는 사람의 근처에 숨겨놓으면 저주의 효력을 발휘하는 물건인 불트도 잘 팔리는 상품이었다. 주로 동물의 내장이나 새의 깃털, 피를 묻힌 천 조각, 특별한 식물로 만들어지는 그것은 상당히 막강한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독약도 인기 품목이었는데 특히 전처의 자식을 가진 계모나 늙은 남편이 있는 젊은 여인들에게 잘 팔렸다. 다른 한 편에서는 점을 치고 있었다. 지고이네르는 태어날 때부터 점술가인 경우가 많았다. 카드와 수정구슬, 거친 청동 거울, 맑은 물이 담긴 수반, 고운 문양이 새겨진 색색의 나무 막대를 이용한 점은 순식간에 우현을 매혹시켰다. 그는 어떻게든 배워보려 애썼지만 문제는 언어가 아직 덜 익숙하다는 것이다. 점을 치던 여인은 정신없이 바라보는 우현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점쳐줄까?" 우현은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혹여라도 자신의 과거가 들통나는 일만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사람을, 그것도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무리 자유분방한 지고이네르라 해도 그를 꺼리게 될지 모른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색색가지의 화려한 천들, 그곳에 새겨진 꽃의 문양, 아름다운 얼룩, 머리에 스카프를 뒤집어쓴 채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여인들과 멋진 포장마차. 어떻게 보아도 이국적인 것에서 오히려 안정을 느끼는 자신을 되돌아본 우현은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들었다. 긴 앞머리가 나풀거려 이마를 간질이고는 넘어갔다. 신이 보내준 세상이라면, 그는 심호흡을 하며 생각했다. 신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주었다면 당연히 감사를 해야 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바랬던 기원은 다른 목표를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오히려 더 좋았다. '행복하다.' 우현의 진한 눈가에 눈물이 얇게 배어들었다. 그는 누가 볼까 얼른 그것을 훔치고는 혼자 얼굴이 벌개져 고개를 숙였다.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저를 이곳에 보내준 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국의 언어로 중얼거리는 우현을 불가해하게 바라보던 에코는 뒤이어 그가 싱긋 웃자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날 밤 지고이네르들은 무척이나 늦어버린 저녁식사를 하며 각자가 벌어들인 돈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고이네르의 생활은 공동경제다. 자신만의 물건도 존재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든 것을 나눠가졌다. 늙었으므로 돈을 벌 수 없는 자는 과거에 돈을 번 사람들이다. 마땅히 존중받아야 했다. 어리므로 돈을 벌지 못하는 자는 앞으로 돈을 벌 사람들이다. 마땅히 보호해야 했다. 우현은 지고이네르의 사고방식이 자신을 편안하게 감싸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어, 물이 떨어졌네."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현은 얼른 일어나 물동이를 집어들었다. "나, 갔다와요." "같이 가, 오빠." 티티가 얼른 따라 일어섰다. 멀어지는 두 아이의 등을 보며 한 남자가 웃었다. "참 괜찮은 애야. 손재주도 있고, 배우는 것도 빠르고, 눈치도 있고. 그렇지?" "알 수 없는 소리를 궁시렁대는 버릇을 빼면 말이야."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에코가 사실은 우현이라면 간도 쓸개도 빼줄 정도로 귀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무리에 없었다. 말을 걸었던 남자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제 얼마 후면 저 아이도 스무 살이네. 뭘 맡길 거야?" 간신히 숫자를 익힌 우현이 자신을 열 아홉 살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은 사람은 에코와 티티밖에 없었다. 키는 그럭저럭 훤칠했지만 얼굴은 꽤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본인이 알았더라면 동양계와 서양계의 차이라고 했을 테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말이 어색해 지고이네르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지고이네르의 무리에서는 스무 살이 되면 성인으로 쳤다. 그때부터는 한 사람 몫을 해야 했다. 우현의 섬세한 손끝을 아는 한 여자가 말했다. "나한테 줘. 가발 하나는 끝내주게 만들게 될 거야." "아냐, 전부터 내가 맡아뒀어. 그 아이의 고리 연결하는 솜씨는 일품이지." 사실 머리핀에 큐빅 박기나 귀걸이에 고리 연결하기 등,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는 우현인지라 여느 소년들과는 달리 손끝이 발달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지고이네르에게 섬세한 손끝은 중요한 재산이었다. 에코는 소리 높여 이야기하는 여자들을 보며 좋은 자식을 둔 어머니의 흐뭇함을 만끽했다. 물론 들먹여지는 일들이 전부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도맡아하는 일이라는 점은 생각하지 않은 지 오래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주인공의 존재는 도대체 언제쯤에야 본편에...;)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1장 내밀어진 손 -5- 지고이네르 여인들 사이에서 우현 쟁탈전이 벌어진 시간, 그는 티티와 함께 두레박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낄낄대며 서로의 몸에 물을 끼얹은 두 사람은 흠뻑 젖은 옷을 보며 짓궂게 웃었다. "오빠 머리카락 엉망이야." "네 머리카락도." 캄캄한 밤에 보는 우물은 꽤나 막막했다. 우현은 그 아득한 깊이에 어지러움까지 느끼며 다시 한 번 두레박을 내렸다. 그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일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우현과는 달리 티티는 태연했다. "레사티나 언니다. 오늘도 그냥 안 넘어가네." 레사티나는 무리에서 무희를 맡고있는 스물 세 살의 처녀였는데, 워낙 용모가 아름다워 가는 마을마다 청년들의 유혹을 받았다. 티티의 말대로 오늘'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현에게 지고이네르의 무리에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단 하나만 꼽으라고 말한다면 아마 이것을 들 것이다. 어릴 때부터 모두가 뒤엉켜 지내는 지고이네르는 성에 있어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때로는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했지만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에 있어서 만은 굉장히 폐쇄적인 한국에서 자란, 게다가 가장 중요한 시기를 아르바이트로 점철하여 그런 쪽으로는 눈길을 돌릴 새도 없었던 우현에게는 이것을 쉽게 받아들이라고 하는 편이 무리일 것이다. 반면 뼛속까지 지고이네르인 티티는 자신의 마른 몸매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저렇게 가슴이 불룩했으면 남자들이 줄을 이었을 텐데." "그, 그래?" 어설프게 대답하는 우현을 보며 티티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자신의 매력을 자각하기 시작한 소녀가 지을 법한 당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자랄 날이 많으니까. 에코 마마가 그러는데 나는 커서 굉장히 쭉쭉해지고 빵빵해질 타입이래. 오빠는 어때? 역시 가슴 큰 여자가 좋지?" "아, 그, 나는..." "하지만 나보다는 오빠가 문제다. 에코 마마가 그랬어. 남자의 매력은 역시 잘 짜여진 근육이라고. 그리고 허리도 중요하댔는데 오빠는..." 티티는 우현의 마른 몸을 훑었다. 그의 몸에는 최소한의 근육 이외에는 붙어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것도 검은 호수에서 처음 건져냈을 때에 비교하면 대단히 나아진 상황이었다. 티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더 두고봐야겠지? 남자는 스물 다섯 살까지 큰다니까. 특히 허리 근육을 열심히 키워. 그래야 나중에 여자들에게 사랑받지. 하지만 역시 허리 운동은 섹..." "우와앗! 임마, 티티! 그만!" 열 다섯 살의 여자아이에게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우현은 얼굴을 붉히며 말렸다. 그러나 그는 티티가 그 반응을 즐기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상냥하게 미소지은 티티는 물동이에 물을 부었다. "얼른 가자, 오빠." 네 살이나 연하인 여자아이에게 놀림 당하는 우현, 열 아홉 살의 초여름이다. 「그」는 물끄러미 수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단정한 입가가 열리고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저런 당돌한..." 스르륵 늘어진 진한 남빛의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걷어올린 「그」는 우현의 얼굴을 세세히 뜯어보았다. 창백하여 밀랍 같던 얼굴은 날에 그을어 제법 건강해 보였다. 이전과는 달리 생기가 도는 눈동자를 보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감사하다고 했던가." 우현의 말은 「그」에게 의외의 기쁨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수면에 지도를 불러와 지고이네르의 여정을 살폈다. 「그」의 손가락이 톡톡 움직여 수반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버릇인 그 동작이 수면에 얇은 파문을 불러왔다. 손을 내저어 지도를 없앤 「그」는 다시 우현의 모습을 불러왔다. 그는 사람들이 내민 그릇에 물을 부어주며 웃고있었다. 그것이 어쩐지 미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음을 느낀 「그」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얼른 손을 내저어 환영을 사그라뜨린 「그」의 얼굴에 차가운 표정이 감돌았다. 지고이네르의 마차는 보통 한 마을에 3일 정도 머무른다. 마을은 귀족들의 지배하에 있는 영지의 일부분으로, 한 영지에는 이러한 마을이 몇 개나 있었다. 영지 내의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 다시 짐을 꾸리는 그의 눈에 레사티나가 보였다. 그녀는 한 청년과 붙어 서서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진한 입맞춤을 라이브로 본 우현의 얼굴이 일순 붉게 달아올랐다. 에코가 미소를 머금었다. "저런 정도에 창피해하면 어쩌자는 건지." 에코의 혼잣말을 들은 다른 여자가 우현을 돌아보았다. 곧 킥킥거리는 웃음이 근처에 퍼져나갔다. 그러나 웃음을 불러온 본인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친 에코는 곧 가볍게 몸을 날려 마부석에 앉았다. 그 동작을 감탄하는 기색으로 바라보는 우현에게 그녀가 말했다. "옆에 앉아 갈래? 마차 모는 법도 배울 겸." 우현이 기쁜 얼굴을 하자 에코는 엉덩이를 꾸물거려 자신의 옆에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얼른 그 자리에 기어오르는 소년을 보며 그녀는 흐뭇하게 웃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가 먼 경우 심하게는 며칠씩도 걸렸다. 마을이 없는 땅의 대부분은 숲이었다. 숲은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위험과 마녀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지만 또한 인간의 삶과는 뗄 수 없는 요소인 불의 원천, 즉 나무를 공급해 주었다. 한참 배고픈 계절에 한 몸 가득 열매를 휘어 감아 인간을 구원해주는 과실수도 있었다. 숲은 영주의 것이며 나무를 지키기 위한 숲지기가 존재하지만, 마음이 넓은 영주는 배고픈 자가 따는 몇 개의 과실은 눈감아 주었다. 이 영지에 몇 번 와본 일이 있는 에코는 숲을 헤치고 들어가 풋사과니 하는 것을 한아름 따왔다. 푸릇푸릇하며, 야생의 것이라 굉장히 작은 사과를 깨물자 풋내와 더불어 시큼함이 입안에 스며들었다. 아이들은 지난해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던 것이 아직도 있는 것을 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높다란 감나무 끝에 매달린 까치밥은 몇 개의 계절을 거치며 쪼글쪼글 말라있었다. 곶감을 떠올린 우현도 아이들을 따라 꼴깍 침을 삼켰다. 우현은 숲이 이리도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준다는 사실을 이제껏 알지 못했다. 초여름의 숲이 이렇게나 시원한 줄도 몰랐으며 숲의 공기에 이렇게나 머리가 맑아질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얇은 신발너머에서부터 전해지는 흙의 감촉은 감미로울 정도로 폭신했다. 새의 울음소리는 손으로 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다채로웠다. 우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친 햇살의 조각조각에 눈이 부셨다. 이 작은 것들이 대단히 기뻤다. '이렇게나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근심이나 걱정도 없이 평온한 나날들은 그에게 오히려 불쑥불쑥 불안감을 전해주었다. 몇 년이나 마음을 졸이며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긴장에 길들여진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오지만 반면에 또다시 이전과 같은 나날이 펼쳐진다면 절대 견디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참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현의 지난날은 끔찍했다. 그것은 단지 혹사당하는 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몸이 고되어도 마음이 편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힘들었던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일어나는 두려움과 싸우는 것, 그리고 옆에 있는 누군가를 거추장스럽게 여기면 안 된다는 자기암시가 언제 풀릴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쁜 생각을 하면 신이 버릴지도 모른다. 구원의 직전에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무섭고 또한 무거운 것이었다. 진심이 무서워 억지로 마음을 조작하면 언제까지고 착하게 있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자리한, 현재에 대한 증오와 신에 대한 원망을 억누르고 억눌렀지만 결국 폭발하고 말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우현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밀어진 것이 폭발한 직후였다는 점이었다. 쓴웃음을 머금은 그를 본 에코는 조금 불가해한 얼굴을 했다. 그때 티티가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오빠, 뭐해?" "응? 아아... 별로."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다 현실로 끌려나온 사람이 흔히 그러하듯, 우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티티의 눈동자에 뚜렷하게 드러난 투정을 본 에코는 얇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숲에서 맞는 저녁은 길의 저녁보다 훨씬 어둡다. 그러나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는 없었다. 어떠한 빛보다도 검은색을 사랑하는 지고이네르였다. 어둠을 무서워해서야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우현은 저녁밥을 짓는 여인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수프를 저었다. 보리 가루를 갠 반죽을 뜨겁게 달군 돌 위에서 구워낸 빵은 설탕도 과일도 이스트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맛있었다. 저녁을 다 먹으면 그때부터는 수업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스물 다섯 살인 루휘트의 호령 아래에서 열심히 목검을 휘둘렀다. 지고이네르의 삶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방랑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맨 처음 목검을 들었을 때에는 몸이 뻣뻣하다며 호된 소리를 들었던 우현이었지만 지금은 제법 날랜 솜씨로 그것을 휘두르고 있었다. 강함에 대한 동경은 생물이 지닌 본능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 근육통으로 끙끙 앓았던 우현은 그러나 자신의 팔다리에 얇은 근육과 단단한 힘이 붙는 것에 신기해했다. 그가 발을 놀리자 지고이네르 특유의 전통의상이 바람결에 움직였다. 발목에서 대님으로 묶는 방식의 통이 넓은 바지는 마치 남자 한복과도 닮아있었다. 루휘트는 '목검이 바람을 가르며 날카로운 소리가 쉬익'이라고 말할 정도의 움직임은 아니라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 솜씨로 발전한 우현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가발 만드는 수업을 받고 있던 티티와 염색약에 대해 배우던 또 다른 여자아이가 응원의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에 머쓱해진 우현은 땀에 젖어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짐짓 큰 동작으로 떼어내었다. 지고이네르는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의 것들을 가르친다. 그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선택의 폭을 넓게 하기 위해서였다. 남자아이들의 경우 대부분은 쇠붙이를 이용한 묘기나 들판에서의 사냥, 나무 조각품을 만드는 일을 맡았고, 극히 일부의 아이들이 노래나 춤, 점술 등의 주요한 일을 맡았다. 지고이네르의 일은 대부분이 여성에게 적합한 섬세한 것이었다. 약물이나 가발을 만들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장신구를 꿴다. 점술 역시 남자보다는 달의 영향을 많이 받는 여자에게 적합했다. 무엇보다도 지고이나는 여신인 것이다. 그 때문인지 태어나는 아이들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훨씬 많았으며, 일행을 이끄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였다. 그러므로 혼혈인 남자아이들은 지고이네르의 무리에서 크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지고이네르는 그것을 서운해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방랑의 삶에 하등의 불만도 없지만 아이는 정착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부모로서 당연히 지니는 애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에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우현을 바라보았다. 자식이 없는 그녀는 그 대신 우현과 티티를 귀여워했다. 몇 해 전 폐렴으로 어머니를 잃은 티티는 무리의 어머니인 에코를 무척이나 따랐고, 우현은 자신을 받아들여준 에코에게 굉장한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특히 우현의 시선은 동경의 색채가 진한 것이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 같이 자유분방하며 자신의 하루하루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지고이네르의 무리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경애의 감정이 소년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더더욱 돈독하게 하고 있었다. 티티는 골수까지 지고이네르였다. 미성년자 중에서 다음 대의 어머니를 꼽으라면 에코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선택할 것이었다. 그러나 우현은 아니었다. 에코는 먼 곳을 바라보는 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떠나가게 된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때때로 어른보다 빠른 직감을 발휘하곤 했다. 티티의 투정을 떠올린 그녀는 조금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아이들의 수업은 끝이 났다. 이론 수업을 받던 아이들은 지루함에 찌든 몸을 기지개로 풀었고 몸을 움직인 아이들은 대지의 품에 안긴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빠! 목욕하고 싶지 않아?" 티티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인 우현을 잡아끌며 말했다. 그가 기진맥진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자 아이들 몇이 따라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 "나도!" 바쁜 부모를 대신하여 그들을 돌봐주는 맏이는 아이들에게 있어 무리의 어머니에 버금가는 존재였다. 어떻게든 손을 잡으려 들고, 한 번 더 안아줄 것을 바라며, 함께 있고 싶어한다. 이전의 맏언니였던 티티가 우현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바람에 조금 질투가 난 아이들의 행동을 본 어른들이 웃음을 머금었다. 우현은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죄 섞인 무리들을 보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티티와 둘만 간다면 멀리 떨어뜨린 후 씻으면 되지만 이 많은 아이들을 데려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일이 보살피고 씻겨야 하는 것이다. 그의 미소를 다른 의미로 해석한 티티가 마지 못해 말했다. "조용히 한다면 데려가 주지." 그러자 얌전히 앉아있던 아이들조차 꾸물꾸물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르르 빠져나가는 아이들의 무리를 본 어른들은 기어이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초여름이라고는 해도 밤이다. 물은 차가웠다. 발끝으로 조심조심 온도를 가늠한 아이들은 눈을 딱 감고 물 속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아읏, 차가워!" 누군가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킥킥 소리를 내어 웃은 우현은 물 깊숙이 머리를 담갔다. 샴푸도 없고 린스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연초록색의 물비누뿐이었다. 비누라고는 하지만 식물의 즙을 섞어 끓인 것이므로 거품도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물이 맑으니 몸의 때는 쉽게 빠졌다. 그는 어릴 때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오염이 되지 않은 시냇가의 바위에는 고둥이 다닥다닥 붙어있을 정도였다. 샴푸도 세숫비누도 없어 빨래비누로 머리를 감았지만 며칠간이나 윤기가 돌았었다. 지금도 물기가 어려 검게 반짝거리는 바위 위에 고둥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는 조금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그」는 조금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동성이라고는 하지만 욕실을 엿보는 것은 질이 낮은 자나 하는 짓이다. 점잖게 시선을 떼며 수면에 손을 내민 「그」는 떠오른 환영을 지워버렸다. 물위에 파문이 일자 반쯤 옷가지를 벗은 우현의 모습도 일렁였다. 그러나 「그」 자신 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있었다. 「그」는 자꾸만 떠오르는 마음을 꾹꾹 집어삼켰다. 사실, 조금 아까웠다. (어이, 자네. 범죄야.)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1장 내밀어진 손 -6- 어느새 다 씻은 아이들이 뭍으로 올라가 몸을 닦고 있었다. 우현은 발가숭이가 된 채 깔깔대고 장난을 치는 열 살 미만의 아이들과, 그래도 점잖게 옷을 걸치고 있는 머리가 굵은 아이들을 곁눈으로 살피며 얼른 머리를 감았다. 조금만 눈을 떼어도 장난기가 발동하는 녀석들인지라 시선을 떼면 안 되었다. 그가 축축하게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한 채 뭍으로 올라오자 남자아이 하나가 수건을 내밀었다. 우현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아이의 눈이 금세 기쁨으로 물드는 것이 귀여웠다. "요잇!" 우현은 아이의 목을 붙잡고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아이는 아욱, 아욱 소리를 지르면서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른 아이들마저 우우 몰려들어 레슬링 판이 되려는 찰나, 티티의 새된 소리가 울려퍼졌다.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야?" 우현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티티가 멀지 않은 곳에 서있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른 이외에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있던 우현은 얼굴이 붉어져서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너, 너야 거기서 뭐 하는 거냐! 저쪽으로 오지 말랐지!" "어머나? 우현 오빠는 부끄럼재앵이이?" "임마, 티티!" 티티는 소리 높여 깔깔거리고는 여자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우현은 멋쩍은 한숨을 쉬었다. "저 녀석, 도대체 어느가 데려갈지."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감기에 걸리고 만다. 옷을 걸친 우현은 아직도 발가벗은 채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아마도 그것을 노린 것이었는지 아이들은 순순히 옷에 팔을 꿰었다. "빠르게 돌아가. 모두 걱정한 거야." 내내 어색한 우현의 말을 들은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매달렸다. 주렁주렁 휘어 감긴 아이들을 지탱한 채 장난치듯 직직 끌고 가는 그의 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 돌아본 그의 눈에 기괴한 덩어리가 비쳤다. 그것은 잿빛의, 녹아 내리다 만 듯 흐물거리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짧은 다리와는 달리 긴 팔은 땅에 닿을 정도로 드리워져 있었다. 제대로 선다면 우현의 한 배 반은 되어보일듯 한 몸집은 둔중해 보였다. 그러나 우현은 그것들의 몸이 매우 날래다는 것과, 다 뭉개져 형체를 채 알아보기 힘든 손가락이 실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크으으..." 벌려진 입에서 신음과 함께 침이 흘러나왔다. 걸쭉한 연녹색의 점액이 긴 수풀 사이로 뚝뚝 떨어졌다. 그제서야 아이들도 사태를 알아채고 비명을 올렸다. "으아악! 퀴아네다!" "오, 오빠!" 몇 아이들은 우현에게 달라붙었고 몇 아이들은 마차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든 우현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손가락을 들어 마차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가! 가서 어른들에게 알려!」 급한 때 흘러나온 언어는 입에 익은 것이었다. 그 뜻을 짐작한 티티가 아이들을 몰았다. 겁에 질린 아이들의 다리는 느렸다. 조급한 마음을 품고 아이들을 내몰던 티티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우현이 자신들과는 반대쪽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 가물가물하게나마 보였다. 그의 의도를 짐작한 티티는 얼른 내달렸다. 우현이 이곳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은 인간이 최종 포식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으슥한 숲 등에 살며 여행자를 습격하는 퀴아네는 그조차도 몇 번 본 적 있을 정도였다. 힘이 대단하여 팔이 그리는 궤적에 스치기만 해도 살이 에이고 말지만 지능은 약간 떨어지는 편이었다. 여러 무리로 나뉘어 달리면 그 중 가장 키가 큰 사람을 따라 달리는 퀴아네의 습성을 익히 들어 알고있던 그는 퀴아네가 따라오기 어렵도록 나무를 요리조리 돌아나갔다. 입에서 뜨거운 숨이 훅훅 새어나왔다. 안 그래도 지쳐있던 우현의 다리는 몇 번이나 풀릴 듯 풀릴 듯 하며 간신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달리고 있으면 누군가 쫓아오리라는 것이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의 다리는 점점 느려져만 갔다. 퀴아네 특유의 역겨운 체취와 더불어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에 닿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현은 뒤를 돌아보는 등의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퀴아네의 위치를 확인하면 그 자리에서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길게 자란 풀이 스친 종아리에 피가 맺혔다. 축축했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말라들어 있었다. 숨이 턱에 차올랐지만 정작 우현은 알지 못했다. 아득한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은 잡히면 죽는다는 것뿐이었다. "크으으..." 퀴아네의 울음이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우현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누군가 오는 기미는 없었다. 이제 끝장인가 싶어 입술을 깨무는 그의 시야에 번쩍이는 것이 들어왔다. 그는 주저없이 발을 돌려 그곳으로 달려갔다. 「사, 사람 살... 허억... 퀴아네가...」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자 다리로 전부 실었던 기운이 분산되었다. 비틀거리던 우현의 발이 지난해의 낙엽을 밟고 휘청거렸다. 그 등을 향해 퀴아네의 손이 날아들었다. "...!" 우현은 머리끝까지 번져오는 아픔을 느끼고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나 지나치게 통증이 격렬하면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소리 대신 격한 숨만이 몇 번 새어나왔을 뿐이었다. 휘둘러진 손의 여파로 크게 나동그라진 우현의 시야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구더기가 보였다.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키려던 그는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신음했다. "으윽..." 우현은 등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퀴아네의 뭉그러진 손가락 속에 파묻힌 날카로운 손톱에 베였을 지도 모른다. 순간 그의 등을 타고 차가운 것이 흘렀다. 퀴아네의 손발톱에는 독이 있다고 말하던 에코의 목소리가 귓가에 그야말로 메아리 쳤다. 다 잡은 먹이라고 생각했는지, 퀴아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엉겁결에 한 걸음 물러선 우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더기로 뒤덮인 채 부패해 들어간 남자의 시체를 보고 조금 질겁한 그는 근처에 떨어진 검을 발견했다. 그를 이끌었던 번쩍임의 정체였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검을 집어들었다. "크르르르르으..." 우현은 루휘트에게 배운 대로 검을 곧추세웠다. 지금의 그가 휘두르기에는 조금 버거운 롱 소드였다. 식은땀이 난 손바닥이 미끈거려 검이 조금 휘청했다. 그것을 단단히 고쳐 쥔 우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등은 타는 듯 화끈거리며 통증을 호소했고 눈앞은 점점 어릿어릿해져 갔다. 퀴아네의 팔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뒤늦게서야 그것을 알아차리고 몸을 뺀 우현의 앞머리를 퀴아네의 손톱이 아슬아슬하게 휘긁고 지나갔다. 그러나 안도할 겨를도 없었다. 이번에는 다른 손이 다가와 우현을 후려쳤다. 엉겁결에 검을 들어올린 그는 팔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강한 퀴아네의 힘에 이를 악물었다. "크으으으으..." 그러나 퀴아네 역시 방금의 일로 팔을 크게 베이고 말았다. 찐득찐득한 녹색의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을 본 퀴아네의 눈이 진해졌다. 아픔에 화가 난 것이다. 퀴아네는 한결 빨라진 동작으로 우현에게 달려들었다. 기둥처럼 육중한 팔이 날아오자 그는 맞받아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퀴아네는 얼른 팔을 회수하고 이번에는 머리를 움직였다. 지척까지 다가온 입김이 우현의 목덜미에 닿았다. 큰일났다, 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몸을 튼 그는 그러나 다음 순간 어깨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아악!" 물어뜯긴 어깨의 살이 뭉텅 떨어져나갔다. 몸을 튼 덕분에 목줄기를 물어뜯기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전신을 지배하는 통증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입맛을 다시는 퀴아네는 끔찍했지만 독과 통증에 침식당한 우현의 정신은 점차 가물가물해져 갔다. 우현의 신형이 흔들리는 것을 본 퀴아네는 한 걸음 다가섰다. 뭉그러진 살을 비집고 작게 드러난 눈에 번진 것은 곧 이어질 포식으로 인한 기쁨이었다. 그때였다. "우현! 거기 있어?!" "대답해, 우현!" 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그것은 우현에게는 구원을, 퀴아네에게는 위험을 알리는 소리였다. 우현은 아득해지려던 정신이 퍼뜩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몸을 뒤로 뺐다. "우현! 있으면 대답해!" 에코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몸이 조금 후들거렸다. 우현은 자꾸만 쳐지려는 팔에 힘을 주어 검을 곧추세웠다. "우현!" "에코 마마! 다시 한 번 에코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우현은 목청껏 대답했다. 기운이 빠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만큼이나 미약했지만 애타게 숲을 헤매던 에코에게 있어서는 천상의 음악이었다.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퀴아네는 여기까지 몰아넣은 먹이가 아까운 듯 입맛을 다시더니 숲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우현!" 선두로 달려온 에코와 루휘트가 비틀거리는 우현을 붙잡았다. 그것에 우현이 신음을 했다. 깜짝 놀란 그들은 희미한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현! 너... 우현?" 안도와 통증, 그리고 독에 한꺼번에 습격받은 우현은 이미 정신을 잃고 있었다. 티티는 마차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초조해하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들은 동시에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빠!" 티티는 루휘트의 등에 업힌 우현을 발견하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정신을 잃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코는 울상을 하는 티티를 밀치며 무리에게로 향해 외쳤다. "에라드 할아버지! 여기요, 빨리!" 무리의 제일 가는 의원인 에라드가 급히 다가왔다. 에코는 루휘트에게 손짓을 했다. 깔려진 모포 위에 눕혀진 우현이 신음했다. 그 소리에 혹여 깨어났나 싶어 얼굴을 살핀 에코는 무의식중의 것임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손톱에 당한 것 같은데. 그냥 다쳤다고 보기에는 열이 심해." 에라드는 우현의 어깨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처매며 말했다. 퀴아네의 독에 당했을 때 먹는 약이 있기는 했지만 워낙 시간이 지난 터였다. 게다가 우현은 그들이 오기 직전까지 움직이고 있었다. 독은 원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빨리 퍼지는 법이다. 걱정으로 얼굴을 하얗게 물들인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에라드는 우현의 입에 약을 물리고 등 부분의 옷을 찢었다. 드러난 상처를 본 티티가 신음했다. 퀴아네는 힘이 강한 만큼 스치기만 해도 상처부위의 살이 뭉그러지게 된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베인데다가 그 절상(切傷)이 뭉개지기까지 한 우현의 등은 엉망진창이었다. 피가 낭자한 등을 물에 적신 해면으로 닦아낸 에라드는 상처에 약초 즙을 흘려 넣었다. 따가움을 느낀 우현이 무의식중에 신음하자 마음이 여린 여자아이 몇이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긴박한 마음에 그 울음마저 거슬리게 느껴진다. 눈을 사납게 뜬 에코는 그러나 하얗게 질린 그네들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걱정되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해독약이 녹아 혈관을 타고 퍼짐에 우현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열은 여전했지만 호흡이 고르게 되는 것을 알아챈 에라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괜찮아. 젊고 건강하니까 곧 일어나겠지. 다행히 독이 얼마 퍼지지 않았어. 뭉개지면서 난 피 때문에 독액이 흘러내린 모양이야." 손에 묻은 피와 약을 닦으며 말하는 그의 입술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한껏 일그러졌던 티티의 얼굴에서 기어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에코는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로 소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어서 숲을 빠져나가 인가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가장 안정하겠지만 밤인데다가 환자가 있어 함부로 이동할 수 없었다. 불을 한껏 피우고 번갈아 보초를 서며 퀴아네에 대비하던 청년 중 누군가가 의아한 듯 내뱉었다. "이상하잖아? 왜 영지의 숲에 퀴아네가 있는 거지?" 그 말을 들은 에코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더 덧붙였다. 이렇게나 불을 피웠는데 산지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작년에 이곳에 들렀을 때만 하더라도 퀴아네가 없었다는 사실을 새긴 에코는 깨어나지 않는 우현과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티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우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에코와 티티만은 아니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수반을 내리쳤다. 그 여파로 수면이 흔들리자 식은땀을 흘리며 잠이 든 우현의 밀랍 같은 얼굴도 함께 흔들렸다. "...누가 감히." 나지막하게 내뱉어진 목소리는 그러나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다시 수면에 손을 드리운 「그」는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환영을 흐트러뜨렸다. 곧 다른 환영이 수면에 떠올랐다. 숨가쁘게 도망치는 우현과 그 뒤를 쫓는 퀴아네, 그리고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 퀴아네의 손이 우현의 등을 할퀼 때 「그」는 미간을 찌푸렸고, 누런 이빨이 그를 물어뜯을 때 「그」는 낮게 신음했다. 에라드의 쭈글쭈글한 손이 엉망이 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잠이 든 우현의 모습을 다시 불러왔다. 우현은 창백한 안색을 하고는 있었지만 표정은 제법 평온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잠시 숨을 가라앉힌 「그」는 언뜻 보았던 시체를 떠올렸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참혹한 환영이 떠올랐다. 「그」는 시체의 복장과 물건을 찬찬히 살폈다. 퀴아네와 들개에게 먹히고 부패하여 엉망진창인 시체의 허리띠와, 특히 우현이 들었던 바 있는 검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제대로 다스려지고 있는 영지라면 퀴아네 따위를 그냥 놓아둘 리 없다. 퀴아네를 몰아내어 사람들을 평안하게 하는 것은 다스리는 자의 의무였다. "기본적인 의무도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자에게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차갑게 중얼거린 「그」는 다시 나타난 우현의 환영을 바라보았다. 조금 일렁이는 얼굴에서 진한 선처럼 그어진 감은 눈이 움찔한다 싶었다. 곧이어 긴 속눈썹이 파르르 움직였다. 우현의 새까만 동자가 흐릿하게나마 빛을 품은 채 드러나는 것을 본 「그」는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채 방금 전과는 다른 미소를 머금었다. "우현 오빠!"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수면 너머까지 퍼졌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미간을 구긴 채 환영을 없앤 「그」는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1장 내밀어진 손 -7- "우현 오빠!" 티티의 목소리가 울리자 깨어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렸다. 한달음에 달려간 에코는 흰자위 위에 뚜렷하게 드러난 검은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려던 우현은 낮게 신음하며 다시 드러누웠다. 상처의 통증이 겪은 일을 떠올리게 했다. '살았어.' 그것은 꽤나 생소하고 격렬한 기쁨이었다. 그의 입술이 미소 비슷한 것을 그리려는 순간, 티티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빠, 미안해! 내가, 내가 목욕하러 가자고 그래서..." 티티의 목소리는 얼굴만큼이나 일그러져 있어 우현이 알아듣기에는 조금 무리였다. 그러나 충분히 전해지는 미안함에, 우현은 간신히 팔을 움직여 티티의 손을 잡았다. 그 온기에 티티는 기어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밤잠을 방해받았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부산을 떨며 수프를 가져와 입에 흘려주는 사람,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주는 사람, 옷을 갈아 입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등,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잔뜩 있었다. 자신이 언제 씻었냐는 듯 눈물과 먼지로 꼬질꼬질해진 얼굴의 아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본 우현은 아픈 와중에도 웃고 싶었다. 다행이었다. 살아서, 이 아이들이 무사해서. 지켜낸 자신에 대한 뿌듯함을 느끼며 우현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라지스 주교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 갓 구운 빵과 달콤씁쓰름한 마말레이드, 따뜻한 차로 아침식사를 마친 그는 그 즈음 골머리를 썩게 하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며 주교관 근처를 산책했다. 여기까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의 일상이었다. 보기 좋게 상기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간 아라지스 주교는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진 편지 한 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 봉투와 편지지는 그럼에도 고급스러웠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편지를 집어든 그는 봉투를 봉한 붉은 밀랍과 그 위에 선명히 찍힌 인장, 그리고 종이 전체에 은은하게 배어있는 향기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 즈음 아라지스 주교가 있는 영지는 시끄러웠다. 전 영주가 세상을 떠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지금 영지는 누가 다음 영주가 될 것인지를 놓고 다투는 세 아들 때문에 하루도 평온할 날이 없었다. 상속에 대한 법률을 그대로 적용하자면 첫째 아들이 영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겠지만, 성정이 포악하고 노름을 좋아하며 영지를 다스리는 데에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는 그에게 영주의 자리를 줄 수는 없다는 것이 다른 두 아들의 입장이었다. 가장 총명한 것은 셋째였지만 그 아이는 첩의 소생으로 지지기반이 약했다. 첫째와 둘째는 한 어머니의 배에서 나왔지만 영주의 자리라는 막강한 먹이 앞에서 혈육의 정이란 모래의 부서진 알갱이만큼도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1주일 전, 첫째는 자신의 친동생을 억지로 유폐시키고 영주 대행의 지위에 올랐고, 둘째 아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막무가내의 행동에 반기를 들고일어났다. 영지 내의 사람 치고 영주 대행의 자리에 오른 청년이 친동생을 살해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거의 없었다. 영주의 부재시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게 되는 이는 다름 아닌 그 교구의 책임자였다. 대륙 유일의 신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창조신 에다마트는 그 신관들에게도 막대한 권력을 주었다. 심지어 주교 정도의 직에 오르면 영주를 탄핵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성이 소박한 아라지스 주교는 세속의 일에 깊이 관여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아라지스 주교는 마음을 가다듬고 편지를 읽어 내렸다. 영지 내의 숲에 퀴아네가 있다니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나 벌써 반년 가량 돌보지 않고 내버려둔 영지이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중인 기사가 처참하게 죽었다고 하니 이 또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영지는 황폐해지고 말 것이다. 게다가 망나니 첫째 아들에게 영지를 맡겼다가는 주민들이 고생하게 될 것이 뻔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집무실을 나섰다. 에코는 창백해진 안색으로나마 제법 정신이 돌아온 우현을 확인하고 출발을 선언했다.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마차를 몰아가던 그녀는 눈부신 은빛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영지의 수비대일까." 지고이네르와 공권력은 어떻게 보아도 상극인 관계였다. 역사를 살피면 관과 지고이네르 사이에 있었던 하잘 것 없는 분쟁이 지고이네르 전체에 대한 탄압으로까지 이어진 적도 있었다. 선두에 선 사람은 제법 나이가 든 기사였다. 갈색의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그는 마차를 세우도록 지시했다. 그의 얼굴에서 별다른 적개심이나 살의를 읽어내지 못한 에코는 조금 안도했다. "좀 묻겠수다. 지금 저 숲에서 나오는 길이요?" 기사의 명을 받들고 달려나온 청년 병사가 에코에게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시하자 청년은 다시 물었다. "혹시 저 숲에서 뭔가 보지 못했수? 퀴아네나 뭐 그런..." 그제서야 이들이 자신들과 관련이 없는, 그러나 어느 부분에서는 대단히 관계있는 일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코가 대답했다. "봤어요. 덕분에 우리 아이 하나가 크게 다치기까지 했는걸요." 병사는 얼른 기사에게 달려가 에코의 말을 전했다.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기사가 천천히 말을 몰아 그들에게 다가왔다. 은백색의 갑주가 태양에 번쩍거렸다. "봤단 말인가? 어느 정도의 퀴아네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제가 본 것이 아니라서..." 에코는 말끝을 흐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기사는 냉정하게 되물었다. "달리 본 사람은 있겠지? 다친 아이가 있다고 했나? 그 아이라면 보았겠군." 병자이므로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따위의 말이 귀족과 기사 나부랑이들에게 통할 리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에코는 포장 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현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현은 간신히 마차에서 기어 내려와 에코에게 기대어 섰다. 그를 바라보는 기사의 눈은 제법 날카로웠다. 움직이는 바람에 벌어진 상처에서 새빨간 피가 배어 나오자 다른 쪽에서 우현을 부축하고 있던 티티가 대신 신음했다. "퀴아네를 보았는가? 어떤 녀석이었나." 근엄한 목소리로 묻는 기사를 보며 우현은 이를 악물었다. 입술을 움직이는 것에 이만큼의 근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안 그래도 벌어진 어깨의 상처가 당겨져 아픈 것을 꾹 참느라 창백해진 얼굴로 그가 대답했다. "키는... 그만큼... 말에게 탄 기사님 정도. 덩치는 사람 둘, 붙여서." "키는 말에 오른 기사님의 정도라고 하고, 덩치는 사람 둘을 붙인 만큼이라고 합니다." 기사가 얼굴을 찌푸리자 에코가 얼른 나서 말을 추려주었다. "어디서 보았나?" "안 쪽 시냇가에서요. 제가 같이 있었어요." 통증으로 창백해진 우현의 얼굴을 보며 티티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기사는 우현의 얼굴을 흘긋 보더니 말을 돌렸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피가 모자라는 상황에 또 피를 흘렸으니 우현이 제 정신으로 있을 리 없었다. 비틀거리는 그를 남자들이 조심조심 부축하여 마차에 태웠다. "에잇, 젠장. 하여간 귀족놈들이란." 남자 하나가 중얼거렸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기사가 귀족인 것은 아니었지만 거들먹거리기는 매한가지다. 우현은 피를 보충하는 물약이 입안에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우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차는 마을에 닿아있었다. 영지에서도 중심에 해당하는 마을인지 제법 크고 화려했다. 공유지를 찾아 마차를 대려는데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아라지스 주교!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쉬어서 쇳소리가 섞인 음성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쭈우욱 뺀 에코의 눈에 호화로운 옷을 입은 청년이 비쳤다. 녹색의 머리카락이 태양 아래에서 신록의 색깔로 빛나는 것이 인상적인 미남자였지만 얼굴에 뚝뚝 흐르는 교만함이 평가를 대폭 깎아 내리게 했다. 그는 자신의 양팔을 붙든 병사들을 뿌리치려 애쓰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아라지스 주교! 세속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에코의 시야 끝에 흰 옷자락이 비쳤다.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흰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주교 이상의 고위직에 있는 자들뿐이었다. 에코는 나이가 지긋한 신관을 보며 다름 아닌 그가 아라지스 주교이리라 짐작했다. "내가 세속의 일에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오. 허나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지." 아라지스 주교는 점잖은 목소리로 응수했다. 청년은 눈에 불을 켜고 주교를 노려보았다. 이를 부드득 간 청년은 억눌린 목소리로 내뱉듯 말했다. "한 가지만 묻겠소. 이것은 당신의 뜻이오?" 주교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소리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청년은 자신을 붙잡은 팔들을 뿌리쳤다. "놓아라! 내 발로 걸어나가겠다." 어느새 영지의 주민들이 까맣게 몰려들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티티의 부축을 받으며 앉아있던 우현이 사납게 돌아선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우현은 청년의 파란 눈동자가 일순 분에 넘치는 것을 보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일을 마치고 주교관으로 돌아온 아라지스 주교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었다. 부드럽게 이어진 필체가 지시한 것은 숲에서 퀴아네가 나왔으며 그로 인해 기사가 한 사람 죽었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영주를 자리에서 내쫓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영지의 주민들에게는 가장 좋은 영주가 세워짐 셈이었다. 주교는 죽은 채 감옥에 널부러져 있던 둘째 아들을 떠올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을 생각하고 계셨음인지..." 입이 없는 편지는 그를 감정 없이 올려다볼 뿐이었다. 지고이네르가 지금 머물고 있는 마을은 마디아른 백작의 영주관과 아라지스 주교의 주교관, 그리고 주교 주재의 성전이 있는 곳이었다.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던 마을이 곧 안정한 것으로 보아 새로이 영주가 된 인물은 상당한 신망을 얻고있는 모양이었다. 숲 근처에서 마주쳤던 병사들이 퀴아네 - 돌무더기에 깔려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고 한다 - 를 잡아 돌아온 날, 에코는 무대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좋을 영주를 얻은 데다가 숲의 퀴아네가 죽었다는 것 때문인지, 지고이네르들의 지갑은 점점 두둑해져만 갔다. 게다가 우현의 상처도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아물어가고 있었다. 지고이네르들의 얼굴에서 즐거운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고이네르 특제의 약은 그 효과가 굉장했다. 우현은 어느새 새살이 나기 시작한 어깨의 상처를 확인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상처의 회복보다 더욱 기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가 몸을 던져 아이들을 구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지고이네르들의 시선은 이전보다 훨씬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우현은 그 따뜻하고 조금은 수줍은 열기 속에서 통증마저 잊어버렸다. 이대로 회색의 차가운 콘크리트 세계에서 살아갔다면 분명히 정에 주려 죽었을 것이다. 우현은 인간이 인간에게 전해주는 애정이 이렇게나 풍부하고 상냥하다는 사실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아왔다.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더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겠지만 가족의 따스함이라는 것이 뭔지 알고있는 상태에서 빼앗긴 행복은 그에게 더 큰 상실감을 주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한 우현은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아마 굉장히 외로웠던 것이라고. 정말로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같은 상황이 다시 온다고 해도 똑같은 행동을 하리라 생각한 우현은 미소를 지었다. 새로 즉위한 영주를 위해 열린 축제가 끝났다. 우현의 몸이 괜찮아진 것을 확인한 에코는 출발을 결심했다. 처음에는 조금 머뭇거리던 마차는 점차 속력을 내어, 출발한 지 며칠이 지나자 이전의 속도로 달리게 되었다. "오빠? 뭐 하는 거야?" 티티가 그렇게 물어온 것은 어느 날의 저녁이었다. 저녁식사 후의 부드러운 시간, 우현은 모닥불을 빛 삼아 무엇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스케치북도 연필도 없다. 있는 것은 판자 조각과 타다 남은 장작뿐이었다. 그는 어깨너머로 기웃거리는 티티를 보며 조금 멋쩍게 웃었다. "별 거 아냐. 「탬버린」을 만들어 해서." "탬버린?" 작은 것 하나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 우현은 그런 마음으로 악기들을 떠올렸다. 초등학생의 방이나 노래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탬버린이 이곳에는 없었다. 금속의 잘강거리는 음이 주변에 울리면 춤을 추는 사람도 흥이 더하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나무 캐스터네츠는 조각을 잘 하는 사람에게 부탁해 놓았지만 탬버린의 도안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는 티티를 향해 웃어준 후 그림을 대강 마무리지었다. "우현! 다 됐어. 그런데 이걸 어디에 쓸 거야?" 한 남자가 때마침 완성된 캐스터네츠를 들고 다가왔다. 우현은 그것을 시험해 보았다. 두 쪽의 나무를 연결해주는 끈이 고무줄이 아니라서인지, 한 번 울고난 후 다시 입을 벌려야 할 캐스터네츠는 가만히 있었다. 결국 손가락을 걸 끈도 달기로 합의를 본 우현은 티티의 시선을 받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우현을 보고있었다. "왜?" "오빠는 몸도 좋지 않으면서 왜 쉬지를 않아?" 티티는 우현이 묘한 물건들을 생각해내는 것이 싫었다. 그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것을 말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판자에 그림을 그리는 그의 손놀림은 제법 익숙해 보였다. 티티는 우현이 그리는 방식의 그림이 상류층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우현은 조금 웃으며 티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알았어." 완성된 캐스터네츠의 끈을 손가락에 묶은 우현이 몇 번 시범을 보였다. 딱, 딱 하는 경쾌한 소리에 몇몇 사람들이 흥미를 보였다. 손에 끼우고 춤을 추는 것을 본 적 있다는 그의 말에 레사티나가 나섰다. 「그」는 수면에 나타난 환영을 보며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우현은 너무나도 잘 적응하고 있었다. 우현의 얼굴에 떠오른, 이 이상 행복한 세상은 없을 것 같다는 표정을 본 「그」의 머리 속에 조금은 어두운 생각이 서렸다. 얼굴을 상기한 채 탬버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우현을 보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토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1장 내밀어진 손 -8- 몇 개의 마을을 더 거치며 캐스터네츠와 탬버린의 성공을 확인한 우현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신세만 지고있던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생각에 너무나 뿌듯했다. 그 날은 어느 영지에도 속해있지 않은 숲을 지나는 중이었다. 식사 중에 물동이가 비자 티티가 자진해서 일어났다. 우현도 무심결에 따라 일어서서, 두 사람은 한적한 숲길을 걷게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티티는 종알종알 쉴 새 없이 입을 놀리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우현 오빠가 만든 악기는 레사티나 언니가 남자를 유혹하는 데에 더 도움을 주게 된 거지. 마음에 드는 남자가 지나가면 괜시리 크게 캐스터네츠를 울리는 걸 못 봤어?" "보기는 했지만." "그렇게 해서 남자가 돌아보면 이번에는 탬버린을 흔드는 거야. 다른 언니들도 원성이 대단하다고. 안 그래도 레사티나 언니는 인기가 많아서 괜찮은 남자들을 전부 독점하고 있었잖아." 레사티나가 화사하게 웨이브진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늘씬한 종아리를 드러내며 춤을 추면 지나가는 남자들의 반 이상이 돌아보곤 했다. 우현은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몇몇 처녀들을 떠올렸다. 루휘트가 레사티나에게 맥을 못 추는 요즘, 그를 좋아하는 라라시타는 아름다운 무희의 얼굴에 구멍이 뚫릴 정도의 시선을 건네고 있었다. 시선의 날카로움이 칼날이 된다면 레사티나는 골백번은 난자당했으리라 생각한 우현이 조금 웃었다. 숲의 샘은 먼 곳에 있었다. 티티는 발로는 걸리는 돌을 툭툭 걷어차며 입으로는 레사티나를 퍽퍽 걷어차며 신나게 물동이를 흔들었다. 방랑생활을 하는 지고이네르의 몇 안 되는 옹기인 그것을 마구 휘두르는 티티에게 우현이 주의를 주려 할 때였다. "캬아아아악! 이것 놔!" 익숙한 목소리의 비명이었다. 앞서 달려나가는 티티의 뒤를 따라 아직 회복하지 못한 우현이 걸었다. 되도록 잰걸음을 옮긴 그는 수풀 사이로 드러난 광경에 입을 크게 벌렸다. "어떡하지?" 티티가 입술을 짓씹으며 물었다. 씻는 중이었는지 알몸이 된 레사티나는 자신을 타고 누르려는 남자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남자의 허리에 달린 바스타드 소드가 땅에 닿아 절걱거렸다. 함부로 덤볐다가는 레사티나를 구하기는 고사하고 두 사람마저 죽을지 모른다. 「어른들을 불러와!」 우현은 티티의 등을 떠밀며 낮게 소리쳤다. 티티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 비슷한 상황이 있었음을 기억한 그녀는 얼른 우현의 옷깃을 움켜쥐고 고개를 흔들었다. "오빠가 가." "나, 뛰자 등 아파. 네가 가." "싫어. 오빠가 가." "티티!" 우현은 급한 마음에 더 굳어버린 혀로 간신히 티티를 달래려했지만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는 이미 하의를 거의 벗은 상태였고 레사티나의 입에는 재갈까지 물려있었다. 그때 남자의 바스타드 소드가 옷가지와 뒤섞여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을 본 우현은 티티의 손에 들린 물동이를 낚아채었다. "오빠?" 물동이의 묵직한 무게는 고통인 동시에 구원이었다. 이 정도라면, 이라고 생각하며 남자의 뒤로 다가간 우현은 어깨를 타고 뻐근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레사티나의 눈물 젖은 눈동자가 우현을 향했다. "그래, 이렇게 얌전히 있으..." 놀라움과 기대로 동작을 멈춘 레사티나를 보며 느물하게 말한 남자는 다음 순간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둔한 통증에 몸을 굳혔다. 그의 목이 천천히 돌아 우현을 향했다. 우현은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물동이를 최대한 높이 치켜든다고 들었는데도 힘이 모자란 모양이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눈앞을 가린 피에 더더욱 분이 치민 남자가 자신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 걸음 물러선 우현의 눈동자가 순간 커졌다. 거친 옹기로 만들어진 물동이가 깨진 조각은 굉장히 날카롭다. 어느새 그것을 손에 쥔 레사티나가 남자의 목덜미를 그어버린 것이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남자는 피가 울컥 솟아나는 목덜미를 만지려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레사티나는 남자의 목젖을 세차게 그었다. 공포가 그대로 분노와 증오로 변한 그녀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땅에 떨어진 흉기가 팍삭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 우현은 부들부들 떨고있는 레사티나에게 다가갔다.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는 듯, 그녀는 옹기 조각에 베여 피투성이인 손을 한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현은 자신의 셔츠를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며 말했다. 「괜찮아, 레사티나. 괜찮아. 잘 했어, 응? 괜찮아.」 의외의 상황에 경직한 티티와는 달리 우현은 레사티나를 외면할 수 없었다. 과거의 그 역시 그녀의 것과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치고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피가 점점이 튄 몸을 바들바들 떨고있던 레사티나는 우현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지자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상체를 감싼 갑옷에 가 닿았다. "이, 이 사람 기사야. 어떻게 하지?"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레사티나에게 티티가 옷을 가져다주었다. 우현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품었다. "도망치자. 기사의 일행, 올 수도. 얼른." 모닥불에 비친 얼굴이 음험하다. 숲을 닮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털어 내던 청년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도대체 뭘 하느라 아직도 안 돌아오는 거야! 사냥이라면 자신 있다고 하더니!" 남자들은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청년의 앞에서 굽신거릴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향해 인상을 썼다. 돈은 있었다. 백작가에서 시집온 어머니의 유산은 풍족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한 몸 운신하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외가로 가서 몸을 의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굴욕은 몸에 아로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으드득 이를 가는 그의 귀에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신경이 날카로우면 뭐든 거슬리기 마련이다. 남자 하나가 달려가 상황을 알아보았다. "마차입니다. 아마 떠돌이 지고이네르인 것 같은데요." "지고이네르?" 그때 청년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영지에서 쫓겨나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지고이네르 소년이었다. 평상시라면 자신의 앞에 조아려 얼굴도 들지 못했을 미천한 것이 자신을 보며 비웃었으리라는 생각에, 그는 눈가를 실룩거렸다. "발칙한...!" 외가에 도착하기만 하면 나라 안 지고이네르의 씨를 말리리라고 다짐하는 그의 귀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루딘 님!" "뭐야?"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달려온 남자는 사냥을 나간 자 중 하나였다. 그의 빈손을 보며 무어라 꾸짖으려던 청년, 클루딘은 다음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엑서르가 죽었습니다! 살해당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이것이..." 남자가 내민 것은 화려한 색깔로 물을 들인 스카프였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족속들은 이렇게까지 알록달록한 색의 물건을 즐기지 않는다. 게다가 이 야심한 밤에 바퀴 소리가 멀리멀리 울리도록 마차를 몰던 지고이네르. 그는 스카프를 잡아 찢으며 외쳤다. "다들 말에 올라라! 그 발칙한 것들을 내 손수 찢어 죽이고 말리라!" 죽은 부하가 그에게 극진하게 충성을 바친 것도, 정이 깊은 클루딘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라고 여겼다. 분노에 가득 찬 클루딘을 본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죽은 엑서르의 모습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었지만, 괜히 나서도 된서리를 맞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마차 소리에 놀랐던 산짐승들은 뒤이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다시 한 번 몸을 사려야 했다. 에코의 무리가 발칵 뒤집혔다. 얼른 짐을 꾸리고 마차를 달리던 그들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에 얼굴을 하얗게 물들였다. 에코는 손으로는 미친 듯이 채찍질을 해대며 머리 속으로는 근처의 지리를 살폈다. 강간이란 중한 죄로, 여자가 자신을 겁탈하려는 남자를 죽인 것은 무죄였다. 그러나 법은 단지 법일 뿐이다. 신분이 높은 자가 그렇지 않은 여자를 힘으로 도모하는 일은 흔했으며 그 행동을 법이라는 잣대로 잴 정도로 간이 부은 자는 없었다. 반면 법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보호의 근거가 되어주었다. 죽은 기사의 일행이 제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다 할 지라도 레사티나의 처벌을 공공연히 외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보복은 늘 음지에서 이루어진다. 과연 보호의 근거인지 재앙의 근원인지 생각해 볼 문제였지만, 지금 그것을 떠올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의 영지도 아닌 들판에서 지고이네르 목숨 하나나 둘쯤이야 버러지만도 못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일단 영지에 들어서면 그 누구도 함부로 난동을 부리지 못했다. 특히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자신의 신분을 믿고 경거망동했을 경우, 그는 영주의 권한을 무시한 책임을 져야만 했다. 영지에 들어가면 살 수 있다. 에코는 고삐를 힘주어 움켜쥐며 다짐했다. 상대적으로 몸이 가벼운 말은 금새 마차를 뒤쫓아왔지만, 도망치는 쪽은 그 발에 공포가 주는 최상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말들도 사람들의 감정에 전염된 것인지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계속 쫓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음인지 기사 하나가 화살을 날렸다. "캬앗!"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마차를 쫓아온 화살은 그러나 힘이 다했음인지 포장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거리가 꽤 있는 경우, 쫓기는 자가 쏘는 화살은 위협적이지만 쫓는 자가 쏘는 화살이 제대로 맞는 경우는 드물다. 반쯤의 성공에 독려된 몇몇 기사들이 뒤이어 화살을 날렸지만 대체로 마차의 뒤꽁무니 즈음에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질 뿐이었다. 펄럭이는 포장 사이로 선두에 선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우현이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본 것도 같지만 거리가 멀어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쫓는 기사들의 수는 여남은 명, 쫓기는 지고이네르의 수는 오십 남짓. 혈기 왕성한 청년들은 허리춤에 찬 무기를 만지작거리며 금방이라도 튀어나가고 싶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루휘트의 경우에는 당할 뻔했던 여자가 레사티나라는 사실에 더욱 고조된 분노로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기사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다. 그것을 알고있는 에코는 마차를 멈추지 않았다. 이 사태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레사티나는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인 채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과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에 가슴을 치며 울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치료해주는 처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 나 때문에... 미안..." 그 말을 들은 라라시타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더니 레사티나의 손등을 한 번 탁 후려쳤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뭘 해." 그네들의 모습을 곁눈질하던 우현이 눈을 크게 떴다. 레사티나라면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던 라라시타가 아니던가. 지고이네르는 폐쇄적인 만큼 외부로부터의 자극에는 일치 단결하여 기민하게 반응한다. 무리 안에서야 죽여라 살려라 으르렁거려도 침입이 있으면 다 잊고 대항하는 것이 그들의 습성이었다. 여러 경우를 보아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확연히 변한 태도를 보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우현의 귀에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기, 더 이상은 못 참아!"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말렸지만 루휘트는 거칠게 뿌리치며 소리쳤다. "죽이지만 않으면 될 것 아뇨!" 짐을 뒤져 작은 활을 꺼낸 그는 화살을 한 대 메겼다. 밤의 어둠과 마차가 일으키는 뿌연 흙먼지의 덕으로, 기사들은 자신들을 노리는 화살촉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을 지그시 노려보던 루휘트는 단단히 긴장한 시위를 풀었다.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갔다. 그 날카로운 파공성을 들은 기사들은 움찔하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클루딘은 자신의 발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땅에 박힌 화살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저런 찢어 죽일!" 그러나 밤의 화살은 두려운 존재였다. 화살이 몇 대 더 날아와 그들의 추격을 방해했다. 발을 묶으려는 의도가 명백한, 그러나 말을 멈추지 않으면 맞을지도 모를 화살 앞에 그들은 추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클루딘이 욕설을 내뱉으며 고삐를 거칠게 잡아채자 말은 콧김을 내뿜으며 발을 멈추었다. "내, 저것들을!" 홧김에 검집으로 땅을 후려친 클루닌은 멀어지는 마차를 노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1장 내밀어진 손 -9- "피휴우..." 누구의 입에서 먼저 나왔는지 따질 것도 없었다.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쉰 지고이네르들은 곧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더 이상 따라올 것 같지 않은 기색에, 에코와 다른 두 마부들은 마차의 속력을 늦추었다. "고맙다." 굵은 목소리를 들은 우현이 고개를 들었다. 루휘트가 근처에 앉아있었다. 그는 검게 그은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레사티나는 꼼짝없이 그 개잡놈에게 당했을 거야." "아니, 뭐어..." 칭찬을 듣자고 한 일이 아니었다. 우현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티티가 그의 어깨너머에서 얼굴을 내밀며 대신 지분거렸다. "어라라? 왜 루휘트 오빠가 우현 오빠에게 고맙다고 하는 걸까?" "시끄러워, 꼬맹아." "우에엥! 루휘트 오빠가 괴롭혀어!" 루휘트가 티티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며 장난스레 윽박지르자 그녀는 거짓 울음을 터뜨리며 우현의 뒤에 숨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이겐튼 영지다! 저 앞에 보여!" 누군가가 외쳤다. 사람들은 우우 몰려 포장을 들추었다. 티티가 말했다. "이제 우리는 살았어. 아이겐튼 영지가 바로 앞에 있어서 다행이야." 영문을 모르는 우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티티가 킥킥 웃었다. "가보면 알아." 한밤중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다 해도 성벽이란 언제나 든든한 보호의 상징이었다. 지고이네르는 안락함을 느끼며 야영을 할 준비를 했다. 숙직을 맡은 수비대에게는 즐거운 밤이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빙 둘러앉아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선보이는 지고이네르의 활달함은 지루한 밤을 빨리 지나가도록 해주었다. 기겁을 해 풀이 죽은 레사티나가 얌전한 바람에 라리나의 명수인 라라시타가 그 밤의 주역이 되었다. 레사티나는 조심스레 우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우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제서야 그녀는 슬그머니 움직여 우현에게 다가갔다. 에라드가 불 가까이에 있으라는 처방을 내린 덕에 적금빛의 혀를 넘실거리는 불꽃 앞에 앉은 우현의 얼굴은 진한 황금빛이었다. 그것은 다른 지고이네르들의 올리브빛 피부와 너무나도 다른 빛깔이어서, 레사티나는 그가 자신들과는 많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말았다. "왜?" 다가와서도 미적거리기만 할 뿐 도무지 말을 꺼내지 않는 레사티나를 향해 우현이 물었다. 레사티나는 모닥불을 한번, 졸고있는 티티의 얼굴을 한 번, 그리고 우현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본 후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저기, 고마워. 구해줘서. 네가 아니었다면 겁탈 당하는 것도 당하는 거였지만 분명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을 거야." 레사티나는 도망치자고 말하던 우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날카로움은 분명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오늘의 그녀와 같은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레사티나는 우현의 얼굴을 흘금거리고 살폈다. "괜찮아. 다들 날 구해줬어. 나는 같은 행동이야." 그러나 우현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어눌한 말투가 그 느낌을 더욱 배가시켰다. 레사티나는 얇은 웃음을 터뜨렸다. 고조되었다가 사그라든 그녀의 신경은 아직 채 회복되지 않아 조그만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레사티나의 한껏 예민해진 눈동자를 본 우현은 위로하듯 손을 들어 그녀의 손가락을 덮었다. 그때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녹슨 도르래가 감기며 끼익거렸고 쇠사슬이 부딪혀 나는 절그렁거렸다. 철로 된 격자가 무겁게 올라갔다. 그 소리에 대답하듯, 두꺼운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새벽의 여명이 클루딘의 옆얼굴에 쏟아졌다. 선이 뚜렷한 얼굴이 빛을 받아 제법 멋지게 빛났다. 그러나 그 얼굴은 상쾌한 아침에 어울리지 않도록 뭣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하의 보고를 받은 그는 더욱 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목은 날카로운 것으로 베여있었습니다. 그 근처에 옹기의 파편이 굴러다니던 것으로 보아 그것에 당한 모양이에요. 옷은... 상체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하체는 속옷 차림이었고 검도 풀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뒤통수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상황은 다시 캘 여지가 없이 명확했다. 클루딘은 씹어뱉듯 말했다. "이 와중에 여자를 밝힐 정신이 있었다니." 클루딘은 머리 속으로 상황을 그려보았다. 여자에게 정신이 팔린 엑서르는 뒤에서 다가오는 자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묵직한 무엇인가로, 어쩌면 옹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엑서르의 목을 누군가 그 파편으로 그었으리라. 그렇다면 그 자리에 적어도 두 명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지고이네르가 달려간 방향에는 영지가 하나 있었다. 영주인 아이겐튼 자작은 주로 자신의 영지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자작의 얼굴을 떠올린 클루딘은 주먹을 움켜쥐며 생각을 삼켰다. 그는 다시 말에 오르며 외쳤다. "출발! 아이겐튼 영지로 간다!" 아이겐튼 자작이 어떠한 인물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클루딘은 사냥감을 놓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화살 몇 대가 그의 마음에 더한 앙금을 남기고 있었다. 지고이네르가 아이겐튼 영지에 들어간 시간은 조금 일러, 영지민들은 아직 채 활동을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빛을 뚫고 공유지에 도착한 지고이네르의 마차가 사람들을 뱉어낸다. 그들이 짐을 풀고 포장을 뜯어 무대를 만드는 동안 태양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어느새 들어온 지고이네르의 마차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재미라고는 없이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는 아주 약간의 변화도 신선하게 느껴진다. 흥겨운 노래와 춤, 그리고 이국적인 볼거리들을 마차 가득 지니고 다니는 지고이네르의 모습을 확인한 그들은 저녁때를 기대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여름은 여러 가지 일로 한참 바쁠 시기였다.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아래에서 일하는 것은 또 다른 고역이다. 그러나 일하는 얼굴에 생기를 더하는 것은 이후 기다리고 있을 즐거움에 대한 기대였다. 여느 때보다 빠르게 일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은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공유지로 나갔다. 무대에는 이미 한 여인이 올라가 있었다. 에코는 지고이네르가 사랑하는 악기인 라리나를 든 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녁의 어스름에 썩 잘 어울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가자 사람들은 하나 둘 씩 걸음을 옮겨 지고이네르에게로 다가왔다. 노래와 춤은 물론 그것만으로도 돈벌이의 수단이 되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손님의 시선을 끄는 것이었다. 주 수입은 지고이네르의 섬세한 손길 아래 만들어진 물건들이었다. 등잔불이 아롱아롱 움직여 사람들의 눈을 홀렸다. 군데군데 켜진 황금빛은 마음 속에 숨겨진 가장 아련한 부분을 자극하곤 한다. 들뜬 사람들은 지갑을 열어 하나둘씩 쓸모도 없는 물건을 사곤 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좋은 기분을 가지게 한 대가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 날 처음으로 장사에 나선 우현은 장신구를 구경하는 아가씨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오랜 서빙 아르바이트로 단련된 영업용 미소는 반쯤은 진심이었다. 그조차 분위기에 홀려버렸던 것이다. 아직은 굉장히 어색한 숫자의 배열을 보다못한 티티가 거들었다. "그건 15 테소에요. 어머, 그 가격에서 어떻게 더 깎아드려요? 이래봬도 이건..." 우현은 시키지도 않은 흥정을 익숙하게 하는 티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천천히 바람이 불어들었다. 빛깔로 치자면 물이 섞여 말갛게 흐려진 남빛이라 생각되는 그 바람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고 지나갔다. 이제 제법 길어진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질이자, 우현은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들뜨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우현이 한 처녀에게 스카프를 권하며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미소 위에 이전의 미소가 덧그려졌다. 그것은 꽤나 자세하게 우현을 살펴보았던 「그」조차 처음 볼 정도로 말갛고 들뜬 것이었다. 딱히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니었던 그 미소는 실은 수면 너머에 있는 「그」의 눈동자와 정확히 부딪혔었다. "우연이겠지." 「그」는 조금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바쁜 일이 있어 한참동안이나 우현을 살피지 못했던 「그」였다. 오랜만에 본 우현의, 고통으로 창백했던 얼굴에는 제법 홍조가 돌고 있으며 거동 역시 꽤나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그것은 격무에 지친 「그」를 기쁘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지금도 그리 한가하지는 않았다. 일을 하는 도중에 잠시 빠져 나온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땡땡이였지만 「그」에게 그런 어휘를 구사할 사람도, 책임을 잊은 행동을 탓할 사람도 없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가락을 뻗어 수면 위로 가져갔다. 환영 위에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손가락을 움직여 물에 담근 「그」는 일렁거리는 우현을 보며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문 저편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이제 그만 환영을 지워야 할 때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클루딘은 매우 기분이 나빴다. 부하들은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태도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은 클루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뭘 그렇게 핼금거리고 있는 거냐!" 찔끔하는 부하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클루딘은 아이겐튼 자작의 가무잡잡한 얼굴을 떠올렸다. 짙은 이끼색의 눈동자에 감돌던 것은 다름 아닌 경멸의 색채였다. 그것과 함께 자작은 이런 말을 건네었다. "나로서는 클루딘 공의 청을 들어드릴 수가 없구려. 나는 내 영지에 들어온 지고이네르를 보호할 것이며, 또한 내 권한이 침범 당하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는 않을 생각이오. 그들이 잘못한 것이 아닌 이상은 당연한 것이리라 생각되니 클루딘 공도 이해하리라 믿소." 클루딘 공(公)이라고 부르며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말투를 썼다. 클루딘은 자신이 마땅히 물려받았어야 할 백작의 지위와 영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날로 먹은 첩 소생 막내 동생을 떠올렸다. 이를 으드득 갈아붙인 그는 영주의 성을 한 번 노려본 후 말에 올랐다. 사냥감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놓칠 생각은 없었다. "영지 밖에서 잡아들인다면 제 놈이 어쩔 것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포장마차를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족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영주관을 노려보며 잇새로 내뱉듯 중얼거렸다. "더러운 잡종주제에...!" 클루딘의 일행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관 앞에 세 대의 포장마차가 멈추어 섰다. 한가득 일어난 먼지에 기침을 한 에코가 소리쳤다. "어어이! 문 열어요, 수문장!" 에코에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우현은 영주관을 올려다보았다. 가뭄에 콩 나듯 드물기는 했지만, 귀족들 중에는 자신의 성에까지 지고이네르를 불러들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한없이 비천한 지고이네르는 뒷문 신세를 져야만 했다. 정문 앞에 서서 문 열라고 외쳤다가는 치도곤이 우스울 정도의 일을 당하는 것이 당연했다. 영주관은 단단한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진한 회색의 그것은 몇 아름이나 되어보이는 돌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벽 너머로는 삐죽하게 솟은 첨탑이 보였다. 그 첨탑을 불쑥 튀어나온 얼굴 하나가 가렸다. 시끄러운 소리에 얼굴을 내밀었던 수문장은 익숙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에코의 무리다! 성문을 내려라!" 사슬이 차르륵 감기더니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내려왔다. 에코는 고삐를 움직여 마차를 출발시켰다. 우현은 나무 바퀴가 도르륵 도르륵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문은 성 주변에 파진 해자 건너에 걸쳐져 있었다. 해자에 가득 낀 진초록 물이끼와 은근하게 피어오르는 악취에 얼굴을 찡그린 그는 걷어올렸던 포장을 내렸다. 마차는 영주관의 넓은 뜰에 멈추었다. 에코는 마부석에서 경쾌하게 뛰어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던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에코, 잘 있었어요?" "그래. 너도 잘 있었어, 영주님?" 우현은 입을 딱 벌린 채 영주라고 불린 청년을 바라보았다. 영주는 영지민들보다 조금 더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혹시?' 그때 우현의 시선을 느낀 영주가 고개를 들었다. 이끼를 닮은 진초록 눈동자가 우현을 향했다. "에코, 저 아이는?" "응? 아아, 우현 말이구나?" 영주의 목소리에서 의아함을 느낀 에코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손짓을 해 우현을 부르며 말을 이었다. "검은 호수에 갔다가 발견한 아이야. 어때? 흠 하나 없는 검은 눈동자라고. 그리고 우현? 인사해. 이 쪽은 카이엔 아이겐튼. 무려 자작님이시지만 어머니가 지고이네르야." 혹시나가 역시나다. 우현은 몇 살 연상으로 보이는 청년, 카이엔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카이엔은 지고이네르라고 하기에는 창백한 우현의 피부를 확인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카이엔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에코, 성가신 자를 건드렸어요. 클루딘 마디아른이 자신의 부하를 죽게 만든 지고이네르를 찾고 있습니다. 내게 와서 협조를 부탁하더군요." 에코는 엷게 신음하며 레사티나를 바라보았다. wlswn 님, 이 미흡한 것을 추천이라니...(눈물)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1장 내밀어진 손 -10- 그 날 저녁 영주관은 개방되었다. 넓은 뜰에서 흥겹게 펼쳐진 지고이네르의 흥겨움을 뒤로 한 카이엔이 말했다. "그렇군요. 그 자 역시 자신이 부하가 왜 죽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시기가 안 좋아요. 그는 지금 있는 대로 화가 난 상태니까." 다른 때였더라면 이렇게 쫓아오지는 않았을 텐데, 라고 덧붙이며 카이엔은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어머니가 지고이네르라고는 했지만 자작이나 되는 사람이 상냥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조금 놀라웠다. 아니, 지고이네르를 정식 아내로 맞았다는 그의 아버지가 더 놀라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카이엔을 흘긋 바라본 우현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에코와 레사티나, 티티, 그리고 우현이었다. 엑서르가 죽었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들은 카이엔은 굉장하다는 듯한 얼굴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그것뿐만이 아냐.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퀴아네의 손에서 아이들을 구해줬다고." 흉 지게 생겼다며 '속상해'라고 중얼거린 에코는 우현이 머쓱함으로 얼굴을 붉히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반응이 순진한 아이를 보는 것은 여러 모로 즐겁다. 그들을 내보낸 뒤 카이엔과 둘만 남은 에코는 그가 내내 궁금해하던 것에 대해 말해주었다. 검은 호수에 떠있던 우현을 티티가 발견했다는 것, 연기의 흐름과 더불어 여러 가지 믿기지 않는 일을 전해들은 카이엔은 호기심으로 얼굴을 물들였다. "재미있는 소년이군요?" 전혀, 라고 에코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제 떠날 지 몰라 가끔 불안해진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들 사이에 앉아있는 우현은 이번에도 역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에코의 표정에서 흔들림을 본 카이엔은 화제를 바꾸었다. "이번의 여정은 어떻게 되죠? 혹시 아르무드로 넘어갈 건가요?" 검은 호수가 있는 숲인 엘 티에르는 하스티아 왕국의 북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한참이나 남쪽으로 내려온 곳에 아이겐튼 영지가 있다. 이대로 계속 남하하다 보면 국경을 넘어 아르무드 왕국으로 가게 된다. 어느 국가에도 귀속되지 않은 지고이네르는 자유로이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하므로 카이엔이 그렇게 묻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쩌면. 하지만 이번에는 중간에 내버린 시간이 많아서 아르무드까지 가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어. 가봤자 국경 근처에서 다시 발을 돌려야 할 걸. 왜 그래?" "늘 있는 일이지만 또 전쟁이 일어났어요. 에피서스 탈환을 목적으로 아르무드가 싸움을 걸어왔죠." 에피서스란 하스티아와 아르무드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두 나라가 반목하게 된 데에는 이 에피서스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나라가 그리 크지도 않은 땅덩어리를 두고 허구 헌 날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은 에피서스가 그 대지에 질 좋은 철을 품고있기 때문이었다. "또야? 지겹지도 않나."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대상이 되는 땅이 좁은 이상 그 규모는 작았다. 정말로 대대적인 전쟁이었더라면 에코도 걱정을 했을 것이다. 떠돌이 지고이네르에게 있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상황은 죽으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카이엔 역시 미소를 지었다. "만약 국경을 넘어갈 거라면 그 부근만은 피하도록 해요. 괜히 붙잡혀서 곤욕을 치르지 말고." "걱정 마, 걱정 마. 장사 하루 이틀 하나? 그러나 저러나, 클루딘인지 뭔지 하는 녀석을 어떻게 치워버릴 수 없을까?" 카이엔에게 협조를 거절당한 그가 순순히 물러섰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시 생각한 카이엔은 곧 가볍게 웃었다. "그 사람의 외가인 엘로소 백작가와는 조금 친분이 있어요. 백작에게 사람을 보내어 클루딘을 불러들이도록 해 보죠." 엘로소 백작가의 영지는 아이겐튼 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카이엔에게서 홀대를 당한 지 열흘 정도 지난 어느 날, 클루딘은 엘로소 백작이 보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들고 온 전갈을 들은 클루딘은 얼굴을 심각하게 찡그리며 되물었다. "외숙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예. 지체없이 달려오라고 하셨습니다." 클루딘의 부하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지루한 기다림에 지쳐버렸던 것이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는 지고이네르들은 그들이 밖에 있는 것을 알았음인지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고, 클루딘의 신경질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알겠다." 부하들은 입가에 배어드는 미소를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이다. "너희들은 여기에 남아 그 못된 것들을 붙잡아라. 나는 잠시 외숙부님을 뵙고 돌아올 테니까." 우현이 보았더라면 '김칫국은 떡을 본 후에나 들이켜라'라고 말해주었을지도 모른다. 미소는 온데간데 없이 개가 핥아놓은 죽사발 꼴이 된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예'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클루딘이 방탕하게 놀던 시절 만났던 시정잡배들이었다. 가진 재주라고는 무식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밖에 없는 그들에게 있어 클루딘은 출세를 위한 좋은 발판이었다. 그를 미래의 영주라고 철썩 같이 믿고있었던 그들은 그러나 이미 그럴 가망은 물 건너갔음에도 클루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 엘로소 백작의 조카라는 신분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백작가의 기사가 될 그 날을 생각하며, 남자들은 오가는 사람들을 눈을 무섭게 치켜 뜨고 살피기 시작했다. 우현이 보았더라면 또 다시 김칫국을 중얼거렸을 장면이었다. 영주관에 도착한 지 정확히 보름째 되던 날, 에코는 무리에게 명령을 내려 출발을 준비하도록 했다. 너무 오래 끌었다가 클루딘이 다시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일이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금세 출발 준비를 끝마친 지고이네르를 보며 카이엔은 섭섭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은 좀 오래 있어서 즐거웠는데 또 금새 움직이네요. 누가 지고이네르 아니랄까봐."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 못 견디는 피인걸." 그 말에 카이엔은 조금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몸속에 흐르는 피의 반은 지고이네르의 것이었다. 활달하게 손을 흔들어 안녕을 고하는 에코와 그들의 무리를 본 카이엔은 먼 들판 너머를 생각했다. 에코의 말대로 지고이네르는 가만히 못 있는 피의 소유자였다. 보름간의 정착이 어찌 그리 길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며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에 에코는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이지, 깝깝해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우현 오빠도 그랬지?" 티티가 종알대며 물었다. 사실 그는 처음으로 들어가 본 성의 본채에 놀라 갑갑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조금 어두운 듯한 그곳은 오히려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다소 을씨년스러운 것이 오히려 우현의 취향에 맞았다. 게다가 칙칙한 붉은 색의 양탄자나 정교한 조각이 아름다운 청동 촛대, 금박의 장정이 호화로운 책은 그를 황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한 우현은 첨탑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에 푹 빠져버렸다. 단단한 성벽 너머로 보이는 아기자기한 마을과 너른 들판, 우아하게 펼쳐진 언덕의 능선은 한 폭의 그림이며,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그렇지만 티티를 실망시킬 수 없었던 우현은 소녀의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깝깝했어. 그리고 네가 워낙 시끄럽게 구는 통에 별로 재미있었지만." "또 또 그런 이상한 말을." 티티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러자 우현은 짓궂은 미소를 띄운 채 손가락을 세워 티티에게 달려들었다. "하, 하지 마 오빠! 캬캬캬캬캬악!" 마차 안에 괴성 비슷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응징 삼아 간지럼을 태우는 우현을 보며 사람들은 낄낄 웃었다. "하윽, 하윽! 우현 오빠, 미워!" 눈에 눈물까지 단 티티가 헐떡거리며 외쳤다. 토라진 체 하는 것이지만 그냥 내버려두면 정말로 삐져버린다. 우현은 티티의 마른 등을 끌어안고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좋아서 해죽해죽 웃는 티티는 깨물어주고싶도록 귀여웠다. 우현은 티티를 달래며 다른 것을 떠올렸다. 그가 영주관에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글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진한 붉은 색의 가죽표지와 그 위에 정교하게 물려진 금박의 무늬에 홀려 펴들었던 책이었건만 첫 장부터 막혀버렸다. 국어와 영어로 모자라 제 2 외국어까지 배웠던 그에게 있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슬쩍 에코에게 운을 띄워보았지만 그녀조차 읽고 쓰는 법을 알지 못했다. 또한 그것이 전혀 흠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을 본 그는 이곳이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말았다. 문맹률과 국민의 수준에 대해 지나가듯 들었던 것을 상기하던 우현의 귀에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들은 것은 그만이 아니었는지 다들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마차가 거칠게 멈춰 섰다. "으아악!" "뭐, 뭐야? 에코!" 마차 안의 물건이 모두 뒤집혀버렸다. 온통 엉킨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들의 귀에 말이 거센 콧김을 뿜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르릉, 하는 그 소리에 뒤이어 굵은 목소리가 외쳤다. "감히 기사를 살해한 지고이네르는 어디 있나?!" 지고이네르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현은 레사티나가 얼굴을 하얗게 물들이는 것을 보았다. 소리는 이제 마차의 앞뒤로 들려오고 있었다. 포장 사이로 슬쩍 엿보니 여남은 명의 사내들이 마차를 에워싸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기사님." 에코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자 사내는 품에 손을 넣어 피 묻은 스카프를 꺼내어 그녀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시체 옆에 이것이 떨어져있었다. 발뺌보다는 살인자는 내어놓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내는 위협조로 말하며 검을 뽑았다. 다른 남자들 역시 뒤이어 검을 뽑는 것을 보며 에코는 입술을 깨물었다. 죽을 것이 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레사티나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내어놓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 에코는 심호흡을 한 후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것이 정당한 행동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겠죠? 우리에게서 그 아이를 넘겨받고 싶다면...!" 다음 순간 에코는 말을 삼켰다. 턱 아래에서 반짝이는 은빛을 보고도 말을 이을 수 있는 자는 얼마 없으리라. 사내의 얼굴에 야비한 웃음이 떠올랐다. "뭔가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에게는 너희를 살려두어야 할 이유가 없어. 살인자는 스스로 한 일을 기억하고 있겠지! 네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 여자의 목숨은 없다!" 잠시 술렁임이 일었다. 에코는 자신의 뒤쪽에서 들려오는 실랑이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레사티나!" 루휘트는 레사티나의 팔을 거칠게 휘어잡으며 외쳤다. 그러나 그녀는 매정하게 그것을 뿌리치고는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두려움으로 가득했지만 가족을 죽게 할 수는 없다는 의지만은 분명했다. 떨리는 다리로 대지를 디디고 선 처녀를 본 사내들은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엑서르가 눈이 뒤집힐 만 했다. 날씨가 더워 드러낸 팔과 목덜미를 훑어보는 음흉한 시선에 한 번 몸을 떤 레사티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그 남자를 죽였어요! 그러니 내 가족은 보내줘요." "레사티나!" 뒤이어 뛰어내린 루휘트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레사티나는 그를 사납게 밀쳐내고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허리춤의 검을 뽑으려던 루휘트는 에코의 목에 들이대어진 검을 한 번 보고는 이를 갈았다. 한 사내가 레사티나의 팔을 우악스럽게 끌어당기고 그녀의 턱 밑에 검을 대었다. 시퍼렇게 선 날이 금방이라도 레사티나의 가는 목을 파고들 듯 보였다. "적어도 한 명이 더 있겠지! 엑서르를 죽이는 데 일조한 공범은 어디에 있는가! 그 자마저 내놓지 않으면 두 여자의 목숨은 없는 줄 알아라!" 티티가 사색이 되어 우현을 보았다. 그는 등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것을 느꼈다. 나가야 하나? 나가지 않으면 에코가 죽는다. 나가야 하나? 나가면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 "무엇을 하고 있나! 공범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녕코 이 여자를 죽게 할 생각이냐! 지고이네르의 단결도 별 것 아니었구먼, 그래!" 차가운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들었다. 우현이 눈을 질끈 감는 것을 본 한 아이가 낮게 외쳤다. "형! 나가면 형이 죽을 거야!" "셋을 센다! 하나!"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가 몸을 일으킬 때였다. "두... 으헉!" 남자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포장을 들추고 뛰어내린 우현은 레사티나의 가슴에서 점점이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레사티나!" 에코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높이 울렸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1장 내밀어진 손 -11- 남자의 팔에 붙들린 레사티나는 돌에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자신이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어째서 에코마저 이 꼴로 위협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레사티나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간 보아온 우현의 성격이라면 위협을 못 견디고 마차에서 뛰어내릴 것이 분명했다. 두 번 구함을 받았다. 위로를 얻었다. 에코와 우현 중 더 소중한 쪽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다른 한 사람 역시 소중했다. "두..." 남자가 두 번째의 숫자를 셌다. 칼날의 번쩍임이 여름의 태양 아래에서 지나칠 정도로 눈부셨다. 레사티나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숙였다. "으헉...!" 남자의 목소리가 신음으로 이지러졌다. 설마 그녀가 검 앞에 몸을 던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엉겁결에 검을 움직였지만 한 발 늦어, 날카로운 끝이 레사티나의 풍만한 가슴을 깊게 베고 지나갔다. "레사티나!" 에코가 비통한 비명을 올렸다.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남자의 검이 흔들렸다. 그 사이 에코가 그의 드러난 팔을 힘껏 물어뜯었다. "으, 으아아아악!" 예상외의 기습에 놀란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검을 떨어뜨렸다. 분노로 눈앞을 물들인 에코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남자를 베어갔다. 피가 뚝뚝 듣는 입을 한 채 단검을 놀리는 그녀의 얼굴이 마치 악귀와도 같아, 남자는 순간 움직일 수 없었다. 바짝 얼은 그의 목줄기를 에코의 단검이 찔렀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기누크!" 사내 하나가 놀람과 분노로 가득 찬 소리를 내지르더니 말을 달려 에코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얼른 고삐를 놀려 마차를 움직였다. 마차가 비틀비틀 험하게 움직이자 타고있던 사람들은 이리저리 구르고 말았다. 그 와중에 안에 있던 물건이 와그르르 떨어져 내렸다. 그것들 중 섞여있는 검 몇 자루가 청년의 혈기에 불을 지폈다. "싸울 수 있는 자는 모두 내려! 이 건방진 놈들에게 지고이네르의 분노한 피가 얼마나 무서운 지를 알려주자!" 루휘트가 외쳤다. 청년 중 제일의 검술을 자랑하는 그의 목소리가 다른 청년들을 고무시켰다. 세 대의 마차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의 수는 남녀 합하여 서른 남짓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지를 밟고 있었고, 상대방은 말에 올라있었다. 인간의 함성과 쇳덩어리가 부딪히며 내는 소름끼치는 소리, 발자국 소리와 말의 울음소리가 난무했다. 우현은 소음을 뚫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그는 찾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레사티나!" 죽었다고 생각되었음인지, 레사티나는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울컥울컥 솟아나온 피가 흙먼지 속으로 쏟아졌다. 우현은 이를 악물었다. '죽게 하고 싶지 않아.' 레사티나가 무슨 생각으로 검에 몸을 던졌는지 모를 우현이 아니었다. 지고이네르의 사고방식이라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레사티나의 행동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것은 자신이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우현은 그것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는 근처에 떨어져있는 검을 주워들었다. 그것을 움켜쥐자 묵직한 무게감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저 난전 속을 뚫고 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와 운이 필요했다. 주먹을 불끈 쥐어 자신을 고무한 우현은 몸을 낮추고 레사티나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남자들은 달려드는 지고이네르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흙먼지를 틈타 용케 레사티나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우현은 그녀의 왼쪽 가슴에 떨리는 손을 얹었다. 그러나 손끝에서 뛰는 것이 자신의 것인지 레사티나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막막한 심정으로 레사티나의 가슴에 귀를 들이댄 그는 미약하지만 알콩알콩 뛰고있는 고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살아있어!」 그렇다면 가장 급한 것은 지혈이다. 내버려두면 언제까지고 쏟아질 피를 본 우현은 자신의 어깨를 장식하고 있던 스카프를 끌렀다. 지고이네르가 스카프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때만큼 기뻤던 적은 없었다. 검 끝에 힘을 주어 스카프를 가늘게 찢어낸 그는 레사티나의 상처를 처매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몸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우현은 이를 악물고 팔에 힘을 주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 한 방울이 레사티나에게 떨어졌다. 「후우... 된 건가?」 우현은 한숨을 쉬며 간신히 매듭을 지었다. 그때 그의 귀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런 쥐새끼 같은! 죽어랏!" 등뒤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난다. 우현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얼른 몸을 굴려 검을 피했다. 묵직한 바스타드 소드의 칼등이 그의 뒤통수를 아슬아슬하게 훑고 지나갔다. 잘려나간 머리카락 몇 가닥이 허공에 풀풀 날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목을 잘렸을 상황이었음을 깨달은 우현은 숨을 몰아쉬며 손을 뻗었다. 레사티나의 상처를 묶느라 내팽개쳤던 검이 그의 손에 닿았다. 남자는 우현이 일어나 자세를 잡는 것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건방지게!" 말은 어디로 갔는지 스스로의 다리로 서 있는 그의 검에는 누구의 것인지 자명한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바스타드가 날아들었다. 반면 우현이 든 것은 숏 소드에 가까운 길이의 검이었다. 그는 얼른 검을 들어 바스타드를 막았지만 상대방은 힘도 기술도 몇 수 위였다. 찢어질 듯 아픈 손아귀를 느끼며 얼른 물러선 우현은 자신의 발치에 쓰러진 레사티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여기서 더 물러서면 레사티나가 다친다. 남자 역시 그것을 알고 있는지 비릿하게 웃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혼자 날쌔게 도망 가 보려무나. 그러면 쫓지는 않을 테니." 「누가 그 따위 짓을 할 줄 알아!」 우현은 떨리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남자가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우현은 남자의 검과 자신의 것을 재어보았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길이의 차이가 있었다. 결국 우현이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게다가 레사티나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하지?' 정수리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채 회복되지 않은 상처가 욱신욱신 쑤셨다. 우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검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남자의 바스타드가 눈부신 빛을 반사했다. 「제길!」 거칠게 중얼거린 우현이 무작정 걸음을 떼었다. "뭐, 뭐야?" 남자는 뒷걸음질을 쳤다. 겁도 없이 품에 안겨들 듯 달려드는 우현에게 놀란 탓이었다. 치이잇! 두 개의 검이 길게 스치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남자는 화끈한 아픔을 느끼며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검이 스치고 지나간 궤적이 붉은 혈선으로 드러났다. 처음에는 가늘었던 그것은 그러나 곧 상당한 양의 피를 내뱉으며 점차 깊어져갔다. 순간 밀려든 분노가 그의 눈앞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이 개잡놈이 감히 어딜!" 바스타드의 자루를 양손으로 단단히 움켜쥔 남자가 검을 높이 쳐들었다. 세차게 바람을 가르며 내리쳐지는 그것에서 위험을 직감한 우현은 본능적으로 검을 놀려 남자의 검을 밀쳐내었다. 그러나 남자의 체중이 고스란히 실린 공격에, 숏 소드는 쩌정 소리를 내며 부러져 버렸다. 분노의 일격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상대방의 검이 망가져 버렸다. 남자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우현을 보며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이젠 네 차례인 모양이군. 걱정하지 마. 외롭지 않게 그 계집도 뒤따라 보내줄 테니까. 아니, 한번에 보내주지." 레사티나의 앞에 자리를 잡고 선 우현은 짜리몽땅해진 검을 움켜쥐었다. 이를 얼마나 악물었는지 어금니 부분이 욱신거렸다. 그때 높이 들려진 바스타드 끝이 오후의 햇살을 머금어 반짝거렸다. "손을 잡고 지옥으로 떨어져라!" 검이 움직인다. 우현은 레사티나의 몸을 힘껏 밀치며 먼지 속을 굴렀다. 다음 순간 어깨와 등에 걸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격통으로 숨을 들이킨 그의 위로 애석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 정도면 이미 발악이라고 할 수 있지.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는 편이 좋지 않아?" 뭐가 추하지? 우현은 열이 오르는 어깨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고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뭐가 추해? 베이는 순간 혀를 깨물었는지 입안에 비릿한 냄새가 가득 번졌다. 「뭐가 추하다는 거냐?」 1분 1초라도 더 살려는 것이 추해? 남자는 덫을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간 생쥐를 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우현은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손에 들린 반 토막의 검은 불에서 갓 꺼낸 듯 뜨거웠다. 「니새끼들 따위에게 죽을 것 같아?!」 가슴 속 깊이 치솟아 오른 분노가 머리를 잠식했다. 우현은 그만한 상처를 입은 자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움직임으로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한 번 같은 경우가 있었던 지라, 남자는 얼른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육중한 곡선을 그리며 우현의 목줄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우현은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낮추었다. 눈부신 은빛은 그의 정수리를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로 스쳐지나갔다. "이...!" 남자는 이를 악물며 무어라 소리치려 했다. 다음 순간 반 토막의, 부러졌다 생각하여 안심했던 검이 그의 목에 들이박혔다. 상대방의 목줄기에 있는 힘껏 검을 쑤셔 박은 우현은 그대로 남자와 함께 넘어갔다.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쓰러진 남자의 입에서 피 거품과 함께 신음소리가 게워져 나왔다. "이럴... 수..." 꾸르륵 꾸르륵 하는 소리는 개구리의 울음을 닮아있었다. 검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였던 우현은 다시 한 번 팔에 힘을 주어 남자의 목을 그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끊어지는 감촉이 그의 양손에 전해지는 순간, 남자의 목은 몸과 분리되었다. "허억... 헉... 헉... 으흐윽!" 우현은 숨을 몰아쉬고 통증에 신음하며 몸을 떨구었다. 태양이 전신을 감싸 뜨겁게 태우는 느낌이었다. 대지가 입을 벌려 자신의 피를 삼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어날 기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틀거리는 팔로 땅을 짚고 무릎으로 기어간 그는 다시 한 번 레사티나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 심장은 아직 그녀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다, 다행...」 어찌된 일일까. 뜨거워진 눈가에 눈물이 얇게 맺혔다. 너무 더운 공기에 숨이 막혔는지도 모른다. 레사티나의 팔을 들어 어깨에 걸친 우현은 연신 신음하며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두 사람이 마차에 도착했을 때 싸움은 거의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두 사람의 지고이네르가 한 조를 이루어, 한 사람은 마상의 사내를 상대하고 다른 한 사람은 말의 다리를 베어 넘어뜨렸다. 그 덕분인지 지고이네르 쪽의 사망자는 다섯 명이었고 남자들 쪽의 사망자는 에코와 우현이 해치운 두 사람을 포함하여 열 명이었다. 마악 상대방의 허벅지를 꿰뚫어 깊은 상처를 입힌 루휘트는 힘겹게 걸음을 떼는 우현과, 그가 간신히 끌어가고 있는 레사티나를 발견했다. "레사티나!" 급히 검을 놀려 상대방의 심장에 꽂아넣은 그는 얼른 두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레사티나의 창백한 얼굴은 곧 죽을 사람 같았다. 입술을 깨문 그는 얼른 그녀를 들어 마차 안으로 올려주었다. "우현, 너도..." 우현을 부축하려던 루휘트는 휘청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얼른 팔을 내밀었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지나치게 뜨거웠다. 그것에 화들짝 놀란 루휘트는 우현의 몸을 살펴보았다. "이, 이런...!" 진한 색깔의 상의를 입은 탓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우현의 등은 이미 젖을 대로 젖어있었다. 레사티나도 위험했지만 이쪽도 상당히 급하다. 루휘트는 그를 마차 안으로 들이며 소리쳤다. "에라드 할아버지! 에라드 할배!" 맏형의 피투성이 등을 보고 놀란 아이들이 낮은 비명을 질렀다. 우현은 그 소리를 가물가물하게 들으며 정신을 놓았다. "이 얼간아!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고열로 들뜬 정신 너머에서 에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현은 그것에 섞여있는 걱정을 느끼고 얼핏 미소를 지었다. "웃어? 너 지금 웃었어? 이 망할 자식! 깨어나기만 해봐!" "에코, 자게 내버려두는 편이..." 그 말에 입을 다물었는지 에코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러나 그녀는 연신 새어나오는 낮은 울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왜 우는 거지?' 우현은 혼미한 머리로 생각을 더듬었다. 아아, 그래. 싸움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죽었다. 자신은 다쳤고, 그리고... 레사티나. "레...사..." "레사티나는 괜찮아. 목숨은 건졌어. 전부 네 덕분이야, 우현." 한 여인이 상냥하게 속삭였다. 가발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유르드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우현은 다시 한 번 웃으려 했지만 등이 타는 듯이 아팠다. 덩달아 목까지 말라오지만 물을 달라고 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는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자 누군가 물에 적신 해면을 대어 입술을 축여주었다. 다시 잠에 빠져든 우현을 보며 에라드가 말했다. "이제 괜찮을 거야. 피를 꽤 흘렸지만 곧 보충되겠지. 열이 있지만 병은 아니니 안심해." "괜찮다면 왜 이렇게 잠만 자는 거죠?" 티티는 물에 적신 해면으로 우현의 입술을 다시 한 번 적시며 물었다. 에라드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토닥거렸다. "약 때문이지. 지금은 자는 편이 자신에게도 좋을 거야. 일어나 봤자 아플 뿐이니까." 죽은 지고이네르는 다섯, 그리고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자는 우현과 레사티나를 포함하여 스물 아홉이었다.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던 자들 중 죽지 않은 자는 전부 다쳤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열 명도 넘는 기사의 무리를 상대하여 이 정도의 피해로 끝났다는 것은 가히 기적에 가까웠다. 사실 그들은 정식 기사는커녕 칼 좀 휘둘러본 건달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지고이네르였다. 가장 심각한 부상자는 역시 레사티나였다. 심장은 다치지 않았지만 피를 지나치게 흘렸다. 그러나 상냥한 바람과 오랜 방랑, 그리고 튼튼한 햇살에 다져진 지고이네르들은 건강했다. 우현이 잠깐이나마 정신을 차렸던 며칠 후, 레사티나 역시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지만 이 정도면 죽을 리 없다는 것이 에라드의 진단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조금씩 나아간다는 기쁜 소식에도 불구하고 에코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싸움이 벌어졌던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지 벌써 4일 째였다. 만약 클루딘이 돌아와 이 상황을 알게 된다면 이전보다 더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마차를 되돌려 아이겐튼 영지로 갈 것인가, 아니면 가던 길을 게속 갈 것인가. 에코는 고민하고 있었다. 아이겐튼 영지로 가 카이엔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한동안은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의 시작이 레사티나의 정당방위였다 할지라도 여남은 명의 기사가 죄다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하스티아 왕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카이엔은 지고이네르를 끝까지 보호하려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안 그래도 혼혈이라 곤란한 그의 입장이 더욱 난처해지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계속해서 달려가야 했다. 레사티나와 우현 등의 중환자에게는 무리가 갈 방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정을 내린 에코는 성한 무리를 모아놓고 말했다. "출발한다. 더 이상 미적거렸다가는 클루딘인가 뭔가 하는 망할 놈팽이가 쫓아올 거야. 다들 어서 마차에 올라가." 나직하지만 전에 없이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차의 덜컹거림을 느낀 우현과 레사티나는 무의식중에도 엷게 신음했다. 전투신, 싫어요; 그나저나 또 다른 남자 주인공은 여전히 제대로 된 등장을 하지 못하고 있네요;;;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1장 내밀어진 손 -12- 우현이 다시 깨어난 것은 마차가 출발하고서도 이틀이나 더 지난 후였다. 괴로운 듯 연신 신음하던 그가 눈을 떠 맨 처음 본 사람은 피곤에 절은 얼굴의 티티였다. "오, 오빠?" 우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리는 티티를 향해 간신히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것을 본 티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와아악! 우현 오빠!" 마차 안은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마차를 멈추고 포장 안으로 들어온 에코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이 얼간아! 누가 너더러 그렇게까지 하랬냐! 아주 잘 한다, 잘 해! 저번에는 퀴아네한테 왼쪽 어깨를 물어 뜯기더니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마저 칼 밥으로 내주는구나! 이 맹추야, 멍청아, 바보야, 잡것아! 다시 한 번만 그래봐라! 볼기짝에서 피가 나도록 후려칠 테니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끌어안고 보듬어주지 못해 안달인 듯한 동작에 모두들 웃음을 머금었다. 지나치게 빠른 말이라 몇 단어 놓치기는 했지만 그 단어들의 반이 바보라는 의미를 가진 것임을 알아챈 우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에코 마마, 무섭네." "계속 무서워 해봐, 좀!" 마지막으로 윽박지른 에코는 우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마부석으로 돌아갔다. 근처에 있던 유르드가 그의 엉망으로 잘려나간 머리카락 끝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끝이 온통 들쭉날쭉해. 다 회복되면 다듬어야겠다." 내가 해줄게, 라고 말하며 유르드가 웃었다. 의식을 전부 끝마친 「그」는 치렁치렁한 예복을 걸친 그대로 수반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몸을 겹겹이 둘러싼 순백색 정식 예복은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벌써 한참동안이나 보지 못했던 우현의 일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환상 속에서 우현은 아이겐튼 영주관의 서재에 서있었다. 홀린 듯 책을 구경하는 모습에 순간 웃음이 나왔더랬다. '그러고 보니 그가 글을 읽을 줄 알던가?' 이전 세계에서의 우현은 상당한 고등 교육을 받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개나 되는 과목의 수업을 듣고 모국의 것도 아닌 언어를 술술 해석할 수 있을 정도가 되도록 배워야 했으며 「그」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수학 문제를 풀었다. 그러나 이곳은 우현에게 있어 신세계였다. 언어조차 통하지 않아 한동안 고생을 했던 우현을 떠올리고는 소리 없이 웃은 「그」는 수반 위에 손을 올렸다. 맨 처음 등장한 것은 기진맥진한 우현이었다. 마차 안이었는데, 누군가의 손길에 기대어 간신히 앉아있었다. 셔츠의 단추가 끌러지는 것에 놀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젖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귀에 우현의 신음소리가 닿았다. 퉁기듯 시선을 내린 「그」는 불그죽죽 엉망이 되어버린 우현의 등을 볼 수 있었다. "무, 무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반의 가장자리를 강하게 움켜쥔 「그」는 우현의 등에 약이 발라지고 붕대가 감기는 장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 그것도 검에 베인 절상이었다. 다시 자리에 누워 창백한 얼굴이 되는 우현의 얼굴이 파문으로 흐려졌다. 「그」는 자신이 불러온 환영에서 눈길 한 번 떼지 않았다. 우현의 목소리, 상대를 향한 필사적인 움직임, 표정, 얼굴, 상처 하나하나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 같은 환영을 불러일으킨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클루딘이 곧 쫓아올 것이라는 에코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며칠 엘로소 백작의 곁에서 머문 클루딘은 자신을 매우 귀여워하는 외숙부에게 부탁하여 부하들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부하를 이끌고 돌아온 그가 발견한 것은 이미 오래되어 검게 굳은 피가 점점이 뿌려진 들판이었다. "이... 무슨...!" 핏자국과 함께 남은 부서진 무기 몇 개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줄 뿐이었다. 부하들에게 주변을 살피게 한 클루딘은 대강 묻혀있는 남자들과, 이들과는 달리 정성스레 묻힌 몇몇 지고이네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분노로 치를 떤 그는 방향을 잡아 추격할 것을 명령했다. '오늘은 괜찮아, 그러나 내일은'이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도망치는 지고이네르를 도운 것은 다름 아닌 점이었다. 능력이 지극히 뛰어난 점쟁이인 클라르사는 매일 저녁 점을 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이 어느 정도인지 살폈다. 점이란 자세한 상황을 알기에는 불투명한 방법이지만 대강의 상황을 살피기에는 제법 그럴 듯한 방법이었다. "위험, 다가오고 있어. 멀리서부터의 분노. 수가 아주 많아." 클라르사는 새의 피로 범벅이 된 손가락을 닦으며 말했다. 동물을 죽여 그 내장이 흩어진 모양으로 미래를 살피는 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특별한 방법이었다. 에코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클루딘?" "알 수 없어.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잡히면 우리 모두 죽을 정도의 분노라는 거야." 클라르사는 피비린내가 자욱한 제단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녀의 이마에 송글송글 배어 나온 땀방울이 힘의 소모를 말해주고 있었다. 에코는 무리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여느 때라면 매우 시끄러웠을 지고이네르의 캠프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아이들마저도 얌전했다. 가벼운 상처를 입은 자는 이미 거동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회복했지만 문제는 중한 상처를 입은 환자였다. 하루 종일 달리는 마차 덕분에 상처가 자꾸만 벌어지는 것인지, 우현과 레사티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의 얼굴은 점차 핏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급하다는 것을 알기에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고통은 말하지 않는다고 모를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에코는 근처의 지리를 떠올렸다. 멀지 않은 곳에 화전민의 마을이 있었다. 돈을 주며 부탁하면 잠시 맡아줄 것이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만나기로 약속한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에코는 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리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낀 에코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에코가 언짢은 생각에 잠겨있다는 것을 알아챈 우현은 자신도 불편한 얼굴을 했다. 새로이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때라면 금새 이야기해주었을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것에 다른 사람들마저 불편해할 즈음, 지고이네르의 마차는 화전민의 마을에 닿았다. 그때까지도 무리를 나누는 것에 대해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던 에코는 경직한 얼굴을 한 채 요점만 들어 설명했다. 몇몇 상처가 심하여 갈 수 없는 자들은 이곳에 놔두고 간다는 것, 나머지는 이 마을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클루딘을 맞는다는 것, 그리고 다시 찾기 힘들어진 경우 만날 시간과 장소를. "고향, 검은 호수에서 만나자. 날짜는 1월 한 달 내야. 이번에 올 수 없으면 다음 번에, 다음 번에 올 수 없으면 그 다음 번에라도 오면 돼. 우리는 매년 그곳으로 갈 테니까."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아이들 몇이 불안한 얼굴을 했다. 그 중 낯을 무척 가리던 남자아이가 다가와 우현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러나 무리의 어머니가 내린 결정은 지엄하다. 어쩔 수 없다고 새기는 사람들의 가운데에서 티티가 소리쳤다. "나도 이곳에 남을 거야! 우현 오빠를 두고 어딜 갈 줄 알고!?" "나, 나도! 나도 여기 있을래!" "나 갑자기 다리가 아파!" 그녀의 목소리에 동조한 아이들이 저마다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몇몇 마음이 약한 아이들은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쾌활한 웃음을 즐겨 짓던 에코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이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만! 아이들의 투정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냐! 티티, 네가 아이들을 통솔해라." "안 간다니까! 안 갈 거야, 에코 마마!" "티티!" 티티는 눈물이 비어져 나오려는 눈가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언제 떠나버릴 지 모를 우현이다. 늘 노심초사하며 떨어지지 않으려 했었다. 그런데 이쪽에서 두고 가다니,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붙들고 늘어져도 모자라는데. "나, 안 가." "티티, 억지부리지 마라. 나는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피곤해." "안 가!" 에코는 창백해진 얼굴을 들어 우현을 바라보았다. 말하는 내내 일부러 라고 할만큼 한 번도 우현을 돌아보지 않았던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일그러졌다. 그녀의 의중을 알아챈 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가, 안 가, 안 간다고!" "티티!" 날카로운 음성은 에코의 것이 아니었다. 티티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지도 못한 채 얼어버렸다. "티티! 이쪽으로 와." 단 한 번도 소리를 내어 화낸 적이 없는 우현의 목소리에, 티티는 삐그덕 소리가 날 듯한 움직임으로 몸을 돌렸다. 우현은 자신의 앞에 다가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아이를 보며 조금 쓴웃음을 머금었다. "티티, 에코 마마와 함께 가." "...싫어." 고집이 한 가득 들어간 목소리는 떨림을 담고 있었다. 곧이어 아이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안 가. 아무리 오빠가 말해도 안 간다면 안 가는 거야." "티티, 고개 좀 들어봐." 상냥해진 목소리가 아이를 움직였다. 티티는 눈물이 가득 고인 얼굴을 들어 우현을 마주 보았다. 외동임에도 느껴지는 오빠의 마음에, 우현은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지고이네르에게 한껏 물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물론 그 색채를 다시 희석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지만. 그는 티티의 눈가를 훔쳐주었다. "티티, 내가 사라져도 네가 제일로 맏이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나 대신 아이들 돌봐." 조금 이상한 말이었지만 의미는 충분했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무어라 반박하려는 티티에게 우현이 다시 말했다. "할 수 있지?" "다시 와?" 대답대신 되돌려진 물음을 들은 우현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술을 깨물며 작게 웅얼거린 티티는 자신의 이마를 우현의 이마에 가볍게 부딪혔다. 약속을 서로의 머리에 박아 넣는 것이다. 우현은 티티의 새끼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이건 뭐야?" "약속하는 거야." 몇 번이고 새끼손가락에 힘을 준 티티는 복사까지 한 후에야 손을 풀었다. 에코가 다가와 우현을 강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루휘트는 레사티나를 한 번 보았다. 망설이는 그는 그러나 싸움이 벌어졌을 경우 자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머리, 잘라주어야 했는데." 유르드가 다가와 상냥하게 말했다. 몇몇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우현은 티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오르는 것을 조금 섭섭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상처에 바르는 약이고 이건 진통제. 그리고 이건 열이 올랐을 때 먹는 약이다. 냄새가 독특하니 잘 구분할 수 있겠지?" 약과 붕대를 건네주며 당부하는 에라드를 마지막으로 일행은 모두 마차에 올랐다. 우현은 마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어 불안한 것은 티티나 에코 뿐만은 아니었다. 우현은 자신의 마음에서 지고이네르가 잠식해 들어간 깊이를 상실감으로 측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상냥스레 불어온 바람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제 1장 終結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2장 해후 -1- 하스티아의 국토는 전부 국왕의 것이므로 그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은 땅에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화전민은 엄밀히 말하자면 국법을 어긴 죄인이었다. 그래서이기 때문일까. 그들이 가진 폐쇄성은 지고이네르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꽤나 강력했다. 마을은 조용했다. 집도 몇 채 안 되고 아이들도 없으니 조용한 것은 당연했다. 사방이 조용하니 드는 것은 분심이다. 상처가 아물어갈 즈음, 우현의 머리 속을 차지한 것은 그의 손으로 행한 두 번째의 살인이었다. 금기든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희박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우현은 두 번째의 살인에도 별 다른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손바닥에 느껴졌던 절실한 감촉, 살을 찢고 뼈를 끊는 느낌은 당시보다 지금이 더 생생했다. 아마도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현은 당시의 상황을 찬찬히 떠올렸다. 소름끼치는 감촉이라고 언뜻 느꼈던 것도 같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그렇게 느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 필사적인 생각과 순간 눈앞을 가린 감정에 정신이 어두워졌었다. 우현은 당시의 자신에 대해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후회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다시 한 번 같은 상황이 된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화전민의 마을에 남겨진 사람 중 가장 심한 환자였던 레사티나는 상처가 잘 아물었는지 이젠 제법 일어나 앉기도 했다. 맨 처음 가슴께에 남겨진 상흔을 보며 조금 얼굴을 찌푸렸던 그녀는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무 완벽한 것보다 한 군데 흠이 있는 쪽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그랬어." 만약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공주병 말기라는, 매우 심각하며 도무지 손을 쓸 도리가 없는 난치병의 진단을 내렸을 우현이었지만 레사티나처럼 얼굴과 몸매가 받쳐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니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봉긋한 가슴에 걸친 붉은 상흔은 곧 새살로 채워질 것이다. 거무스름한 살갗 위에 드러난 상아색 선은 제법 아름다울 지도 몰랐다. 물론 상흔의 색깔을 어떻게 아는 거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우현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고개를 돌릴 것이다. 에라드에게서 맡은 약이 있는데다가, 레사티나 본인이 연하의 우현을 남자로 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사태였다. 즉, 치료를 맡았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의 저런 순진함 - 이라고 쓰고 늦됨이라고 읽는다 - 이 이런 사태를 불러온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저런 사소한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손님의 입장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했다. 도대체 에코가 얼마의 돈을 건네준 것인지, 집주인은 그들에게 떠나라는 눈치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새 지고이네르의 피가 옮은 우현은 지루해 죽을 지경으로 몸을 배배 꼬며 검은 호수로 돌아갈 때를 꼽고 있었다. 「문제는 역시 예산인가.」 우현이 중얼거리자 곁에 앉아있던 레사티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현은 머쓱하게 웃고는 바꾸어 말했다. "돌아갈 여비, 어떻게 해야했지를 생각했어." "응? 뭐가 문제야? 가면서 벌면 되잖아." 과연 뼛속까지 지고이네르는 다르다. 우현은 너무나 쉽게 나온 해답을 듣고는 허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의 어깨에 모양 좋은 팔이 얹혔다. "저어기이, 우현?" 콧소리가 가득 섞인 레사티나의 음성에 우현의 등골이 쭈뼛 섰다. 성적으로 흥분했기 때문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뒤」가 있는 음성에 오한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비 말인데, 내 말 듣고 있는 거니?" 레사티나는 우현의 볼을 지이익 잡아당겨 자신 쪽으로 돌렸다. "벌기 위해서는 도구가 있어야하지 않겠어? 그러니까아..." 우현의 뒤통수를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결국 이럴 줄 알았어." 우현은 캐스터네츠와 탬버린을 만들며 투덜거렸다. 전자는 그럭저럭 쉬웠지만 후자는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물건이었다. 그는 낑낑거리며 나무를 깎고 금속 조각을 찾아 끼웠다. 곁에 있던 레사티나는 입을 가린 채 오호호 웃었다. 이변은 탬버린이 그럭저럭 제 모습을 취할 즈음에 찾아들었다. 삐뚤삐뚤 깎인 모양이 그리 곱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탬버린이라고 불러줄 만한 물건을 보며 흡족해하던 때였다. 우현의 귀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일어난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구르듯 뛰어들어온 집주인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죠?" "구, 군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집주인이 아내를 채근하여 집을 나서려는 무렵이었다. 문밖에서 들려온 말 울음소리에 그의 몸이 경직했다. 함께 있던 우현과 레사티나 역시 조금 긴장한 채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등장한 것은 장신의 남자였다. 말 위에 올라 더더욱 커 보이는 그는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슥 훑어보았다. 30대의 부부, 그들과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없는 소년 하나, 그리고. 레사티나에게까지 닿았던 그의 시선이 이채를 띠었다. "지고이네르인가?" 그가 한 말은 그것뿐이었다. 곧 병사들이 달려와 그들을 양떼 몰 듯 몰아갔다. 무슨 짓인지 묻고 싶었지만 마을을 감싼 분위기는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남자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다 모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범법자인 너희 화전민들에게 죄를 씻을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지금 에피서스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곳에 가서 공을 세우면 이곳에 불을 지르고 멋대로 땅을 파헤친 죄를 묻지 않겠다는 국왕 폐하의 말씀이 있으셨다. 모두들 폐하의 바다와 같으신 자비와 은혜에 감사하도록." 술렁임이 모두를 스쳐지나갔다. 말이야 그럴싸하지만 결국 징발인 것이다. 남자가 몸을 돌리는 그때, 마을에 남아있던 지고이네르 중 한 청년이 소리를 높였다. "나는 지고이네르요! 길을 걸을 수 있게 해 주신 국왕 폐하의 은혜에는 감사하나 전쟁에 나갈 의무도, 또 씻어야 할 죄도 내게는 없습니다!" 레사티나는 우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남자는 그녀가 지고이네르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었던 것이다. 남자는 말을 한 청년의 가무잡잡한 피부를 한 번 보더니 냉정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을 데려오라는 명을 받았다. 예외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어. 자세한 것은 총사령관을 맡고 계신 위스 자작님께 직접 말씀드리도록." 말뿐인 대답이었다. 한낱 병사가 총사령관을 만날 수 있을 리 없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공기는 불만스럽게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한바탕 일어난 소란에 가축들이 아우성을 쳤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한데 몰려 수레에 태워졌다. 닭이니 소니 하는 귀중한 가축들도 전부 수레에 몰아졌다. 불만을 꿀꺽 삼키는 화전민들을 본 우현은 레사티나에게 물었다. "레사티나? 그럼 우리, 싸우러 가는 거야?" "응. 전쟁이 났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지만 내가 끌려가게 될 줄은..." 레사티나는 우현의 마른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전쟁터에서 여자의 역할이란 뻔하다. 그러나 그녀는 차라리 정액받이쪽이 훨씬 나은 결과라고 생각하며 우현을 보았다. "레사티나?" 영문을 몰라 되묻는 얼굴은 아직도 앳되어 보였다. 배짱이 두둑한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인지 모를 표정이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라 생각하며, 레사티나는 약하게 웃었다. 처음 며칠은 도망가려는 사람들이 속출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병사들은 도망자가 발생하는 족족 가차없이 손을 놀려 그들의 목을 베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쉽사리 전염된다. 어느덧 사람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면서도 도망칠 생각을 못하게 되어버렸다. 그 날도 수레에 한데 몰려 하루 종일 덜컹거린 사람들은 자포자기하여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우현은 얕은 잠에 빠져 연신 뒤척거리다 신음을 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등에 칼맞나 봐라.' 똑같이 검에 베였다고 해도 어디를 다쳤느냐에 따라 아무는 속도가 달라진다. 자주 움직이게 되는 부분을 다치게 되면 상처의 회복은 그만큼 느려지게 되는 것이다. 우현의 상처가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잠결에 등 근처의 근육을 사용하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낮게 신음하는 그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반쯤은 잠에 빠진 채 연신 투덜거리며 얼굴을 찡그리는 우현의 등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와 닿았다. 조금은 낮은 듯한 체온이 얇은 옷 너머로 느껴졌다. '누구?' 손의 임자는 그의 등을 한 번 슬쩍 쓸고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조금 화가 난 것도 같은 차가운 음성이었다. 그것에 우현이 조금 움찔하는 순간, 등에서부터 온기가 스며들었다. 우현은 더운 여름의 한중간에 느낀 온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편안함에 몸의 힘을 풀었다. 잠시 후 머뭇거리며 손을 뗀 그 사람이 조금 움직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그것을 알아챈 우현은 자신의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마치 눈꺼풀에 무쇠를 달아놓은 듯 눈을 뜰 수 없었다. 단지 아주 좋은 향기를 맡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림자는 곧 사라졌고 우현은 향기에 휩싸여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햇살을 온 얼굴에 받으며 일어난 우현은 버릇처럼 등을 움츠렸다. 그러나 평상시라면 느껴졌을 뻐근한 통증은 다가오지 않았다. "어?" "왜 그래?" 무슨 일인가 물어오는 레사티나에게 고개를 저어 보인 우현은 간밤의 일을 떠올렸다. 상냥하기 그지없는 손과 쓰다듬음.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상처가 아프지 않게 되나?' 거기까지 생각한 우현은 신관의 존재를 떠올렸지만 일행 중에는 신관 비슷하게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꿈이었나.' 어쨌거나 아프지 않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수레 안에서 우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에피서스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도착한 것은 5월도 중순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태양은 마을을 푹푹 찌는 열기로 감싸안았다. 레사티나에게 이것저것 들어 에피서스에 대해 알고있던 우현은 마을 뒤로 솟아오른 산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광산을 품고있을 산은 어쩐지 적막해 보였다. "남자는 이쪽에, 여자는 이쪽에 나란히 서! 꾸물대지 마!" 잠시 멍하니 있던 우현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금방이라도 한 대 후려칠 듯 험상궂은 표정으로 소리치는 병사가 있었다. 사람들은 어미 닭 잃은 병아리 모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우현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던 레사티나도 이내 다른 여자들이 서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우현은 이름 모를 남자가 레사티나를 지분거리는 소리를 귀 한 켠으로 들으며 병사를 따라갔다. 그들이 간 곳은 나뭇가지로 뼈대를 세우고 천을 대강 걸쳐 만든 막사 안이었다. 여러 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막사 안은 찌들어버린 땀 냄새와 씻지 않아 퀴퀴한 체취, 상처에서 풍기는 비릿한 썩은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한여름의 열기가 그것을 더더욱 짙게 만들었다. "저녁이면 각자에게 무기가 지급될 것이다. 종이 한 번 울리면 집합, 두 번 울리면 식사시간이니 잘 알아두도록." 그들을 안내한 병사는 간단하게 말한 후 막사 밖으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한숨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현 역시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막사 안의 공기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지만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어쩐지 꺼려졌다. 그는 막사 안을 살폈다. 그들보다 먼저 징발된 사람들이 몇 있었다. 하나같이 오랜 시간 동안 씻지 않아 구질구질해진 얼굴로 방만하게 누워있었다. 아니, 어쩌면 포기한 것처럼도 보였다. '나도 저렇게 될까.' 우현은 아직 채 실감이 나지 않는 전쟁이라는 상황을 인식하려 애쓰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에피서스에서의 첫 식사시간이 되었다. 놋쇠의 종이 두 번 울리자 사람들은 주섬주섬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갔다. 우현은 머뭇거리며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식사를 하고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 다른 지고이네르를 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우현은 곧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디 막사야?" 청년이 먼저 물었다. 우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이 나온 막사를 가리켰다. 청년이 말했다. "허어, 바로 옆이네. 몸은 좀 괜찮냐?" "응. 싹 다 나았어." "에라드 할배의 약은 기가 막히게 듣지." "거기, 뭘 해! 밥 먹고 싶으면 줄을 서!" 서서 별 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향해 병사 하나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얼른 움직여 줄에 끼여든 우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레사티나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레사티나가 아닌 한 그릇의 멀건 죽이었다. 우현은 투박한 그릇에 담긴 죽을 보며 그것이 식사인지 물인지 잠깐 고민해야 했다. "이, 이게 뭐야?" 청년 역시 어이가 없는 듯 죽 그릇을 노려보았다. 중년의 사내 하나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가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사내의 얼굴이 움직여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내었다. "신참인 모양이지? 이나마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도록 해. 당장 내일 목이 잘릴 수도 있고, 또 보급이 끊어져 쫄쫄 굶게 될 지도 모르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음식을... 부려먹을 때 부려먹더라도 밥은 제대로 줘야 하는 것 아니요?" 그 말을 들은 사내는 한 번 웃고는 죽을 한 입 들이마셨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는 듯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입가에 묻은 죽을 혀로 슥 핥은 사내가 다시 웃었다. "그 죽이 싫으면 용병이 되든가. 실력이 되는 자는 용병으로 전환할 수도 있어. 용병들의 막사에서는 그럴 듯한 먹을 것이 나온 다는군." "실력이라니, 어느 정도의 실력을 말하는 겁니까?" 어릴 때부터 틈틈이 검술의 훈련을 받아온 지고이네르 청년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사내는 열정과 자신감이 지나쳐 사려와 분별이라는 귀중한 덕목을 잊은 젊은이를 보는 시선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글쎄. 용병과 맞서 싸워 인정을 받으면 되겠지?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겠지만."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2장 해후 -2- 상체를 가린 갑옷이 햇살을 반사해 냈다. 눈이 부셨던 우현은 미간을 찡그렸다. 뙤약볕은 손에 쥔 검을 한껏 달구어 놓았다. 갑옷조차도 뜨겁게 달아올라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상대방도 그러하리라. 그러나 사실 갑옷이나 검보다 더 뜨거운 것은 적병과의 사이에 놓여있는 공기였다. 한껏 달아오른 그것은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보면 터럭만큼의 미움도 없을 터인데 이렇게 서로 노려보고 있다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된 우현이었다. 공기가 터질 듯 조밀하게 모여들었다. 이런 공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도 다른 병사들도 알고 있었다. "돌격!" 우현은 등뒤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검에서 올라온 뜨거움이 그의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귓가에 스치는 함성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에는 기진맥진하여 늘어질 거면서도 막상 적병이 눈앞에 있으면 이렇게 나오고 마는 사람들을 느낀 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니, 웃었다고 생각했다. 먼지가 부옇게 일어났다. 우현은 그 황갈색 속에서 날카로운 반짝임을 보았다.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 팔을 움직였다. 채챙, 소리가 나며 두 자루의 검이 서로 부딪혔다. 검을 잽싸게 떨쳐낸 그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적병의 오른팔을 걷어찼다. 상대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우현은 그 신형이 흔들리는 틈을 타 검을 박아 넣었다. 먼지 속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늘 난전이었다. 상대편 역시 급히 징발한 병사들이었는지, 검술도 싸우는 방식도 형편없었다. 그러므로 우현 역시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병사들이 조심해야 하는 적은 용병이었다. 그리고 하스티아도 아르무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용병의 상대는 용병에게 맡겼다. "용병을 마주치게 되면 다른 방도가 없어. 그냥 꼬리가 빠져라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야." 누군가의 조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언을 해주었던 그는 얼마 안 있어 용병의 손에 생을 달리하고 말았다. "죽어랏!" 누군가 거세게 소리쳤다. 우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차앙, 하는 소리와 함께 등 쪽에서부터 엷은 충격이 전해졌다. 눈을 질끈 감았던 그는 다음 순간, 자신이 조잡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갑옷을 걸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우현은 얼른 몸을 돌렸다. 연두색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작해야 열 여섯 살 즈음으로 보이는 소년의 얼굴은 악에 받친 듯 일그러져 있었다. 우현은 그 얼굴에 튄 피를 보며 자신도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우현은 생각과 행동이 충분히 따로 놀 수 있다는 것을 전투를 치르며 알았다. 몸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검을 들어 자신을 방어한 우현은 상대방의 연둣빛 투명한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연초록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 위에 흩어진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어린아이다. 그러나 어리다고 방심하면 당하는 것은 그가 될 것이다. "계집애같이 비리비리한 놈이 제법이잖아." 소년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것에 우현이 무어라 대답을 해주려는 찰나, 소년은 다짜고짜로 검을 찔러들었다. 우현의 검이 그것을 걷어내었다. 검날끼리 훑어지며 소름끼치는 금속성이 츠츠츳 울렸다. 이렇게 부딪히면 날이 상하는데, 라고 생각한 우현은 팔에 힘을 주었다. 소년의 검이 옆으로 밀쳐졌다. 그 틈을 타 한 걸음 나선 우현은 소년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서로 갑옷을 입고 있으니 상체를 공격해 보아야 소용없다. 다리와 머리 등 드러난 부분이 주로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어설픈 상처는 상대방을 더더욱 화나게 할뿐이므로,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공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목을 길게 베인 소년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뿜어져 나오는 피보라 사이로 언뜻 새하얀 것이 보였다. 이곳도 저곳도 인체의 구성은 다름없구나, 라고 생각하던 우현은 거친 바람소리에 얼른 몸을 숙였다. 간발의 차이로 지나간 검이 그의 뒤통수를 훑었다. 황급히 돌아선 우현은 자신의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곧이어 강한 힘이 담긴 검이 그를 내리눌렀다. "크읏!" 혹사시킨 근육이 아팠다. 이를 악물며 신음한 우현은 급히 상대방의 배를 걷어차고 한 걸음 물러섰다. 검을 내려다보니 날이 뭉텅 빠져있었다. 그때 누군가와 부딪혔다. 화들짝 놀라 돌아본 우현은 그것이 익숙한 얼굴임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디시트였구나." "조심해! 베어버릴 뻔했잖아!" 우현은 디시트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공격했던 남자를 찾았다. 한 번 부딪힌 검에서 느껴진 힘은 장난이 아니었다. 우현은 다시 쓰게 웃었다. '정말로 장난은 아니지.' 디시트가 우현의 어깨를 툭 쳤다. "뭐가 좋아서 실실대고 있어?" 지고이네르 청년, 디시트가 험상궂게 말하며 우현의 머리를 한 대 툭 쳤다. 대답 삼아 그의 어깨를 한 대 친 우현은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날이 말리고 이가 나가기까지 한 검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측면에서 적병이 밀려들었다. 잽싸게 허리를 굽혀 떨어진 검을 주워든 우현은 상대를 맞아 팔을 힘껏 휘둘렀다. "흐읏!"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우현은 자신의 등을 짓누르는 감각에 신음했다. 뾰족한 것이 등을 찌르고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살펴보니 전투 중에 우그러진 갑옷 때문이었다. 우현은 삐그덕거리는 것만 같은 손을 움직여 갑옷을 간신히 벗고 다시 누웠다. 손가락 끝 발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막사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땀 냄새, 금속 냄새, 먼지 냄새를 풍기며 잠이 들었던 그들은 정확히 두 번 울린 종소리에 눈을 떴다. 식사를 배급받기 위한 줄에 합류한 우현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경쾌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무더운 바람에 섞여 들려오는 그것이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먼저 배급을 받았는지 죽 그릇과 빵 조각을 손에 든 디시트가 말했다. "레사티나일 거야. 넌 저녁에는 뻗어버리니까 모르겠지만, 요즘 저 녀석은 매일 저렇게 나와 춤을 추고 있어." 어느새 우현의 차례가 왔다. 마찬가지로 작은 흑빵 한 조각과 멀건 죽을 받아든 그는 디시트를 흘긋 바라보았다. 머리를 몇 번 긁적인 디시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데려다 줄 테니 얼른 밥이나 먹어라." 에피서스에서 처음 마주친 후, 그는 우현을 곰살궂게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돌봐주고 있었다. 죽을 들이키고 빵을 베어 무는 우현의 얼굴을 디시트가 쿡쿡 찔렀다. "땟국이 줄줄 흐르네. 레사티나가 못 알아보겠다." 우현은 엉겨붙은 머리카락을 집어들었다. 확실히 심각한 상태이기는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너무 뛰어난 것 같은데.' 이전 같았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씻고싶어 안달을 했을 터인데 지금은 떡이 진 머리카락도 아무렇지 않았다.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기 마련이라 생각하며, 우현은 며칠 내로 씻을 것을 결의했다. 몸의 더러움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숱하게 베어 넘긴 일도 아무렇지 않았다. 사방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워낙 보아 그것이 일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전투에 뛰어들면 정신이 격앙되어 뜨겁게 달아올랐다. 누구에게 향하는 것인지 모를 덧없는 증오가 새삼 솟아올라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적도 있었다. '나는 정말로 이상한 것이 아닐까.' 이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이었다. 단지 이세계라는 것만이 아니었다. 전쟁터는 1년 전까지만 해도 그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쉽게 눈앞이 벌개지다니. 우현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해할 수 없어도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죽이지 않으면 죽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 살인 자체가 너무나 정당하게 느껴진다. 누군가를 죽이는 데에 익숙해지는 자신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욱한 피비린내를 뚫고 바람이 불어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먼 곳을 바라보는 우현의 머리를 디시트가 툭 쳤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 레사티나 보러 가야지." 다 해진 신발을 끌며 걸어간 두 사람은 무대 비슷하게 만들어진 단을 볼 수 있었다. 단 위에는 레사티나가 있었다. 우현은 단 주변에 빼곡하게 몰린 사람들을 보며 조금 향수에 젖고 말았다. '언제 검은 호수로 갈 수 있을까.' 우현은 날짜를 꼽아보았다. 언제 전쟁이 끝날지 모르는 지금의 상황을 헤아리면 1월중에 검은 호수에 도착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의 어깨가 조금 쳐졌다. 색색가지의 머리카락 속에 끼여든 검은색은 진한 어둠을 발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금세 잡아끌었다. 탬버린을 들고 경쾌하게 움직이던 레사티나가 두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치마를 걷어붙이고 단에서 뛰어내린 그녀는 급히 두 사람에게로 뛰어갔다. "우현! 디시트!"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는 우현을 와락 끌어안았다가 얼른 몸을 떼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는 너무도 달라진 모습을 본 그녀는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뭐야, 우현? 이 꼴은 너무하잖아!" "그렇게 너무해?" 우현이 멋쩍게 웃자 레사티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응. 너무해." 우현을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레사티나였다. 그녀는 울컥 솟아오르는 눈물 대신 함박미소를 지어주었다. 우현 역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사티나는 조금 안색이 나빠져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예뻤다. "다행이야, 레사티나. 건강이 보여." 우현이 불쑥 내뱉은 말을 들은 레사티나는 잠시 멈칫 하더니 손을 뻗었다. 우현의 뺨을 한 번 살짝 꼬집은 그녀가 웃었다. "너도." 그때 레사티나의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옷을 입은 30대의 남자가 서있었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한 우현과 디시트는 머뭇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베슬렌 님." 레사티나가 그 고운 음성에 화려함을 담아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두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시누크 베슬렌, 에피서스의 총사령관 위스 자작의 참모를 맡고있는 남자였다. 머뭇머뭇 인사를 하는 두 사람을 본 베슬렌이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레사티나의 동족인가 보군?" "네. 저와 함께 이곳에 왔지요. 특히 이 소년은 제 동생 같은 아이랍니다." 우현의 지저분한 얼굴에 한 번 눈길을 준 베슬렌은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레사티나와 베슬렌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챈 우현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가무잡잡한 얼굴의 루휘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에게서 의도적으로 떨어진 레사티나는 수줍게 얼굴을 떨구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저녁은, 저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단지 베슬렌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번 어루만졌을 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을 얻은 레사티나는 최고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현은 베슬렌이 멀어지자마자 레사티나에게 다가갔다. 조금 떨어져 있었다지만 말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레사티나, 혹시..." "뭐가 혹시야?" 말꼬리를 흐리는 우현에게 레사티나가 조금 퉁명스레 물었다. 우현은 지고이네르의 무리 안에 있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에도 레사티나는 자유분방했었다. "호, 혹시 저 사람 좋아해?" 레사티나는 얼른 말을 돌리는 우현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시원스럽게 지어진 그것은 어쩐지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싫어하지는 않아. 나쁘지 않은 사람이야. 점잖고, 지위도 높고." "그럼 왜..." "당연하잖아?" 말을 끊은 레사티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가 다시 춤을 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사티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방울소리처럼 청명한 소리로 웃었다. "저 사람들을 전부 상대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 하나를 상대하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게다가 전쟁이 끝나면 나를 수도로 데려가겠다고 말하고 있어. 이 정도로 빠져있다면 내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들어줄 거 아냐? 편한 길을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이것이 레사티나의 원래 성격인 것인지 아니면 변한 것인지, 우현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언뜻 바라본 디시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이 어쩐지 참을 수 없게 느껴진 우현은 내내 생각하고 있던 이름을 입 밖에 내었다. "루휘트는?" "루휘트? 아아, 정말이지." 잠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레사티나는 우현의 볼을 꼬집으며 웃었다. "언젠가 무리로 돌아갔을 때에도 그가 내게 마음이 있다면 그때 생각할 문제겠지." 우현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레사티나가 말했다. "순진하기 그지없는 우리 우현 소년. 이런 말이 있잖아. '지고이네르의 열정과 귀족의 총애는 접시에 담긴 수프다'라고. 그만큼이나 빨리 식는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 큰일났다. 들어가야 할 시간이야. 우현, 캐스터네츠를 만들어 줄래? 저번에 끌려오면서 들고있던 탬버린밖에 챙기지 못했잖아. 캐스터네츠가 너무 아쉽더라고." 빠르게 말한 레사티나가 급히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우현은 조금 멍한 시선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2장 해후 -3- 그날 밤 우현은 막사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보초를 서는 사람에게는 근처 개울에 씻으러 간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우현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으로 쉽사리 허락을 해주었다. '그렇게 더러운 건가?' 우현은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낮 동안 고조된 열기는 밤이 되면 순식간에 가라앉아 버렸다. 제법 차갑게 느껴지는 물에 몸을 담근 우현은 계절이 바뀌는 때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언제 다쳤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찢어진 손바닥과 이곳 저곳의 작은 상처에 물이 들어가자 조금 쓰라렸다. 상처가 난 것도 모르고 있었던 자신을 떠올리니 쓴웃음만 나왔다. 찌든 때와 땀 냄새를 벗겨낸 우현은 상쾌한 기분이 되어 뭍으로 올라왔다. 옷마저 깨끗한 것으로 바꿔입으니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문질렀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운치 있었다. 잠시 그렇게 앉아있던 그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주워들고 일어났다. 아무리 허락을 받았다지만 너무 오래 있으면 좋지 않을 것이다. 한참을 걷던 우현의 시야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진 나무토막이 들어왔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며 중얼거렸다. 「캐스터네츠를 만들어 달라고 그랬었지.」 막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현은 지급품인 단검을 꺼내어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주변에 가득 찼다. 조금 알 수가 없었다. 우현에게 있어 지고이네르는 한없이 상냥하고 따스한 무리였다. 저녁 무렵에 레사티나가 했던 말에 깃들여있던 그런 차가움은 지고이네르 안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디시트는 레사티나의 말에 별로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건 레사티나가 변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따스한 것은 가족에게 만이었나?' 우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마음을 놓은 사이, 단검은 나무를 스치고 미끄러져 그의 손을 할퀴었다. "앗!" 작게 소리친 우현은 상처에서 울컥 비어져나오는 피를 보았다. 제법 큰 상처였다. 지혈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통증으로 얼굴을 찡그리는데, 그의 앞에 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조심성이 없군." 나직한 목소리에는 밤을 닮은 울림이 들어있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조금 울컥하고 만 우현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고개를 든 우현은 눈앞에 늘어진 짙은 색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남자로 보이는 실루엣의 사람이었다. 그는 선 채로 허리를 숙여 우현의 손을 잡았다. 그가 상처를 건드리는 것을 느낀 우현은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다음 순간 통증은 사라져버렸다. "앞으로는 조심성 있게 행동하도록 해." 남자는 우현의 손을 놓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우현의 성격상 불만스러워 할 말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아문 상처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허리를 펴고 일어나자 우현 역시 따라서 일어났다. 겹겹이 입은 흰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며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향내가 풍겼다. '높은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한 우현의 시야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안 그래도 다물지 못했던 입을 더 크게 벌린 그는, 그래서 남자가 그를 보며 눈썹을 조금 꿈틀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날카로운 눈매나 지나치게 단정한 선이 인상을 차갑게 만들고 있기는 했지만 놀랍도록 수려한 생김을 가진 사람이었다. 짙은 색깔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덕분인지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얼핏 검은머리인가, 하고 생각한 우현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듯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꽤나 냉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우현은 남자의 안색을 확인하고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고이네르가 아니었다. 낙심한 우현은 풀죽은 인사했다. "치료해 보셔서 감사합니다. 신관인가 보죠?" 미묘하게 이상한 말이다. 남자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것을 본 우현이 다시 물었다. "아닌가요?" "신관은 맞다. 너는 병사 같은데, 이 밤중에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잠깐 씻어서 나왔다가 할 일이 생각나서요." 어눌함은 많이 없어졌지만 단어선택에 있어 조금씩 엇나가는 우현을 보며 남자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안 그래도 냉정한 그의 인상이 더 차가워지는 것을 본 우현은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머뭇거리며 막사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우현을 향해 남자가 불쑥 물었다. "너는 지금 행복한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것을 묻고 있을까. 신관의 의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우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잃어버린, 어쩌면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를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덮쳐들어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한 번 경험한 상실은 그렇기에 더 두렵다. "그다지." 작게 대답한 그는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따가울 정도의 시선이 등에 와 닿았다. 그것이 너무나 불편하게 느껴진 우현은 급히 막사 안으로 뛰어들었다. 「뭐야, 저 사람?」 뒤늦게서 찾아든 의문에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깊이 잠든 사람들 사이를 잘 피해 자신의 자리로 간 우현은 한숨을 쉬며 누웠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얕게 잠들었던 우현은 그것을 방해하는 소리에 설핏 눈을 떴다. 익숙한 소리였지만 들려올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가물가물하게나마 들고 있었다. 다음 순간 우현은 눈을 번쩍 떴다. 곁에 놓아두었던 검을 얼른 집어든 그는 근처에서 잠든 사람들을 마구 걷어찼다. 「얼른... 이런 젠장.」 무심결에 나온 언어에 욕설을 내뱉은 우현은 천천히 눈을 뜨는 남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일어나! 무슨 일이 생겼어!" 그가 말하지 않아도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안색이 일변한 채 일어난 남자들은 무기를 움켜쥐고 뛰어나갔다. 마지막 남자가 빠져 나오는 순간 막사에 불이 붙었다. 우현은 활활 타오르는 막사를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수라장이었다. 고삐 풀린 말들은 불에 놀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막사에서 채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우현은 아까 자신과 말을 나누었던 보초가 목이 따진 채 쓰러진 것을 발견하고는 눈을 돌렸다. "기습에 두려워하지 마라! 모두 진정해! 상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누군가 목청껏 외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곧 '컥...'하는 숨넘어가는 소리로 변해버렸다. 우현은 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여기저기에서 불타오르는 막사 덕분에 사방은 대낮같이 밝았다. 그 불길 사이로 몇 개의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서는 여지없이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뭔가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등을 맞대고 섰다. "호오, 제법이군?" 즐거운 기색이 감도는 목소리였다. 여자의 것이었지만 걸걸하게 느껴지는 음성을 들은 그들은 몸을 긴장시켰다. 지익, 하고 흙 알갱이가 끌리는 소리가 나며 커다란 실루엣이 다가왔다. 넓은 어깨와 두꺼운 팔이 어지간한 남자 뺨 칠 여자였다. 덩치에 걸맞게 손에는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녀의 분위기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남자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르무드의 용병?" 그녀는 대답 대신 웃었다. 이를 드러내며 짓는 그 웃음은 마치 늑대나 이리와도 닮아있었다. "대화는 그만. 간다." 여상스러운 어조로 말한 여자는 다음 순간 땅을 박찼다. 파파박 하는 소리와 함께 흩어진 흙이 땅에 다시 떨어질 즈음 신음소리가 울렸다. "컥!" 길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지근거리까지 다가든 그녀가 도끼를 휘둘러 남자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조금의 거침도 없이 깨끗하게 베어진 목이 멀리까지 날아갔다. 우현은 떨리는 손을 억누르며 검을 다잡았다. 두려움은 금새 전염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어버린 아군을 보며 모두 같은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용병을 만나면 도망치는 것 이외에는 도리가 없다.'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용병들은 하루하루가 싸움이다. 강하지 않고서는 견뎌내지 못할 그들의 실력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의 것이었다. 그들은 슬금슬금 발을 놀려 여자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우현도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어머, 거기 미소년." 걸걸한 목소리가 울렸다. 남자들은 모두 뻣뻣하게 굳은 채 발을 멈추었다. 여자의 시선이 우현에게 멈춰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널 몇 번 본 적 있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검술 좀 배운 것 같던데, 맞지?" 우현은 딱딱하게 굳은 고개를 움직여 간신히 끄덕거렸다. 여자가 낮게 웃었다. 그것에 그녀가 아까 지었던 웃음이 겹쳐지는 것을 느낀 우현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크아아아악!" 이번의 신음은 길었으며 또한 비명에 가까웠다. 우현이 피하는 바람에 애꿎은 사람을 벤 여자는 '쳇'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어깨에서 가슴까지 길게 베인 남자를 한 번 흘긋 보더니 도끼를 내려쳐 비명을 잠재웠다. "제법 잽싸잖아?" 우현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그녀가 다시 한 번 웃었다. 꽤 귀엽네, 라고 중얼거린 그녀는 다시 한 번 대지를 박찼다. 뭔가 어른거리는 것을 느낀 우현은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그러나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할 사람이었다면 용병일을 하여 먹고 살 수 있을 리 없었다. "크읏!" 땅에 뒤통수를 호되게 박은 우현은 노랗게 된 시야를 다잡으려 애썼다. 그 가물가물한 시야 너머로 높이 들려진 도끼가 보였다. 여자는 우현의 멱살을 단단히 움켜쥔 채 웃었다. "마음에 들었거든? 그러니까 고통 없이 단번에 보내줄게." 도끼는 정확히 우현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되었다. 우현은 도끼가 내려오는 것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죽는 건가.' 죽는 순간이 되면 이제까지의 일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는 옛말은 사실이었다. 바로 지금으로부터 시작된 흐름은 점차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 레사티나를 구하고, 퀴아네에게 다치고, 지고이네르와 함께 마차로 이동하고, 맨 처음 에코의 눈동자를 마주 대하고, 그리고. 아버지를 목 졸라 살해하고. 죄 값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으로 보내진 것이 구원이 아니라 벌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기묘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움에 찬 그것을 들은 우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무서운 기세로 움직이던 도끼는 중간에 멈춰있었다. 아니, 그것은 이미 도끼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세한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도끼를 보며 여자도 우현도 말을 잃었다. 바람이 부는지, 가루는 가볍게 흘러 먼 곳으로 날아갔다. "이, 이런..." 자루만 남은 도끼를 보며 여자가 신음했다. 우현의 멱살을 쥐고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때다 싶었던 그는 얼른 손을 움직였다. "으읏!" 어느새 떨어뜨린 검은 저 멀리에 있다. 무기도 없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여자의 얼굴에 흙을 끼얹는 것뿐이었다. 뜬눈에 흙 세례를 받은 여자는 놀라움과 고통, 당황에 신음했다. 분노는 우현에게 밀쳐진 다음에 찾아든 감정이었다. "이런 고약한!" 생전 흘리지 않았던 눈물까지 흘려가며 손을 더듬은 여자는 우현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틀어쥘 수 있었다. 곧 쿠당탕, 하는 소리가 나며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으윽! 이것 놔!」 여자의 손에 발목을 잡힌 우현이 힘껏 발길질을 했다. 그의 발등에 얼굴을 얻어맞은 여자가 순간 손아귀의 힘을 늦추었다. 우현은 얼른 도망치려 했으나 다음 순간 여자는 더더욱 거세게 발목을 조여들었다. "읏..." 발목이 부러질 듯한 통증을 느낀 우현이 신음했다. 눈의 흙을 전부 털어낸 여자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다급한 마음에 다시 한 번 걷어차 보았지만 여자는 여유 있게 그것을 막아냈다. "성질이 나쁜 아이는 두들겨 패야 하는 법이지." 여자가 우현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그녀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우현의 배에 주먹을 질러 넣었다. 푹, 하는 소리보다 먼저 느껴진 것은 매서운 통증이었다. "크허억!" 우현은 고통 속에서 자신의 멱살이 잡히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올라온 격렬한 통증이 턱에서 시작하여 머리를 뒤흔들었다. 신음도 내뱉지 못하고 몸을 움츠린 우현을 보며 여자가 말했다. "귀여운 아이에게는 고통스러운 모습도 어울리는 구나." 즐거움과 분노가 반반씩 섞인 음성이었다. '가지고 놀고 있어.' 그렇게 생각한 우현은 고통 속에서도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한 번 여자의 주먹이 바람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눈을 꽉 감은 우현은 순간 품속에 넣어두었던 단검을 떠올렸다. 그러자 어디서 그런 속도가 튀어나왔는지, 재빨리 몸을 웅크린 우현은 간발의 차이로 여자의 주먹을 피해내었다. "이런...!" 여자가 이를 갈았다. 그녀의 손이 우왁스럽게 다가와 우현의 목을 틀어쥐었다. "크윽..." 여자의 손아귀가 세게 조여들었다. 그대로 허공에 들려진 우현은 발버둥을 쳤지만 요지부동, 여자는 놓아주지 않았다. "괴롭니?" 그녀의 어조만으로 판단한다면 놀이를 즐기는 어린아이 같았다. 우현은 간신히 시선을 돌려 여자를 보았다. 아무리 그가 말랐다고 하지만 뼈의 무게만도 상당하다. 그럼에도 여자는 우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있었다. "어머, 괜찮아?" 여자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목이 막혀 삼키지 못한 타액 한 줄기가 우현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괴로운 모양이구나? 어라? 더럽게!" 턱선을 타고 흐른 타액이 여자의 손에 떨어졌다.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우현의 머리를 땅바닥에 메다 꽂았다. 그래도 아직 기분이 나쁜지, 그녀는 육중한 다리를 들어 우현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타격음만으로 보자면 복날 개 잡는 소리 같았다. 우현은 가물가물한 정신을 부여잡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 개가 자신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아주 그럴싸한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여자의 화를 부추겼다. "웃어? 이 새끼가 정말!" 굉장한 소리를 내며 날아든 발이 우현의 복부에 정확하게 꽂혔다. 통증으로 멍멍해진 귀에 미약하게나마 바람 소리가 일었다. 부웅 떠서 한참을 날아간 그는 흙과 피가 지저분하게 엉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졌다. "커헉! 쿨럭쿨럭..." 보잘 것 없는 저녁 메뉴를 굳이 확인하게 해줄 필요는 없는데, 라고 생각하는 우현의 귀에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없을 기회였다. 그는 단검을 꺼내어 소매춤에 숨겼다. "일어나. 아직 안 끝났...어? 무슨 짓이야!" 우현의 멱살을 틀어쥐고 들어올리던 여자는 머리카락이 죄 뽑히는 통증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처음에는 눈, 그 다음에는 머리카락이라니. 단련되지 않은 부분만 골라 공격을 하는 우현에 대한 밉살스러움이 솟구쳤다. 그녀가 우현의 목을 움켜쥐고 끌어내리려 할 때였다. "...!" 우현의 손이 움직여 단검을 빼어들었다. 그는 여자의 목을 노리고 그것을 움직였다. 푸욱, 하는 소리와 두툼한 살점이 잘려나가는 감촉이 동시에 다가왔다. "그...으으...이..." 여자의 입에서 분노에 넘치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고 싶은 말이 채 언어로 흘러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여자는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다. 우현은 손에 힘을 주어 단검을 뽑았다. 희미한 달빛을 은빛으로 반사한 단검이 다시 아래쪽을 향해 움직였다. 피와 기름에 번들거리는 검날이 일순 황홀한 빛을 뿜었다. (전투신, 싫어) 2장부터는 한 화씩 올리려고 생각했는데, 언제까지고 다른 남정네를 방치할 수도 없고 해서 말입니다. 게다가 저번 편에는 내용이 거의 없어서 ^^;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2장 해후 -4- 쿵, 하는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혼란으로 뒤덮인 장소에서 그곳만은 차가운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여자의 입에서 꾸역꾸역 게워지는 피 거품만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미동도 없던 여자의 어깨가 조금 움찔했다. 곧이어 그 밑에서 다섯 개의 피투성이 손가락이 드러났다. 여자의 시체 밑에서 기어 나오던 우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쓰러지던 여자가 그의 팔을 물어뜯었던 것이다. 의지를 담은 것인지 단순한 우연이었는지 이제 와서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전자라면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어지간한 남자는 저릴 가랄 정도로 육중한 몸 밑에서 간신히 기어나와 숨을 몰아쉬던 그는 이번에는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낮게 신음했다. 단검을 박아 넣을 때 스쳤는지 왼쪽 손가락의 살갗이 너덜너덜했다. '나 살아있어?' 통증이 오히려 확신을 주었다. 갑작스레 온몸이 뜨거워졌다. 덜덜 떨리는 자신의 몸을 꼭 감싸안은 그는 쓰러진 여자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여자는 그리도 원통했는지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한 채 죽어있었다. 그 얼굴에서 지독한 분노와 증오, 그리고 저주를 본 우현은 몸을 떨었다. 얼른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그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현!" 마치 천국에서 들려오는 선율과도 같은 음성과 더불어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간신히 고개를 든 그의 앞에 낯익은 얼굴이 내밀어졌다. "우현! 괜찮아?" 여기저기 그슬린 디시트는 우현과 쓰러진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발견했을 때 상황은 이미 끝나있었다. 우현의 손에서 무딘 빛을 반사해내던 검이 마치 빨려들듯 여자의 목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어쩐지 가까이 갈 수조차 없는 느낌이었다. 무섭다고, 그는 몇 살이나 연하인 소년을 보며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야, 우현?" 그렇지만 부들부들 떨고있는 우현은 안쓰럽기만 했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디시트는 가는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나친 긴장과 공포가 한꺼번에 풀렸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도 주체를 못하겠다는 듯 자신의 몸을 꽉 부둥켜안은 우현을 향해 디시트는 등을 내밀었다. "자, 업혀. 얼른." 우현은 간신히 팔을 들어 디시트의 어깨에 걸쳤다. 그와 동시에 머리가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은 그는 그대로 디시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디시트의 놀란 목소리가 그를 깨우려 들었지만 이미 놓쳐버린 정신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우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맨 처음으로 느낀 것은 퀴퀴한 냄새였다. 막사 안에 떠도는 지독한 체취에 익숙해진 그의 코로도 견디기 힘든 그것은 그러나 몇 번이나 맡아본 것의 응집에 지나지 않았다. 몇 번 눈을 깜빡여 혼미한 정신을 바로잡은 우현의 귓가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윽... 흐으으... 으으..." 무의식인 듯 또렷하지 않은 그것은 그렇기에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우현은 자신의 바로 곁에서 신음하고 있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불에 타버렸는지 왼쪽 반신이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오른쪽 팔 역시 불에 녹아버렸는지 이상한 형태로 끊어져 있었다. 그 참혹함에 저도 모르게 눈을 돌린 우현은 그 사람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줄지어 누워있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몇 사람 건너에는 온 몸이 난자 당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지혈을 위한 것인지 상처를 칭칭 감은 천은 이미 피를 잔뜩 먹어 헐거워져 있었다. 그 옆에는 머리 한 쪽이 완전히 함몰된 남자가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한 상태인 그는 얕은 숨을 할딱거리며 간신히 호흡하고 있었다. 팔 하나, 다리 하나 잘라진 것은 예사로 보이는 이들 가운데에서 우현은 유일하게 성한 사람이었다. 아니, 성한 사람은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이 약을 저 사람에게 발라 줘. 이 약은 먹이고. 붕대 정도는 네가 매 주라고." 말하는 쪽은 나이가 지긋한 남자였다. 희끗희끗한 빛깔이 군데군데 엿보이는 진회색 머리카락의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청년에게 몇 가지의 약과 둘둘 말린 천 뭉치를 건네주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몸을 돌리던 우현은 몸 여기저기에서 전해지는 뻐근한 통증에 숨을 삼켰다. 아마 전신이 알록달록하게 멍들어 있을 것이다. 우현은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다행스럽게도 뼈는 상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다른 상처는 없나 살펴보던 그는 물어뜯긴 팔과 깊게 베인 손가락을 발견했다. 이미 피가 말라붙은 손가락은 잘릴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지만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는 정도이기는 했다. 후들거리는 팔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난 우현은 의원으로 보이는 남자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는 전신에 화상을 입은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치료해 달라고 말하기에는 우현의 상처가 너무 경미했다. 우현은 약병이 줄지어 있는 선반으로 다가갔다. 화전민의 마을에서 에라드가 맡기고 간 약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 병을 찾아낸 그는 고약 형태의 그것을 상처에 발랐다. 붕대도 감아야겠다고 생각한 그의 눈에 너절한 천 조각이 보였다. 피와 때, 고름으로 점철된 그것은 어떻게 보아도 붕대처럼 보였지만 그러한 것을 손가락에 감을 용기는 없었다. '이런 걸 감았다가는 분명 다른 병에 걸리고 말 거야.' 질린 시선으로 붕대를 내려다본 그는 자신의 옷을 흘긋 보았다. 기습이 있던 날 밤에 갈아입었던 것이라 흙먼지가 묻고 피가 튀기는 했지만 붕대보다는 훨씬 깨끗했다. 근처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들고 자신의 옷자락을 길게 찢어낸 우현은 그것으로 손가락을 칭칭 감았다. 한 손으로 간신히 매듭을 짓는 그를 날카로운 시선이 훑었다. 대강이나마 치료를 끝낸 우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고름과 살이 썩는 냄새, 배설물 냄새, 그리고 피 냄새가 한데 섞인 공기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얼른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몸을 돌린 그는 자신의 바로 뒤에 서 있는 의원의 모습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는 그를 매서운 눈이 살폈다. "약에 대해서 조금 아는 모양이지?" "네?" 엉겁결에 되물었던 우현은 어물어물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주 조금...요." 그가 알고있는 약이라고 해봐야 상처에 바르는 약과 진통제, 해열제, 소화제 뿐이었다. 앞의 세 개는 에라드가 알려주었고 마지막 하나는 아무 것이나 잘 주워먹는 아이들을 돌보며 저절로 기억하게 된 것이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의원은 다시 한 번 눈을 날카롭게 했다. 우현은 자신보다 손바닥 하나만큼 아래에 있는 주름진 얼굴을 보며 대강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정도의 나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우현을 살피던 의원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위생병으로 보이는 병사를 본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얼간아! 그건 먹는 진통제지 상처에 바르는 약이 아냐! 몇 번을 가르쳐줬는데 아직도 외우지를 못 해! 어이, 너!" 마지막 말은 우현을 향한 것이었다. 갑작스런 큰 소리에 깜짝 놀란 그를 보며 의원이 물었다. "이름이 뭐지? 나이는?" "우, 우현. 열 아홉 살인데요." "좋아, 우현. 네가 저 사람을 맡아라. 진통제를 먹이고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줘.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겠지?"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위생병에게 향하는 것과는 달리 신경질적인 면은 없었다. 우현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위생병과 빨리 하라고 재촉하고 있는 의원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의원의 얼굴에 험상궂은 빛이 떠돌기 시작하는 것을 본 그는 결국 위생병에게 다가가 약과 붕대를 건네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인지 군데군데 피가 말라붙은 상처에서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색깔의 진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고 마는 것은 무의식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미간을 찌푸린 우현은 우선 환자의 입안에 진통제를 흘려 넣었다. 손가락에 고약을 묻힌 그는 더더욱 찌푸린 얼굴로 상처에 약을 발랐다. 다음 순서인 붕대감기를 위해 천을 바라본 우현은 아예 일그러진 얼굴로 의원을 돌아보았다. 위생병과 무어라 입씨름을 한 후 기어이 쫓아낸 의원은 할 말 있냐는 듯한 얼굴로 우현을 마주보았다. "좀... 깨끗한 붕대는 없지요?" 스스로는 알지 못했지만 확신하는 투로 묻고 만 우현을 보며 의원은 피식 웃어주었다. "깨끗한 붕대? 있을 리가 없지. 그나마 있는 것도 다행이야." 우현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붕대를 감은 후 약병이니 하는 물건들을 놓아둔 채 일어났다. 의원이 물었다. "어딜 가려고?" "네? 막사로 돌아..." 의원은 우현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고는 붕대와 약병을 다시 들려주었다. 그러더니 어안이 벙벙하여 바라보는 그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가긴 어딜 가. 너는 오늘부터 내 조수야." 우현이 병동에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레사티나는 부리나케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있으면 안 걸릴 병도 걸리고 만다. 황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그러나 멀쩡하게 서서 돌아다니고 있는 우현을 발견하고는 입을 딱 벌렸다. "저쪽에 있는 환자한테서 붕대를 걷어서 이리 가져와. 상처에 바르는 약과 진통제도 가지고 오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네가 한 발 늦으면 이 사람은 그만큼 더 힘들어해야 한단 말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재촉에 종다리처럼 바삐 움직이면 다음은 상처의 치료가 기다리고 있다. 의원은 간단한 환자의 경우에는 우현의 손에 맡기고 자신은 중한 환자만 돌보고 있었다. 붕대를 보며 한숨을 쉰 우현은 문 앞에 못 박힌 듯 서있는 레사티나를 보며 얼굴을 밝게 했다. "레사티나!" 레사티나를 흘긋 본 의원은 다른 환자에게로 바삐 옮겨가며 건성으로 말했다. "잠깐이라면 수다떨고 와도 좋다고 허락하지." 툭 던지듯 하는 말이었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병동의 상황을 따지면 상당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우현은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레사티나와 더불어 나가는 우현의 등을 향해 의원이 한 마디를 던졌다. "오늘이 다 지나기 전에는 돌아오겠지?" "내일 점심때까지는 올게요, 모리악 선생님." 우현은 싱긋 웃으며 그의 말을 맞받고는 레사티나를 병동의 그늘로 안내했다. 이제 가을이건만 낮의 공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레사티나는 흙먼지가 섞여 더욱 숨이 막히는 공기를 들이마시며 물었다. "병동에 있다고 하길래 크게 다친 줄 알았잖아. 용병을 해치웠다는 말을 들었어.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멍이 좀 들었겠지만 이젠 별로 안 아파. 손가락을 다쳤지만 이제 며칠 후면 나았어." 또 이상한 말을, 이라고 생각한 레사티나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우현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은 기습이 있던 날로부터 며칠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이제 베슬렌의 막사에서 지내게 된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일반 병사인 디시트로서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레사티나는 그 며칠 동안 병동에 완전히 익숙해진 듯한 우현을 보며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젠 위생병이야? 다칠 염려는 없어졌으니 다행이네. 식사도 더 괜찮게 나오지?" "응. 어제는 감자 수프도 나왔어." 우현은 멀건 죽과 잘해야 흑빵으로 때우던 끼니에 비하면 그야말로 호화판인 식사를 떠올리며 마주 웃었다. 문득 레사티나가 부탁했던 캐스터네츠에 생각이 미쳤다. "캐스터네츠. 아직 못 만들었어." "천천히 해줘도 돼. 어차피 꼬실 사람은 정해져 있으니까." 캐스터네츠에 대한 생각이 우현을 기습이 있던 밤의 기억으로 이끌었다. 그는 피와 약에 절은 손가락을 보았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는 아직도 꽤 쓰라렸지만 그날 밤 입었던 다른 상처는 이미 흔적도 없었다. "혹시 이곳에 신관이 있지 않아?" 우현은 긴 머리카락의 한 올 한 올, 치렁한 옷의 자락 자락이 부드럽게 움직일 때마다 향기를 내뿜던 남자를 떠올렸다. 이어진 일들로 정신이 없었지만 새삼 생각해 보면 그가 했던 질문은 정말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남자에 대한 생각은 그가 가진 수려한 얼굴로 귀결되었다. '아름다운 정도도 굉장할 수 있는 거구나.' 호감을 사기에는 수려한 외모보다 더 이득이 되는 것이 없다. 신도 불공평하시지,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외모를 떠올리며 한숨을 쉰 우현은, 자신을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는 레사티나의 시선을 느끼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베슬렌 님은 다친 적이 없어서 말이야. 왜? 병동에 있다 보니까 신경 쓰이니?" "아, 조금." 그러자 레사티나는 코방귀를 뀌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서라. 여기에 신관이 왔다고 해도 높은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야. 혜택이라는 게 일반 병사들에게까지 돌아갈 리 없잖아. 신관도 병동에 들어서자마자 혼비백산해 도망치고 말걸. 곱게 곱게 살아온 사람들이니까." "그런가?" 그러나 그 남자는 곱게 곱게 살아온 것치고는 지나치게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우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그렇게 생각했다. 가이아 님, 복 받으실 겁니다.(추천이라니... 크흑)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2장 해후 -5- 레사티나로부터 우현이 위생병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디시트는 그날 저녁 병동으로 찾아왔다.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우현은 보지 않아도 뻔한 저녁식사를 했을 디시트에게 자신의 빵을 잘라 나누어주었다. 그는 반색을 한 채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이제야 한시름 놨다. 네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내가 에코 마마에게 죽어났을 거야." 우현은 욕에 욕을 해대며 자신을 나무랐던 에코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문득 디시트가 용병에 대해 물었던 것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이제 용병 쪽으로 갈 거야?" 감추지 않아도 좋을 것을 감추는 배려는 상대방에게 더 큰 부담을 줄 수도 있다. 그것을 알고있는 지고이네르는 자신의 감정 표현에 인색하지 않았다. 우현은 디시트가 내내 용병 쪽으로 옮겨가고 싶어한 것을, 그러나 그의 옆에 있어주느라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었다. 역시 그가 눈치챘다는 것을 알고있는 디시트는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네가 그 아르무드 용병이랑 싸우는 것을 보고는 옮길 생각이 싹 사라져버렸어. 맛있는 음식 좀 먹자고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곳에 스스로 기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용병의 상대는 용병이다. 그런 상대가 주변에 득시글거린다면 목숨이 아홉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몇 마디 나눈 디시트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새로 배정 받은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우현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그의 앞에 쌓여있는 붕대를 노려보았다. 이 환자가 쓰던 것을 걷어 저 환자에게 감는 것이 예사인 붕대는 여러 사람의 때와 피고름으로 얼룩져 있었다. 다리를 잘리고 병동에 실려온 환자가 '차라리 내보내 줘!'라고 외치는 것을 들었던 날 저녁, 우현은 내내 생각하고 있던 것을 실행하기 위해 시냇가로 갔다. 세제는 당연히 없었다. 차가운 물에 붕대를 넣고 빡빡 문질러 때를 빼던 우현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문지르고 헹구는 행동을 되풀이한 지 한참 후, 붕대는 이름에 걸맞는 모습을 얼추나마 되찾았다. 뿌듯한 기분으로 그것을 넌 그는 병동 안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들었다. 문제는 소독이었다. 우현에게 있어 알코올이나 과산화수소로 상처를 소독하고 깨끗한 붕대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 상식이었다. 그러나 모리악조차 때로는 씻지 않은 손으로 상처를 만지기도 했다. 소독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다. 우현은 하얀 붕대를 바라보았다. 물에 대강 빤 것만으로는 소독이 되었다고 볼 수 없었다. 겉으로는 하얗지만 속은 균의 도가니탕일 붕대를 본 그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고작 며칠 간의 병동생활 동안 파상풍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껴버린 우현이었다. 기껏 상처를 치료해 놓으면 이번에는 붕대에 있는 균에 감염되어 몸에 열을 올리고 마는 병사들을 보면 자신의 헛수고에 허탈해지기까지 했다. 그는 붕대를 바라보며 소독할 길을 모색했다. 「선조님들은 위대하다는 거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린 우현은 곧 한숨을 푹푹 쉬었다. 도대체 이 많은 것을 언제 다 삶냔 말이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중얼거렸다. 「저를 이곳으로 보내주신 신님. 제발 부탁인데 가루세제 한 포대만 보내주세요.」 물론 가루세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따위의 행복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우현은 아침식사가 끝난 후 주방으로 갔다. 수많은 병사들에게 먹일 음식을 만드는 주방인 만큼 거대한 솥이 많았다. 아침의 일을 끝내고 휴식에 젖어있던 여자들은 병사로 보이는 그의 등장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솥을 빌릴 수 있을까요?" 우현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러자 자식뻘 되는 해말간 얼굴에 호감을 느낀 여인 몇이 솥을 내어주었다. 그는 적당한 크기의 것에 물을 부은 후 붕대를 우겨넣었다. 우현은 물이 끓는 지루한 시간 동안 여인들을 살폈다. 대부분 중년을 넘긴 여인들이었다. 젊은 여자들은 다른 곳에 가있겠지, 라고 생각을 하자 조금 등골이 서늘해졌다. 대한민국 국민 치고 군 위안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현이 하스티아 공권력에 대해 치를 떨고 있는 그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건 뭐 하는 거야?" 연한 삼베빛의 머리카락이 거의 은발로 보이는 여인이 물었다. 우현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얼른 대답했다. "붕대를 삶고 있어요. 더러워져서." "삶으면 깨끗해져? 누구에게 배웠니?" "어... 할머니요." 엉겁결에 '엄마'라고 대답할 뻔했던 우현은 입술을 꼭 깨물고 말을 돌렸다. 그 찡그림에 무엇을 생각했는지 여인들은 모두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명백한 오해였지만 바로잡을 수고를 할 생각은 없었다. 우현은 고개를 돌렸다. 주방의 한 쪽에서는 그날의 점심거리로 보이는 보리가 있었다. 저것을 한데 넣고 끓인 죽은 일반 병사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병동에도 배급되었다. 피를 흘려 약해진 자신에게 에코가 억지로 먹였던 간 요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환자식이었다. 문득 우현은 어릴 때 읽었던 위인전을 떠올렸다. 환자의 환경을 깨끗하게 하고 음식을 개선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어딘지 상황이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나는 우현 나이팅게일이 되는 것인가.' 그것이 너무나 우습게 느껴진 우현은 킥 소리를 내어 웃었다. 어느새 빨래가 끓고 있었다. 그는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붕대를 긴 꼬챙이로 저으며 자조의 미소를 지었다. 위인처럼 숭고한 마음과 희생정신으로 하고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환자를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상처에서 풍기는 냄새에는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으며, 끝이 없는 부상병은 지긋지긋했다. 때로는 신경질이 나 환자의 치료를 거칠게 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아픈 사람을 덜 아프게 할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측은지심이라고 했던가. 측은함에 눈시울을 붉히고 가련함에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었다. 또한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면 자신을 기특하게 여긴 신이 한시라도 빨리 지고이네르의 무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코의 활달한 웃음과 티티의 종알대는 음성이 그리웠다. 지고이네르의 무리에 섞여 포장마차를 타고 마을을 옮겨다니던 것이 마치 몇 년은 지난 과거의 일인 것만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붕대를 건져 올렸다. 붕대를 다 널고 돌아온 그를 맞은 것은 모리악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늦었다, 이 녀석아." 그러나 모리악이 자신을 상당히 귀여워하고 있는 것을 아는 우현은 그 정도 퉁명스러움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베실베실 웃은 그는 물이 담긴 대야를 내밀었다. "손 씻고 하세요." '이건 또 무슨 짓이냐?'고 묻는 듯 생뚱 맞은 표정으로 그를 본 모리악은 그러나 권하는 대로 손을 씻었다. 때와 약 찌꺼기, 피와 고름이 물에 씻겨 내려갔다. 우현은 그것을 곁눈질하며 한편으로는 환자들의 환경을 살폈다. 피와 땟국으로 꼬질꼬질해진 담요를 그 혼자 맡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아직 식사를 하는 것조차 무리인 환자들의 머리맡에는 영양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엿볼 수 없는 멀건 죽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보급에 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건 놔두고, 다른 쪽으로...' 어느 시대나 빽이란 좋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포도주를 들이키는 모리악이 보였다. 두 사람의 식사에는 아주 가끔 포도주가 딸려 나왔는데, 애주가인 모리악은 그것을 물통에 담아두고 조금씩 조금씩 아껴 마시곤 했다. 우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 술인가요, 모리악 선새...!" 모리악은 자신의 팔에 다짜고짜로 들러붙은 우현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싸구려 포도주 특유의 시큼한 맛을 싫어하는 우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생명수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술 냄새를 맡고 있었다. 「알코올!」 "어, 어이? 우현?" 알 수 없는 단어에 놀란 모리악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현을 불렀다. 그러나 우현은 그것을 듣는 둥 마는 둥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에피서스에 온 후 처음으로 짓는 밝은 웃음이었다. 「나 바보 아냐? 이제까지 몰랐다니!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리치고 나가는 우현을, 모리악은 눈을 크게 뜬 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코를 킁킁거려 포도주의 냄새를 맡은 그는 고개를 기우뚱거리며 말했다. "거 이상하네. 냄새만 맡고도 취하는 건가?" 병동을 나선 우현은 날 듯이 달렸다. 너무나 기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숭고한 마음이 아니어도 희생정신이 없어도, 인간은 다른 사람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을 보며 충분히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레사티나! 레사티나앗!" 우현은 베슬렌의 막사에 채 다다르기도 전에 힘껏 외쳤다. 보초 몇이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앞에서 발을 멈춘 그는 어깨로 숨을 쉬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레사티나... 좀... 허억, 우현이라고..." 그때 우현의 목소리를 들은 레사티나가 막사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을 발갛게 상기한, 그녀에게조차 익숙치 않은 표정의 우현을 본 눈동자가 조금 크게 뜨였다. "우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레사티나, 술! 술 있어?" "응? 뭐?" 우현이 지고이네르 특제의 달콤한 과실주를 꽤 즐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레사티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마실 만한 술은 없어. 쓰고 시고 해서 맛이 없을 거야." "그게 아니라! 나 안 먹어. 있으면 좀 줘, 응?" 그의 웃음에 이끌린 레사티나는 용병들에게 지급될 것인 싸구려 증류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시켰다. 술병을 받아든 우현은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은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레사티나! 나중에 봐!" 또 다시 있는 힘껏 뛰어 사라지는 우현의 뒷모습을 본 레사티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리악은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환자의 상처를 보았다. 이전 같았으면 열에 여덟은 붓고 고름을 줄줄 흘리며 썩어들었을 상처였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상당히 깨끗했다. 그의 시선이 조금 움직여 옆을 보았다. 우현이 그 귀중한 술로 환부를 씻고 있었다. 달큰한 술냄새에 입맛을 한 번 다신 그는 우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도대체 어떤 마법을 사용하는 거냐?" 창조신 에다마트의 입김이 강하게 뒤덮고있는 이에라 르페리토 대륙은 마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신의 힘을 빌리지 않은 기적은 전부 사악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일부 극단적인 에다마트 주의자들은 다른 신의 힘을 빌린 것조차 마법으로 치부하곤 했다. 진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마녀, 혹은 마인(魔人)으로 불렸다. 사악한 힘에 매료된 그들은 주로 산이나 으슥한 숲 속에 집을 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잡아다 시약을 만들었다. 그들의 마법은 때로는 굉장한 힘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구하곤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을 그것이 마법이라는 것도 알지 못할 방법으로 죽음의 땅에 내던져지도록 만들었다. 모리악이 우현의 방법을 마법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회복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단지 붕대를 삶고, 상처에 술을 붓고, 여자들에게 부탁해 담요를 빨게 하는 것만으로 일어나는 변화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들은 우현은 조금 난감한 듯 웃었다. "그게... 그러니까 「균」이라는 것이 있어서..." "균?" "네. 상처에 들어가면 사람을 병들게 해요. 지저분한 손이나 붕대에 묻어있어요. 술과 열이 그것을 없애요." 모자란 언어로 자세한 설명이 가능할 리 없다. 우현의 이핀트가 다소 어색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리악은 그 정도 설명으로 만족해야 했다. "마법이 아니란 말이지?" "네. 당연하죠." 마법이라는 말에 산산히 부서져 흩어지던 도끼를 잠깐 떠올렸던 우현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술병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상처에 붓는 모리악을 곁눈질한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는 시험삼아 근처에 있는 빈 술병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가루가 되기는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번 머쓱하게 웃은 그는 머리를 긁적이고 다른 환자에게로 옮겨갔다. 어차피 이상한 세계니까 도끼가 부서지는 일도 가끔은 있는 거겠지, 라고 자기 암시를 하며. 감상란, 추천란 보고 기뻐서 눈물이 줄줄...(크흑!)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2장 해후 -6- 우현이 한 일은 겉보기에는 매우 단순해 보였다. 그는 붕대를 삶고 상처를 술로 씻는 것 이외에도 레사티나에게 부탁하여 젊은 여인들을 동원하도록 했다. 밤에는 병사들을 상대하지만 낮에는 하릴없이 잠이나 수다로 소일하던 그네들이었다. 우현이 그들에게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빨래였다. 여럿이 모여 하는 일은 노동보다는 놀이에 가깝다. 비눗물 대신 양잿물을 부은 빨래통 속에 담요와 옷을 밀어 넣고 자근자근 밟는 그들은 제법 즐거워 보였다. 그러나 깨끗해진 천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변화를 가져왔다. 우현은 자신이 일궈낸 결과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성취감과 뿌듯함이 온몸을 내달렸다. 이곳의 누구도 알지 못하던 방법으로 얻어낸 결과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베풀었다는 우월감이 조금은 섞인 기쁨을 만끽하는 중인 그였지만 그러나 혼자였더라면 해낼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무 사이사이에 걸쳐진 밧줄마다 잿빛 담요가 걸려있었다. 담요 사이로는 가는 붕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것들을 날렸다. 한가한 시간, 여인들을 도와 담요를 널던 우현은 바람결에 묻어나는 빨래 냄새를 맡고는 미소를 지었다. 곧은 스트레이트의 검은머리가 가닥가닥 흩날려 그의 뺨을 뒤덮었다. 그 바람이 어쩐지 아득한 느낌이라, 그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 우현을 바라보는 눈길들이 있었다. 하급 병사에서부터 사령관에 이르기까지 우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몇 가지 사소한 방법만으로 병자들의 사망율을 대폭 떨어뜨린 그를 향해 마인(魔人:Wizard)이니 치료의 힘을 지닌 자니, 멋대로 떠들어대는 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우현의 외모와 분위기였다. 그가 지닌 미묘한 피부색은 이 대륙에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옅은 밀빛이라고 할 수 있을 피부는 대륙인들의 그것과는 달리 잡티 하나 없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눈에 띄었다. 얼굴의 윤곽은 다소 밋밋한 듯 했지만, 그 한 가운데에 자리한 눈은 그런 느낌을 날려보내기에 충분했다. 먼 곳을 보던 우현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넋을 잃은 채 그를 보고 있던 처녀 하나가 황급히 눈을 피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려는 그때, 그를 부르는 음성이 있었다. "이 녀석, 우현! 술이 들어왔다!" 모리악의 목소리였다. 우현은 여인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병동을 향해 걸어갔다. 그와 눈이 마주쳤던 처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조심했어야지. 들킬 뻔 했잖아." "응. 하지만 눈이 너무 예뻐서 말이야. 나도 모르게 정신을 빼놓고 말았어." 엄밀히 말하자면 예쁜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무지렁이 시골 처녀가 할 수 있는 표현의 한계였다. 우현의 밀빛 얼굴 한가운데에 박힌 까아만 눈동자는 지고이네르가 울고 갈 정도로 깊었다. 속눈썹이 빽빽하여 또렷한 눈매와 짙은 눈썹이 의지가 강한 인상을 준다면, 흰자위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검은자위는 아기처럼 순진한 느낌을 주었다. 얇게 쌍꺼풀이 진 눈매가 몇 번 깜빡거려지며 웃음을 띨 때면 지나가는 병사부터 시작하여 나이 든 할마시들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미 검은색에 익숙한 지고이네르들이야 가까스로 그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지만, 에코와 티티, 그외 수많은 아이들의 경우로 보아 정말로 자유로운지는 미지수다. 동양인 특유의 신비스러움을 동양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대륙에 발산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죄를 짓고있는 우현, 열 아홉의 겨울이었다. 밤이 깊어졌다. 우현은 레사티나가 노래를 불러대며 조르고있는 캐스터네츠를 만들기 위해 병동 밖으로 나갔다. 별이 무서울 정도로 총총 떠있는 하늘은 에코의 머리카락 만큼이나 검었다. 막사를 만들고 남은 나무토막을 주워든 그는 병동 근처에 주저앉아 단검을 꺼냈다. 진지인지라 불을 밝혀두었다고는 하지만 밤의 본색은 어둠이다. 우현은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나무토막을 향해 자꾸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앞머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것을 본 우현은 자신의 목덜미를 만졌다. 제법 길어진 머리카락이 잡혔다. 우현은 손을 꼽았다. 어느새 11월도 거의 다 지나갔다. 만나기로 약속했던 1월까지는 고작해야 35일 남짓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올해 안으로 만날 수 있을까?' 이번이 안 되면 다음이, 그때도 안 되면 그 다음이 있다. 우현은 그렇게 자신을 달래며 손을 놀렸다. 나무토막이 슬슬 캐스터네츠의 모습을 취해갈 때였다. 우현은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맨 처음 비친 것은 바람에 우아하게 너울거리는 옷자락의 흰빛이었다. 밤의 어둠을 받았음에도 새하얀 그것에서 시선을 올리자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과 수려한 얼굴이 보였다. 하얀 얼굴에 박힌 눈동자가 냉정한 빛을 품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의 신관님?" 우현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대답 없이 우현의 곁에 다가온 신관은 금방이라도 때가 묻을 듯 하얀 옷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흙바닥에 앉았다. 신관의 시선이 우현의 손에 닿았다. "이번에는 다치지 않은 모양이군." 신관의 목소리는 검푸른 밤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낮은 미성이었다.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순간 넋을 잃었던 우현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에 정신을 차렸다. "이래봬도 꽤 잘 하니까요. 한 번의 실수로 판단하면 곤란이었습니다." 묘하게 이상한 말이었다. 신관의 입매가 조금 굳어졌다. 그것을 본 우현은 사람들이 누누이 지적했던 부분, 즉 그가 구사하는 언어체계의 미묘함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표정을 지을 건 또 뭐야?' 소리 없이 투덜거린 그는 괜시리 손을 놀려 나무를 깎았다. 그러자 신관은 빛을 낼 듯 새하얀 손을 뻗어 부드러운 동작으로 나무토막을 빼앗아갔다. 이글거리는 불빛을 받은 나무토막의 결이 거칠게 빛났다. "무엇을 만들고 있지?" "캐스터네츠. 악기입니다." 우현은 그에게서 나무토막을 돌려받으며 대답했다. 그새 향기가 옮은 것인지 나무토막에서는 향긋한 내음이 맡아졌다. 다음 순간 불안해진 우현은 신관을 흘긋 바라보았다. 혹시 불쾌한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싶어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신관의 얼굴은 쾌도 불쾌도 띄우지 않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움직여 신관과의 거리를 벌린 - 그래봐야 5cm 정도였지만 - 우현은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앉아있는 거지?' 우현에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타당한 의문이었다. 물론 이 신관은 단지 밤산책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책을 하다 말고 흙바닥에, 그것도 우현의 곁에 앉을 이유는 없었다. 다시 한 번 신관을 흘긋 올려다 본 그는 다음 순간 눈이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치웠다. 모닥불의 은은한 빛이 비치는 장소에서 확인한 신관의 눈동자는 진한 남빛이었다. 노을이 사라진 직후의 저녁 하늘을 무척이나 닮은 그 색깔은 차갑고도 깊었다. "너는... 이름이 뭐지?" 신관의 담담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러나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우현은 발음을 분명히 하여 대답했다. "우현." "성(姓)은?" "없어요." 신관의 두 번째 물음에 우현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아버지에게서 얻은 성을 쓰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는 우현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한 가족인 지고이네르의 무리에는 성씨의 개념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에게 댈 성도 없다고, 그는 미간에 얇은 주름을 만들며 생각했다. 신관은 그런 우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앳된 얼굴이 만든 주름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서 더 재미있었다. 그의 입술이 미소 비슷한 것을 그리려는 그때, 우현이 타이밍도 좋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남의 이름을 들었으면 자기 이름도 알려야지요. 신관님의 이름은 뭐죠?" 여전히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말이었다. 신관은 금방이라도 실소할 것만 같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팔의 옷자락을 걷었다. 우아한 손가락이 차가운 지면에 닿았다. 우현은 신관의 손가락이 땅 위에 그려내는 글자들을 보며 감탄하고 말았다. 슥슥 소리를 내며 이어진 필체는 흡사 아름다운 문양 같았다. 문제는 그것이 공용어인 이핀트이든, 귀족어인 레판트이든, 신성어인 로퀀트이든 우현이 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단지 이름을 쓰는 것치고는 오랫동안 손가락을 움직이던 신관이 손을 탁탁 털며 허리를 폈다. 우현은 일상의 간단한 동작도 사람에 따라서는 홀릴 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그때 신관이 우현에게 시선을 주었다. 읽어보라는 의미가 명백하게 담긴 눈빛에,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못 읽어요." 이에라 르페리토 대륙의 평민으로서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조금의 허물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현의 앞에 선 신관은 한쪽 눈썹을 우아하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문맹이라는 사실에 안 그래도 움츠러들었던 우현은 더더욱 찌그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신관은 한숨까지 섞어가며 말했다. "배울 생각은 있나?" "생각이야..." 생각이야 넘치도록 있었다. 우현은 아이겐튼 영주관의 서재에서 느꼈던 충격을 떠올리고는 열의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이 전개는 아무리 봐도...?' 우현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신관을 올려다 보았다. 신관은 우현의 눈을 들여다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생각만 있다면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어. 배우겠나?" 우현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눈을 부볐다. 모리악이 묘한 시선을 한 채 물었다. "어딜 가서 그렇게 밤놀이를 하는 거야? 고양이라도 숨겨놨어?" 고양이란 은밀한 연인을 뜻하는 은어였다. 밤마다 병동에서 빠져나가는 우현을 슬쩍 비꼬는 말이었다. 우현은 얼굴을 슬쩍 붉힌 채 웃음으로 대답했다. 차마 글을 몰라 배우는 중이라고 말하기에는 쪽팔림이 너무 컸다. 우현이 신관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한 지 1주일이 지났다. 신관은 전부 해서 50개인 글자를 하루 두 자씩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썼다. 이전에 썼던 것과는 달리 짧은 그것은 우현이 이미 배운 글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읽어봐." 우현은 신관이 이 밤 공부를 은근히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나 재미있어 하는 느낌을 담뿍 담은 어조로 말하는데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그의 말을 '읽어봐'라고 듣고 '읽지 못하면 가만히 안 두겠다'고 해석한 우현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되돌려주었다. "전부 배운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으음... 잠깐만요. 그러니까..." 우현은 글자의 모양을 살폈다. 땅에 졸로리 늘어선 50개의 글자를 처음 보았을 때, 우현은 이것을 언제 다 외우나 걱정을 했었다. 아주 조금씩만 다를 뿐인 그 글자들은 마구마구 헷갈리라는 의도가 강력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입에서 끙, 하는 신음이 나왔다. 신관은 잔뜩 망설이는 우현을 보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흘금 곁눈질한 우현은 그의 의중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벌을 줄까.' 우현은 으아악 하고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키고는 열심히 글자를 살폈다. 신관의 단정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절대절명의 순간, 우현은 가까스로 외칠 수 있었다. "이! 맞죠?!" 신관의 열렸던 입술이 미소로 다물어진다 싶었다. 그것은 곧 심술궂게 움직여 이렇게 말했다. "그럼 다음은?" "으, 으음... 유? 아니 아니, 잠깐. 그게 아니라..."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만약 우현이 틀린 글자를 말하면 신관은 그를 끌고 가 12월의 시냇물에 밀어버릴 것이었다. 어서 말해보라는 듯한 얼굴의 신관을 본 우현이 작게 투덜거렸다. "새디스트." "그게 다음 글자들인가? 조금 많은 것 같은데?" "자, 잠깐! 심술궂게 굴지 좀 말아요, 거!" 투덜거리며 한참을 끙끙댄 우현은 간신히 두 번째 글자를 읽어낼 수 있었다. "...스? 마, 맞아요?" 신관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였다. 우현은 뛸 듯이 기뻐하며 마지막 글자에 도전했다. 그러나 도대체 이것이 '무'인지 '다'인지 '드'인지 '서'인지 헷갈린다. 글자의 획과 삐침의 방향을 살핀 우현이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다...가 아니라! 아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잠시만... 으음..." 신관은 머리를 굴리는 우현을 보며 낮게 웃었다. 쿡, 하는 소리를 들은 우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남빛 눈매가 너무나 다정해 보여, 우현은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다음 글자가 영 나오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긴 신관이 고개를 돌려 우현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우현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돌렸다. 쑥스러운 마음이 투덜거림으로 표현되었다. "이거 혹시 레판트나 로퀀트 아닌가요? 왜 이리 복잡해?" "정말 로퀀트로 써줄까?"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는 무뚝뚝한 것보다 훨씬 두렵다. 우현은 땅에 코를 박을 듯 얼굴을 숙였다. 전화위복이라, 그 행동이 오히려 글자 해독에는 도움을 주었다. 그는 기쁨에 가득 차 고개를 들었다. "드! 맞죠!" "그래, 맞다." 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이 그 사소한 동작을 보며 떠올린 것은 물에 빠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감개가 무량하여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던 그는 다음 순간 발음을 굴려보았다. "이스드? 이게 당신 이름인가요?" 단조로운 소리들로 이루어진 이름은 그러나 하나가 되자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이스드는 자신의 이름을 연신 발음해보는 우현을 보고는 조금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지만 저번에는 분명 더 긴 이름이었던 것 비슷한데." 이름을 읽어내고 자신만만해진 우현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있었다. 이스드는 피식 웃었다. "전부 쓰면 읽을 수나 있을까?"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우현은 이스드의 웃음에 담긴 놀리는 기색을 느끼고 발끈했다. 그것을 본 이스드는 다시 한 번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반달을 닮은 그것이 너무나 상냥해 보여서, 우현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라는 것이 어젯밤의 일이었다. 우현의 얼굴에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붉음이 번졌다. 마침 곁을 지나가던 모리악이 우현의 머리를 한 대 쳤다. 상당한 강도였다. "윽! 모리악 선생님? 왜..." 우현은 머리를 감싸쥔 채 투덜거렸다. 모리악은 혀를 츳츳 찼다. "상황을 좀 살펴가며 생각에 빠져!" 그 말을 들은 우현은 주변을 살폈다. 여기저기 눕혀진 부상자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머쓱한 표정을 지은 우현은 붕대와 약을 챙겨들었다. 모리악이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자기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는 있는 건지, 원." 오후 즈음이 되자 잠깐 짬이 났다. 우현은 완성된 캐스터네츠를 가지고 일어섰다.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안 그래도 호시탐탐 치료용 술을 노리는 중인 모리악은 우현의 휴식에 쌍수 들어 환영했다. 우현이 '건드리지 마십시오!'라고 엄포를 놓는다 한들 들을 모리악이 아니다. 술을 한 잔 따라 든 그는 병동의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겹구만. 이놈의 쓸모 없는 전쟁, 언제나 끝이 날꺼나." 그때 그의 눈에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가는 우현이 보였다. 조금은 이상한, 그러나 성실하고 바지런해 귀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그를 본 모리악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20대 초반인 딸이 생각났다. '전쟁이 끝나고 저 녀석에게 갈 데가 없다면 내 집에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우현은 베슬렌의 막사가 있는 곳을 향해 잰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몇 번 보아 얼굴을 익힌 보초가 반갑게 인사하고는 레사티나를 불러주었다. 그녀가 막사 밖으로 걸어나오는 것을 본 우현은 눈을 크게 떴다. "레사티나, 예쁘다!" 지고이네르의 것과는 다른 모양의 진녹색 드레스는 레사티나의 올리브색 피부와 검은머리에 잘 어울렸다. 길게 흩어져 내린 머리카락을 화려한 동작으로 넘긴 그녀는 방울이 울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베슬렌 님의 선물이야. 어울려?" "응, 진짜 어울려! 아, 참. 이걸 전해주려고 왔어." "어머, 완성했구나?" 두 사람이 하는 양을 본 보초가 웃었다. 아무리 같은 지고이네르라지만 남자다. 베슬렌의 애첩인 레사티나에게 함부로 접근시키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눈을 빛내며 '예쁘다'고 외치는 우현은 마치 누이를 따르는 동생과도 같았다. 보초가 농을 걸었다. "어이, 꼬마? 언제까지 그렇게 누나에게 매달려있을 거냐? 아니지. 너 물건은 제대로 달려있는 거냐? 그렇게 가늘가늘해서야 어디 사내 구실 하겠어?" "윽! 서, 성희롱입니다, 성희롱!" 주먹까지 움켜쥔 우현이 반박했다. 파르르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놀리는 재미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우현이었다. 보초가 껄껄 웃으며 만져보네 어쩌네 너스레를 떨 때였다. "불이야! 불이 났다!"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굿간에서도 불길이 확 하고 일었다. 언제 풀린 것인지 모를 고삐를 흔들며 달리는 말은 불에 놀라 더더욱 그 기세를 험악하게 하고 있었다. 몇 개나 치솟은 검은 연기의 기둥을 본 우현은 지난 기습을 떠올리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2장 해후 -7- 하스티아 군의 진지는 뒤쪽에 산을 두고 있었는데, 지난번의 기습이 야음을 틈탄 것이었다면 이번의 것은 그 산을 타고 이루어졌다. 워낙 험준한 산이라 설마 저것을 넘어오랴는 생각으로 방비를 소홀히 하였는데 그 방심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되고만 것이다. "진정하고 불을 꺼라! 침입한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침착하게 움직여라!" 참모용 막사에서 뛰어나온 베슬렌이 목청껏 외쳤다. 그러나 한 번 수라장이 된 진지는 도무지 수습이 되지 않았다. 천을 둘러 만든 막사는 단지 불티가 닿는 것만으로도 쉽사리 불타올랐으며 풀려난 말들은 불길에 놀라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간혹 시냇물을 퍼오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개개의 양동이로 끄기에는 불길이 지나치게 컸다. 몸에 불이 붙은 병사들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뛰고 구르는 통에 불길은 점점 퍼져나갔다. 베슬렌은 흘긋 고개를 돌렸다. 연기로 이루어진 검은 기둥이 곳곳에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막사가 있는 방향을 한 번 본 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걸음은 금방이라도 그쪽을 향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진지 여기저기에서는 비명과 신음이 울리고 있었다. 기습의 목적은 단지 화재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검을 뽑아든 베슬렌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함성을 들었다. 그때 우현과 레사티나는 보초에게 이끌려 달리고 있었다. 높은 사람들의 막사가 모여있는 이곳이 가장 위험하다는 보초의 말이 있었던 것이다. 경험 많은 병사의 판단은 현명한 것이었다. 그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검을 든 사람들 몇이 그 부근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막사를 뒤져 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쳐죽이기 시작했다. 우현들이 적병과 마주친 것은 그로부터 잠시 지난 후였다. 그들이 만난 것은 기습을 틈타 진격한 아르무드의 병사들이었다. 레사티나와 시선을 교차한 우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그들만이 아니라 불을 끄던 아군도 있었다. 그들의 우왕좌왕하던 분위기는 금세 일변하여, 양국의 병사들은 날이 선 검을 빼어들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우현도 레사티나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면 터질 분위기에 질려 차마 발을 뗄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어느 쪽이 먼저 함성을 질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차 오른 살기를 헤치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우현은 한 손으로는 검을 휘두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레사티나를 등뒤로 잡아당겨 보호했다. 한동안 잡지 않았던 검은 순간 손에 설게 느껴졌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그는 곧 익숙하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레사티나는 그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짐덩어리는 싫은데.' 눈을 벌겋게 물들인 병사 하나가 레사티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신음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그것을 들은 우현은 자신이 상대하던 사람을 힘껏 떨쳐내고는 새로운 사람을 맞아 검을 움직였다. 그렇게 몇 번 검이 부딪히는 사이에 원래의 상대가 달려들었다. 상대의 검이 우현의 옆구리로 향했다. 그는 '갑옷이 막겠지'라고 생각하며 그 검을 쳐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병동에서 움직이기에 갑옷은 전혀 쓸모 없이 방해만 되는 것이라,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갑옷을 입고있지 않았다. "우현!" 레사티나가 비명을 닮은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현은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곳이 검집인 양, 서슬이 퍼런 검은 그의 옆구리에 단단히 박혀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보았다. 고작 해야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동년배의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얼굴이 살의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에서 다음 행동을 예측한 우현은 소년의 손을 움켜쥐었다. 검을 움직여 우현의 허리를 가르려던 소년은 잇사이로 욕설을 내뱉으며 손을 잡아빼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현의 검이 날아 그의 목을 쓸었다. "우현!" 소년의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쓰러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레사티나는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우현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부축하려는 찰나, 우현은 화끈한 통증을 참지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년이 쓰러지며 후려친 검자루가 상처를 크게 헤집었던 것이다. 상처에서 퍼진 열기가 핏줄을 타고 올라와 머리까지 잠식해 들어갔다. "크흑! 읏, 흐윽..." 우현은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머리가 땅에 세게 부딪히고 땀에 젖은 뺨이 흙모래에 긁혔지만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새하얀 세상이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통증은 그마저도 하지 못하게 했다. "우, 우현! 움직이지 마! 어, 어서 검을 뽑아야..." 레사티나는 피가 줄줄 흐르는 상처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우현은 그녀가 검을 건드리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몇 개나 되는 잔영을 가진 레사티나가 보였다. "가만히 있어, 우현! 지금 검을 뽑을 테니까!" 레사티나가 잇사이로 내뱉듯 외쳤다. 우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말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무엇인가 하리라는 것은 깨달을 수 있었다. 레사티나의 손이 닿은 검이 작게 흔들리고 그에 따라 우현도 신음했다. 그러나 그것은 뒤이어진 통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불에 덴 것보다 더한 화끈함이 상처를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우현은 참았던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우, 우현?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아. 소리 없이 외치며 눈을 뜬 우현의 시야에 높이 치켜진 검이 보였다. 그러나 레사티나는 목전까지 닥친 위험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그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레사티나는. 우현은 뜨겁고 혼미한 정신의 끄트머리로 아직 손에 들린 채인 검을 의식했다. "우...!" 옷을 찢어 지혈을 하려던 레사티나는 갑작스레 움직인 우현을 보며 몸을 경직했다. 그와 동시에 수박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그녀의 머리 위에 몇 방울의 뜨끈한 액체가 떨어져 내렸다. "으으으....윽!" 그 액체의 정체를 짐작한 레사티나가 진저리를 쳤다. 비명을 간신히 삼킨 그녀의 귀에 묵직한 것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쭈뼛쭈뼛 고개를 돌렸다. 검에 머리를 꿰뚫린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옆구리에서 피를 쏟으며 널부러진 우현을 보았다. 레사티나의 안에서 과거 에코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분노가 솟구쳤다. "이...!" 우현은 무어라 크게 소리를 지르는 레사티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뒤로 사람들이 뛰어가는 것도,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도, 검은 연기도 전부 볼륨을 죽인 영화처럼 느껴졌다. 심지어는 상처의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해.' 그렇지만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검이 빠져 나온 자리에서는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얼른 지혈하지 않으면 출혈과다로 죽을 것이 뻔했다. 그렇지만 우현은 손도 발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 어떻게든 되려나.' 태평스러운 생각을 하는 우현의 코끝을 스친 향기가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맡아 익숙해진 그것을 찾아 눈동자를 데룩 굴렸다. 곧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펄럭거리는 하얀 옷자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주하고 지저분하며 연기와 피로 얼룩진 전장에서 보는 순백색은 너무나도 청신했다. 조금 더 눈을 굴린 우현은 무엇에 그리도 화가 났는지 잔뜩 굳어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남빛...이네.' 낮에 본 이스드의 머리카락은 눈동자와 똑같이 진한 남색이었다. 우현은 이스드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가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땀과 흙먼지, 그리고 피로 얼룩진 뺨에 빗방울이 하나 떨어져 톡 소리를 냈다. 그것만이 묘하게 큰 소리로 들린다고 생각하며, 그는 결국 정신을 잃었다. 불은 갑작스레 내린 겨울비 덕분으로 전부 꺼졌다. 위스 자작과 베슬렌의 지휘 아래 안정을 되찾은 하스티아 군은 아르무드 군을 맞아 있는 힘껏 싸웠다. 아르무드 군은 곧 자신들의 진지로 물러갔지만 하스티아 군이 입은 손해는 헤아릴 수 없었다. 병동은 이미 부상자로 가득했다. 화상에 신음하는 자, 검에 찔린 자, 달리는 말에 깔려 뼈가 부서진 자. 부상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상처의 정도가 무겁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눈코 뜰 새 없이 환자를 돌보던 모리악은 구석에 있는 방을 향해 흘긋 시선을 주었다. "빌어먹을 녀석. 이놈들을 나 혼자 어떻게 다 치료하라고 자빠져 잠만 자고 있담." 우현이 들었더라면 모진 말 이면에 숨겨져 있는 걱정에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소를 지어줄 그는 지금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모리악은 부상병의 잘려나간 다리에 술을 들이부으며 긴 한숨을 쉬었다. 우현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얕은 숨만을 간신히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굳게 닫힌 눈꺼풀은 미동도 없었다. 핏기를 잃은 그의 뺨에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와 닿았다. 잠시 뺨 위에 머물렀던 손가락은 곧 천천히 움직여 우현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었다. "어리석어." 조금의 흔들림도 품지 않은 냉정한 목소리였다. 사락, 하는 소리와 함께 남빛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드리워졌다. 우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댄 이스드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이 아니더라도, 금방이라도 꺼질 듯 몰아쉬는 숨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우현의 시간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옆구리에 깊숙이 파고든 검은 살만 상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검을 꽂은 채 움직이는 바람에 내장이 완전히 상해버렸고, 검을 뽑은 채 움직이는 바람에 피가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이대로 놔두면 정말로 죽겠지." 그것은 이 뜻도 모를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일까, 아니면...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우현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에서 나온 엷은 빛이 우현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눈에 띄게 안정되어 가는 얼굴을 본 이스드 역시 안색을 부드럽게 했다.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치료가 끝난 것이다. 우현의 허리에서 손을 뗀 이스드는 이번에는 목덜미를 짚었다. 살아있는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고동이 생생했다. "...하아." 그때 우현이 단 한 번 숨을 크게 내쉬었다. 주변의 공기가 술렁였다. 이스드는 방안의 공기가 우현에게 몰려드는 것을 불가사의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한데 모인 공기는 전부 우현의 눈꺼풀 위에 내려앉았다. 무겁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이스드는 천천히 떨리는 눈꺼풀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내려앉은 공기를 밀어 올리듯 힘겹게 움직인 그것을 따라 긴 속눈썹 역시 파르르 떨렸다. 인간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이만큼의 수고가 필요한 것인가, 라고 생각한 이스드는 무심코 감탄했다. 미세한 근육 가닥가닥마저도 이 단 하나의 동작을 위해 존재하는 듯 했다. 우현의 얼굴에서 유난히 뚜렷한 선을 그리는 눈이 움직이자 표정 전체가 살아났다. 다소 굵은 편인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 순간 우현의 주변에 모여들었던 공기가 확 하고 주변에 퍼져나가며 새카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우현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 속에서 아버지는 작은 아파트의 수위가 되어 있었고 어머니는 식당 설거지 일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가 살던 단칸방은 꿈에서는 부부의 차지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부부는 인형에 눈을 붙이고 머리핀에 큐빅을 박았다. 문득 어머니가 말했다. 「우현이, 이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내일은 젊은애들이 많이 다니는 유흥가 쪽에 가서 전단지를 붙여야겠어.」 「경찰에서는 연락이 있어?」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긴 한숨이 부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것은, 그 한숨은, 그 익숙한 언어는 우현에게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 그는 손을 뻗었으나 그들이 있는 곳까지는 닿지 않았다. 무척 가까워 보이는데도, 지금이라도 만져질 것 같은데도. 그의 눈앞이 느리게 흐려지며 검붉게 물들었다. 그에 따라 부모의 모습도 지워졌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선 그는 안타까움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가를 떠올렸다. 꿈은 욕망의 표출이라고 했던가. 늘 생각하고 바라는 것은 꿈에 나오고 만다. 그것이 아무리 꼭꼭 감춰둔 무의식 너머의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자신을 속일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는 법이니까. 바라고 있었다. 실직을 했어도 다시 기운을 차린 아버지를,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있어주는 어머니를, 그리고 이렇게 멀리 떨어진 자신을 찾아줄 두 사람을. '돌아가고 싶어.' 단지 장소만의 이동은 아니었다. 우현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은 장소와 더불어 시간의 움직임이었다. 다시 한 번 과거로 돌아가 행복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과거로 돌아가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덧없는, 그러나 그만큼 간절한 바램이었다. '아아, 그래.' 우현은 얼굴을 가렸다. 과거라고 해도 힘들었던 부분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돌아가고 싶은 때는 새롭게 만들어갈 여지가 있는 그런 과거였다. 욕심이 지나친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원한다 해도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소용없잖아.」 누군가가 말했다. 익숙한 언어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담겨있는 조롱조차 익숙했다. 「네가 죽였으니까. 아버지를 죽였잖아? 돌아간다 해도 네놈은 살인자야. 가족이 존재하는 행복? 정말로 그런 것을 바랬다면 좀 더 참았겠지. 하지만 너는 단지 해방되고 싶었을 뿐이잖아. 너의 행복을 바랬을 뿐이잖아.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것 따위, 사실은 원하지도 않았으면서. 네가 바라는 것은 모두가 행복해져서 네게 더 이상의 불행을 주지 않아도 되는 그런 상황이었지. 안 그래?」 그 목소리는 잠시 킬킬대고 웃었다. 그것에 화가 난 우현은 반박하듯 생각했다. '거기서 더 참아야 했다고 말하는 거야? 나는 할만큼 했어!' 「그건 네 생각일 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 그 세상에서 너는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일 뿐이야. 사람들은 결과를 사랑하고 과정을 기피하지. 너를 알고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왜? 조금 시간이 지나봐. 그들이 언제까지 네 좋은 면을 기억해줄 거라고 생각해?」 우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목소리는 이제 귓가에 닿아있었다. 「끝내주게 이기적이구나.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주제에, 그것도 힘든 과거는 싫어? 도망도 이 정도면 국보급이지. 아버지의 명줄을 끊은 게 누군데 어떻게 그 아버지가 자신에게 자상하게 대해주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냐? 낯짝이 두꺼운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너. 죽은 사람에게 가서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고 말해보지 그래?」 우현은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소리는 가차없이 그를 따라왔다. 「하지만 사실은 우월감에 차있었잖아. 이만큼의 고난을 나는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안 그래? 정말 죽여주는데, 너. 비틀린 기쁨을 느끼는 방법도 가지가지잖아.」 '그만 해! 닥쳐!' 「어차피 이제 할 말도 없다.」 끝까지 조롱하는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것이었다. 매일매일 들어왔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었다. 우현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얼굴을 세상에 드러낼 수가 없었다. 자신 안의 가장 추한 부분이 파헤쳐진다는 것은 마치 할복이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되돌릴 수는 없잖아.'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2장 해후 -8- 이스드는 눈을 뜬 우현이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비릿한 그것은 자조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가 익히 보아온 우현의 쓴웃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이기에 더욱 통렬하게 다가들곤 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우현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스드는 손을 움직여 우현의 이마를 짚었다. 우현은 그제서야 제대로 정신이 드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스..." 쇳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스드가 손을 저었다. "말하지 말아라." 우현은 그의 목소리에 깃들인 분노를 읽고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고 한 마디 할 것 같았던 이스드는 의외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느낌만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우현은 아직도 몽롱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스드는 눈을 무겁게 감는 우현을 향해 기묘한 시선을 던졌다. 어쩌면 그의 뺨에 드리워진 속눈썹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사소한, 그러나 이제껏 단 한 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들이 너무나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기분은 제법 신선했고 또 제법 더러웠다. 어째서, 라는 질문은 이미 늦은 것일지도 몰랐다. "너는... 지금 행복한가?" 그것은 우현이 익히 들었던 바 있는 질문이었다. 그는 눈을 뜨고 이스드의 남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행복한 걸까? 이렇게 살아있잖아. 분명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텐데 말이야. 행복한 걸까? 별로 아프지도 않아. 이스드가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행복한 걸까? 이곳에 와서 에코와 티티를 만났어. 당연히... 우현의 시계가 일그러졌다. 만약 팔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얼굴을 가렸을 것이다. 이를 악물어 눈물을 참은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자는 것이 좋겠다." 그 말을 듣자 까무룩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잠결에 가물가물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를 만났다는 것은 비밀이야." 우현은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스드를 보았던 것도 같은데, 꿈이었나?' 꿈이라는 단어는 우현에게 또 다른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참혹함에 쓴웃음을 지은 그는 얼굴을 가렸다. 잠시 그렇게 있던 그는 뒤틀리고 아파야할 옆구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옷자락을 들춰보았다. 옆구리는 깨끗했다. 「꿈이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 이마에 닿은 감촉은 진짜였던 것도 같았다. 우현은 얼굴을 슬쩍 붉히며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이스드." 그는 들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현은 땀과 굳은 피로 꼬질꼬질해진 옷을 갈아입은 후 방을 나섰다. 병동의 낡은 문이 끼이익 거친 소리를 내었다. 그것을 들은 모리악은 눈을 휘둥그래 뜬 채 그를 돌아보았다. "...우현?" 모리악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어조로 우현을 불렀다. 우현은 조금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들고있던 약과 붕대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은 모리악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너... 너... 이게 도대체 어떻게... 괜찮은 거냐?" 우현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모리악은 그의 검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고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눈이었다. 얼굴이 조금 해쓱하다고 해도, 몸을 조금 비틀거리고 있다고 해도 이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너, 정말로 마법을 쓸 줄 아는 거 아니냐?" 미심쩍다는 듯 물어오는 모리악을 보며 한 번 웃은 우현은 그러나 곧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채근하는 모리악에게 가볍게 대답했다. "그건 아니지만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어요. 비밀이걸랑요." 잠시 우현을 바라본 모리악은 검은 눈동자에 음습한 부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몸이 다 나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비밀이라고 말하는 데야 굳이 캐물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마법이 아니라지 않는가. 몸을 돌린 모리악은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뭘 해? 얼른 움직이지 않고. 네가 쿨쿨 잠만 자고 있는 동안 나 혼자 이 많은 사람들을 도맡아 치료했다, 이 녀석아!" 우현은 짐짓 목을 움츠리며 슬며시 웃었다. 부상자는 아직도 끊이지 않고 들어오고 있었다. 병동으로는 자리가 모자라 흙바닥에 담요를 깔고 부상병을 눕혀야만 했다. 정신없이 움직이던 우현은 그들 중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디시트?" 되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숨을 깔딱깔딱 쉬고있는 그의 얼굴에서 이제껏 몇 번이나 보아 눈에 익은 죽음의 기운을 목격한 우현은 이를 악물었다. 에피서스에 온 지고이네르는 전부 죽고, 남은 것은 레사티나와 디시트, 그리고 우현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단 두 사람만이 남게 될지 모르게 되었다. "디시트?" 우현은 무릎을 꿇고 앉아 디시트의 손을 잡았다.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린 그는 그러나 미동도 하지 않았다. 초겨울의 햇살이 엷은 황금빛으로 드리워져 사람들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온화한 빛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 디시트가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 "디시트." 디시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 하는 숨결에 실린 것은 단지 공기만은 아닐 것이다. 우현은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생명력이 바람에 담겨 꺼트려지는 것을 보며 디시트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이러한 것이라면, 그런 깨달음 따위는 필요 없었다. 아직도 화재의 잔재가 남은 공기는 매캐했다. 치료를 위한 술을 얻으러 갔던 우현은 베슬렌의 막사가 완전히 타버린 것을 보며 입을 벌렸다. 보초의 채근으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자신들 역시 불길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타고남은 잔해는 불의 손길이 얼마나 극성스러웠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곳에서 무얼 하고 있나." 잔뜩 지친 목소리였다. 우현은 몸을 돌렸다. 베슬렌이 서있었다. 피곤으로 잔뜩 물든 얼굴을 한 그는 우현을 알아보고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레사티나의 말로는 크게 다쳤다고 하더니 괜찮아 보이는군." 우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베슬렌 역시 별로 캐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막사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레사티나를 구해주었다고 들었네. 다친 와중에서도 네 걱정을 하고 있었어." "레사티나가 다쳤습니까?!" 생각하면 그가 아픈 것을 알면서도 와보지 않을 레사티나가 아니었다. 베슬렌은 다급히 되묻는 우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 크게 다친 것은 아니다. 회복되어가고 있으니 걱정은 말게." 베슬렌의 목소리에서 강한 밀어냄을 느낀 우현은 새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제 전쟁은 끝이야. 사람이 죽는 것을 보다못한 라벤다에서 발벗고 나섰으니 말이야. 이제 히쉬미른에서 회담을 주재할 사자가 오겠지. 그렇게 되면 너희 지고이네르도 각자의 길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단." 베슬렌은 굉장히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매와도 닮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챈 우현은 서늘한 시선을 받으며 조금 어리둥절해 했다. 그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본 베슬렌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빗겼다. "레사티나는 내가 수도로 데려갈 것이다. 너와 그녀의 돈독한 관계도 이쯤에서 끝이 나겠지." 그가 무엇을 경계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우현은 조금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래도 이 수프는 밑이 깊은 접시에 담긴 모양이었다. "저에게 레사티나는 누이와도 같습니다." "그녀도 그렇게 말했지." 우현은 머리를 한 번 긁적거리고는 변명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지금의 베슬렌은 우현이 무엇을 말해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우현은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베슬렌을 향해 돌아섰다. 이제 한동안 레사티나와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워낙 매력적인데다가 머리가 좋은 레사티나이니 어디서든 잘 해내겠지만 헤어짐의 아쉬움과 더불어 걱정이 샘솟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나게 해주실 수는 없겠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베슬렌의 눈썹이 조금 실룩거렸다. 우현은 조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레사티나의 부탁이었다지만 그동안 여러 가지로 배려할 것임에 감사합니다. 레사티나를 잘 부탁드려요." 숙인 머리 위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현은 고개를 들었다. 경계를 채 풀지 않아 차가운, 그러나 조금은 누그러진 얼굴의 베슬렌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도 말했지만 너는 꽤나 이상한 이핀트를 사용하는군.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녀는 잘 지낼 것이다. 아아, 그래. 만약 너희가 정말로 남매의 정을 지닌 것뿐이라면 수도에 올 일이 생겼을 때 나를 찾아라. 그때에는 만나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만날 수 있게 해준다'가 아니라 '만나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분이 굉장할지도 모른다. 한편 레사티나가 자신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퍼트린 것인지를 생각하며 조금 볼이 부은 우현이었다. 그것을 본 베슬렌은 다시 한 번 웃었다. 그 역시 이 기묘한 피부색의 지고이네르를 내내 주목하고 있었다. 병동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 중에서는 우현이 마법을 부릴 줄 안다고까지 말하는 자도 있었다. 심상치 않은 상처를 입고도 며칠 사이에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을 보면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이에라 르페리토 대륙의 사람이라 사악한 것을 배척하는 베슬렌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 탓인지, 예감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병동으로 돌아온 우현은 환자와 씨름 중인 모리악을 거들며 물었다. "모리악 선생님, 라벤다가 뭐죠?" 베슬렌의 이야기 도중 나온 그 단어는 어떤 지명인 것 같았다. 모리악은 우현이 건네주는 약병을 받으며 대답했다. "법황령이지. 밖에 나갔다가 소문이라도 들은 게냐?" "네. 라벤다가 나섰다고 들었어요. 히쉬미른에서 사자가 온다는 말도." 히쉬미른이란 하스티아와 아르무드 두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였다. 모리악은 이미 알고있었는지 붕대를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히쉬미른에 있는 대주교가 와서 회담을 주재하겠지. 법황의 대리자로 말이야." 법황이란 창조신 에다마트가 선택한 자, 신의 대리인이다. 이에라 르페리토 대륙에 펼쳐진 에다마트의 교세를 생각했을 때에 법황의 지위는 국왕의 위에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법'황'과 국'왕'. 지칭하는 단어에서부터 이미 지위의 차이가 나버린다. "다행이네요. 전쟁이 끝날 테니까." 무심코 말한 우현은 모리악의 시선이 잠시 머뭇거리다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보았다. 잿빛 눈동자에 감도는 주저함을 본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할 말 있으세요?" 거친 입과 솔직하지 못한 성격의 소유자인 모리악이 우현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주저한 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치료를 끝낸 모리악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건성인 듯 물었다. "전쟁이 끝나면 갈 곳은 있냐?" 우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갈 곳은 있었지만 지금은 벌써 12월이었다. 우현이 준 붕대를 건네 받은 모리악이 다시 건성인 듯 물었다. "갈 곳 없으면 내 집에나 와라. 딸네미가 여기사인지 뭔지가 된답시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통에 조수가 없어." 그제서야 모리악이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린 우현은 조금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는 흔들리려는 시야를 얼른 다잡으며 말했다. "감사하지만... 엘 티에르 숲에 가야 해요. 에코 마마와 약속했어요. 1월에 그곳에서 만나기로." "엘 티에르 숲에서 1월에? 그렇지. 너는 지고이네르라고 했었지." 모리악은 피가 묻은 손을 씻으며 중얼거렸다. 상심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말투였다. 그러나 곧 그는 입을 다물고 날짜를 헤아렸다. "1월이라고 했냐? 얼마 안 남았잖아! 여기서 지고이네르의 숲까지 얼마가 걸리는데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내년이 안 되면 내후년에 만나기로 했어요. 이번에는 틀렸지만..." "바보로다! 도대체 숲 근처에서 뭘 어떻게 하고 살아가겠다는 거야! 그것도 1년씩이나!" 우현의 머리를 한 번 쿡 쥐어박은 모리악은 다시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날 따라와. 지고이네르의 숲은 내 집에서 멀지 않으니까." 우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모리악은 화가 난다는 듯 덧붙였다. "도대체 저 얼간이를 어디에 부려먹나, 그래?" 자신은 운이 좋다. 우현은 가슴을 타고 올라오는 따스한 기운을 느끼며 말했다. "모리악 선생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모리악은 우현을 흘금 보더니 잰걸음을 옮겨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 무뚝뚝한 뒷모습은 어딘지 쑥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행복하냐고 물었던가. 이스드의 나직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정말로 잘은 모르겠지만 운이 좋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했다. 행운과 행복은 엄연히 다른 것이지만 그래도 행운이 많이 쌓이면 조금은 행복해 질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배려해준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행복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는데, 행운이 쌓이게 되면 충분히 행복해질 것 같았다. 우현은 얼른 모리악에게 달려가 그가 들고있는 약병을 빼앗아 들고 거들기 시작했다. 제 2장 終結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3장 온기 짙은 유리, 장미의 가시 -1- 12월이 끝나고 열흘간의 「암흑의 주」마저 지나자 새해가 밝았다. 1월 하고도 열 여섯 번째의 날, 우현은 화려한 일행이 요란뻑적지근한 소리를 내며 에피서스에 도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히쉬미른에서 온 대주교는 초라한 에피서스를 한 번 훑어보고는 숙소로 옮겨갔다. 대주교의 일행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끝나나 보다. 이제야 실감이 나네." 용병 출신으로, 지난 번 기습에서 왼쪽 팔을 잃은 루드칸이 말했다. 모두 그의 말에 동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눈을 쏟을 듯 흐려진 하늘이 있었다. 기온이 따뜻했음인지 눈은 내리지 않고 비가 주륵주륵 내렸다. 하쉬미른 주재 대주교의 이름으로 열린 회담은 비가 내리는 중에 진행되었다. 병동의 사람들은 비 특유의 비린내를 맡으며 저마다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 전쟁은 하스티아의 패배였다. 라벤다에서 나서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기습이 있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법황은 에피서스에서 더 이상의 살생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어길 정도로 간이 부은 사람은 대륙에 없었다. 루드칸이 경쾌하게 말했다. "신관은 전부 고리타분한 사람 아니면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들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신관들의 우두머리께 구원을 받았으니 이걸 어쩌나. 앞으로 신관을 보면 꼬박꼬박 인사를 해야겠어. 어이, 꼬마야. 술 좀 가져와라. 이렇게 좋은 날 축배를 들어야지." "없어요." 우현은 딱 잘라 말하며 그의 상처를 감은 붕대를 풀었다. 루드칸이 이죽거리고 웃었다. "거짓말하지 마. 치료용으로 들어온 술이 있잖아. 쩨쩨하게 굴지 말고 한 상자 풀라고." "마실 술은 없어요. 얌전히 있지 않으면 아프게 약을 발라버릴 지도 몰라요. 퍽, 팍, 후려칠지도." 상태가 호전되어 가는 사람들은 우현에게 짓궂게 말을 걸어오곤 했다. 그 농의 절반이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적당한 선에서 응수해 주었다. 말수가 늘은 덕분인지 그의 언어는 차츰 안정되어 갔다. 그가 실수하면 왁자하게 웃어버리는 사람들 덕분이라 전혀 고맙지 않았지만. "어이구, 무서워라." 두 번째 기습 이전까지만 해도 우현이 마주쳤던 용병은 무시무시했던 여자 단 하나 뿐이었다. 게다가 전쟁터에서 용병을 만나면 피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던 그는 용병을 피에 절은 미치광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동에서 만나게 된 용병들은 조금 걸걸한 성격의 사람들일뿐이었다. 우현은 목을 움츠리며 '무섭네, 무서워'를 연발하는 루드칸의 팔을 잡아당겨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갈아주었다. 그 손놀림을 눈여겨 본 루드칸이 말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놔두기 아깝단 말이야. 어이, 꼬마. 우리 용병단에 올 생각 없어? 대우는 나쁘지 않게 해줄게. 소개비로 내가 6정도 떼고 네가 4정도 가져가면..." "내 조수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지 말았으면 좋겠군." 근처에 있던 모리악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루드칸은 얼른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돌리더니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괴팍한 늙은이 밑에 있는 것보다는 우리 용병단에 와서 귀염받는 편이 훨씬 나을텐데 말이야. 이 정도 붕대감기에 이 정도 얼굴이면 분명 어딜 가도..." 모리악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우현은 일어나며 짐짓 점잖게 말했다. "전부 루드칸처럼 우락부락한 아저씨들뿐일텐데 귀염받기 무서워서 어디 가겠어요?" "뭐야? 나는 아직 스물 아홉 살이야! 이 반들반들한 피부와 잘생긴 동안의 어디가 아저씨라는 거야! 어이, 꼬마! 이리 안 와? 잡히면 죽었어!" 병동 안에 쾌활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우현은 얼른 다른 환자에게로 도망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기애애한 듯 했지만 이것은 한껏 예민해진 신경을 잠재우기 위한 행동이었다. 전장에 익숙해진 신경은 아주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 놀라 날카롭게 반응하곤 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이었다. 그것의 해소가 짓궂은 대화를 나누는 이유의 나머지 반이었다. 전투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용병들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해하던 일반 병사들의 신경이 더 날카롭다는 것은 역시 경험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용병인 루드칸이었다. 그는 용병 중에서도 특출나게 쾌활하여 병사들을 안정시키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었다. 술을 달라고 지분거리지만 우현은 사실 루드칸이 싸구려 증류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팔을 하나 잃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 우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루드칸을 흘긋거렸다. 루드칸이 웃었다. "어이, 그런 눈으로 보면 실례야. 난 아직 안 죽었다고." 찔끔한 우현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정신의 넓이가 다르다는 생각이 그를 조금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루드칸은 여전히 쾌활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팔이 정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함께 용병단으로 가면 돼. 내 전용 의원으로..." "회담이 끝난 모양이야!" 창가에 붙어있던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창가에 몰려들었다. "이렇게 빠르게 끝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양쪽 다 급했나 보네?" "법황이 그만큼 단호하게 나왔다는 말이 되지." 루드칸이 조금 차갑게 응수했다. 우현은 그것을 귓등으로 들으며, 회담이 있던 건물에서 걸어나오는 무리들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스드가 대주교와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대문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얼핏 새하얀 옷자락이 흔들리는 것을 본 그는 창문에 코를 박을 듯 다가섰다. "어이, 꼬마. 밖에서 보면 흉하다." 루드칸이 목덜미를 잡아당기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코를 박았을 것이다. 잠시 흰옷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우현은 이스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섭섭한 심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료를 받았던 날, 가물가물한 정신 너머로 보았던 것이 이스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혹시 날 치료한 것 때문에 높은 사람들에게 안 좋은 말을 들었던 걸까?' 아주 신빙성 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걱정으로 주름이 잡힌 우현의 미간을 루드칸이 슬슬 문질렀다. "꼬마라는 말에 질렸다고 해도 늙은이가 되면 안 되지." "환자는 가서 얌전히 누워있어요." 우현은 짐짓 매정한 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조금 울적해진 심정을 알아차린 루드칸은 우현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우현은 조금 미소를 지었다.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몰라.' 벌써 몇 명 째의 보기 힘든 사람일까. 이에라 르페리토는 넓고 우현은 이 세계의 지리도 시스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지고이네르와는 만날 약속이나 했다지만 이스드와는 그것조차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에 대해서는 이름과 직업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처음 두 번은 그가 먼저 다가왔고, 그 이후에는 만날 장소를 정하여 만났으므로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새삼 자신의 무지에 대해 한탄한 우현은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어느새 어깨를 덮도록 자란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회담으로 가기까지가 길었을 뿐이다. 회담과 그 후의 처리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며칠 동안 추적추적 내린 겨울비에 엉망진창이 된 길에서 우현은 루드칸과 인사를 나누었다. "돌아가는구나, 꼬마. 잘 살고, 용병이 필요하면 우리 「붉은 휘장」 부대에 연락을 해서 날 찾아. 초일류인 내 몸값은 조금 비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이야." "상처에 빗물 안 들어가게 조심이나 해요, 초일류 용병 아저씨." 눈을 찡끗하며 웃는 루드칸에게 마주 웃으며 대답해준 우현은 그의 손에 약을 쥐어주고는 몸을 돌렸다. 용병인 그에게는 급여의 계산이 남아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병사들에게는 이곳에서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모리악과, 몇몇 방향이 같은 자들과 함께 걷던 우현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에피서스는 묘하게 아련한 느낌이었다. 우현은 걸어서 여행을 한 경험이 없었다. 지고이네르에게는 마차가 있었고 징발되어 갔을 때에는 수레가 있었다. 모리악은 물집이 터져 도저히 걸을 수가 없게 된 우현의 발을 살피며 혀를 끌끌 찼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기에 발이 이렇게 부드러운 거냐? 혹시 귀족이었냐?" 굳은살이 조금 박혀있다고는 하지만 모리악이나 다른 사람들의 발에 비하면 우현의 것은 갓 구운 빵과도 같았다. 약을 바르고 붕대로 발을 칭칭 감은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모리악은 '뭐가?'라고 묻는 듯 우현을 돌아보았다. 우현의 발이 부르트는 바람에 그의 발조차 묶여버렸다. 우현을 기다릴 이유가 없는 다른 사람들이야 저마다의 길을 걸어가면 되었지만 모리악은 달랐다.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을 그의 속을 모를 우현이 아니었다.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비슷한 것이니까. 그렇지만 그는 달리 우현을 탓하지 않았다. "뭘 이런 정도를 가지고. 돌아가면 엄청 부려먹을 텐데." 그의 배려는 지고이네르의 것과는 또 조금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지고이네르가 솔직함을 미덕으로 삼는 것에 비해 무뚝뚝한 성품의 모리악은 그 성격에 기인한 쑥스러움 때문인지 좀처럼 솔직해지지 못했다. 우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겨울도 중엽에 접어들었다. 제법 단단해진 발바닥을 가지게 된 우현은 여행에도 익숙해졌다. 먹을 수 있는 나무뿌리와 먹을 수 없는 나무뿌리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스티아에서 병사들에게 나눠준 귀환 비용은 그야말로 새 모이만큼 밖에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빈집에 들어가 바람을 막고, 그조차 없는 날은 모포로 몸을 둘둘 감고 노숙을 하고, 배가 고프면 야생의 열매를 따먹으며 북상을 계속했다. 다행히 퀴아네는 동면을 하므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일은 훨씬 적었다. 그리고 그들은 3월 초가 되어서야 목적했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바람은 사나웠고 지붕에는 하얀 눈이 얼어붙어 있었지만 태양은 한결 따스해져 있었다. 이른 아침의 마을은 조용했다. 모리악은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길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우현도 덩달아 숨가쁘게 뒤따랐다. 밤새 걸어 피곤했지만 모리악의 뒷모습에서 조급한 빛을 읽은 우현은 말없이 그를 쫓아갈 뿐이었다. 한참을 걸어간 모리악은 적갈색 벽돌로 벽을 세우고 밀짚을 얽어 지붕을 올린 작은 집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의 눈동자에서 감격과 무한한 기쁨을 본 우현은 한 걸음 물러섰다. 모리악은 깊이 심호흡을 하고 손을 들었다. 그가 문고리를 붙잡으려는 찰나, 안에 있던 사람이 문을 활짝 열었다. "윽!" 먼지 등등 제반 사항때문에 대부분의 대문은 바깥으로 열리게 만들어져 있었다. 필연적인 전개로 이마와 코를 세게 부딪힌 모리악은 얼굴을 움켜쥐며 노성을 올렸다. "아니, 밖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열어?!" 문을 연 사람은 아담한 몸집의 중년 여성이었다. 담갈색 머리카락을 매끄럽게 빗어 올린 그녀의 얼굴은 사과처럼 둥글었다. 곧 그 얼굴의 색깔마저 사과와 같아졌다. "파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물음을 들은 모리악은 부딪혀 붉게 된 얼굴에서 손을 떼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래, 나야." "파체? 여보?" "나라니까." 문득 여인의 시선이 모리악의 뒤에 서있는 우현에게 가 닿았다. 모리악은 손짓을 해 그를 불렀다. "우현이라는 녀석이야. 조수로 삼을 생각에 데려왔지."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얼른 허리를 굽혀 인사한 우현은 여인의 손에 들린 것이 물동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 담으러 가시는 길이었어요? 이리 주세요. 제가 갔다올게요." 얼떨결에 내민 여인의 손에서 물동이를 낚아챈 그는 모리악을 보며 눈을 찡끗거렸다. '건방지게'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을 되돌린 모리악은 그러나 어딘지 쑥스러워 보였다. 오면서 스치듯 보았던 우물로 뛰어가는 우현의 등뒤에서 서로 부둥켜안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현은 두레박을 내려뜨려 물을 떠올리며 슬며시 웃었다. 모리악의 성격상 누가 보는 앞에서 가족 상봉의 기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리가 없는 것이다. '고집쟁이 아저씨.' 히죽 웃은 그는 살얼음이 동동 떠있는 물을 물동이에 부었다. 촤아아악, 하는 소리가 정신까지 맑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날이 밝아 사람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물동이를 들고 돌아오는 우현을 마을 사람들이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머쓱해진 그는 잰걸음을 놀려 모리악의 집으로 돌아갔다. "오자마자 일을 시키다니 미안해서... 저기, 우현이라고 했지?" 부려먹으려고 데려왔는데 미안은 무슨 미안, 이라고 말하는 모리악을 한 번 흘겨본 여인이 말했다. 부엌에 물동이를 내려놓은 우현은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신세지게 되었습니다. 모리악 선생님 말씀대로 열심히 부려주세요." "나는 엘리마야. 이름으로 불러주면 돼. 그런데..." 엘리마는 말꼬리를 흐리며 우현을 훑어보았다. 목덜미를 더벅더벅 뒤덮은 머리에 오랫동안 씻지 못해 지저분한 얼굴, 때가 가득 앉은 옷차림. 우현은 머리를 한 번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뭘 그 정도를 가지고. 에피서스에서는 더 했어. 거리에서 동냥하는 아이라고 해도 단박에 믿을 정도..." "여보!" 한 마디 한 모리악에게 아내의 나무람이 떨어졌다. 우현은 웃음을 삼켰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파이프를 피워 문 채 난로가의 의자에 앉아있는 모리악은 원래의 자리를 되찾은 듯 편안해 보였다. 그때 끼이익, 소리가 나며 방문이 열렸다. "어머니, 누가 오기라도... 아버지?!" 여기사인지 뭔지가 된답시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닌다는 그 딸네미인가. 우현은 고개를 돌렸다. 우현과 비슷할 정도로 훤칠한 처녀가 그곳에 서있었다. 그녀는 모리악을 포옹했다. "아버지, 언제 왔어요?" "지금. 네 녀석이 쿨쿨 쳐 자는 사이에 왔다." 투박한 말투가 어딘지 닮은 부녀였다. 포옹을 푼 처녀가 돌아섰다. 그제야 우현을 발견한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현이라고 한다. 내 조수야." 모리악이 점잖게 말했다. 처녀는 우현을 기웃기웃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가엾게도." "무슨 의미로 하는 소리냐?" "사실이잖아요? 아버지의 조수라니. 분명 신경질이니 응석이니 다 받아주면서..." "너 이 녀석! 아버지한테 말 버릇이 그게 뭐냐!" 거실이 금세 시끄러워졌다. 우현은 웃고 말았다. 제 바보 컴퓨터가 지금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올라가면 어떻게 할지;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3장 온기 짙은 유리, 장미의 가시 -2- 이른 봄의 햇살은 아직 미약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목련의 풍성한 꽃잎은 처녀의 볼처럼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그 꽃송이를 향해 뻗어진 손이 있었다. 발돋움을 한 우현은 목련 가지를 꺾어 한아름 안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만들고있던 엘리마는 우현을 보며 포근하게 웃었다. "미안하구나. 원래는 셰리가 해야하는 일인데. 아유, 예뻐라. 여기다가 꽂아줄래?"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엘리마는 매일 아침 식탁에 올릴 꽃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것을 따오는 일은 딸인 셰리의 몫이었는데, 매일 늦게까지 훈련을 하는 그녀는 아침마다 늦잠을 자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그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이 우현이었다. 우현은 엘리마가 내어준 꽃병에 목련을 꽂았다. 소담스레 피어난 송이송이가 한데 모여 화사하게 빛났다. 그는 그것을 들고 식당으로 갔다. 그때 얼굴에 물을 흠뻑 묻힌 처녀가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우현, 잘 잤냐? 오늘도 부지런하네." "셰리가 게으른 거겠지." 우현은 들으란 듯이 크게 꽃병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타당, 하는 소리를 들은 셰리는 악동처럼 혀를 내밀며 웃었다. 금갈색으로 그은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본 우현은 혀를 츳츳 차며 근처에 걸려있던 수건을 건넸다. "제대로 좀 닦아." "네, 엄마." "내가 왜 엄마냐?!" 아빠도 아니고 엄마라니, 우현은 조금 발끈하며 외쳤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한 두 번의 일이 아닌 것이다. 지고이네르와 함께 생활하며 붙은 맏형의 버릇을 그저 원망할 밖에. 그때 엘리마가 부엌에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주전자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우현과 마찬가지로 탕 소리가 나도록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지은 죄가 있는 셰리는 다만 알아서 길 뿐이다. "잘못했사와요, 마님." "어떻게 매번 매번 우현에게 네 일을 미룰 수 있는 거니? 조금만 일찍 일어나면 될 것을." "아잉, 어엄마아아?" "시끄러워! 가서 아버지나 깨워와." 화가 난 이유는 셰리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셰리는 어마 뜨거라 싶어 얼른 식당을 나갔다. 그 뒷모습에 대고 엘리마가 말했다. "몇 번을 깨워도 일어나지를 않으니, 원. 어쩌면 아이들보다 더할까. 안 일어나시면 우리끼리 아침을 전부 먹어버린다고 해라." "이옙!" 셰리가 들어가 아직도 한밤중인 양 곤히 잠이 든 모리악을 깨우는 동안 우현은 엘리마를 따라 부엌으로 갔다. 엘리마는 손에 든 국자로 바구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만 가져다놓으면 돼. 스튜는 내가 가져갈 테니까." 우현은 갓 구워 따끈따끈한 빵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식당으로 갔다. 언제 나왔는지, 아직도 잠이 덜 깬 채인 모리악이 앉아있었다. 잿빛 머리카락을 마치 새집처럼 헝클어뜨린 모습이 여느 집의 게으른 가장들과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우현의 뒤를 이어 스튜 냄비를 들고 나온 엘리마가 혀를 츳츳 차며 말했다. "저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야하는 우현의 신세가 가엾구나. 얼른 눈뜨지 못해욧!" 이 집의 실세는 엘리마다. 이곳에 왔던 날 그 사실을 깨달아버렸던 우현은 웃음을 삼키며 모리악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아내의 채근을 들으면서도 아침잠을 없애지 못한 그는 몇 번 눈을 껌뻑거리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우현과 셰리는 그것을 보며 소리 죽여 웃었다. 식사는 언제나 화기애애했다. 식탁을 지배하는 자는 역시 엘리마였다. 그녀는 스튜를 떠 각자의 접시에 담아주고 빵에 버터를 발라 건네주며, 많이 먹으라느니 꼭꼭 씹으라느니 하는 잔소리도 곁들여주었다. 익숙해진 셰리야 그만 좀 하라고 투덜거리지만 우현에게는 더할 수 없이 정겨운 소리였다. 식사가 끝나면 셰리는 영주인 멜도바 백작의 영주관으로 갔다. 그녀는 성의 수비대 후보로 훈련을 받고 있었다. 대대로 열렬한 왕당파인 멜도바 백작은 국왕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찬성인지라 소소한 일에도 지원병을 보내곤 했다. 그렇게 마을 남자들이 밖으로 돌면 영지가 비게 된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이 바로 여자들이었다. 멜도바 영지에서는 여자들이 검을 들고 훈련을 받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셰리가 검을 덜그럭거리며 집을 나서면 모리악도 슬슬 일어나 진료소를 열었다. 그의 진료소는 집 한 켠에 붙어있는 것으로, 집안에서 소리를 지르면 진료소에 닿을 정도였다. 모리악이 진료 준비를 하는 동안 우현은 엘리마의 일을 도왔다. 마흔이 넘어 슬슬 허리니 무릎이 아프기 시작한 엘리마에게 그의 도움은 상당히 고마운 것이었다. 특히 우물과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자리한 집인지라 물을 뜨러 가는 것도 큰일이었다. 우현은 커다란 물통을 들고 우물로 향했다. 바람은 아직 쌀쌀했지만 햇살은 대단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옅은 햇살이 그의 뺨에 보르르하게 난 솜털을 황금빛으로 비추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먼 너머 검은 호수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어이!" 얼마나 그렇게 서있었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에 절겅절겅하는 소리가 섞인 것을 보니 셰리다. 우현은 미소를 지으며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검을 절그럭거리며 달려온 셰리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을 향해 짓궂은 웃음을 날려주었다. 우현에게 한 마디 해주기라도 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본인은 자각도 못 하니 상관없을 것이다. "뭐야, 셰리?" 우현은 웃고만 있는 셰리를 일깨웠다. 히죽히죽 웃으며 자기 생각에 빠져있던 그녀는 멋쩍게 말했다. "아까 말하는 것을 깜빡 했거든. 오늘 저녁에는 수업 없다." 일주일에 세 번, 우현은 셰리에게 검술을 배웠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세상에서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검술은 속도 위주의 날랜 것이라 근력이 부족한 우현에게도 제법 잘 맞았다. "무슨 일 있어?" 우현은 슬핏 웃으며 물었다. 그의 묻는 듯한 시선을 받은 셰리는 문득 얼굴을 붉혔다. 왈가닥에 여장부인 그녀가 얼굴을 붉히다니, 같은 수비대의 사람들이 보았더라면 잔뜩 쏠린 속을 붙잡고 가까운 풀숲에라도 기어들어갈 장면이었다. "아, 어어, 만날 사람이 있거든." "누군데?" "네, 네가 모르는 사람이야!" "흐음, 그래애?" 우현의 말꼬리가 기이하게 올라갔다. 셰리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지? 나는 알겠는데? 이른 저녁의 노을처럼 근사한 오렌지빛 머리카락의..." "너, 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현이 늘어놓은 말은 셰리가 그 오렌지빛 머리카락의 청년과 나눈 편지의 한 구절이었다. 우현과 셰리의 방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 벽이라는 것이 얇기 그지없어 조금만 크게 소리를 내어도 상대방에게 죄다 들려버리고 만다. 그러니 잘못은 문장을 고민하다가 무심코 소리를 내어 말해버린 셰리 자신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현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안해내는 문장을 들으며 대패를 찾는 재미가 의외로 쏠쏠했기 때문이었다. "글쎄? 어떻게 알까나? 그런데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어도 되는 거냐? 안 늦었어?" "으윽, 젠장. 비밀이야! 알았지! 난 급해서 가지만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니면 죽어!" 셰리는 다시 검을 절그렁거리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배를 잡고 웃은 우현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떠벌리다니, 너무하네." 우현은 웃느라 흐트러진 앞머리를 슥 쓸어넘겼다. 이곳에 온 날 엘리마가 다듬어 준 머리카락은 목 근처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우현이 있던 곳에서 남자가 머리를 기르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 역시 남자의 머리가 긴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선입견과 고정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안 어울리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자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길게 길게, 허리에 닿을 때까지 쭉 길러서 가발을 만들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머리를 기르는 것은 곧 그리움과 다짐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우물로 간 우현은 두레박을 내렸다. 첨벙 하는 소리가 뼛속까지 뒤흔들 듯 차갑게 느껴졌다. 그 소리에 섞여 누군가의 온화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 좋은 아침이지?" 우현은 고개를 들었다. 잘 익은 오렌지의 껍질처럼 밝은 빛깔의 머리카락이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우현이 싱긋 웃었다. "응, 날씨 좋은데." 겉으로는 평온한 체 하고 있는 우현은 그러나 속으로는 박장대소를 하는 중이었다. 사실 우현은 셰리가 연모해 마지않는 청년과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었다. 노을 같은 머리칼이 멋진 그의 입장에서야 미묘한 감정이 오가는 처녀와 사이가 좋은 우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다가온 것이겠지만. 그러나 우현은 그와 자신이 아는 사이라는 것에 대해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재미있잖아.' 셰리가 알았다면 검을 들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우현은 두레박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 했지? 난 우현이다. 모리악 선생님 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지. 너는?" "슐리언. 모리악 선생님이면 빨간 벽돌집의 의원님이지?" 응, 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 우현은 슐리언을 슬쩍 살폈다. 상냥한 분위기였지만 꼿꼿하게 뻗은 눈썹이나 야무진 입매가 어딘지 고집스러워 보였다. 그것에서 모리악을 연상한 우현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눌렀다. "그럼 셰리 모리악도 알겠네? 영지 수비대의." "응, 알아. 누이...라기 보다는 나쁜 친구 같은 사이지. 왜? 셰리랑은 아는 사이야?" "아? 어어. 그렇지, 뭐. 원래 한 마을에 살면 다 아는 사이잖아." 우현은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안도하는 슐리언을 곁눈질했다. 문득 그의 안에서 장난기가 치솟았다. 그는 가지고 온 물통을 채우며 건성인 듯 입을 놀렸다. "셰리 때문에 요즘 엘리마가, 엘리마는 셰리의 어머니야, 걱정을 하고 있어. 게다가 오늘은 내게 검술을 가르쳐주는 날인데 멋대로 약속을 깨버리기까지 했지. 얼굴이 멍한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연애문제 같아. 엘리마는 그렇다 쳐도 모리악 선생님은 워낙에 꼬장꼬장하고 꽉 막힌 분이라, 시집도 안 간 딸이 남자를 만나고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면 불같이 화를 내실 텐데. 아, 나도 모르게 노닥거렸네. 미안, 심부름이 있어서. 나중에 또 보자!" 우현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몸을 돌렸다. 곁눈으로 보인 슐리언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킥킥 웃은 우현은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뛰어갔다. "봄이네, 봄." 엘리마는 의미불명의 말을 하며 들어오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보통은 엘리마의 설거지를 다 도우면 진료소에 나가지만 오늘은 특별한 심부름이 있었다. 약초의 씨앗에 에다마트의 축복을 받기 위해 신전에 가야만 했다. 신전과 영지민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신전에서 이름을 부여받았다. 봄이 되면 씨앗을 축복받았고 가을이 되어 소득을 거두면 그 중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신전에 가져갔다. 할 일이 줄어드는 겨울이 되면 아이들은 신전에서 여는 교리학교에 나갔다. 에다마트에 대한 신앙심을 어릴 때부터 키우는 것이다. 신관에게서 씨앗을 축복받은 우현은 진료소로 갔다. 환절기에 흔히 걸리기 쉬운 감기 증상으로 진료소를 찾은 사람들이 벌써 몇이나 와있었다. 얼굴이 익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그는 약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빈 약병이 있는지 체크했다. 독특한 색깔과 냄새, 병에 붙은 리본의 색으로 약을 알아보아야 하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수없이 헷갈렸던 우혀이었지만 지금은 제법 능숙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을 끝낸 우현은 모리악에게 갔다. 모리악의 잔심부름과, 때로는 간단한 환자를 돌보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 즈음 많이 걸리는 감기의 경우에는 모리악의 진단이 떨어지면 그가 약을 챙겼다. 엄격한 남자 어른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에게 약을 먹이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한참을 일하다 보면 배가 텅 빈다. 어떻게 알고 때를 맞추는지, 그때쯤 되면 엘리마가 두 사람을 불렀다. 셰리는 영주관에서 식사를 하므로 점심 식탁은 세 사람의 차지였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건너가면 그때부터 바쁜 오후가 시작되었다. 환자는 오전보다는 오후에 훨씬 많았다. 게다가 다친 상처의 경우, 모리악에게 가면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게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 먼 마을에서까지 찾아온 사람들로 진료소는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날 오후에는 제법 큰 환자가 찾아왔다. 사내아이 하나가 나무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만 것이다. 시퍼렇게 부어오른 발목을 본 모리악은 손을 씻고 뼈를 맞출 준비를 했다. 우현은 뼈를 맞추는 시간을 가장 싫어했다. "아아아악! 아악! 으아아악!" 부러진 뼈가 한 번에 맞춰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모리악이 아이의 다리를 붙들고 뼈를 맞추는 동안, 자식의 처절한 비명에 사색이 된 어머니는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고통으로 보랏빛이 된 아이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손을 덜덜 떨며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모리악이 다리에 손만 대면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곤 했다. "괜찮아, 이 녀석아. 다 끝났다고." 우현은 아이를 끌어안고 살살 달랬다. 그 동안 모리악은 아이의 다리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다.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난 아이는 마구 소리를 지르며 울었던 것이 부끄러웠는지 우현의 어깨에 몰래 얼굴을 문대었다. 눈물콧물로 범벅이 되었을 옷을 생각하며 조금 쓴웃음을 지은 그는 이번에는 실신한 어머니의 코밑에 정신을 돌리는 소금을 얹었다. 어머니마저 깨어나자 모리악은 아이에게 지팡이를 건네주며 엄포를 놓았다. "또 이렇게 다리 분지르고 와. 알았지?" 아이는 몸을 흠칫하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우현도 아이의 어머니도 그만 웃고 말았다. 이런 환자가 있으면 그날 하루는 종일 정신이 없다. 늦은 저녁, 엘리마는 기진맥진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았다. "수고들 했어요. 얼른 씻고 밥 먹어요." 낮 동안의 먼지를 깨끗이 씻고 식탁 앞에 앉아 맛있는 밥을 먹으면 안온한 휴식이 찾아온다. 이것이 모리악 가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밤이 늦은 시간,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벌어졌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들어온 셰리가 다짜고짜로 우현의 손목을 움켜쥐고 뒷마당으로 나간 것이다. 싱글싱글 웃으며 따라나가는 우현을 본 모리악과 엘리마는 은근한 미소를 교환했다. "야! 너 슐리언이랑 아는 사이라며?" 얼마나 급했는지 뒷마당에 채 나가기도 전에 외친다. 우현이 짓궂게 웃었다. "어? 내가 말 안 했나?" "뭐야? 너 정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넌 어떻게 아는 사이면서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안 해 주냐? 좀 도와줄 수도 있는 거잖아?" 분통이 터진다는 듯 말하고 있는 셰리였지만 우현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그가 말했다. "입 꼬리가 올라갔는데, 셰리." "어? 저, 정말?" 어벙하게 대답하더니 이젠 아예 숨기지도 않고 웃는다. 우현은 짐짓 한숨을 쉬었다. "슐리언 앞에서는 그렇게 웃지 마. 능글맞아 보이는 여자는 인기 없... 아프다, 셰리. 나도 꽤 도왔단 말이다. 막말로, 내가 훼방을 놓으려고만 했으면 얼마든지 놓을 수 있었다는 건 알고 있잖아? 슐리언의 등을 밀어준 게 누군데 지금 꼬집는 거냐?" 과연 그것이 등을 밀어준 행동인지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있었지만 결과가 좋으면 된 거다. 셰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아잉, 미안해.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아, 그렇지. 말만 해, 말만. 마을 여자애들 중에서 아무나 마음에 드는 애가 있으면 내가 다 소개시켜 줄 테니까. 방앗간 집 뮤? 푸줏간 집 셋째 클라라? 포목점 집 둘째 매리안은 어때? 혹시 수비대에 있는 애가 취향이라면, 내가 이미 네 얘기를 잘 해놨으니까 말만 하면 즉시야." "행여나 네가 나밖에 없겠다." 바람이 불었다. 이른 봄의 바람이 제법 차가워, 우현은 몸을 움츠렸다. 실내에 있다 끌려나와서인지 체감은 늦겨울이었다. 그렇지만 차가운 바람에 익숙한 향기가 섞여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것이 어쩐지 두근거리는 느낌이라 우현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가 그러는 동안에도 셰리는 마을의 처자들을 주워섬기고 있었다. "삼거리 빵집 이스틴도 괜찮지. 걔의 은발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피부도 하얗고..." "이스틴?" 우현이 익히 알고있는 누군가와 비슷한 울림을 담은 이름이었다. 그가 멈칫하자 그것을 관심으로 받아들인 셰리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스틴을 칭찬했다. "그래, 이스틴. 역시 너도 아는구나? 걔가 얼마나 인기있다고. 뭐,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어때? 소개시켜 줄까? 만나보고 싶어?" "...별로. 나 먼저 들어간다." 우현의 대답은 다른 때와는 달리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짜식, 빼기는. 저도 남자니까, 소개시켜 준다고 하면 좋아라 달려들겠지만." 바람이 불었다. 냉정한 바람은 꽃의 향기를 싣고 있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3장 온기 짙은 유리, 장미의 가시 -3- 모리악의 진료소는 한 달에 한 번 씩 쉬었다. 그러나 휴일이라고 해서 노는 것이 아니었다. 우현은 다 쓴 약의 목록을 들고 모리악을 따라 창고로 갔다. 아직 글자를 모두 익히지 못한 그는 익숙한 언어를 사용하여 목록을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글자를 처음 보았던 날, 모리악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의원이 까막눈이라면 일이 되지 않는다. 마을에서 몇 안 되는 식자층인 모리악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우현은 글을 배울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조금 고집스러운 마음 때문이었다. 글자는 이스드가 가르쳐주기로 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배울 수 없다, 라는. '태도가 불량한 선생이네. 배울 마음은 넘쳐나는데 가르칠 사람이 없다면 도대체 이건 어떻게 되는 거야?' 이전에 이스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거칠게 약초를 다루던 우현은 곧 모리악에게 혼나고 말았다. "정성껏 하지 못해? 약초는 섬세한 녀석들이라고. 미움을 받으면 금방 알아채." "네." 목을 움츠리며 대답한 우현은 필요한 약초 다발을 골라 옆에 내려놓았다. 약초는 봄에서 가을 사이에 났다. 그 기간동안 딴 약초는 각각 양지에서 말려야 하는 것과 음지에서 말려야 하는 것으로 나뉘는데, 보통은 잘 펴서 건조시킨 뒤 묶음을 만들어 천장에서부터 내린 줄에 매달았다. 겨울은 그것들을 저장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숙성까지 시키는 기간이었다. 우현은 제법 익숙해진 손길로 약초들을 골라냈다. 그는 약초의 차분한 내음이 밴 창고를 좋아했고, 모리악은 그것을 매우 기꺼워했다.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모리악은 헛기침을 하여 운을 떼었다. "너도 알고 있지? 어제 상인들이 온 것 말이다. 그중에 내가 아는 슈나르라는 상인이 있는데 말이야, 지금 아르무드는 난리가 났다고 하더구나. 아르무드 동부 지방에 전염병이 돌아서 사람들이 죄 죽어나가고 있다지 뭐냐." "그래요? 큰일이네요." 아르무드라면 에피서스를 놓고 하스티아와 으르렁대고 있는 그 나라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나라 병사들과 검을 맞대었던 우현은 손톱만큼의 근심도 없이 대답했다. 모리악이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런데 그 슈나르가 이번에 지고이네르의 숲 근처까지 간다더구나. 네가 원한다면 그 사람에게 부탁해서 검은 호수로 한 번 찾아가 보라고 하마. 뭔가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까." 약초의 냄새를 맡던 우현은 고개를 들어 모리악을 보았다. 짐짓 다른 곳을 보며 이미 골라낸 약초 다발을 뒤적거리는 모리악은 어딘지 조금 어색해 보였다. 우현은 다시 약초 다발에 얼굴을 묻었다. 차분하고 조금은 씁쓰름한 향이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잠시 그렇게 있던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에코 마마와 약속했으니까 내년 1월에는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그 숲은 매년 바뀐다고 그랬으니까 함부로 가면 위험할지도 모르잖아요. 신경 써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아니 뭐, 신경 쓴 것까지야.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모리악은 몇 번 헛기침을 해 머쓱한 분위기를 몰아내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약초를 골라내었다. 3월이 되니 길은 온통 꽃으로 가득 찼다. 벚꽃은 목련이 지는 기간과 어슷하게 겹치며 피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어린아이의 해말간 미소를 닮은 개나리가 특유의 황금빛 물결을 치렁치렁한 가지 끝에 가득 달았다. 마을은 이내 꽃향기에 휩싸였다. 멜도바 영지에서 열리는 봄의 축제는 인근 영지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유명했다.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만큼 봄의 온기를 알리는 꽃이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곳이다. 거리거리마다 피어나 색색을 자랑하는 꽃이 산뜻하고 달콤한 향기를 주변에 흩뿌리는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축제의 준비를 했다. 귀족답지 않게 근검절약을 모토로 하고 있는 멜도바 백작도 이 축제만큼은 풍성하게 베풀어주었다. 백작이 내려보낸 술과 고기에 마을 사람들이 준비한 음식이 더해지면 축제가 시작된다. 축제 첫 날의 오전, 우현과 셰리는 판이 크게 벌어지고 있는 거리로 나섰다. 여느 때의 그녀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사하게 차려 입고 머리에 화관까지 얹은 셰리는 대단히 예뻤다. 본인은 어색한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치맛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지만. 우현은 잔뜩 긴장한 셰리를 보며 소리 죽여 웃었다. 웃음의 기색을 느낀 셰리가 그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그 동작도 어딘지 자신이 없어보였다. "역시 이상한가?" 잔뜩 풀이 죽은 어조였다. 우현은 자신보다 두 살이나 위인 셰리를 보며 처음으로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셰리의 머리에서 떨어지려는 꽃송이를 다시 올려주며 대답했다. "아니, 예뻐. 슐리언이 보면 정신을 못 차릴 테니 걱정하지 마." "그, 그럴까?" 셰리는 얼굴을 붉힌 채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기대에 부푼 강아지 같았다. 우현은 또 다시 터지려는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공유지에는 테이블을 몇 개나 붙여 만든 커다란 식탁이 있었다. 그 위에 넘쳐나듯 올려진 음식들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평상시에 맛보기 힘들었던 과자나 사탕 등을 집어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장이 서있었다.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 놓인 좌판이 우현을 그리움에 젖게 했다. "아! 여기!" 방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수줍음이나 자신 없음은 도대체 엇다가 팔아먹었는지, 셰리는 마구마구 팔을 저으며 누군가를 불렀다.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기웃거린 우현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오렌지빛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대단해, 라고 중얼거린 우현은 이젠 숫제 달려가는 셰리의 뒤를 쫓아갔다. 슐리언은 오렌지 블론드에 잘 어울리는 파란 옷을 입고있었다. 달음질치던 셰리는 그의 바로 앞에 다다라서야 겨우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그를 발견하자마자 보였던 반응은 조건반사였던 듯, 그녀는 실물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바로 소심하게 변해버렸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발이 빨라? 게다가 혼자만 그렇게 뛰어가다니. 안녕, 슐리언? 오랜만이네?"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온 우현이 투덜거렸다. 셰리의 모습에 잠시 눈을 빼앗겼던 슐리언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우현? 일찍 나왔구나?" "응. 엘리마가 내쫓았어. 젊은이들은 이런 날 집에 있으면 안 된다나. 아, 셰리와도 인사했어?" 우현은 셰리의 팔꿈치를 밀어주며 말했다. 내내 말도 없이 얼굴만 붉어져있는 셰리에게 안달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지원을 받은 셰리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 이 부분에서 우현은 쏠리는 기분을 맛보았다 - 슐리언에게 다가갔다. "아, 안녕, 슐리언. 오늘 날씨가 참 좋아. 그렇지?" "그렇네. 축제하기에 딱 좋은 날씨야." 셰리는 깍지 낀 손을 끊임없이 비틀었다. 그것을 본 슐리언은 좀 더 깊어진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늘 예쁘다, 셰리." 우현, 자신이 했던 지원을 처절하게 후회하다. 우현이 옆에서 닭살을 벅벅 긁거나 말거나, 근처를 지나가던 수비대 사람들이 아무 것도 없는 땅에서 넘어지거나 말거나 두 사람의 주변에는 달달한 춘풍이 불고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닭살 커플에게 매정한 법. 그들 사이로 끼여든 목소리가 있었다. "의원님 댁 셰리 아냐?" 슐리언의 얼굴에는 쑥쓰러움이, 셰리의 얼굴에는 긴장이 스쳐지나갔다. 우현은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오렌지 블론드의 머리카락을 틀어올린 중년 여성이 서있었다. 상황을 금세 알아챈 우현은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슐리언의 어머니시죠?" "어머, 너는 혹시 의원님 댁에 있다는 그 아이니? 우리 슐리언하고 친구라는 것은 또 몰랐네. 그러니까 이름이..." "우현이라고 합니다." 우현은 여인의 어깨 너머로 보인 셰리가 눈에 띄게 긴장을 푸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여인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셰리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슐리언마저 덩달아 굳어버리는 것을 본 우현은 내심 혀를 끌끌 찼다. '저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썩어도 준치라, 여인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셰리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곱게 치장했는데 흐트러졌네. 내가 다시 예쁘게 해줄 테니까 이리 따라 들어오렴. 자아, 어서?" 셰리의 힘이 아무리 장사라 해도 지금 그녀를 잡아끄는 작은 손을 뿌리치는 것은 무리였다. 그녀는 울상 반 긴장 반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집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축제의 혼잡함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두 남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 어머니가 조금 막무가내시라. 모처럼 놀러나왔는데 붙잡은 거 아냐?" "말은 바로 해야지. 붙잡은 것은 슐리언이 아니라 셰리잖아?" 우현이 짓궂게 웃으며 눙쳤다. 가볍게 웃은 슐리언은 곧 머뭇거리는 얼굴이 되었다. 우현은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 말인데, 우현? 너와 셰리는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또 그거다. 닭이 되어 날아갈 뻔한 위기를 겪었던 우현은 잠시 심술을 부려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셰리의 도끼눈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뭐, 누구나 목숨은 하나뿐인 법이다. 우현은 순순히 대답했다. "나한테 셰리는 누이 같은 거라고 했었잖아. 손이 좀 많이 가는 누이이기는 하지만. 아마 셰리도 나를 남동생 정도로 보고 있을 걸." "아, 그랬던가." 슐리언의 얼굴에 미미한 안도가 퍼졌다. 그것을 본 우현이 씨익 웃자 슐리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남을 놀리는 재미가 어떤 것인지를 슬슬 터득해가는 업그레이드 우현, 스무 살의 봄이었다. 살랑살랑 불어온 봄바람이 우현의 볼을 간질였다. 바로 앞에는 친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서있었다. 한참동안이나 가져보지 못했던 친구의 명칭이 제법 낯간지러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시끌벅적했다. 그는 기분이 좋아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도 기분이 좋은 듯 보일까 생각했다. 싱긋 웃은 그는 자신이 최근 들어 자조의 미소를 거의 짓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스드가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조금은'이라고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평화롭다." 무심코 내뱉은 말에 슐리언이 웃었다. "어디가 평화롭다는 거냐? 이런 것은 지옥처럼 시끄럽다고 하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우현은 조용히 웃었다. 그 미소가 지나가는 처녀 총각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홀로 그것을 깨달은 슐리언은 우현을 향해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우현 너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으, 으응?" 그 순간 우현의 뇌리에 새하얀 얼굴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어, 어째서?' 우현은 스스로도 알지 못할 이유로 얼굴을 붉혔다. 슐리언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그의 얼굴을 훑었다. "삼거리 빵집의 이스틴?" "왜 그 이름이 나오는 거야? 전혀 아냐." 그러나 우현의 붉어진 얼굴이 슐리언에게 확신을 주었다. 복수혈전, 슐리언이 능글맞게 말했다. "그으래? 하지만 셰리가 그랬는걸. 네가 그 아가씨한테 관심있다고 말이야." 그때였다. 꽃향기를 닮은, 그러나 조금은 차가운 향기가 우현의 코끝을 간질였다. 꽃이 함박 핀 것을 축하하는 날이니 만큼 향기가 난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 향기에서 누군가를 떠올린 우현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 전혀 아니야. 단지 아는 사람과 이름이 비슷한 것 같아서 조금 놀랐을 뿐이라고." 슐리언은 말까지 더듬는 우현을 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우현의 난처한 빛을 띄운 채 변명했다. "정말로 아니라니까 왜 그렇게..." "그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군." 매우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자아내는 소음 속에 파묻힌 그것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나 겨우 들을 정도의 크기였다. 그러나 우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황급히 돌아본 그의 눈에 냉정한 표정을 짓고 선 청년이 비쳤다. 우현은 눈까지 부벼가며 청년을 응시했다. 좀처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본 청년은 눈을 슬쩍 내리깔며 미소지었다. "이, 이스드?" "그래. 그렇게 못 미덥나?" 청년의 입에서 친근감이 섞인 비아냥이 흘러나왔다. 우현은 그제야 앞에 서있는 것이 이스드의 실물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의 입에서 반가운 음성이 터져나왔다. "이스드!" 근 4개월 만의 재회였다. 우현은 사람들을 헤치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 짧은 거리가 매우 길게 느껴졌다. 우현은 급한 마음에 손부터 내밀어 이스드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단단히 움켜쥔 주먹을 본 이스드는 나직하게나마 소리를 내어 웃었다. 가, 간신히 나왔습니다, 이스드 군. 도대체 몇 화 만인지, 자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3장 온기 짙은 유리, 장미의 가시 -4- 우현이 기억하는 이스드는 언제나 흰옷을 입고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발끝까지 내려오는 잿빛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후드까지 뒤집어 쓴 덕분에 밖으로 드러난 것은 하얀 얼굴뿐이었다. 우현은 그의 망토를 잡았던 손에 더욱 더 힘을 주며 물었다. "어떻게 이곳에... 무슨 볼일이라도?" "볼일이라. 있다면 있는 거고 없다면 없는 거겠지." 그렇게 말한 이스드는 손을 내밀어 우현에게 가져갔다. 다가오는 손가락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던 우현은 다음 순간 이스드가 팔랑팔랑 떨어져내리는 꽃송이를 붙잡는 것을 보고는 머쓱해졌다. 그는 그 머쓱함을 무마하기 위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축제 때문에? 이곳의 봄 축제는 꽤나 유명하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겠지만." 이스드의 말은 미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우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는 눈빛만으로 웃고있었다. 그 안에서 다정함을 본 우현은 머리 속이 하얗게 되는 것을 느꼈다. "그, 그, 그럼? 뭔가 다른 볼일이?" 이스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외로 꼬았다. 입가가 슬쩍 비틀려 올라간 것이, 아무래도 이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었지만 정신이 없는 우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지 미소에 당황해버린 그는 급히 할말을 찾을 뿐이었다. "그, 그렇지! 나 여기에 살고있는데 혹시나 알고 있었어요? 그때 같이 있던 의원님 댁에서 조수로..." "너같은 얼간이를 부려먹을 사람이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스드가 한 것치고는 꽤나 심한 말이었지만 우현은 화내지 않았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생각한 우현은 곧 '아앗'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몰래 엿들은 겁니까?!" "굳이 말하자면 엿들은 거겠지만 몰래 하지는 않았어." 그럼 당당히 엿들었다는 말인가. 너무나 뻔뻔스럽게도 부정하지 않는 이스드였다. 우현을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쳤다. "그럼 그때 병동에 들렀다는 거잖아요! 왔으면 불렀어야지! 나는...!" '나는?' 우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스드는 갑자기 말을 멈춘 그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도무지 나설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런 감격스런 장면에서 나섰다가 얼마만큼의 원망을 들으라는 거지?" 그것은 내용과는 달리 조금 차가운 울림을 담은 말이었다. 잠시 주춤했던 우현은 다음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역시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이스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그 매정한 눈초리를 조금 누그러뜨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이 우현의 뒤로 향한 순간, 그 눈매는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친구인가?" "에? 아아, 슐리언." 뒤를 돌아본 우현은 바로 뒤에 서있는 슐리언을 볼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슐리언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닌지라, 우현은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이쪽은 슐리언. 이 마을에서 사귄 친구예요. 슐리언? 이 사람은..." 우현은 잠시 말을 끊었다. '비밀이야'라고 속삭이던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도는 느낌이었다. 그는 혀끝까지 나온 말을 삼켰다. "아는 신관님이야." 이스드의 잿빛 망토는 여행 중인 신관이 즐겨 걸치는 것으로, 슐리언은 우현의 말이 있기 전부터 청년이 신관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잿빛은 평신관의 색이었다. 그러나 이에라 르페리토 대륙에서는 아무리 평신관이라고 해도 지위가 높았다. 슐리언은 얼른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런 그를 차가운 시선이 훑었다. 슐리언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우현을 곁눈질했다. 그러나 우현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도대체...' 슐리언은 내심 질리는 것을 느꼈다. 이스드가 지닌 분위기는 슐리언이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왕의 앞에 서있어도 이리 질릴까 싶을 정도로 전신을 짓누르는 위압감은 날카로운 눈매 덕분에 더욱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이스드의 우아한 몸가짐과 수려한 얼굴도 그 위압감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 아직은 싸늘한 봄날의 오전, 슐리언의 등을 타고 때아닌 땀이 흘러내렸다. '도대체 우현 녀석은 어떻게 이런 사람과...' 다시 우현을 곁눈질하는 그에게 이스드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는 뱀 앞에 선 쥐의 심정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이스드의 시선은 슐리언에게 오래 머물러있지 않았다. "여행 중인가요? 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중?" 우현이 묻자 이스드는 조금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우현의 밀빛 뺨에 닿은 손가락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우현이 눈을 크게 떴다. "뭐가 묻었다. 흐음, 꽃가루인가?" 나직한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잔뜩 당황한 우현은 어떻게든 할말을 찾기 위해 허둥지둥이었지만 이스드는 여유만만,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그, 그것이, 그러니까 설라무네... 아! 이스드, 나한테 글자를 가르쳐주기로 했지요? 그래놓고 다 내팽개치고는 튀다니. 나는 배울 마음이 넘쳐나는데! 가르쳐준다고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요?" 튄다, 라. 의미는 알고 있으나 직접 들어본 것은 처음인 어휘에 이스드가 우현을 조롱하려는 찰나, 거센 바람이 불어들었다. 꽃가지 끝에 아슬하니 매달려 있던 송이송이가 바람결에 따라 우수수 흩날렸다. 이스드는 작고 새하얀 꽃들이 우현의 머리 위로 쉼없이 떨어져내리는 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스드? 아, 혹시 바쁜가요?" 대답이 없는 그를 향해 우현이 물었다. 가늘어졌던 눈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당혹감을 담았던 이스드는 이내 허리를 숙여 우현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밤, 달이 중천에 뜨는 시간에 뒷마당으로." 말과 함께 숨결이 새어나와 우현의 귓가를 간질였다. 이스드의 옷자락이 품은 여전한 향기가 우현을 에피서스의 밤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잠시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그는 다음 순간 눈을 둥그렇게 떴다. "뒷마당이라면..." '모리악 선생님 댁의?'라고 물으려던 우현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셰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셰리! 여기야!" 슐리언이 외치자 사람들 사이로 그들을 알아본 셰리가 안도한 얼굴을 했다. 그것을 본 우현은 다시 이스드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는 온데간데 없었다. "이스드? 이스드!" 이름을 부르며 둘러보았지만 회색의 망토 끝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축제로 들뜬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틈에 섞였다면 쉽게 찾을 수 없으리라. 우현은 깊은 아쉬움에 한숨을 쉬었다. "뭐야?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니?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먼저 가버린 줄 알았잖아!" 셰리가 다다다닥 쏘아댔다. 물론 그 대상은 우현이었다. 그녀가 슐리언을 대상으로 그런 말을 할 리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있는 우현이었지만 기분이 기분인지라 웃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셰리의 말을 대강대강 받아주며 생각했다. '그래도 뒷마당이라고 했으니까.' 거기까지 떠올린 우현은 슐리언을 보았다. 셰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그는 어딘지 조금 불편해 보였다. 세 사람은 축제가 벌어지는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셰리의 발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색색의 돌들을 꿰어만든 목걸이며 팔찌, 정교한 세공이 아름다운 귀고리, 반짝이는 구슬을 엮어넣은 헤어네트 등, 셰리 나이의 처녀들이 좋아할 물건들이 잔뜩 펼쳐진 좌판이 있었다. 아무리 남자처럼 하고 다닌다 해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예쁘게 보이고 싶은 것이 방심(芳心)이다. 그녀가 좌판 앞에서 넋을 잃은 사이, 우현은 슐리언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슐리언? 미안한데 아까 그 신관님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주겠어?" 슐리언은 우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스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우현은 무척이나 기뻐보였다. 얼굴에 띠고 있던 것은 홍조가 분명했으며, 안 그래도 말간 눈은 연신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셰리가 수비대의 훈련을 맡고 있는 기사가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조금 달랐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슐리언은 그 이상 예측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우현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호의를 품었던 그였다. 그 호의를 망가뜨리는 예측은 하고싶지 않았다. 슐리언이 대답했다. "그거야 어렵지는 않지. 하지만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냐? 어떻게 알게 된 거고?" "누구냐니? 신관이고..." 우현이 멈칫했다. 이스드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던 우현이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조금 아는 사람이야." 기필코 그에 대해 알아내리라는 생각을 하며 우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밤이 되었다. 3월의 하현달이 제법 두툼한 날이었다. 달이 뿜은 빛은 어둠빛 화선지 위에 곱게 스며든 상아색 물감과도 같았다. 그 위에 총총히 뿌려진 별이 유리 조각처럼 반짝 빛났다. 새까만 밤하늘에 가다가다 한 두 개씩 박힌 별들을 올려다보던 시절은 이미 멀다. 우현은 뒷문 난간에 쭈그리고 앉아 한숨을 쉬었다. 봄의 낮 공기는 상냥하지만 밤 공기는 제법 차다. 외투까지 걸친 채 이스드를 기다리던 그는 식은 손가락을 부볐다. 새까만 밤하늘은 그에게 지고이네르를 떠올리게 했다. 밤처럼 까만 그들의 머리와 눈, 그리고 순면처럼 하얀 그들의 미소. 다시 만날 날은 아직 멀었다. 모리악이 아무리 그를 귀여워해도, 엘리마가 아무리 그에게 상냥해도 지고이네르를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우현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 되어있었다. 의식하지 못한 한숨을 길게 쉬는 그의 귓가에 담담한 목소리가 닿았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지?" 언제 왔는지 이스드가 목련 아래에 서있었다. 망토를 걸치지 않은 그는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이미 져버린 목련의 꽃잎과 똑같은 색깔의 그것은 우현에게 에피서스의 병동 근처에서 이스드를 기다리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우현은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하도 안 와 지루해서 그랬죠." 짐짓 투덜거리는 우현을 향해 이스드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우현은 목련 아래의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를 따라 아무렇게나 앉은 이스드는 품에서 작은 책을 한 권 꺼냈다. 그것을 받아든 우현의 눈동자가 미심쩍음으로 가늘어졌다. "읽으라고 억지를 쓰면서 날 물 먹이려는 것은 아니죠?"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 방법이겠군." 이스드의 목소리는 제법 진지했다. 깨갱, 하며 꼬리를 내린 우현은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어?"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여야 하는 것이 책이다. 그러나 그 책의 페이지는 이스드의 옷마냥 새하얗기만 했다. 우현은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은 페이지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종이는 최고급품이 분명했다. "그건 교본이다. 언제까지나 흙바닥 위에 글자를 쓸 수는 없지." 책을 돌려받은 이스드가 맨 앞장을 펼쳤다. 우아한 필체의 글자 몇 개가 쓰여있었다. 우현이 알지 못하는 글자들이었다. "오늘 배울 글자인가요?" 이전에 배웠던 것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보이는 복잡한 글자들이었다. 우현은 코를 불만스레 찡긋거렸다. 그것을 본 이스드가 점잖게 말했다. "배울 마음이 넘쳐난다고 하지 않았어?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이번에는 우물에 빠뜨려 버릴 테니까." "으아악, 제발 참아줘요. 아직 초봄이란 말야." 질린 듯 중얼거린 우현의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현은 이스드의 얼굴을 티나지 않을 정도로만 흘긋거렸다. 그는 이스드의 냉정하다 못해 매정한 얼굴이 웃음으로 이지러지는 순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곧 사각거리며 글자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 우현,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는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스드는 몇 살이죠?" 질문과 동시에 펜이 주륵 미끄러졌다. 안 그래도 삐뚤빼뚤한 글자 위에 검은 잉크 점들이 뿌려졌다. 견본으로 주어진 글자가 워낙 유려하여 그 아래의 것들은 더욱 못생겨 보였다. 자신이 쓴 글자들을 보며 얼굴을 찡그린 우현은 그러나 사실 온 신경을 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에 주의를 준 이스드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스물 셋." "그 정도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러나 날카로운 눈매라든가 눈동자에 깃들인 침착함이 지나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스드는 자기 나이 이상으로도 보였다. 우현은 잉크가 다 빠져나간 깃털펜을 잉크병에 담그며 다시 물었다. "원래 어디 살죠? 그러니까 지금 어디로 향하는 중인지... 윽!" 손을 들어 우현의 머리를 가볍게 친 이스드가 말했다. "자꾸 말하지 말고 집중해. 말해줘도 너는 알 수 없는 곳에 살아." "쳇,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우현은 툴툴거리며 대꾸했지만 사실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각거리며 펜을 놀리던 우현은 지나가듯 물었다. "가족은? 형제 있어요?" "...없다." 잠깐 망설이던 이스드는 그러나 대답을 해주었다. 대답을 들었다는 것에 만족한 우현은 다음 질문을 생각했다. 연락처를 묻고싶었지만 이곳에는 전화가 없었다. 그때 그의 귀에 익숙한 질문이 고였다. "너는 지금 행복한가?" 세 번의 질문은 전부 다른 빛깔을 품고 있었다. 맨 처음의 것이 조금은 충동적인 것이었다면 두 번째의 것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아픈 듯 했으며 화가 난 것처럼도 보였다. 아마 그때 우현이 괴로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 번째인 지금은 상냥함으로 포장한 얼음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목소리 저편에 깔린 차가움을 느낀 우현은 이스드를 올려다보았지만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생각을 읽을 수 없게 했다. "응, 조금. 아니 상당히 행복해요." 우현은 애써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는 더더욱 차갑게 변한 얼굴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인가 생각한 우현은 조심스레 물었다. "이스드는? 그럼 당신은 행복한가요?" 이스드는 시선을 돌려 교본을 바라보았다. 우현이 되물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제멋대로 나간 글씨를 보며 이스드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도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확신이 엿보이지 않는 대답을 한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현이 엉겁결에 따라 일어나자 이스드는 교본을 가리키며 말했다. "잘 연습해둬. 제대로 외우지 않으면 정말로 우물에 빠뜨려 버릴 테니." 그의 음성에 은근하게 깔려있는 감정을 느낀 우현은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그것은 색채가 엷기는 했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참혹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우현은 돌아서는 이스드의 옷자락을 붙들고 다급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그 참혹함이 이제껏 알지 못했던 자신 안의 부분을 깨달아버린 후의 감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우현 역시 비슷한 느낌을 겪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스드는 우현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고는 엷은 미소를 띄웠다. 곧 그는 우현의 손을 가볍게 붙잡아 옷에서 떼어놓았지만, 미안하다는 말에 흔히 뒤따를 '괜찮아'라던가 '네 탓이 아니다'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내일 다시 오겠다." 그것이 사과를 정당화하는 것만 같아, 우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3장 온기 짙은 유리, 장미의 가시 -5- 두 번째의 밤, 다시 찾아온 이스드는 지난 밤의 일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다. 슬쩍 눈치를 본 우현은 그가 어젯밤의 일을 새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두 사람의 사이에 이제까지는 없던 담이 생긴 듯한 느낌이었지만 우현은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자기 보호란 본능이었고, 우현 또한 꿈으로 깨달았던 소원을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언제까지 있을 건가요?" 다섯 번째 밤의 질문이었다. 하루에 두 개씩 익혀나가니 전에 배운 것과 합하면 대략 반정도 배운 셈이 된다.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흘긋거리며 묻는 우현에게 이스드는 짓궂은 미소를 섞어 대답해주었다. "네가 글자를 다 배울 때까지. 나도 모르겠어. 과연 그때가 오기는 할까?" "나, 나도 이제 제법..." "거기. '하' 자의 꼬리는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올려야지." 우현은 찔끔 하고는 다시 글자를 써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글씨 쓰기에 열중하는 그를 향해 이스드가 지나가듯 물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것은 어때? 편한가?" "네. 엘리마는 무진장 상냥하고, 모리악 선생님은 호통을 치시지만 사실은 친절하고..." 거기까지 말한 우현이 킥 웃었다. "그리고 셰리는 요즘 슐리언에게 푹 빠져있어요. 편지에 적을 말들을 고안해내는 것을 보면 끔찍하다니까요. 맑은 눈동자는 호수 같다든가, 머리가 노을처럼 멋지다는 정도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니예요. 눈동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해도 좋다느니, 슐리언의 손끝에 닿는 꽃송이조차 부럽다느니. 사랑에 빠지면 다들 그런가?" 얇은 벽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우현이었다. 이스드가 무심히 대꾸했다. "글쎄, 그런가?" "너무 냉정한 말 아닌가요? 솔직히 이스드 정도면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 그렇게 말하던 우현은 순간 가슴이 찔끔하는 것을 느끼고는 창백해졌다. '찔끔? 내가 왜?' 그가 어떤 생각을 하든 이스드는 어디까지나 차분했다. "그런 목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은 절대 사양이다. 무엇보다도 신관은 여자를 가까이 하면 안 되니까." "에에, 그런가요?" 우현은 다소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본 이스드가 말했다. "오늘은 이만 하지. 피곤한 모양이로군." 이스드가 떠나고 난 뒤 자기 방에 돌아온 우현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 머리를 싸맸다. 「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나... 설마?」 이스드를 생각하면 두근두근한다. 함께 있으면 절로 긴장하고 그가 웃어주면 기뻐진다. 우현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런 욕도 안 나올 일이!」 "그건 동경이야." 다음날 아침 우물가에서 만난 슐리언이 명쾌하게 내린 해답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로 시작하여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던 우현은 안도와 불안이 반반씩 섞인 눈으로 슐리언을 보았다. "동경?" "그래." 낡은 도르래가 끼익끼익 울었다. 슐리언은 두레박을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 동경과 사랑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 나타나는 징후가 매우 비슷하거든. 우현 네가 말한 그 사람은 상대에 대해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을 품고, 그런 부분만을 보고있는 것 같아. 그건 사랑이 아냐. 어린 소년들이 기사에 대한 환상을 품고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일례로." 슐리언의 차분한 얼굴이 다소 짓궂은 표정을 띄웠다. "나는 셰리와 함께 있으면 어떻게든 손을 잡고 싶고 어깨도 끌어안고 싶어. 더한 것도 하고 싶어지지. 하지만 동경은 조금 달라. 직접적으로 어떻게 하고 싶다, 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 "으음, 그렇구나." "어때?" "나는..." 무심결에 말했던 우현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하하, 그러니까 내가 아는 그 사람 말이야. 그런 쪽에 관해서는 별 말 없었어. 그런데 슐리언? 학생이라더니 굉장히 똑똑한 모양이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누구나 겪는 일이니까. 사실 사춘기의 아이들치고 동경 한 두 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 누구나 겪는 동경. 슐리언의 단정은 우현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아침 내내 우거지상이었던 우현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고맙다! 그 사람한테 그대로 전해줄게!" 슐리언은 멀어져가는 우현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는 사람은 무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현의 감정이 동경이라고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우현은 그의 말에 수긍을 했지만 말이다. "거짓말은 아니니까." 그나저나 그것이 동경이라면 우현의 정신 발육 속도는? "...늦되구만." 슐리언이 중얼거렸다. 며칠 후의 저녁, 모리악 가는 한 사람의 손님을 맞게 되었다. 촛불의 황금빛을 받아 옅은 귤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에 셰리의 눈동자가 녹아버렸다. "내 변변치 못한 조수 녀석과 잘 지내주니 고맙군, 그래." "어서 와요. 어머, 예쁜 꽃이네." 모리악을 위한 질 좋은 포도주와 엘리마를 위한 꽃다발은 우현이 귀띔해준 아이템이었다. 갓 피어난 진달래 송이송이가 식탁 위에 놓이고 깊은 적보라색의 포도주가 잔에 따라졌다. 변변치 못하다는 모리악의 말에 투덜투덜거리던 우현은 셰리를 슬쩍 바라보았다. 수비대의 훈련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일찍 들어온 그녀는 특별히 화사하게 차리고 있었다. 지난 축제 때에 산 헤어네트가 언제나 풀어헤쳤던 머리카락을 흐트러짐 없이 감싸고 있었다. 헤어네트의 섬세한 그물에 박힌 구슬이 빛을 반사하여 반짝거렸다. 그 덕분인지 오늘의 셰리는 우현이 보기에도 예뻤다. 그러니 슐리언의 눈에는 오죽할까. 우현은 친구의 시선이 연신 그녀에게 향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소리를 죽여 킥킥거렸다. 우현의 친구 자격으로 온 슐리언의 자리는 당연스럽게도 그의 옆이었다. 우현의 계략인지 어떤지, 그 자리는 셰리의 맞은편이기도 했다. 결국 연인들은 눈을 별처럼 빛내는 상대의 얼굴을 마주하고 식사를 하게 되었다. 연신 붉어지는 뺨과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미소, 눈에 떠도는 행복감을 본 우현도 싱글싱글 웃었다. '봄이야, 봄.' 언젠가 했던 생각을 다시 한 번 떠올린 그는 엘리마의 눈치를 살폈다. 슐리언의 점수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엘리마는 어딘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숨기지도 않은 채 슐리언을, 그리고 셰리를 보더니 마지막으로 우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우현이 눈을 둥그렇게 뜨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슐리언이 마음에 안 드시나?' 우현은 모리악을 보았지만 그 역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우현을 보며 무엇인가 할 말이 잔뜩 있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부부는 한 번 시선을 교차하더니 서로의 얼굴에서 같은 것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서로 들떠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연인들뿐이었다. 거북살스러운 분위기가 어지간히 불편했던지, 우현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얼른 말했다. "그러고 보니 셰리? 오늘은 나한테 검술을 가르쳐주기로 한 날이잖아. 뒷마당으로 나가자." "그럴까?" 연인과 부모가 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 쑥스러웠던 셰리는 슐리언을 흘긋 보았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셰리의 검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나도 볼 수 있을까?" "물론이지. 그럼 나가자." 셰리와 슐리언이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모리악 부부는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방에 들어갔다. 우현은 부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이상하네. 도대체 왜들 저러시지?' 아무리 슐리언이 마음에 안 든다 해도 저렇게 얼굴에 드러낼 모리악 부부가 아니었다. 식사 중의 일을 곰곰이 되새기며 뒷마당으로 간 우현의 눈에 맨 처음 보인 것은 붙어 앉은 채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었다. 다정한 연인은 싱글의 염장을 지르는 영원한 소재다. "어이, 검술은?" 우현이 짐짓 목검을 한 번 휘두르며 말하자 셰리가 눈을 흘겼다. 사실 지금 그녀가 입고있는 옷으로는 검술은커녕 집안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우현은 건들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어이, 거기? 그림 좋은데?" 너무나 안 어울리는 느낌이라, 셰리도 슐리언도 웃음을 터뜨렸다. 슐리언이 말했다. "사실은 너도 이렇게 될 줄 알고 나가자는 말을 한 거 아냐?"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눈앞에서 대놓고 염장을 지르면 싱글은 섭하시지. 확 그냥..." "화악 그냥, 그리고?" 잊지 말자. 셰리는 어릴 때부터 검술의 기초를 다져온 아가씨였다. 우현은 킥킥 웃으며 그녀의 흘김을 받아쳤다, "예입, 알아 모시겠습니다요. 둘이서 잘 놀아라." 우현은 목검을 내려놓고는 어슬렁 어슬렁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셰리와 슐리언의 시선이 훑었다. "싱글은 섭하다, 라." 슐리언이 중얼거리자 셰리가 웃었다. "뭐, 접근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확실하니까. 온갖 시선은 다 끌어모으지만 그건 시선일 뿐이잖아." "저 녀석에게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으니까. 가까이 가기 전까지는." 차분한 듯 신비스러운 우현의 분위기에는 타인의 접근을 막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물을 닮은 듯 차가운 분위기는 단지 느낌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다들 그냥 눈 딱 감고 다가가서 말을 걸면 좋을 텐데. 한 번 입을 열면 환상 같은 것은 사라지잖아. 안 그래?" "환상이라." 슐리언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로 환상 같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가 물었다. "셰리, 우현은 도대체 어떤 녀석이야?" 이스드라는 이름을 가진 신관에 대해 묻고 싶었던 슐리언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기로 약속한 것도 있었고, 게다가 셰리가 알 것 같지도 않았다. 다음으로 궁금해진 것은 그런 사람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우현이었다. 이스드의 우아하며 예의 바른 몸가짐은 그러나 다른 사람을 부리는 것에 익숙한 자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껏 보아온 사람 중 가장, 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수려한 외모. 거기에 신관이라는 요소가 더해지면 소문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나 슐리언은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 위압감이라니.' 우현도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듯 싶었다. 그럼에도 그의 행동은 매우 친근했었다. 아니, 친근 정도가 아니었다. 슐리언은 그것이 신기했다. '독특한 분위기 이외에는 별 다른 것이 없는 녀석으로 알았는데.' 그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우현에 대한 정리를 끝낸 셰리가 입을 열었다. "좀 애매한 질문인데? 봐서 알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입도 험하고 무뚝뚝하거든? 누군가에 대한 칭찬은 입이 찢어져도 안 하는 분이야. 그런데도 우현에 대해서는 좋은 말을 해준다니까. 본인 앞에서야 툴툴거리지만. 어머니야 뭐, 눈에 보이도록 예뻐하지. 성실하고 착하고 예의 바르고, 등등등의 칭찬을 해대면서. 전에 얘기를 들었는데, 에피서스에 가기 전까지는 지고이네르의 무리들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했었나봐. 내년 1월에 다시 엘 티에르로..." "에피서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슐리언이 흐름을 자르며 물었다. 셰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어? 몰랐어? 그 녀석, 아버지랑 같이 돌아온 거잖아. 저번에 에피서스에서 전쟁이 있었을 때 우리 아버지도 징집된 거 알지? 거기서 만났다나봐. 몇 번이나 죽을 뻔 했다나? 뭐, 전쟁터에 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겠지만. 위생병이 위험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 종알거리던 셰리는 슐리언의 얼굴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 그냥." 말을 흐렸던 그는 그러나 셰리의 걱정하는 눈빛을 받고는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현은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데도 그렇게 많은 경험을 했잖아? 그런데 나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징집도 되지 않고 이렇게 영지에서만 생활하고 있어. 게다가 소문을 들으니 진료소에서의 일도 상당히 잘 한다고 하던데. 나는 정말로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구나 하고 생각하니 조금 의기소침해진 것뿐이야." 슐리언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는 거니까. 그렇지, 셰리?"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금방이라도 핑크발이 날릴 것 같은 분위기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3장 온기 짙은 유리, 장미의 가시 -6- 두 연인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알지 못하는 우현은 그때 욕실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문득 모리악 부부의 방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엿듣는 것은 나쁜 짓이므로 얼른 그 앞을 지나왔지만 묘하게 진지한 음성들에 대화의 내용이 궁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역시 슐리언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하지만 어디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우현은 슐리언에 대해 떠올렸다. 현재 마을에서 몇 안 되는 학생인 슐리언은 영주의 자제를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미 멜도바 백작의 눈에 들었다는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 영주의 밑에 들어갈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그는 사람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준수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며, 눈동자는 정직한 빛을 담고 있었다. 모리악 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이 훌륭한 사윗감이었다. '아, 혹시 딸한테 연인이 생긴 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우현은 무심코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때 셰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발그레한 얼굴로 연신 방글방글 웃고있었다. "간 거야?" "응?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아까부터." 셰리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우현은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슐리언은 지이임스응?" "무, 무슨!" "얼굴을 그렇게 새빨갛게 한 채 길길이 날뛰어도 소용없다고. 게다가 입이 웃고있는데야 더더욱." 모종의 썸씽이 있었군, 이라고 생각하는 우현은 집안의 분위기를 깜짝 잊고있었다. 두 사람이 떠드는 소리에 문이 열렸다. 거실로 나온 모리악은 엄격한 얼굴을 하고는 셰리를 보았다. "잠깐 이리 들어와라." "에? 네에..." 셰리가 들어가자 엘리마가 나왔다. 그녀는 우현을 의미심장하게 보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도우러 부엌으로 가려던 우현은 다음 순간 큰 소리에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벽에 부딪혀 웅웅거리는 바람에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그것은 사람의 음성이었다. "뭐, 뭐지?" 집안의 분위기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몇 번의 큰 소리가 더 나고, 잠시 시간이 흘렀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요, 이 망할 아버지!" 셰리의 목소리였다. 문을 부서지도록 열어젖힌 그녀는 우현을 보고는 멈칫했다. "셰리! 너 이 녀석... 우현. 좀 들어오렴." 셰리를 따라나온 모리악이 이번에는 우현을 불렀다. 모리악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놀란 우현은 쭈뼛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우현,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솔직하게 대답해주려무나." 이런 질문을 받으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우현은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셰리를 어떻게 생각하니?" "...네?" 얼떨떨하여 되물었던 그는 모리악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서야 이것이 농담이 아님을 깨달았다. "친구... 내지는 누이요." "혹시 너는 슐리언과 셰리의 사이를 알고 있었던 거냐?"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모리악은 긴 한숨을 쉬었다. 그 얼굴에서 아쉬움과, 포기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고집을 읽은 우현은 머뭇머뭇 말했다. "저어, 모리악 선생님..." "모리악 가는 대대로 진료소를 운영해왔다. 우리는 이것으로 빵을 굽고 옷을 지어 입어왔지. 그러나 우리에게 이것은 살기위한 수단만은 아니었다.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야.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이 넓은 영지에 진료소라고는 단 네 곳뿐이지. 셰리가 내 일을 물려받지 않으면 이 근방의 사람들이 곤란해지고 말아." 모리악의 눈동자가 우현을 직시했다. 우현은 싫은 예감을 느꼈다. "나는 셰리가 내 진료소를 물려받지 않을 거라면 녀석의 남편 될 사람이 대신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사실 너를 데려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그 이유가 컸기 때문이지. 너라면 좋은 의원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너희들 둘이 워낙 사이가 좋아 결혼하는 데에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리악이 말을 꺼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심 아니기를 바래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우현은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모리악은 고집 센 얼굴을 부드럽게 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안 되겠니? 너만이라도 좋다고 해준다면 그 아이는 설득할 수 있을 게다. 나도 엘리마도 너를 자식처럼 여기고 있고, 또한..." "하지만 모리악 선생님. 저는 지고이네르의 무리로 돌아갈 거예요. 아시면서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시죠?"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가족과 떨어진 경험이 있는 모리악이라면 그가 지닌 그리움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우현이었다. 그의 뱃속에서 배신감이라는 벌레가 몸을 뒤틀었다. 자신도 모르게 원망하듯 말하는 우현을 보며 모리악이 대답했다. "너는 순수 지고이네르가 아니잖느냐. 네가 무리로 돌아가려는 것은 방랑을 원해서가 아닌 그들을 만나고 싶어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힘든 떠돌이 생활을 영위할 것 없이 정착해 살면서 가끔 그들을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게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현은 모리악의 행동을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현, 얘야." "죄송합니다. 자식처럼 생각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저는 셰리와 결혼할 수 없어요." 모리악의 얼굴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우현은 그것을 차마 보지 못해 밖으로 나갔다. 정말로 좋아하는 스승에게 그런 실망을 시켰다는 것이 날카로운 죄책감이 되어 그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모리악을 기쁘게 하기 위해 셰리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 방에 들어간 우현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얇은 벽 너머로 서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간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섞인 것으로 보아 아무 것이나 후려치는 모양이었다. 그는 더 듣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그의 눈에 아름답게 장정된 교본이 들어왔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고 뒷마당으로 뛰어갔다. 스승이 그를 그런 이유로 데려왔다는 것, 모리악 부부가 그를 그런 눈으로 보고있었다는 것, 좋아하는 두 사람을 실망시켰다는 것, 그리고 의외의 말에 대한 배신감이 우현을 심란하게 했다. 그는 흙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스드가 오면, 그의 냉정한 얼굴을 보면 이 들끓는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달이 중천을 지나 점차 멀어지고 하늘이 뿌옇게 밝아와도 이스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우현은 퉁퉁 부은 눈을 부비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시뻘건 눈을 한 셰리가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을 돌려 서로를 외면했다. 모리악 부부가 의자에 앉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우현은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 고통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한 번 어색해진 분위기는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결국 셰리는 있지도 않은 숙직을 핑계로 집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밤 우현을 찾아와 글자를 가르쳐주던 이스드는 고운 남빛의 머리카락 한 올 비추지를 않고 있었다. 꼬박 열흘 동안 매일 뒷마당에 나가 그를 기다렸던 우현은 열 하루째가 되는 새벽에 결국 기다리는 것을 포기했다. '아마 바쁜 모양이지.' 우현은 이스드가 오지 못한 변명을 대신 해보았지만 절로 상심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교본을 침대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친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아, 진짜! 어떻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 그래?" 그리고 그날 오후, 성문을 통해 급한 파발이 들어왔다. 마상의 기수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마구 거리를 내달려 영주관으로 들어갔다. 나무 밑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던 우현과 슐리언의 옷자락이 말이 일으킨 바람에 정신 사납게 펄럭거렸다. 점차 작은 점으로 멀어져가는 기수를 보며 슐리언이 중얼거렸다. "설마 전쟁이 난 것은 아니겠지?" 셰리와 우현이 철저히 입을 봉한 덕에 슐리언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단지 셰리의 분위기를 통해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예상할 뿐이었다. 그 예상과 급한 파발이 겹쳐 전쟁이라는 짐작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현은 일부러 웃는 낯을 만들며 말했다. "괜찮을 거야. 정말로 전쟁이 일어난 거라면 소문이 먼저 퍼졌겠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소문이다. 그것은 발이 달린 생물에게 몸을 의탁해 온갖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불길한 소문은 특히 발이 빠르므로 정말로 전쟁이 났다면 소문이 퍼지지 않았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슐리언을 안심시킨 우현의 안색은 오히려 어두웠다. 저리 급히 달려가는 파발이 좋은 소식을 담았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한 뼘의 뙤약볕도 주지 않는 하늘에는 구름만이 자욱했다. 파발이 오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셰리는 숙직이라는 핑계를 대고는 영주관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의 모리악과 안절부절못하는 엘리마 사이에서 불편함을 느낀 우현은 식사를 마친 후 얼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봄임에도 바람이 세게 불었다. 윙윙거리며 휘몰아친 바람이 문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더니 뒷마당의 목련을 뒤흔들어 손바닥만큼 한 나뭇잎들을 우수수 떨구었다. 침대에 앉아있던 우현은 창문이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뒷마당에 세워놓았던 목검이 왈그락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졌다. "비가 오려나." 그는 창문가로 다가가 걸쇠를 단단히 채웠다. 올려다본 저녁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낀 잿빛이었다. 그가 나무로 만든 이중창마저 닫으려는 그때, 세차게 펄럭거리는 것이 곁눈으로 비쳤다. "어, 어라? 이런." 우현은 얼른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나무로 만든 작은 집게에 몸을 고정한 채 휘덕휘덕 자락을 나부끼는 빨래에 손을 뻗은 그는 그것들을 간신히 거두었다. 바람에 엉망이 된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 그것을 가다듬고 있자니 모리악과 엘리마가 나왔다. "어머, 이런. 내가 깜빡 잊었구나." 고맙다는 얼굴의 엘리마와는 달리 모리악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우현은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우뚝 솟은 영주관은 그날 따라 음습하게 보였다. 그때 저 먼 곳으로부터 미묘한 기운이 날아들었다. 뚜렷하게 무엇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희미한 그것은 겪어본 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점차 다가오는 감각 속에서, 우현은 팔을 들어 자신의 몸을 감쌌다. '살기다.' 늪처럼 깊으며 물에 젖은 옷처럼 무겁고 잘 갈린 창끝처럼 뾰족하다. 그것은 에피서스에 있을 때 하루가 멀다하고 느꼈던 살기였다.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마음을 품은 자 한둘로는 이런 느낌이 나올 수 없다. 사람을 죽이는 데에 익숙해진 자들이 한데 모여 뿜어대는 그것을 느낀 것은 우현만은 아니었다. "이건 설마?" 모리악의 어깨가 경직했다. 영문을 모르는 엘리마조차 조금 불안한 얼굴을 하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해요, 둘 다? 얼른 들어가요. 어두워서 그런가, 어쩐지 무섭네." 몸을 부르르 떨며 말한 엘리마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차디찬 밤바람이 뒷마당을 쓸었다. 흙모래가 날아와 아프도록 뺨을 때렸다. 그때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있었다. 흠칫 놀란 두 사람은 귀를 기울였다. 살기가 바람을 타고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이 영주관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우현은 모리악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같은 것을 깨달은 듯 얼굴을 잔뜩 굳히고 있었다. "들어가세요, 모리악 선생님. 제가 잠깐 살피고 오지요." 모리악을 끌고 안으로 들어간 우현은 얼른 검을 집어들고 나왔다. 그것은 에피서스에서부터 가지고 온 검으로, 멜도바 영지에 와서는 꺼내본 적이 없던 물건이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무게와 감각이 제법 안정감 있게 다가왔다. 그것을 꽉 움켜쥔 그는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한 두 방울 씩 떨어지기 시작한 비는 상당히 차가웠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3장 온기 짙은 유리, 장미의 가시 -7- 공유지에 다가갈 수록 말발굽 소리는 점차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의 음울한 노랫소리도 그것을 감춰주지는 못했다. 우현은 굉장히 가까운 곳까지 다가온 말발굽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척 보아도 잘 먹인 준마였다. 탄탄한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이 역동적이었다. 말 위에는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앉아있었다. 투구를 쓰지 않아 드러난 머리의 색깔은 가지가지였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에게서는 알 수 없는 기품이 감돌고 있었었다. 단순한 무뢰배는 아니라고 생각한 우현은 선두의 기사가 자신이 숨어있는 곳을 흘금 바라보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들켰는가 싶어 몸을 경직한 그는 다음 순간 기사가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살기의 근원은 그들이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기운을 내뿜으며 달려온 그들은 우현이 숨어있는 곳을 지나쳐 영주관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이 걸친 흉갑에 도드라진 한 송이 장미를 발견한 우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게다가 들고 있는 깃발은 물을 먹어 축 늘어져있기는 했지만 분명 문장을 수놓은 물건일 것이다. 나쁜 짓을 하려는 자가 자신의 문장을 이렇게 당당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과연 있을까. 잠시 생각한 그는 영주관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해 달렸다. 비에 젖은 셔츠가 거추장스럽다. 게다가 바지는 무겁게 젖어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하며 달린 우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영주관의 도개교를 통해 마지막 기사가 들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전신을 내리치는 빗줄기가 제법 사나웠다.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며 서성거리던 우현은 영주관에서부터 길게 뻗쳐 나온 살기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날카롭기만 하던 이제까지의 것과는 달리 진홍색을 띠고 있었다. 생생하게 솟아오르는 핏줄기와도 같은 모양으로 격하게 움직이는 살기를 느낀 그는 몸을 떨었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 "역시 따라왔군." 우현은 기색도 없이 다가붙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경직하고 말았다.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지만 또한 연상되는 부분이 있는 음성이었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는 무리의 선두에 서있던 기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검은 단지 장식용은 아닌 것 같군. 눈매하며, 보통 꼬마는 아닌 것 같은데?" 그의 음성은 근엄했고 또한 차가웠다. 우현은 온 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끼며 그를 마주보았다. 칙칙한 놋쇠색의 머리카락은 비에 젖어 착 내려앉아 있었고, 그 아래에는 쑥색의 눈동자가 있었다. 오른쪽 눈에 걸쳐 콧잔등에까지 나있는 검붉은 상흔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누가 시켰나? 하스티아 국왕인가?" 일국의 국왕을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게 들먹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우현의 머리 속을 스쳤다. 그가 입을 열지 않자 기사의 표정이 험한 빛을 띄웠다. 우현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일뿐입니다. 단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나왔다가 당신들을 보았어요. 국왕이니 뭐니, 그런 것은 나와는 상관없어요." "그렇다면 이 검은 뭔가? 네 것이 아니라는 변명은 하지 말도록." "나는 최근까지 에피서스에 있었어요. 그러니 가지고 있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요?" 에피서스, 라고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린 남자는 우현을 내려다보았다. 들고있는 검과 날카로운 눈매가 아니었더라면 조금 특이할 뿐인 마을 소년으로 생각할 모습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엄명이 있었다. "참전용사인가. 담대한 소년이로군. 죽이지는 않을 테니 얼른 집에 돌아가 잠이나 자.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니까." 말을 마친 기사는 몸을 돌려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틀림없이 죽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여 검을 뽑을 준비까지 했던 우현은 의외의 전개에 어리둥절했다. 절그렁 절그렁 하는 소리가 나며 남자가 말에 올라탔다. 어쩌면 사실을 캐낼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우현이 얼른 입을 열었다. "도대체 왜 이 마을에 온 거죠? 이 밤중에, 그것도 그런 흉흉한 기운을 뿜으며. 그리고 저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셰리는 오늘 숙직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불편한 자리를 피하기 위한 거짓말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영주관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었다. 기사는 이를 악무는 우현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등골이 오싹해진 그는 흠칫하며 검을 뽑으려 했다. 기사가 얕은 비웃음을 지었다.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나?" 그러나 만약 우현이 소리라도 질러 사람들이 나온다면 일이 귀찮게 된다. 들키거나 말거나 상관은 없었지만 되도록 비밀리에 처리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잠시 생각한 남자는 검집 째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것은 중간에 막혀버렸다. 자신의 검을 차단한 또 다른 검을 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기사는 이번에는 우현의 복부를 노려 팔을 움직였다. "흡...!" 묵직한 감촉이 배에 느껴진다. 우현은 이를 악물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떠벌리고 싶다며 마음대로 해. 단지 그때는 너와 네 가족의 생명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목덜미에 검집이 내려앉았다. 우현은 강한 통증과 함께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그럼에도 손에 쥔 검을 놓지 않는 것을 본 기사가 소리내어 웃었다. "근성 하나는 그럴싸하군." 우현은 비웃음과 감탄이 적절히 섞인 음성을 들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물가물한 정신 너머로 도개교가 다시 내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 위를 한 무리의 기사들이 건넜다. 그들의 갑옷과 깃발은 빗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어느 순간 바람이 불어와 깃발을 잡아당겼다. 암적색의 바탕 위에 섬세하게 수놓인 하얀 장미 한 송이를 본 그는 그 문장을 머리 속에 단단히 박아 넣었다. 정신을 잃고있던 우현이 다시 깨어났을 때 먼 하늘은 이미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으며 비는 가늘어져 있었다. 그는 차갑게 얼어붙은 몸을 간신히 움직여 일어났다. 눈앞에 있는 것은 이미 정적에 싸인 영주관이었다. 그 정적이 한바탕 전투가 끝난 직후의 적막, 혹은 쓸쓸한 불길함과도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뒤에서 영주관의 도개교가 내려졌다. 끼기긱, 하는 소리가 이토록 소름 끼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뼛속까지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고 선 그는 도개교 위를 달리는 수레를 보았다. 우현은 수레 밖으로 비죽이 내밀어진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돌렸다. 흙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수레가 한 번 덜컹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 바람에 수레 밖으로 늘어진 팔과 다리가 덜렁덜렁 움직였다. 애써 얼굴을 돌린 우현의 눈에 바로 곁까지 다가온 수레가 들여다보였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미 보아버린 것은 지울 수 없었다. '셰리.' 그녀의 밀랍 같은 얼굴에는 굳은 피가 엉겨있었다. 빗물이 스쳐 지나자 조금씩 녹으며 흘러내리는 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보이도록 했다. "도대체 왜..." 우현은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의 옆으로 몇 대의 수레가 더 지나갔다. 덜컹거리는 소리는 죽은 자의 신음이었으며 부슬부슬 떨어지는 비는 그들의 흐느낌이었다. 그는 귀를 틀어막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모리악, 엘리마, 그리고 슐리언. 그는 참담함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을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영주의 집사가 발표한 사인 - 영주관에 숨어든 자객의 손에서 영주를 지키고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는 - 도 유족들을 위로하지 못했다. 죽은 자를 살려내라는 탄식이 드높았지만 사인을 발표한 영주관은 음산한 침묵을 고수했다. 밤새 돌아오지 않는 우현을 기다리다 난데없는 시신을 맞이하게 된 모리악 부부는 망연자실해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모리악과 울다 지쳐 이제 꺽꺽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엘리마를 돌보는 것은 우현의 몫이었다. 사망 소식을 믿지 못하겠다며 직접 시신을 확인하고는 비척거리는 슐리언을 부축한 것도 우현이었다. 그 밖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며 돌아다니던 그는 셰리가 대지로 돌아가던 날, 기어이 앓아눕고 말았다. 밤새 비를 맞은 데다가 괴로움으로 상한 몸이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어째서?' 그것은 끊이지 않는 의문이었다. 자객? 그렇게 당당히 오고가는 자객이란 듣도 보도 못했다. 그는 열이 올라 어릿어릿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천장에 마악 피어나기 시작한 하얀 장미 한 송이가 들이박혔다. 이 참극을 일으킨 자의 문장이 분명했다. 그러나 함부로 입밖에 낼 수 없었다. 남자의 목소리, 너와 네 가족이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열로 뜨거워진 눈가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넘쳐날 것만 같았다. 잠깐 잠이 들었던 것일까. 우현은 자신의 이마에 와 닿는 서늘한 손을 느끼고 눈을 떴다. 쇳덩이라도 달아놓은 듯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자 어둠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하얀 옷이 보였다. 물고기 모양으로 보이던 그의 세상이 순식간에 커졌다. 줄곧 지켜보고 있었던 듯 눈을 뜨자마자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이 있었다. 짙은 남빛의 눈동자가 너무나 반가워, 우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그를 불렀다. "이...스..." "무리해서 말하지 마. 목이 상해있어." 이스드는 긁히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우현을 만류했다. 우현의 이마와 뺨을 짚어 열을 식혀준 그는 조금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어리석은 짓이지? 왜 비를 맞고 돌아다녀?" 걱정이 깃들인 꾸중을 듣자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우현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이스드..."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하여간 말도 안 듣지, 너는." 이스드는 우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에서 나온 엷은 빛이 우현의 이마를 통해 스며들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조금씩 안정되는 안색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웃은 그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몇 번 눈을 깜빡인 우현은 자신의 몸이 한 결 편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마워요, 이스드." 속삭임에 가까운 말에 잠시 멈칫한 이스드는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우현은 그의 얼굴이 상냥함으로 이지러지는 것에 멋대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눌렀다.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죽은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동경하는 상대와 단 둘이 있는 것은 생각보다 더한 긴장을 주었다. 우현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공기 중에 섞여있던 향기가 숨과 함께 폐부로 스며들었다. 부드러웠지만 조금 차가운 그 향기가 그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꼼지락거려 일어나 앉은 그는 입가를 움직여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왜 안 왔죠? 난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버렸나 했다고요." "잠시 일이 생겼었다." 우현은 '역시'라고 중얼거렸다. 그것을 들은 이스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한 표정을 본 우현은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 말한 것인가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곧 그는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와 우현을 보았다. "내일부터는 다시 글자를 가르쳐줄 수 있어. 배울 텐가?" "가르쳐 준다면야 나는 좋죠."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은 우현은 그러나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이스드는 우현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괜찮다는 것도 같았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도 같았으면 위로해주는 것도 같았다. 우현은 이를 악물어 우물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셰, 셰리...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어요. 나한테도 참 잘해주었고, 검을 쓰는 법도 가르쳐줬고, 그리고, 어, 그러니까..." 울음을 지우려던 말이 더한 울컥함을 가져왔다. 우현은 고개를 숙였다. 장미 송이의 문장, 얼굴에 상처가 있는 남자, 수레에 걸쳐진 채 덜렁거리던 창백한 팔. 그때 이스드가 우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 사소한 움직임과 함께 풍겨 나온 향내를 맡은 우현은 작게 웅얼거렸다. "이스드에게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나네요. 향수라도 뿌리는 모양이죠?"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 보였는데 엉뚱한 소리를 한다. 이스드는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겨주며 대답했다. "그런 것은 쓰지 않지만 향을 먹인 실로 옷을 꿰맨다고 들은 것 같다.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조금 차가운 것 같지만 차분하고 부드러워서 이스드에게 잘 어울려요. 맡아봐도 되요?" 웅얼웅얼 울먹울먹. 우현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스드는 잠자코 팔을 들어 우현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그와 함께 다가온 향이 온몸을 편하게 감싸안아, 우현은 마치 꽃에 파묻힌 기분인 채로 눈물만 줄줄 흘리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 하나 둘이 죽어나가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닌 곳에 있던 우현이었다. 아침에 인사를 나눈 사람이 저녁에 싸늘해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많은 죽음을 만났어도 또 다른 죽음을 보는 일은 괴로웠다. 어쩌면 평온하다고 생각했던 중에 맞은 죽음이라 더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우현은 이를 악물고는 이스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그의 팔은 포근하거나 따스하지는 않았지만 든든했다. 이스드는 어느새 잠이 든 우현을 가만히 떼어내었다. 눈물로 얼룩진 뺨과 발갛게 부은 눈가에 마음이 언짢았다. 손가락을 들어 눈물자국을 쓸어준 그는 우현을 조심스레 자리에 눕혔다. 자리가 불편했는지 '끄응'하는 소리를 내며 뒤척거리는 것이 어린아이 같았다. "슬픈가?"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아마 언젠가와 같이 입을 꾹 다물지도 모른다. 이스드는 얼굴을 가까이 하여 우현을 들여다보았다. 대륙인의 피부와는 또 다른 느낌의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이 달빛을 받아 희푸른 색으로 빛났다. 잠든 얼굴에 입체감을 주는 것은 달이 드리운 몽환적인 그림자였다. 그 얼굴에 뚜렷하게 박힌 진달래빛 입술이, 그곳에 묻은 타액의 반짝임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슬픔을 삼키느라 내내 입술을 씹고 있던 탓이었다. 뚜렷한 잇자국마저 찍혀있었다.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스드는 홀린 듯 고개를 숙였다. 습기 어린 감촉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 따스함을 입술 위에 느끼는 순간 척추를 타고 올라 머리끝까지 치민 뜨거움이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혀를 움직여 꽃잎 같은 입술을 가르고 고른 치열을 쓸었다. 입술로 강하게 빨아들이고 혀에 힘을 주어 이를 가르려는데 우현이 숨을 뱉으며 입술을 열었다. 입술로 울타리를 치고 이로 성벽을 쌓은 안에 있는 것은 새빨간 색깔의 과실이었다. 보물은 원래 꼭꼭 숨겨두는 법이며, 그러기에 탐할 가치가 있는 법. 우현의 혀에 자신의 것이 닿은 순간 그는 나직하니 뜨거운 한숨을 쉬고 말았다. 두 사람의 체중을 받은 낡은 침대가 삐걱거려도 그는 듣지 못했다. 자신조차 알지 못하던 격렬함으로 깊이 입맞추던 이스드를 일깨운 것은 가쁜 숨소리였다. 잠결에도 괴로웠던 우현이 내뱉은 것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든 그는 자조하고 말았다. 언제 침대 위로 올라왔는지 우현을 거의 덮다시피 한 자세는 마치. "...짐승 같군." 그것도 봄의 발정기에 접어들어 어쩔 줄 모르는 짐승 같았다. 아무리 치료를 해주었다지만 우현은 병자였던 몸이다. 내내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것이 뻔한 그를, 게다가 잠이 들어 있을 때 덮치다니. 만약 우현이 숨막혀 하지만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스치자 미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그 하나는 안도감과. "아쉽다니." 픽 웃어보아도 이미 느껴버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극렬한 허기를 닮은 무엇이 몸을 지배해, 단지 아쉽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굶주림이 그의 혈관을 타고 휘돌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우현의 입술을 보았다. 벼락을 맞은 듯 눈앞이 온통 새하얗게 되던 느낌은 지나치게 강렬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았다. 슬슬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바닥에 내려선 이스드는 눈에 익은 교본을 발견하고는 조금 쓴웃음을 띄웠다. 고작 글자를 가르쳐주겠다는 핑계를 댔던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잠이 든 우현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이스드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가 다시 나타난 장소는 다름 아닌 수반 앞이었다. 뒤엎어진 수반을 본 그는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간만에 들여다본 수반은 아파서 기진맥진한 우현을 비쳐주었다. 계속 지켜보지 않았던 자신에게 화가 난다는, 너무도 생소한 기분을 경험한 그는 수반을 뒤엎어버렸었다.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홧김이라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롭고 신선하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전부 너 때문이다." 낮게 중얼거린 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두둥실 떠올라 움직인 수반은 자신이 언제 엎어졌냐는 듯 물까지 담긴 채 제자리로 돌아갔다. 에에, 드디어 [그]=이스드의 공식이 성립되었습니다. 뭐, 다들 알고 계셨겠지만요 ^^ 비밀도 아니었지요, 뭐; 그나저나, 자는 사람에게 하는 것은 역시 진도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겠지요?(차라리 위로를 핑계로 끌어안은 쪽이 더 진도답네요;)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3장 온기 짙은 유리, 장미의 가시 -8- 이곳을 떠나고 싶다. 모리악이 그 말을 꺼낸 것은 봄도 다 지나간 5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슬슬 공기가 데워지기 시작한 날의 오전, 식탁에는 가라앉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디로 옮기시게요?" "조카가 있는 엘로소 영지로 갈 생각이다. 그 녀석도 의원이니 내가 도움을 줄 수 있겠지." 이곳에 있고 싶은 생각이 없구나, 라고 중얼거리는 모리악을 본 우현은 시선을 떨구었다. 모리악은 맨 처음 만났을 때보다 10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그을린 얼굴에 앉은 주름은 나이 먹은 고목의 밑둥과도 닮아있었다. 원래도 잿 빛인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가 섞여 연회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모리악은 줄곧 걷히지 않고 남아있는 침울함을 지우려 애써 웃으며 우현의 손을 잡았다. "같이 가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지고이네르의 숲은 이곳과 가까우니까, 너는 여기에 있다가 천천히 출발해도 괜찮아." 모리악과 엘리마는 셰리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만약 자신들이 셰리의 결혼에 대해 고집을 부 리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날 그녀가 굳이 영주관에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 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현 역시 그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우현은 모리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도 진료소의 계승을 바랬던, 이 넓은 영지에 사람 살리는 집은 단 넷 뿐 이라고 말하던 그가 스스로 이곳을 떠난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현은 손을 뻗어 모리악의 거친 손을 꼭 붙들었다. 기운 없는 어깨를 한 그에게 힘과 온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두 분만 어떻게 보내요. 여행길에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데. 엘로소 영지까지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우현은 되도록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보았다. 모리악 역시 칼칼한 미소로 마주보았다. 그날부터 우현은 진료소의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약은 다른 곳에 가서도 쓸모가 있겠지만 전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한 약과 쉽게 상하는 약을 분류했다. 덜 마른 약초는 다른 진료 소에 넘겼고 의자 등의 잡다한 집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엘리마는 집안을 정리했고 모리악은 여러 가지 서류를 처리한 후 이주와 관련한 허락을 받기 위해 영주관으로 갔다. 멜도바 백작의 집사는 모리악을 한 번 본 후 어렵지 않게 허가서를 내주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수십 년을 살아왔는데도 정리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구나." 모리악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엘리마는 슬픈 시선으로 뒷마당을 둘러보았다. 떠나는 것은 슬펐지만 어느 한 곳 딸의 체취가 묻어있지 않은 곳이 없는 이 마을에서 사는 것은 더한 고통이었다. 우현은 잠시 짬을 내어 슐리언을 방문했다. 슐리언은 해쓱하니 야윈 얼굴로 그를 맞았다. 퀭하니 들어간 눈은 그가 지닌 슬픔의 깊이 같았다. "나 간다." 우현이 불쑥 말했음에도 슐리언은 놀라지 않았다. "짐작은 하고 있었어. 내가 모리악 씨라도 이런 곳에서는 하루도 못 살 테니까." 슐리언은 잔뜩 지친 눈동자를 한 채 그렇게 말했다. 떠나고 싶은 사람 중에는 그 역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책임감이 강한 그는 전부 멋대로 내팽개치지 못할 것이었다. 우현의 눈동자에서 생각을 읽은 슐리언은 기운 없 이 웃으며 말했다. "부모와 연인의 차이겠지. 나는 몇 년만 지나면 훌훌 털고 일어나게 될 거야." 그 웃음이 어쩐지 우는 것 같은 느낌이라, 우현은 충동적으로 팔을 뻗어 슐리언을 끌어안았다. 힘없이 비틀거리며 당겨지는 것이 안쓰러웠다. "기운 내, 임마." 이런 말밖에 해줄 수가 없다니. 우현은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슐리언이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확연한 흐느낌을 담은 음성이었다. 우현은 그것을 못 들은 체 하며 가만히 서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슐리언은 붉어진 눈을 한 채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짐짓 씨익 웃으며 우현의 어깨를 툭 쳤 다. "짜식, 그렇게 안 봤는데 제법 강골이다."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파는 누구하고는 다르다고."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셰리를 매개로 한 사이였지만 충분히 친밀했으며 또한 기분 좋은 관계였던 그 들이었다. 슐리언은 고개를 숙여 우현의 이마에 자신의 것을 가져가며 말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거겠지?" 비슷한 약속을 누군가와 했었다. 지켜지기 힘든 말이었지만 희망은 언제나 존재했다. 우현은 슐리언의 이마에 자신 의 것을 부딪혔다. 툭 하는 소리를 들은 슐리언이 조금 웃었다. 멜도바 영지에서의 마지막 날 밤, 우현은 뒷마당으로 나갔다. 50개의 글자는 마스터한 지 오래였지만 이스드는 그 후에도 우현을 방문하곤 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밤에 떠나는 날짜를 말해 놓았으니 분명 찾아오리라는 생각이 들 었다. 우현은 만남의 장소인 목련 나무를 보았다. 둥근 잎사귀를 가득 매단 가지를 보자 이곳에 온 첫 날이 생각났다. 그 때 이 목련에는 회색 털옷의 겨울눈만 붙어있었다. '시간이란 참 빠르구나.' 향수와 회한의 중간쯤 되는 감정으로 목련 아래에 선 그는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닿는 것을 느끼고 어깨를 움츠 렸다.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을 정도로 자라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머리를 그러모았다. 이 정도까지 길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에 조금 쓴웃음을 머금은 우현은 옷자락이 움직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이스드가 새 하얀 옷자락 겹겹에서 향기를 뿜으며 서있었다. "역시 왔군요." 이스드는 우현에게 자신이 머무는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 영지 내의 여관 등에서 지낼 것이겠지만, 그런 것 치고는 전혀 소문도 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얼굴이라면 어딜 가도 화제 거리일 텐데, 라고 생각하며 조금 웃은 우 현은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우현은 자신이 이스드에게서 위로를 받아버린 것을 떠올렸다. 위로라고 말하면 듣기야 좋지만 그 정체는 동정일 뿐이다. 동정은 동등한 관계를 일그러뜨린다. 동정하는 것은 우월한 쪽이며 동정을 받는 것은 약한 쪽이다. 우현은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너그럽고 상냥한, 그러나 사실은 얕보게 만들 뿐일 울타리에 자꾸 감 싸이게 되면 나중에는 혼자 설 수조차 없어지게 된다. 그렇게 약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스드는 강해 보였다. 누가 무어라고 하든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사람이었다. 괴로운 상황을 억지로 참기 보다는 그 상황을 만든 원인을 찾아 없앨 사람이라는 것은 어쩌면 본능으로 깨달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강함에 이끌려 동경했던 것이라고, 그는 이스드를 올려다보며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보면 우현과 이스드는 대등했다. 그것이 위로 받음으로 인해 무너져 버렸다는 사실에 조금 자존 심이 상하지만 그래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마는 것은 우현이 그를 대단히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쩐지 지는 느낌인걸.' 어찌 보면 대단히 낯 뜨거운 생각을 한 우현은 얼굴을 슬쩍 붉힌 채 웃었다. 그것을 본 이스드가 눈을 가늘게 떴 다. "어디로 간다고 했지?" 이스드의 목소리는 언제나 차가웠다. 그것은 처음 만난 사람이 오해하기 딱 좋은 느낌의 차가움이었다. 아니, 사실 정말 차가운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우현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엘로소 영지요. 그곳에 모리악 선생님의 조카가 있다던 걸요. 하지만 나는 그곳에 정착하지 않아요. 선생님과 엘 리마를 모셔다 드리고 곧바로 엘 티에르로 출발할 거니까." 우현의 말을 들은 이스드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탁탁 털어 낸 후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네요. 주소를 가르쳐 줄 생각은 여전히 없나보죠? 편지라도 쓸 생각이었는데." "먼저 알아볼 수 있는 글씨를 쓰도록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끝까지 너무하네요." 우현은 짐짓 투덜거리며 이스드를 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잠시 웃은 이스드는 자신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갔다. 그 리고 우현은 곧 이스드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목걸이를 볼 수 있었다. 이스드와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가죽 줄 끝에는 삼각형의 펜던트가 매달려 있었다. 목걸이를 잠시 내려다 본 이스드는 우현의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 위에 그것을 얹어주었다. "나 주는 건가요? 중요한 것 같은데." 우현은 어두운 은회색의 펜던트를 홀린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성인 남자의 새끼손가락 정도의 크기인 펜던트는 은이 아닌 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중의 삼각형이 있었고 알아볼 수 없는 문양이 두 개의 삼각형을 단단히 연 결하고 있었다. 꼬불꼬불한 그것에서 아라베스크 무늬를 연상한 우현은 잠시 웃었다. "근사하네요." "귀족 혹은 신관과 마찰이 있거나 혹은 그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을 때 내보여라. 대부분의 일이 잘 풀릴 테니." 그 말에서 이스드의 신분이 제법 높다는 것을 짐작한 우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사실 그에게서 풍기는 분 위기에는 어지간한 사람은 가지기 힘든 고고함이 섞여있었다. 그의 말은 우현이 이미 짐작했던 사실의 확인에 지 나지 않았다. "정말로 주소, 안 알려줄 건가요? 끝까지?" 이런 물건을 건네줄 정도라면 이스드도 자신에게 제법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한 우현이 다시 물었지만 이스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주소라는 것은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네가 편지를 보낸다 한들 내 손에 쥐어진다는 보장도 없어." "그렇게 떠돌아다니나요? 연락할 방도가 없네. 다시 볼 수나 있는 건가요?" 바람이 불었다. 그 속에 섞인 방향(芳香)과 이스드 특유의 향기가 한데 몰려 우현에게 다가들었다. 잠깐 웃은 이스 드는 우현의 뺨에 손가락을 가져가 섬세하게 쓸며 말했다. "당연한 것을 말하는군." 향기가 조금 짙어졌다. 우현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빛 눈동자를 보았다. 키스에 한없이 가까운 각도에 당황한 그는 경직하여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스드의 이마가 우현의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마, 말이라도 하고! 놀랐잖아요!" 우현은 놀라움과 당황, 그리고 착각했다는 무안함에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그것을 본 이스드는 나직한 목소리로 웃었다. "왜? 입맞춤이라도 할 줄 알았어?" "이...! 누가요!" 정곡을 찔린 우현이 펄펄 뛰거나 말거나 이스드는 웃을 뿐이었다. "신관의 축복 정도는 해줄 수 있지만." "필요 없습니닷! 크아악! 웃지 말아요!" 6월 초의 밤. 초승달은 제법 살이 쪄있었다. 제 3장 終結 (그냥 시킬 걸 그랬나) 온기 짙은 유리라는 것은 평온했던 상황입니다. 아무리 따스하다 한들 유리니까 식기도 쉽고 깨어지기도 쉽겠죠. 장미의 가시야 아실 테고 ^^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4장 어긋난 길 -1- 태양이 쨍쨍 내리쬐이는 7월 중순의 한낮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으며 대기는 바람 한 조각도 품고있지 않았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척박한 대지를 한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흙먼지를 잔뜩 일으키며 달리는 마차는 수레나 달구지라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짐을 잔뜩 실은 사이로 중년의 남녀가 앉아있었다. 부부로 보이는 남녀는 잔뜩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차를 모는 사람은 기껏해야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어른이 있음에도 스스로 마차를 모는 폼이 제법 미더워 보였다. 그는 마차를 모는 중간중간 부부를 돌아보며 무언가 말을 건네곤 했다. 뒤통수에서 하나로 묶은 검은머리가 단정한 인상을 주었다. 이 세 사람은 다름 아닌 우현과 모리악 부부였다. 에코에게 배웠던 마차 모는 방법을 실행하는 것은 이번 여행이 처음인 우현이었지만 그럭저럭 해내고 있었다. 멜도바 영지를 떠난 지 한 달 가량 된 지금은 제법 익숙하게 마차를 몰고 있었다. '역시 나의 적응력이란.'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어디에 던져놔도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남자로서 기쁘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생각하면 어딘지 서글픈 느낌도 없지 않았다. 우현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원래의 세상에서는 생각도 못 할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이었다. '잡초.' 그 한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것을 누가 막으랴. 우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은 뇌가 익어버릴 정도로 뜨거웠다. 이렇게 더운 날씨는 비를 불러온다. 여행하는 동안 몸으로 익힌 사실을 떠올린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른편으로 가물가물하게나마 인가가 보였다. "모리악 선생님, 저쪽에 마을이 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그리로 갈까요?" 대답 대신 끄덕임이 되돌아왔다. 우현은 고삐를 잡아당겨 마차의 방향을 바꾸었다. "어라?" 사람들의 발길로 판판하게 다져진 길에 들어선 우현이 맨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이상스럽게도 낯이 익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 대륙에서 그가 알고있는 장소는 얼마 되지 않았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마차를 몰아간 그는 몇 채의 허름한 집이 늘어선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긴..." 이 무슨 기가 막힌 인연이란 말인가.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본 모리악 부부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때 바퀴와 돌멩이와 부딪혀 나는 덜컹거림을 들은 마을 사람이 방문객을 살피러 나왔다. 그들 중 섞여있는 30대 후반의 남자가 우현의 얼굴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자네는... 살아있었나?"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우현은 마을을 한 번 둘러보았다. 조잡하게 만들어진 집도 작은 텃밭도 여전했다. 그가 기대어 앉아있던 나무도 있었다. 한사코 떨어지지 않겠다고 소리치는 티티의 목소리를 저 나무에 기대어 앉아 들었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지고이네르의 무리와 헤어진 장소로 기억되고 있는 그곳은 화전민의 마을이었다. 전쟁터에 끌려갔던 화전민 중 돌아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여자는 생존율이 조금 더 높았지만, 에피서스에서 만난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꽤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아내도 그러했다고 말하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여기서 하루 묵어가도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비가 올 것만 같아서..." "상관없겠지. 빈집도 많으니까." 남자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우현은 얼른 마을을 돌아다니며 그럴 듯한 집을 물색했다. 그 와중에 에피서스에서 몇 번 얼굴을 보았던 사람과 만나기도 했다. 병동의 신세를 졌던 그 남자와 붕대 삶는 것을 도와준 여자가 부부라는 사실을 안 우현은 저도 모르게 조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세상은 참 좁구나.' 게다가 병동에서 목숨을 건진 다른 남자가 모리악을 알아보고는 닭을 한 마리 잡아와, 우현 일행은 그날 저녁 풍성한 식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좋은 일의 대가라고 생각하니까 더 맛있는데요? 아, 물론 그 좋은 일을 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모리악 선생님이지만. 설마 그렇다고 그만 먹으라고 말씀하시지는 않겠죠? 물론 들을 제가 아니라는 건 아시겠고요." 우현이 넉살좋게 말하자 모리악이 조금 웃었다. 엘리마가 간만에 솜씨를 발휘하여 만든 치킨 스튜는 무척 맛이 있었다. 우현이 맛있게 그릇을 비우고 다시 한 그릇을 청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자 엘리마는 엷게나마 미소를 머금었다. 기운 없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웃는 것을 본 우현은 안도감까지 느꼈다. 기어이 쏟아진 비는 낮 동안의 열기를 씻어 내렸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까지 깨끗이 끝낸 우현은 문턱에 걸터앉았다. 무겁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오래된 나무가 보였다. 분재처럼 배배 꼬인 탓에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나무 둥치는 두 아름은 되어 보이도록 굵었다. 그때는 저 나무에 기대 앉아있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에도 힘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깨에 걸쳐 등을 가로지른 상처는 티티를 달래는 내내 욱신거렸었다. 자신이 입었던 상처를 잠시 떠올린 우현은 곧 킥, 하고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X자로 교차되어있을 거야.' 퀴아네의 손톱으로 한 번, 그리고 검으로 한 번 등을 베였다. 어지간한 조폭도 이런 흉터는 가지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며 잠깐 웃은 그는 짐짓 얼굴을 찡그렸다. '훈장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 이곳은 어떤지 몰라도 원래의 세계에서는 남자의 흉터 역시 좋은 것이 못되었다. 그러나 우현의 입술은 웃고있었다. 이런 부상을 입으면서도 살아남았다는 자부심과 흉하게 남은 상처 자국을 다른 사람들이 안 좋게 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뒤섞인 생각은 꽤나 모순적인 것이었다. 잠깐 흉터에 대해 생각했던 우현은 그러나 곧 다른 것을 떠올리고는 싱긋 웃었다. 이번의 웃음은 기대에 가득 찬 것이었다. 이곳이 화전민의 마을이라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아이겐튼 영지가 있을 것이다. 에코는 아마, 아니 반드시 그곳을 지나쳤을 것이었다. 지고이네르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과 이제 곧 검은 호수를 향해 출발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 한데 섞여 굉장한 두근거림으로 다가왔다. 우현은 잔뜩 붉힌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만날 수 있어.' 지난 1월에는 만나지 못했지만 내년 1월에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평소의 배는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더위와 습기가 어우러진 끈적끈적한 공기마저 상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리악 부부와 헤어지게 된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지만 지고이네르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니까 영원히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비는 다음 날 아침까지도 내리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그것을 바라보던 모리악은 출발을 결정했다. 엘리마와 우현은 기름먹인 천으로 짐을 덮었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는 우비를 꺼내었다. 그 사이 모리악은 지도를 보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을 쭉 가다 보면 표지판이 나온다는 구나. 거기까지 가면 엘로소 영지는 다 왔다고 볼 수 있지. 얼른 가자꾸나." 모리악이 지도를 접으며 말했다. 곧 마차는 진흙탕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 튼튼하지 못한 마차이므로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우현은 천천히 마차를 몰았다. "우현, 저것을 보아라. 저 나무 밑에 난 하얀 꽃을 말이야. 저 식물은 이름을 에르멜이라고 하는데, 뿌리는 강장에 쓰이고 잎과 열매는 해열제의 재료로 쓰이지. 꽃은 꿀이 많아서 끓이면 달콤한 차가 만들어진다." 모리악은 여행을 하는 내내 우현에게 한 가지라도 더 가르쳐주려 애썼다. 생업에 관한 지식은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전해진다. 살아가는 밑천이 되는 것이므로 아무에게나 전해주지 않는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달은 우현은 모리악이 자신을 얼마나 귀여워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모리악은 귀를 기울이는 그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하지만 날것인 뿌리에는 독이 있어서 그냥 먹으면 위험해. 불에 대고 바싹 구운 후에 가루를 내서 꿀과 섞어 둥글게 빚는 것이 가장 좋지. 그 옆에 있는 꽃은 데이지야. 즙을 내어 상처에 바르면 좋단다. 잘 기억해 둬." "네." 그런 식으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하루 종일 마차를 달린다. 밤이 되어 노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불을 대낮같이 밝혔다. 어디에서 퀴아네가 나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도 퀴아네는 불을 꺼렸다. 불을 피운 우현은 그 근처에 쪼그리고 앉았다. 모닥불 근처에서 하게 되는 것은 주로 이야기였다. "퀴아네가 어디에서부터 생겨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해. 하지만 여느 생물들처럼 번식을 위한 교접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언젠가 퀴아네를 몇 마리 데려다가 우리 안에 가둬두었지만 그런 비슷한 시도도 없었다고 한다. 암수구별도 되지 않는 녀석들이니 제대로 된 실험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우현이 등에 있는 상처를 되새기며 퀴아네에 대해 묻자 모리악은 그렇게 대답했다. 오후가 되어 그친 비 덕분에 대기는 제법 시원했지만 그래도 여름이다. 모닥불로 인해 벌겋게 상기된 얼굴의 모리악은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그럼 어떻게 멸종하지 않는 걸까요?" "알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냐. 추측이지만 아마도 퀴아네는 사악한 자들의 영혼이 뭉쳐서 생긴 것이라는 말이 있다. 신학의 분야이니 나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악한?" "그래. 숲 깊은 곳에서 살면서 사람들을 죽여 시약을 만드는 마녀와 마인, 남을 저주하는 자나 그런 물건을 만드는 자, 정정당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남을 살해한 자 말이다. 에다마트께서 눈을 찌푸릴 정도의 행위를 하는 자들은 죽어서도 신의 분노를 받게 되는 거지." 우현은 가슴을 쿡 찌르는 죄책감을 애써 지우며 물었다. "그럼 전쟁에서는요? 저는 벌써 몇 명을 죽였는지 알 수도 없는데." "네 그 조그만 머리통은 어깨 위에 괜히 얹어놓은 것이 아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라고 달려있는 거야, 이 녀석아. 죽이지 않으면 죽는 그런 상황에서 가만히 칼을 맞는 것과 자살이 다를 게 무어가 있냐. 정정당당하지 못하다는 것은 공격할 의사가 없는 상대방에게 방어할 틈도 주지 않고 죽이는 것을 의미하지. 질투로 연적의 배후를 급습하는 청년이라던가, 전처의 자식을 독살하는 계모, 무고한 자에게 없는 죄를 몰아붙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귀족 등을 말하는 거야. 뭐, 귀족 같은 경우에는 신전에 돈을 듬뿍 바치고 죄를 변명하는 기도를 올려달라고 청하기도 하지만 말이야." 또 다시 죄책감이 스물스물 고개를 들었다. 우현은 독사의 세모꼴 대가리와도 닮은 그것을 얼른 짓밟아 없앴다. "그럼 지고이네르는요? 독약이나 불트를 만드는데." 독약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며 불트는 남을 저주하는 데에 사용된다. 그의 말에 얼굴을 조금 찡그린 모리악은 곧 고개를 저어 보였다. "지고이네르에게는 에다마트 이외의 다른 신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 신이 그들을 구원하겠지. 그만 조잘대고 잠이나 자거라." 모포를 잘 깔고 그 위에 몸을 누인 우현은 모리악을 올려다보았다. 불꽃의 적금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진한 황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음영이 뚜렷하게 드리워진 덕분에 주름이 더 깊어 보였다. 모리악의 눈가에 앉은 피로를 본 우현은 그것이 단지 여행의 탓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뒤로도 며칠을 꼬박 달렸다. 그리고 어느 날의 저녁, 그들은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무로 된 그것은 간단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아이겐튼 영지이고 왼쪽으로 가면 엘로소 영지다. 그들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사흘 후, 엘로소 영지의 든든한 성벽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원래 살던 곳의 영주가 이주를 허락하면 옮겨갈 장소의 영주에게 허가서를 보인다. 그러면 옮겨갈 영지의 영주는 큰 문제가 없는 이상은 이주를 허락해 주었다. 모리악처럼 기술을 가진 사람은 오히려 환영을 받곤 했다. 수문장은 모리악의 허가서를 흘금 보더니 감탄했다. "의원이라니, 굉장한데요. 파체 모리악... 혹시 페렛 모리악과 무슨 관계라도?" "그 녀석은 내 조카요." 그렇군요, 라고 말하며 엘리마를 확인한 수문장은 이어 우현을 보았다. 검은머리와 검은 눈에 시선이 머물렀다. "혹시 지고이네르요?" 살피듯 훑는 시선이 그리 탐탁지 않아 보였다. 조금 망설이던 우현이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였다. 모리악이 얼른 나섰다. "이 아이는 내 조수요. 엘로소 영지에 우리를 데려다주고 곧 다른 곳으로 갈 아이요만, 뭔가 문제라도?" "서류에 문제는 없지만..." 거기까지 말한 수문장은 입맛을 다시더니 이어서 설명했다. 1년쯤 전 엘로소 백작의 조카가 영주 대리의 자리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그 와중에 지고이네르의 무리에게 부하들을 잃는 일이 벌어졌다. 백작의 조카는 노발대발하여 그 무리를 쫓았지만 몇 사람을 죽일 수 있었을 뿐 전부 해치우지는 못했다. "돌아와서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을 식히지 못해서, 결국 영지에 지고이네르는 발도 못 붙이게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검은머리라면 보는 족족 잡아들이는 바람에 혼혈 여럿이 죽었어요. 다른 곳으로 갈 거라면 지금 떠나슈. 괜히 들켰다가는... 이크, 저기 있군. 저 사람이 바로 영주님의 조카라오." 우현은 조심스레 시선을 돌렸다. 녹색의 머리카락을 본 그는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물었다. "저 사람의 이름이 뭔가요?" "이름? 에, 그러니까... 클루딘이라던가." 그 이름은 머리 속에 남아있었다. 아이겐튼 자작 카이엔에게서 몇 번이나 들었던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생각을 떠올린 그는 카이엔이 클루딘의 외숙에게 사람을 보내었던 일을 기억해내었다. 왕복하여 열흘 정도가 걸린다고 했었다. 그 사람이 엘로소 백작이었던가. 우현의 안색에서 그 사건과 그가 무관하지 않음을 알아챈 모리악이 급히 채근했다. "얼른 떠나거라. 도망쳐!" 엘리마는 짐을 뒤져 음식물을 안겨주었다. 내몰린 우현은 한 번 돌아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정신없이 뛰어갔다. 숨막히게 더운 오후의 태양이 그의 머리카락 위에 쨍쨍한 햇살을 내려보냈다. 고백합니다. 이번 장은 앞부분에 이스드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컥!) 다 클루딘 놈이 나쁜 겁니다(변명 변명) ...넙죽.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4장 어긋난 길 -2- 클루딘은 숨이 턱턱 막히는 공기에 짜증스러워진 심사를 가누지 못해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그 대상은 그를 따라다니는 시정의 잡배들이거나 영지의 상인들이었다. 말채찍으로 옹기장수의 옹기를 죄다 깨부수던 클루딘은 동그마니 반짝거리는 검은머리를 발견했다. 검은색만 보면 치가 떨리는 기억이 있는 그는 맨땅에 엎드려 살려만 달라고 비는 옹기장수의 등을 되게 후려친 후 말을 돌렸다. 그 사이 검은머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저쪽으로 가겠다!" 클루딘이 크게 외치며 말을 몰아 가자 그의 일행들이 뒤따랐다. 말 탄 사내들이 지나가자 다들 몸을 움츠리며 길에서 물러났다. 우왕좌왕하는 소리를 들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성질 사나운 도련님을 본 수문장이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흘긋 본 클루딘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잿빛 머리칼의 남자와 갈색 머리칼의 여자는 있었지만 검은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상하군. 분명히 보았는데." 그가 중얼거리자 수문장은 누가 보아도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어깨를 움츠렸다. 클루딘은 수문장이 들고있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파체 모리악, 엘리마 모리악, 그리고... 우현?" 서류에 있는 이름은 세 개인데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수문장을 제외하면 두 명이다. 뭔가 건수를 잡았다 싶은 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클루딘은 채찍을 들어 수문장을 겨누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네놈의 등 껍질이 벗겨지도록 후려칠 테니 각오해라. 여기에 너희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지? 검은 머리카락의." 모리악은 몸을 뻣뻣하게 굳혔고 엘리마는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였다. 수문장은 얼어붙은 입을 간신히 열었다. "그, 그것이... 있었기는 하오나 이 사람들을 내려놓고는 바로 떠났습니다." "갔단 말이지? 왜 바로 떠났을꼬?" 클루딘이라고 자신에 대한 소문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포악하다는 말은 힘이 있는 자에게만 사용되는 단어다. 그는 그것을 귀족의 상징으로 받아들였지만 다른 하나의 소문은 결코 그냥 들어 넘기지 않았다. 의심을 해달라는 듯 창백하게 질린 수문장을 보며 클루딘은 서슬이 퍼런 미소를 지었다. "혹시 네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게 아니냐?" 클루딘의 파란 눈이 잔혹스레 빛났다. 수문장은 자신이 뭐 그리 선량한 사람이라고 미주알고주알 나불거렸을까, 라고 입 방정을 후회했다. 보다못한 모리악이 이를 질끈 깨물고 나섰다. "이 사람은 단지 우리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준 것뿐입니다, 나리. 제 조수인 우현은 검은머리인지라 오면서 들은 소문에 겁에 질려있었습니다. 어차피 우리를 데려다준 후 다른 곳으로 갈 아이여서..."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인가!" 서슬이 퍼랬던 얼굴은 이제 분노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모리악은 자신이 괜한 소리를 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지고이네르의 무리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발칙한 짓을 저질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 천한 것들이야 백 번 죽어 마땅하지요. 그러나 제 조수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때문에 이 늙은이가 주제넘은 행동을 했으니 부디 넓으신 아량을 베풀어 용서해 주십시오, 나리." 정중한 말을 들은 클루딘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모리악은 당장의 분노는 풀렸다 생각하여 안도했다. 그러나 그때 그의 귀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네 조수라는 놈은 어느 쪽으로 갔지?" "그, 그것은..." 클루딘은 모른다고 대답하는 부부에게서 시선을 돌려 수문장을 바라보았다. 수문장은 벌벌 떨며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모, 모릅니다. 그냥 도망쳤을 뿐으로 방향까지는..." "하나같이 쓸모없는 것들뿐이군." 채찍을 들어 말 궁둥이를 내리치려던 클루딘은 금세 손의 방향을 틀었다. 가죽으로 만든 채찍은 끝부분에 튼실한 매듭을 지어놓곤 했다. 그것은 게으른 말을 위한 좋은 징벌이었다. 그러나 지금 채찍은 말 궁둥이가 아닌 인간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채찍의 끝이 만든 벌건 자국이 수문장의 얼굴 한 가운데에 길게 새겨지더니 곧 피가 울컥 솟아올랐다. 클루딘은 안심하고 있다가 얻어맞은 수문장의 표정을 감상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의 손가락은 가죽 채찍 끝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가자!" 이번에는 정말로 말 궁둥이를 후려친 클루딘은 성문을 통해 영지 밖으로 빠져나갔다. 모리악은 그 뒷모습을 혐오스럽게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괜찮소? 우리 때문에..." 짐에서 붕대와 약을 가지고 온 모리악은 수문장의 상처를 꼼꼼히 치료해 주었다. 딱딱한 가죽 매듭은 심한 경우에는 살 뭉텅이를 떼어내는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피는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모리악은 피를 멈추게 하는 가루를 수문장의 얼굴에 뿌려주며 속으로는 우현의 안위를 걱정했다. 영지를 빠져 나온 클루딘은 먼저 주변을 살폈다. 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따라 나온 무리들을 향해 호령했다. "세 무리로 나눈다! 거기 둘은 저쪽 길로 가고, 그쪽의 둘은 아이겐튼 영지로 가는 길을 살펴라. 그리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숲을 뒤진다. 출발해!" 인간 최대의 적은 권태라고 했던가. 지루한 나날이 이어지면 색다른 즐거움을 찾기 마련이다. 클루딘은 이 사냥을 최대한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가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계절이었다. 때는 한여름의 저녁. 해가 져도 낮 동안의 열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움직이던 그는 결국 제풀에 지치고 말았다. "제길, 잘 들어! 나는 이만 들어갈 테니 반드시 그 놈을 잡아 내 앞에 대령하도록 해! 알겠어?!" 술과 행패로 소일하는 망나니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해도 한 쪽은 시정 잡배이며 다른 한 쪽은 영주의 조카다. 남자들은 지친 목소리로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클루딘이 말을 달려 영지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 한 사내가 투덜거렸다. "젠장, 이 더운 날 이 고생을 하게 만들다니 누군지 잡히기만 해 봐라. 아주 아작을 낼 테니까." 다른 한 사내가 긍정하듯 소리를 높였다. 사실 사내들의 분은 우현보다는 클루딘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입밖에 내어 말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같은 무리를 짓고 있다지만 조금이라도 더 클루딘의 눈에 들기 위해서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배반할 수 있는 관계라는 사실은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도망칠 시간이 많지도 않았을 텐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우현은 숨어있던 바위 뒤에서 걸어나왔다. 말은 정리된 길을 벗어나기 어렵지만 사람은 울퉁불퉁한 산길도 걸어갈 수 있다. 쫓아올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덕분에 시간에 맞추어 숨을 수 있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음식 약간과 검 한 자루뿐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게다가 쫓아오는 사람들을 피하면서 아이겐튼 영지까지 갈 생각을 하니 앞길이 막막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저쪽으로 달려갔다는 것은 내가 짚은 방향이 맞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니까.' 사실 표지판에 있던 아이겐튼 영지의 방향을 떠올렸던 것뿐이었다. 카이엔에게 가면 절대로 무사하다. 지난 번의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는 우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퀴아네와 산짐승을 생각하면 불을 피워야 하겠지만 산에 사는 것들보다 더욱 무서운 사냥꾼을 생각하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우현은 검을 뽑은 채 청각을 곤두세웠다. 이름 모를 새들이 한데 모여 합창을 하는 듯 숲은 시끄러웠다. '낮은 매미, 밤은 새냐.' 낮에도 매미의 울음소리로 귀가 따가웠던 것을 기억한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숲이 품어주는 생물의 것이 아닌, 그러나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닌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것인 그 비명은 여자의 그것처럼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두껍게 울려 멀리까지 흩어졌다. 깜짝 놀란 우현은 그것이 자신을 지나쳐간 추적자들의 것이라고 추측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잠시 고민한 우현은 일단 다가가기로 결심했다. 사삭, 사삭, 사삭. 길게 자란 수풀을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귓가를 울렸다. 여름의 후덥지근한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로 드나들며 윙윙 소리를 내었다. 그 리듬에 맞추기라도 하듯 나무는 음충맞은 춤을 건들건들 추고 있었다. 여름 특유의 습습한 풀 냄새가 그를 숨막히게 했다. 숲 전체가 숨을 죽이고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는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시끄럽게 지저귀던 새들마저 울음을 자제하고 있었다. 무엇에 놀랐는지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바람에 깃털 몇 개가 사방에 흩어졌다. 바로 곁에서 새의 날갯짓 소리를 들은 그는 놀란 숨을 진정했다. 그때 작게나마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흐윽..." 억눌린 신음은 고통과 겁에 질린 기색이 완연한 것이었다. 우현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뭇가지를 젖혔다. 삐죽빼죽한 가지 사이로 두 남자와 이질적인 하나의 모습이 보였다. "...!" 우현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앞을 바라본 그의 눈에 더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광경이 비쳤다. 한 남자는 쓰러져 있었다. 그의 다리 한 짝은 무릎 아래에서부터 찢겨나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뒹굴고 있었다. 등에는 검은 반짝임이 흥건했다. 어둠을 품어 검게 보이는 그것은 십중팔구는 피일 것이다. 그는 얼굴을 검게 물들인 채 실신하기 직전에 다다라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퀴아네의 거무튀튀한 잿빛을 확인한 우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우적거리는 소리는 너무나 가깝게 다가와 귀에 고여들었다. 퀴아네는 남자의 팔다리를 찢어내어 옷 채로 씹어 삼키고 있었다. 심장 부분을 가린 금속제의 약식 갑옷을 본 퀴아네는 화가 난다는 듯 그것을 떼어 던져버렸다. 먹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갑옷이 떨어지며 내는 쩔그렁 소리를 들은 우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할까.' 그냥 지나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구해야 하는 것인지. 우현은 고민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그를 쫓아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컸다. 물론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가능성 따위가 아니었다. '저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나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내버려둔 채 산길을 타고 몰래 지나가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현 하나가 덤빈다고 해서 당할 퀴아네도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퀴아네의 등을 바라보았다. 식사에 열중한 퀴아네의 등은 무방비로 비어있었다. 그리 예민하지 않으므로 몰래 다가가 찌르면 당할 것이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하던 그는 결국 검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영웅심이나 고결한 박애주의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대로 놓고 간다면 몇날 며칠은 밤잠을 설치게 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퀴아네라고 해도 목은 똑같이 약하겠지!' 우현은 이를 악물었다. 타는 듯한 긴장이 등 전체를 적셨다. '제발 이대로 돌아보지 말아라.' 간절하게 바라며 조심스레 다가간 그는 검을 들어올렸다. 웅크리고 앉은 퀴아네의 머리는 그의 어깨 정도에 높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제발!' 이 한 방으로 죽어주기를, 이라고 기원한 그는 검을 힘껏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기척을 느꼈는지 퀴아네가 고개를 돌렸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두툼한 눈두덩에 싸인 작은 눈이 우현을 직시했다. 넙죽 찢어진 입가에는 새빨간 피와 치즈빛 살점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흐읍!" 우현은 숨을 멈추고 검을 휘둘렀다. 퍼걱, 하는 소리와 동시에 묵직한 감각이 검날을 통해 전해졌다. 한동안은 느껴본 적 없는 그것은 그러나 사람을 찌를 때와는 달리 조금 물컹한 느낌이었다. "크으으..." 육중한 몸과는 어울리지 않게 기민한 퀴아네는 간발의 차이로 움직여 치명상을 면했다. 뭉텅 베어져나간 퀴아네의 어깨에서 녹색의 찐득찐득한 피가 흘러나왔다. 그 상처와 우현을 번갈아본 퀴아네의 작은 눈이 분노로 빛났다. "크으..." 우현은 퀴아네의 공격에 대비하여 검을 곧추세웠다. 퀴아네의 늘어진 살이 미약하게 흔들리는 순간 그는 '내가 뭐하러 나섰을까'하는 후회를 했다. 그러나 퀴아네의 움직임을 본 그는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어라?" 앞으로 돌진하리라고 생각했던 퀴아네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 것이다. 우현을 보며 크릉거리는 것으로 보아 어떻게든 찢어죽이고 싶은 모양인데도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혹시 상처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이 적기다. 우현은 긴장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핥고는 땅을 박찼다. 상처가 꽤나 중했는지 퀴아네의 움직임은 느렸다. 바로 앞까지 다가간 우현은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체중을 실어 위에서 아래로. "그어어..." 퀴아네의 입에서 이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깨에서부터 가슴까지 길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튀었다. 울컥 하고 튀어 오른 피를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만 우현은 그 퀴퀴한 냄새에 헛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억눌렀다. 그는 팔에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이번에는 옆구리를 꿰뚫었다. 녹색의 피로 칠갑을 한 퀴아네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퀴아네의 손발톱에 있는 독에 당한 적이 있는 그는 얼른 물러섰다. 다음 순간 퀴아네는 지축을 울리며 그 육중한 몸을 수풀에 뉘었다. "그윽, 그르륵..." 퀴아네의 목구멍에서 피가 끓는 소리가 났다. 손발이 바르작거리고 떨리는 것이 마치 큰 동물의 임종과도 비슷했다. 마지막으로 검을 내리쳐 퀴아네의 목을 딴 우현은 팔을 들어 얼굴을 슥 훔쳤다. "으욱, 빌어먹을. 욱..." 암녹색의 피가 길게 묻어난 팔을 보자 참았던 구역질이 다시 올라왔다. 큰 나뭇잎을 따 얼굴을 닦은 우현은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미약한 희망이 범벅이 된 이상한 표정을 지은 채 기절해있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4장 어긋난 길 -3- 우현은 남자의 상처를 살폈다. 등은 손톱에 다치지는 않은 모양인지 그냥 뭉개져 있었다. 남자의 셔츠를 칼로 쭉쭉 찢은 그는 우선 잘린 다리를 처매었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봐요. 이봐요!" 그는 남자의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뜬 남자는 우현의 얼굴을 보더니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흐아악!" "뭐야, 이 반응은. 기껏 구해주었더니 사람을 괴물 취급하네." 기분 나쁘게스리, 라고 중얼거린 우현은 몸을 일으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자신이 죽인 퀴아네의 피를 얼굴에 잔뜩 묻힌 채 그늘이 가득 드리워진 모습을 하고 우뚝 서있는 그는 상당히 무서웠다. 게다가 남자는 우현이 퀴아네를 쓰러뜨리는 모습까지 보고 기절한 것이다. 그는 더욱 겁에 질린 얼굴을 하는 남자를 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당신들 누굽니까? 날 쫓아왔나요?" 목소리가 절로 냉정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남자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시켰죠?" "크, 클루딘 님이..." 아무래도 잘못 걸렸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혹시 에코라는 지고이네르를 알고 있나요? 1년 전에 클루딘인가 뭔가 하는 놈의 부하를 죽였던 지고이네르 무리의 우두머리인데." "나는 잘은 알지 못하지만 그때 몇 놈을 죽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두머리를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그때 따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우현은 두 마리의 말이 겁에 질린 채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다가가자 말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자, 착하지. 다치게 하지 않아. 겁먹지 말고." 겁을 먹은 동물에게 성마르게 대하면 도망가 버린다. 우현은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말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실은 저 튼튼하기 이를 데 없는 발에 걷어차이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말에게 다가가자 남자는 더욱 더 겁에 질려 소리쳤다. "가, 가지 마요! 아는 것은 다 이야기할 테니까, 제발!" 우현에 대한 무서움보다 혼자 있는 것에 대한 공포가 더 큰 모양인지 남자는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우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안장 주머니에 쓸만한 게 들어있는지 보려는 겁니다." 그 바람에 우현의 얼굴이 똑똑히 드러났다. 남자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얼굴을 상상하고 있던 남자의 눈에 비친 것은 의외일 정도로 앳된 생김이었다. 남자는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소년의 상냥한 윤곽에 무심코 한숨을 쉬었다. 지레 겁에 질려있던 자신이 우습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겉모습이 어떻든 퀴아네를 죽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에도. 몇 번 뒷걸음질치던 말은 우현이 위해를 끼칠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음인지 곧 얌전해졌다. 서투른 동작으로 말의 목을 두드려준 그는 안장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는 몇 가지의 음식과 보기에도 민망한 그림으로 장식된 표지의 도색그림책, 그리고 술병이 들어있었다. 그 중 술병을 꺼낸 그는 남자의 다리에 그것을 뿌렸다. "으아악! 무엇을..." "가만히 있어요. 균이 들어가지 않게 하려는 거니까." 짓뭉개진 등에도 술을 뿌리자 이제는 숫제 뜨거운 물벼락을 맞은 애벌레 모양으로 꿈틀꿈틀 몸을 비튼다. 고통으로 눈물까지 어린 눈을 본 우현은 남자의 입에 술병을 물려주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끝났다. 우현은 눈이 더 순하게 보이는 말의 고삐를 잡아끌었다. "아마 클루딘에게 돌아가자마자 내 이야기를 하겠죠? 어디어디에서 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저, 절대로 그런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요! 절대로!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황급히 부정을 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폼이 더욱 수상했다. 우현은 남자를 미심쩍게 바라보았지만 어쩌겠는가. 기껏 살려놓고 죽이자니 - 게다가 다친 사람을 - 내키지 않았다. 우현은 말 위에 올라타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껏 구해놓고는 그것을 헛수고로 돌릴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굳이 위협하지 않아도 클루딘에게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말해줄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는 얼굴 맞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우현은 말의 배를 걷어찼다. 갑작스럽게 속력을 높이는 말에 깜짝 놀라 혀를 깨물 뻔했지만 다행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남자는 멀어지는 말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남아있는 말에게로 시선을 돌린 그는 거칠게 소리쳤다. "이리 와!" 말은 투레질을 할 뿐 남자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화가 치민 남자는 주먹으로 땅을 후려치려 했지만 등 근육이 상해있는 터라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자, 말아? 이리와." 남자가 억지로 부드러운 음성을 내어 말하며 손짓을 하자 그제서야 말은 한 두 걸음씩 다가왔다. 말에 지탱하여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남자는 등자를 밟으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진한 상실감이 찾아왔다. "이런 빌어먹을!" 씹어뱉듯 외친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움직였다. 등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 넘치고 있었고 다리 역시 비릿한 내음을 가득 흘리고 있었다. 어찌어찌하여 간신히 말에 올라탄 그는 이를 득득 갈며 그 자리를 떠났다. 남자의 보고를 들은 클루딘은 노발대발하여 무능한 부하들을 탓했다. 남자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는 것도 그에게는 아무 상관 없었다. 클루딘이 분을 못 이겨 날뛰다 못해 밖으로 나가자 사내들은 다친 남자를 근방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이라는 페렛 모리악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페렛은 없고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장년의 남자가 그들을 맞았다. "의원은?" 영지에서도 이름난 난봉꾼인 그들과 의원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미 안면을 익힌 페렛과 매우 닮은, 그러나 훨씬 늙은 남자의 모습을 본 그들은 거만하게 말하며 그를 밀쳤다. 이 정도쯤 하면 다들 겁을 먹곤 했다. "페렛은 왕진을 갔지. 나 역시 의원이야. 치료를 받기 싫다면 그냥 돌아가도 상관은 없지만." 그러나 남자는 꼿꼿하게 선 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게다가 그는 '페렛은 한참은 있어야 돌아오는데'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금방이라도 죽을 듯 새파랗게 질린 채 기절한 동료의 얼굴을 본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으르렁댔다. "잘못하기만 해 봐! 이런 진료소 따위는 단번에 뒤집어버릴 테니까!" 잿빛 머리칼의 의원은 남자들의 의례적인 으름장도 아랑곳하지 않고 환자를 살폈다. 문득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나 다시 눈을 내리깔아 잽싸게 표정을 감춘 그는 상처를 처맨 천을 익숙한 동작으로 풀어내고 약을 발랐다. 이제 별다르게 할 일이 없어진 무리들이 몰려나가자 갈색 머리카락의 중년 여인이 안 쪽에서 나왔다. "여보...! 누가 이런 잔혹한..." "힘으로 뜯어놓은 거야. 인간이 한 짓이 아니지." 여인은 의아한 듯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드문 웃음이 떠올라있기 때문이다. 남편의 말을 들은 여인의 얼굴 역시 밝아졌다. 그녀의 얼굴에 오랜만에 찾아든 밝음이었다. "우현 녀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이 정도 여유가 있다면 무사할 테니까." 남자는 술냄새를 풀풀 풍기는 천을 기분 좋게 두드렸다. 우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한 무리의 말 탄 사내들이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가 말발굽 소리를 처음 들었던 것은 퀴아네를 죽인 날로부터 사흘 후의 일이었다. 그 소리에 우현은 쓰게 웃었더랬다. 남자가 그에 대해 절대 발설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빨리 쫓아올 줄은 몰랐다. '내가 승마에 약한 것도 있겠지만.' 우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력을 높였지만 사냥감을 찾은 상대는 더욱 기운을 북돋아 그를 쫓아왔다. 엄폐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길게 펼쳐진 들판에 주홍빛 노을이 드리워졌다. 그 위를 달리는 긴 그림자의 수는 도합 일곱이었다. 양쪽의 말은 모두 비슷하게 지쳐있었다. 아니, 사흘간 쉴새없이 달린 남자들의 말이 조금 더 지쳐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 차이는 경미했지만 하루 종일 달려야 하는 이 상황에서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와 남자들이 서로를 발견한 다음날 오후, 두 마리의 말이 나동그라졌다. 남은 말들도 그리 온전해 보이지는 않건만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잡는다는 생각에 눈을 벌겋게 물들인 남자들은 쉼 없이 우현을 쫓았다. 그리고 아이겐튼 영지의 성벽이 가물가물하게나마 보일 즈음, 우현의 말조차 나동그라졌다. 다행히 말에 깔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떨어진 충격으로 잠시 멍하니 있던 그는 대지를 진동하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후다닥 일어난 그는 쓰러진 말을 보았다. 말은 입에 거품을 잔뜩 물고 애처로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내내 고마웠어." 버리고 간다는 것이 이렇게 죄책감 느껴지는 행위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우현은 피곤한 몸에 힘을 주어 달렸다. 온 몸이 말 잔등에 앉아있을 때와 같이 진동하고 있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으로 달려가는 그의 귓가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은 것 중 세 마리의 말이 나동그라졌다. 우현의 말이 넘어간 것을 보고는 됐다 싶어 잔뜩 지친 말을 재촉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제 말을 달리고 있는 남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뒤쳐진 동료들을 내버려두고 말을 달렸다. 남자는 공을 세울 수 있다는 기쁨으로 웃고있었다. 얼핏 뒤를 돌아보았던 우현은 먼 곳에서 홧김에 내리쳐지는 칼날의 날카로운 반짝임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를 여기까지 실어다 준 말이 애처로운 단말마를 올렸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심장이 두방망이질 친다. 다리는 힘껏 대지를 박차고 있었고 숨은 턱에까지 차있었다. 그러나 정신은 바람결에 실은 양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가슴을 조이는 두려움만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달린다 해도 인간의 다리와 말의 다리가 가지는 차이는 명확했다. 우현은 자신의 바로 뒤까지 다가든 호흡을 느끼며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쥐방울만한 녀석! 너 때문에 얼마나..." 숨을 씨근덕거리며 말한 남자가 손에 들린 채찍을 치켜들었다. 휘이익, 하는 바람소리로 위험을 알아챈 우현은 얼른 몸을 수그렸다. 그러나 그 순간 풀려버린 다리는 그의 몸을 지탱하지 못했고, 쓰러진 몸 위로 채찍이 바람을 가르며 지나갔다. "피해? 얌전히 후려맞아도 시원찮을 놈이!" 남자는 말을 재촉해 방향을 바꾸었다. 우현을 밟아 짓뭉개버릴 생각인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린 그는 후들거리는 팔로 몸을 지탱해 일어났다. 말은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피해봤자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시간을 끌면 남자의 동료들이 달려올 것이다. 무자비하게 움직이는 네 개의 가는 다리, 그 위에서 흔들리는 두 개의 좀 더 굵은 다리. 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검을 뽑은 우현은 그것을 냅다 휘둘러 공기를 갈랐다. "으아아악!" 다리가 잘리면 균형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빠른 속도로 달리던 말은 중심을 잃고 고꾸라졌다. 그 바람에 말의 육중한 몸 아래에 깔리게 된 남자가 신음했다. "크으윽... 이런 젠..." 그러나 그에게는 욕설을 내뱉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우현은 한 달음에 다가가 남자의 목에 검을 꽂아 세웠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울컥 솟아올랐다. "끄으으..." 마지막 숨과 함께 신음을 내뱉은 남자의 고개가 툭 소리를 내며 꺾였다. 그러나 그의 임종을 가련히 여겨줄 사람은 없었다. 우현은 남자를 찌르자마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남자의 동료들이 들이닥쳤다. "웃, 이런..." 앞다리를 잃고 바르작거리는 말과 그 밑에 깔린 채 목숨을 잃은 동료를 본 남자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들끼리 얼굴을 마주본 것은 이대로 계속 쫓아야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눈이 벌개져 잠시 잊고있었지만 자신들의 상대는 홀로 퀴아네까지 해치운 자였다. 동료 하나는 목숨을 잃었으며 자신들은 잔뜩 지쳐있었다. 그러나 마주본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자."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클루딘에게 매질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 매질로 끝나면 다행이다. 그들은 기운 없는 다리에 힘을 주어 달리기 시작했다. 우현은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양쪽 모두 지친 상태인지라 달음질 치는 다리는 느리기 그지없었다. 마른 우물에서 다시 물을 퍼 올리듯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힘을 짜내어 달리는 것은 양쪽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현에게는 멈출 수 없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다시 앞을 본 그는 이제 뚜렷해진 성벽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기쁨을 느꼈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는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모래밭을 달리는 느낌으로 허우적대며 뛰어가는 그의 귓가에 매정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피할 겨를도 없었다. 들었다고 느꼈을 때에 이미 소리는 아픔이 되어 그의 어깨를 후벼파고 있었다. 우현은 어깨에 박힌 화살을 바라보았다. 뒤이어 새로운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 보인다. 그는 얼른 몸을 웅크렸지만 화살이 한 발 빨랐다. "큭..." 이번의 화살은 다리에 들이박혔다. 눈물이 절로 나오는 고통이 몸을 관통했지만 우현은 이를 악물고 그것들을 잡아 뽑았다. 상처가 훑어지는 아픔이 화끈함으로 느껴지며 그의 정신을 깨웠다. 쫓는 남자는 이제 세 사람. 그 중 하나는 간간이 멈춰 서서 화살을 쏘아보내고 있었다. 마치 사냥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냥꾼 하나에 개 두 마리. 사냥꾼은 만족스럽게 그를 바라보았고 개 두 마리는 침을 흘리며 언제라도 달려들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승리를 확신하여 기뻐하는 것도 같았다. "잘했어! 맞았다!" "이제 다 잡은 고기야!" 우현은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다시 달렸다. 조금만 더 가면 아이겐튼 영지다. 저곳에만 들어가면 무사했다. 결코 이런 곳에서 어이없게 붙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저 따위, 사람을 사냥하듯 행동하는 저 따위 인간 말종들에게는 오기로라도 잡혀줄 수 없었다. 「내가...」 으드득 갈아붙인 잇새로 악에 받친 말이 새어나왔다. 뒤에서는 남자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성벽과의 거리보다 남자들과의 거리가 더 가까웠다. 발자국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남자들은 승리감에 도취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화살이 한 대 더 날아왔지만 우현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떨어졌다. 「네깟 새끼들 따위의 앞에서 쓰러질 성싶으냐!」 눈물이 스며 나온다. 통증과 여름의 열기로 머리는 온통 뜨거웠다. 진홍의 노을은 태양의 울음이다. 단발마를 힘껏 내지르며 끝끝내 지지 않겠다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태양은 내일도 말간 얼굴을 다시 내민다. 이번에는 비통함이 아닌 기쁨으로 얼굴을 붉히며. 다리가 비틀거렸다. 우현은 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것은 여름임에도 제법 서늘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손이 뜨겁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열로 뇌가 전부 녹아버린 듯 어지러웠다. 「얼간이, 바보, 멍청이! 쓰러지면 죽여버리겠어! 포기하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겠어!」 그것은 우현에게 마지막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근성과 자존심이었다.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마저 손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전부 놓아버렸으니까. 새로이 주어진 환경에서마저 그래버리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와 준 신을 볼 낯이 없었다. 우현의 지척까지 달려든 두 남자는 뜻을 알 수 없는 언어로 악을 쓰며 검을 뽑아드는 그를 어리둥절하여 바라보았다. 고통과 열기와 눈물로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한 채 노려보는 소년에게서는 광인이나 가질 법한 분위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들에게 흠칫하는 마음을 주었다. "내가 도대체 뭘 했기에 이렇게 쫓아오는 거야?" 이를 부드득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들은 위축된 마음을 숨기려 짐짓 허세를 부렸다. "너를 잡아오라는 클루딘 님의 명령이시다! 순순히 잡혀주면 목숨만은 보장해주지!" "클루딘? 하도 못나 영지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는 그 개자식 말이냐?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잡아오라고 시키는 거야?" 눈물을 머금어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상실한 자의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 남자가 말했다. "네, 네가 고르겐을 죽였잖아!" "네놈들이 먼저 나를 쫓아왔잖아!" 우현은 발끝에 힘을 주어 흙을 걷어차며 악에 받친 소리로 외쳤다. 그와 동시에 그는 몇 걸음 나서며 검을 휘둘렀다. "으윽! 이 놈이...!" 눈에 들어간 흙먼지에 신음하며 얼굴을 가리던 남자는 섬뜩하게 다가드는 오싹함을 느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검을 움직였지만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사악'하는 느낌에 뒤이어 '챙그랑'하고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은 그 다음이었다. "으아아아악!" 잘려나간 팔을 움켜쥐고 주저앉은 남자는 이미 우현의 대상 외였다. 그는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두 개의 쇠붙이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판 위에 메아리쳤다. "이 조그만 것이 감히...!"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남자 역시 힘이 다 떨어졌기는 마찬가지였다. 팔에 힘을 주어 우현을 밀쳐낸 남자는 얼른 몇 걸음 물러섰다. 미친개처럼 달려드는 사람을 상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슬금슬금 물러서는 남자를 본 우현은 땅에 검을 박아 몸을 지탱했다. 진한 자줏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활을 든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쫓아오지 마. 다시 쫓아오면 정말로 죽여버릴 거야." 남자를 힘껏 노려보며 말한 우현은 몸을 돌려 달려갔다. 구멍이 난 자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절뚝거리며 달려가는 그의 귀에 몇 번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흐윽!" 비명을 지를 힘도 없었다. 우현은 툭툭, 하는 소리와 함께 들어박힌 화살의 여파로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이제 아이겐튼 영지는 바로 앞에 있었다. 검을 의지해 몸을 일으킨 그는 다시 몇 걸음 걸어갔다. "저, 저기 좀 봐!" "이런...!" 누군가 팔을 붙들었다. 우현은 점점 검어져 가는 시야를 느끼고 몇 번 눈을 깜빡거렸다. 쫓아오던 남자들과는 다른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 이봐! 너 지고이네르냐?" 아이겐튼 영지의 수문장인가. 그는 아득한 정신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우현은 남자의 팔 안에 무너지듯 기대며 중얼거렸다. "카이엔... 아이겐튼 자작님을..." 안전한 곳에 닿았다는 생각에 힘이 빠진다. 그는 눈을 감았다. '도대체 이게 몇 번째의 기절일까.' (미안해, 우현아;;)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4장 어긋난 길 -4- 카이엔은 잰걸음을 옮겼다. 만신창이가 된 지고이네르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영주관을 빠져나와 급히 성문으로 말을 달린 그는 검은 머리카락의 사람을 안은 채 어쩔 줄 몰라하는 수문장을 발견했다. 의원이 치료를 하고 있다지만 부상자에게 바깥 공기는 그리 이롭지 않다. "왜 안으로 들이지 않..." 다그치려던 그는 수문장의 옷깃을 힘껏 붙잡은 손을 볼 수 있었다. 하얗게 질린 그 빛깔은 여느 지고이네르와는 조금 달랐다. 혹시, 하는 마음에 얼굴을 확인한 카이엔이 얕게 신음했다. "이 소년은..." 바로 1년 전에 에코의 무리에 섞여 이곳에서 나간 우현이 홀로, 그것도 이런 꼴로 돌아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그런 생각을 하며 소년의 상처를 훑던 카이엔은 문득 그 손에 시선을 주었다. 우현의 또 하나의 손은 피가 흐르는 검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카이엔은 질렸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우현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영지 바깥은 확인해 보았나?" "네. 엘로소 영지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 아이를..." 클루딘이 지고이네르를 잡아들여 족친다는 사실은 그 역시 익히 들어 알고있었다. 그것을 피해 여기까지 왔으리라. 도망쳐온 과정이 험난했다는 것은 우현의 검이나 상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안 그렇게 봤는데 굉장히 강인하군." 카이엔은 하긴, 이라고 뒤이어 중얼거렸다. 우현이 퀴아네의 손에서 아이들을 지켜내고 겁탈 당하려는 레사티나까지 구하려 들었음을 떠올린 것이다. 몸을 숙인 그는 우현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우현, 손을 놓아도 돼. 이제 안전하니까. 이봐?" "소용 없습니다요, 자작님. 제가 아까부터 내내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히엑?" 그것은 꽤나 신기한 광경이었다. 수문장이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 않던 우현의 손가락이 카이엔의 말 몇 마디에 스르륵 힘이 풀려버렸다. 챙그랑, 소리와 함께 피묻은 검이 떨어졌다. 수문장은 땀에 젖어 꼬깃꼬깃해진 옷을 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카이엔은 일련의 과정을 불가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지?" 문득 우현이 지고이네르에게 처음 발견되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카이엔은 그가 깨어나면 반드시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옮기도록 지시했다. 우현이 다시 눈을 뜬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창을 통해 내리쬐이는 햇살이 눈꺼풀을 따갑게 찔러대었다. 무어라 웅얼거리며 눈을 비비려던 그는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아...파..." 몽롱하니 젖어있던 잠의 여운에서 깨어날 정도로 등이 뜨끔거렸다. 낮게 신음한 그는 푹신한 침대 위에 엎드린 채인 자신을 발견했다. 이대로 잠을 잤는지 목이 뻐근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우현은 그곳이 익숙한 방임을 깨달았다. 이전에 아이겐튼 영지에 왔을 때에도 그 방에 묵었던 것이다. 신발을 찾는 그의 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깨어났음을 모르는지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어왔다. "어머, 일어나셨... 움직이셔도 괜찮아요? 크게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우현보다 한 두 살 연하로 보이는 연두색 머리카락의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왔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우현을 다시 침대로 밀어 넣었다. "누워 계셔요. 의원님을 모셔올게요."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우현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재삼 느껴졌다. 문득 자신의 옷이 갈아 입혀져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얼른 품을 더듬은 그는 목에 무사히 걸려있는 목걸이를 확인하고는 미소지었다. 곧 의원이 들어와 그의 등을 살폈다. 우현은 그의 등을 본 하녀가 작게 신음을 하며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들으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등에는 화살에 의한 상처 말고도 이전의 흉터가 있을 것이다. 의원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뭐하다가 왔는데 몸이 이렇게 엉망입니까? 혹 용병이요?" 우현은 마주 헛웃음을 지어줄 뿐이었다. 우현이 깨어났다는 소식은 금세 카이엔에게 전해졌다. 아침식사 중에 소식을 접한 카이엔은 식사를 채 끝마치지도 않고는 급한 걸음으로 우현의 방에 올라갔다. 마침 상처의 치료를 마친 우현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카이엔의 모습에 반색을 했다.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진 말에 우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왜 혼자 이곳에 온 거지? 다른 사람들은? 함께 있지 않았어?" "...에코 마마, 이곳에 오지 않았나요?" 두 사람은 얼굴을 잔뜩 굳힌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우현이었다. "작년에 이곳에서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헤어졌어요. 나랑 몇 사람이 다쳐서 여행을 계속하기 힘들었거든요. 에코 마마는 우리를 근처에 있는 화전민의 마을에 내려놓고 클루딘을 맞는다고 말했죠. 헤어지게 되면 1월에 검은 호수에서 만나자고 그랬었는데 나는 사정이 있어 가지 못했어요. 그래도 이곳을 지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왔습니까?" "안 왔어. 나 역시 작년에 본 것이 마지막이야. 네가 피투성이로 나타났다고 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생각했다. 안 그래도 이웃 영지에서 지고이네르를 잡아들이고 있으니까, 분명 너 혼자 어떻게든 도망친 거라고. 그런데..." 우현은 말꼬리를 흐리는 카이엔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단지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이라면 그가 이렇게 초조해할 이유가 없다. 우현의 물끄럼한 시선을 느낀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아직 모르고 있군." 뭘? 묻는 듯한 우현의 얼굴을 본 카이엔은 몇 번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망설이다 말했다. "국왕 폐하의 명령으로 지고이네르 탄압이 시작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아직 이곳까지 명령서가 내려오지는 않았지만 이런 소문은 십중팔구 사실이니까. 에코의 무리가 아직까지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정말로 잡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는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린 우현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카이엔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쉬어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놓쳤다고?" 집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나갔다. 클루딘은 테이블을 쓸어 물건을 넘어뜨리고 마시던 술잔을 부하들에게 집어던졌다. "그깟 놈 하나 잡아오는 것도 제대로 못 해?! 그러고도 어슬렁어슬렁 돌아와? 이 어리석은 것들!" 남자들은 머리를 숙일 뿐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괜히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가는 오히려 클루딘의 역정을 살 뿐이라는 것을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있었던 것이다. "꺼져라, 이 버러지 같은 것들아! 이런 자식들을 부하로 두고 있어야하는 내가 안쓰럽구나!" 클루딘은 우르르 몰려나가는 남자들의 뒷모습을 향해 다시 한 번 물건을 집어던졌다. 누군가가 맞았는지 작은 신음소리가 뒤이어졌다. 홀로 남은 클루딘은 생각에 잠긴 채 신경질적으로 방안을 거닐었다. 방은 폭풍이 지나간 듯 엉망이었다. 실크가 우아하게 흐르던 커튼은 뜯겨져있었고 금실로 문양을 짜 넣은 양탄자는 깨진 술병에서 흘러나온 술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술병의 조각을 와그작 소리가 나도록 힘주어 밟은 그는 울화통이 터져 중얼거렸다. "아이겐튼, 그 더러운 잡종 놈..." 클루딘은 혼혈 주제에 자작의 지위에 올라있는 카이엔 아이겐튼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싫어했었다. 그때는 클루딘도 카이엔도 영주의 아들이었는데, 순수한 귀족도 아닌 그가 자신과 비슷한 대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싫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숙부의 영지에 몸을 의탁한 신세가 되었는데 그는 어엿한 영주이며 자작이었다. 클루딘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빌어먹을 법황!" 다시 한 번 집기가 부서져나갔다. 클루딘은 거친 숨결을 한 채 물건을 걷어찼다. 충혈된 눈동자의 자신이 얼마나 추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리라. 곧 그는 문을 벌컥 열어 젖히며 소리쳤다. "나갈 준비를 해! 아이겐튼 잡종놈의 영지로 간다!" 지고이네르는 에코의 무리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우현은 지금 다른 지고이네르의 무리가 영지에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엔이 그들에게서 에코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우현은 재빨리 창문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손님은 그가 바깥을 보기 전에 모습을 감추었다. 몸이 단 그는 얼른 방을 나섰다. 화살에 맞은 부분이 쑤셔왔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서 오시구려, 클루딘 공. 이곳까지 어인 일로 오셨소? 엘로소 백작님은 평안하십니까?" 젊은 영주가 몸소 나가 클루딘을 맞았다. 카이엔은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클루딘을 관찰했다.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심술과 흉폭함이 그의 미남형 얼굴이 가진 장점을 모조리 삼켜버린 듯한 인상이었다. 카이엔의 의례적인 인사를 들은 클루딘은 그 인상을 더더욱 안 좋게 만드는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클루딘으로서는 최대한의 자기 방어였지만 그것을 간파한 카이엔에게는 우스울 뿐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는 당신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오만, 아이겐튼 자작. 이곳에 내 부하를 죽인 살인자가 와있다고 들었소. 그는 지고이네르가 아니라고 알고 있으니 자작이 보호할 이유도 없지 않소이까? 내게 내어주길 바라오." 잠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귀족들의 사교법이다. 게다가 이곳은 영주관의 뜰.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한 장소는 결코 아니었다. 귀족의 행동에는 복잡한 예의와 절차가 뒤따르는 법이었으며, 그것을 어기는 것은 상대방을 업신여긴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었다. 카이엔은 미간을 찌푸려 자신의 심기가 상했음을 은근히 주의시켰지만 그런 것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행동할 클루딘이 아니었다. 카이엔은 포기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일단 안으로..." 그때 클루딘의 눈이 한 곳으로 향했다. 카이엔 역시 그 시선의 궤적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짓고있는 우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여름이라 더웠는지 간소한 셔츠에 바지만 입고 모자나 두건 등은 전혀 쓰지 않은 모습이었다. 장식이니 자수가 전혀 없어 검박한 인상을 주는 옷이었지만 평민이 입을 수 있는 옷감은 아니었다. 아이겐튼 자작의 몰락한 친척 정도로 생각할 차림이다. 그러나 우현의 얼굴을 확인한 클루딘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영지에서 쫓겨날 때에 비웃고 있던 그 지고이네르가 아닌가!' 한편 우현 역시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클루딘의 녹색 머리칼은 그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우현은 이 귀족 망나니와 제대로 얼굴을 맞댄 적은 없었으니 본 듯한 얼굴이라는 느낌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눈동자를 굴려가며 생각하던 우현은 엘로소 영지의 수문장이 했던 말을 기억해내었다. 엘로소 백작의 조카가 영주 대리의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했었다. 그리고 우현은 1년쯤 전에 끌려나가며 악을 쓰던 녹색 머리칼의 청년과 눈이 마주쳤었다. 우현의 눈동자에 알겠다는 듯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것을 읽은 클루딘은 모욕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느낌을 받고 눈을 부릅떴다. 허리에 찬 묵직한 롱 소드에 손을 올리며 한 걸음 다가서는 그를 말린 것은 카이엔의 목소리였다. "클루딘 공. 내 손님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카이엔은 우현을 발견한 클루딘의 표정이 점점 흉악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는 '아차'하고 혀라도 차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가 우현을 알아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 자요?" 클루딘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잇새로 쏘아진 그 소리를 들은 카이엔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떼며 점잖게 물었다. "무슨 의미인지?" "저 자가 내 부하를 죽인 놈이냐는 말이요!" 클루딘은 확인 삼아 자신의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우현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더니 소리쳤다. "맞습니다, 클루딘 님! 저 자가 맞아요!" 우현은 소리친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물가물한 기억 너머로 자신과 검을 맞대었던 남자라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처음의 몇 배나 되는 분노를 지닌 채 우현에게 다가가는 클루딘을 누군가의 팔이 가로막았다. "비켜!" 클루딘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 팔을 밀쳐내고는 검을 뽑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르르 몰려온 기사들이 그의 무리를 에워쌌다. 하마터면 위험에 처할 뻔한 영주를 지키기 위해 달려온 것이다. 억센 손이 다가와 클루딘의 팔을 비틀어 검을 빼앗았다. "윽, 무슨...! 무엄하다! 이 손 놓지 못할까!" 무자비하리 만치 우악스러운 손길에 신음한 클루딘은 카이엔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저 자가 내 부하를 죽였다는 말을 들었을 터인데 비호하는 이유가 뭐야?!" 이미 점잖은 태도는 물 건너간 지 오래다. 카이엔은 자신을 노려보며 이를 가는 클루딘에게 점잖게 말했다. "그대의 부하가 먼저 이 사람을 쫓아왔다고 알고 있소만. 단지 머리와 눈의 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위험에 처했는데 자신을 보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소?" "단지? 저 자는 지고이네르다! 모를 줄 아느냐?" "그렇습니까? 그럼 그는 당신의 적이 아닌 모양이오. 쫓고있는 자가 지고이네르가 아니라고 말한 사람은 바로 클루딘 공 당신이니까. 손님을 영지 밖까지 정중하게 모셔다 드려라." 코웃음까지 치며 말하는 카이엔을 죽도록 노려보던 클루딘은 시선을 돌려 우현을 바라보았다. 희번덕거리는 흰자위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번쩍거렸다. 그러나 우현은 꿋꿋하게 서서 시선을 맞받아쳤다. 검은 눈동자에서 자신에 대한 경멸을 읽은 클루딘은 정수리에 분노의 벼락이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것 놔! 이 천하디 천한 것들이 어디에 함부로 손을 대느냐! 놓아라! 내 저 눈깔을 후벼파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그럼 짐승 하든가." 꼴이 딱 그거네, 라고 덧붙이는 우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를 노려보고 있던 클루딘은 금세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카이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우현을 잡아끌었다. 악을 쓰는 소리가 멀어졌다. 4장 3편까지는 이전에 써놓았던 것을 정리하여 올렸지만 여기서부터는 새로 쓰고 있습니다. 와하하;;;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4장 어긋난 길 -5- 클루딘이 우현의 눈동자에서 읽어낸 경멸은 피해망상적인 착각만은 아니었다. 우현은 그를 진심으로 경멸했던 것이다. 우현이 느낀 그는 강간미수범인 부하 한 사람의 죽음에 일일이 복수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영지에서 쫓겨났다는 분노와 수치심이 그를 자극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생각해 낼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우리를 뒤쫓은 것은 화풀이라는 말이잖아!' 고작 클루딘의 화풀이 때문에 우현은 지고이네르의 무리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껏 만나지 못하고 있다. 정말로 화를 내고 길길이 날뛰어야 하는 것은 클루딘이 아닌 우현이었다. 그는 폐부를 가르듯 스치고 지나가는 분노에 눈을 가늘게 떴다. 카이엔은 그런 그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더 화나게 해버렸잖아." "어차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으니까 상관없잖습니까." 현명한 젊은 영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은 오히려 너같은데'라는 말을 집어삼켰다. 그때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고이네르의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에코? 그럼 너 혹시... 우현?" 그 무리의 어머니인 탓시는 에코의 안부를 묻는 우현을 살피더니 그렇게 물었다. 그의 얼굴에 일순 빛이 감돌았다. "에코 마마를 만났나요?!" 우현은 마치 꽃이 피어나는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탓시는 자신에게 안길 듯 달려드는 그를 향해 불안정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정말로 눈이 까맣구나. 그래, 만났어. 지난 1월에 엘 티에르에서 봤지. 네 이야기를 해주면서, 혹시 널 보거들랑 자신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했어." "어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자신을 잊지 않았다. 계속해서 찾고 있다. 그것은 클루딘으로 인한 분노를 까맣게 잊을 정도로 멋진 벅참이었다. 그러나 탓시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는 조금씩 경직된 것으로 변해갔다.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린 우현의 얼굴에 불안의 구름이 밀려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소문처럼 정말로 지고이네르의 탄압이 있는 건가요?" 그렇게 말한 것은 카이엔이었다. 그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본 탓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야. 그리고 에코의 무리는 하스티아 국왕의 문장을 지닌 병사들에게 잡혀갔다는 말을 들었어." 카이엔은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우현의 팔을 움켜쥐었다. 얼굴을 흙빛으로 물들인 우현은 늪에 가라앉는 사람이 수초를 움켜쥐듯 강한 힘으로 카이엔의 팔을 쥐어뜯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불안은 암적색을 띠고 밀려와 그를 침식해 들어갔다. "잡혀가면...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카이엔은 필사적인 얼굴로 물어오는 우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바라고 있는 대답과 기다리고 있는 진실이 다른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현의 눈에 들어찬 간절함은 거짓을 바라고 있었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잡혀간 지고이네르는 전부 참혹하게 죽었다." 멀쩡히 방면되고서야 탄압이라고 불릴 이유가 없다. 우현은 이를 악물었다. 역사를 살펴볼 때 지고이네르를 탄압한 경우는 상당히 많았다. 어느 나라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떠돌아다니는 그들은 토지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인 세금을 내지 않는다. 또한 그들의 독약이라던가 점술, 저주를 위한 불트는 사람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으며, 더군다나 그들은 창조신 에다마트가 아닌 자신들만의 검은 여신 지고이나를 숭배했다. 고명한 신관들은 지고이네르와 마녀 - 혹은 마인 - 의 차이점은 사는 장소일 뿐이라고 말했으며,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악하다고 주장하는 신관도 있었다. 그 증거로 꼽아지는 것이 지고이네르 특유의 색이었다. 신관들은 암흑을 나타내는 검은색은 인간이 마땅히 지향해야할 빛과는 정반대의 것이며 지고이네르의 악한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이유에 신학적 뒷받침까지 있으면 인간은 더할 나위 없이 잔인해질 수 있는 생물이었다. 만약 - 이라기 보다는 십중팔구지만 - 이번 탄압에 라벤다의 입김이 불어넣어졌다면 탄압은 이에라 르페리토 대륙 전역을 휩쓸 것이었다. 카이엔은 서랍을 열고 편지를 꺼내었다. 잠깐 얼굴을 찡그린 그는 그것을 펼쳐 다시 읽어내렸다. 그때 우현은 신전에 있었다. 영주관이 있는 마을이니 만큼 세워진 신전 역시 장엄했다.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같은 소원을 되풀이했다. 만약 이곳의 신이 자신을 이끌어왔다면, 혹시 시선의 한 조각이라도 던져주고 있다면. 신의 신발에서 떨어진 먼지 한 조각이라도 붙잡고 애원하고 싶었다. 제발, 제발, 제발. 애원은 애써 참은 눈물로 아파진 눈가처럼 간절하고 또 고통스럽다. 신의 침묵은 신경의 한 조각 한 조각을 전부 실처럼 쪼개놓았다. 그 모두가 전부 한 곳으로 향해 또 다른 애원의 덩어리가 된다. 「제발...」 소원은 어느새 언어가 되어 흘러나왔다. 이곳의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에 대답하는 음성은 낮고 냉정했다. "바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지?" 그는 언제나 그러했듯 발자국 소리조차 내지 않고 나타났다. 우현은 이 자리에서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음성에 얼굴을 들었다. 새하얀 옷자락에 오후의 금빛 햇살이 스며들었다. 역시 황금빛으로 물든 섬세한 손가락이 다가와 우현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눈가로 올라갔다. "이제 보니 울보였군, 그래." 눈가가 슬쩍 붉어질 정도로만 밴 눈물은 울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우현은 그것에 대해 무어라 반박하지 않았다. 지치고 격앙된 상태에서 격렬한 반가움이 밀어닥쳐 심장이 빠개질 것만 같았다. 그는 손을 뻗어 이스드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세상에 남은 단 하나의 구원인 양 붙든 자락에서는 이스드 특유의 내음이 흐르고 있었다.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도록 혼란스러운 여름날의 오후, 유일하게 서늘한 내음이 우현의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혀 주었다. 이스드는 팽팽하게 당겨지고 꾸깃꾸깃 우그러진 소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잡고있는 손가락 마디마디는 옷자락보다 희었다. 고개를 조금 돌리니 눈가를 잔뜩 일그러뜨린 채 입술을 피가 나도록 악문 우현이 보였다. 그 진달래빛 입술과 새하얀 잇자국의 대비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어, 이스드는 우현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고 말았다. "이스드?" 마주친 눈동자는 선명한 검정. 흑단보다 짙고 밤하늘보다 어둡다. 그것은 이스드의 옷자락 만큼이나 티 없는 흰자위 덕에 더욱 검어보였다. 언제나 강인한 빛을 쏘아대던 그것은 지금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에는 참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이전처럼. 우현은 이스드가 삼킨 말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과 그때는 경우가 달랐다. 이번에는 참지 않고 울어버리면 그것으로 포기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는 억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스드는 우현의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한동안 몸을 일으키려 하던 우현은 그러나 곧 조용해졌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에요?" 우현의 목소리는 소금물에 절여놓은 배추처럼 축축 늘어져 있었다. 완전히 기운을 잃은 음성을 들은 이스드는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볼일이 있어 여행 중이다. 이곳에서 너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엘로소 영지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일이 좀 생겨서요." 이스드는 우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붙들고 일어난 우현은 그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신전을 나서자 지은 지 오래된 건물 특유의 눅눅한 냄새 대신 신선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높은 곳에 지어진 신전에서는 마을의 정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한여름 특유의 진한 녹색과 앙증맞은 집이 보인다. 그 사이를 오가는 인간은 마치 점과도 같았다. 눈을 내리깔자 세상 모든 것이 가늘어진다. 눈을 뜨면 온갖 것들이 확, 하고 들어온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렇게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현의 미간에 주름이 선 것을 본 이스드가 나지막이 물었다. "괴로워?" 그는 무슨 일이냐고 캐묻지 않았다. 우현이 왜 신전에 있었는지 알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우현은 고개를 돌려 이스드를 바라보았다. 힘들 때의 만남은 더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고난 속에 싹을 틔워낸 꽃이 자라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것과 닮은 심정이었다. "괴롭지만, 또..." 만난 것은 기쁘군요, 라는 말을 입 속으로 삼킨 우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지금 그가 느끼는 죄책감은 이전에 셰리에게 느꼈던 것과 닮아있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건가요?" 우현의 목소리는 손에 부딪혀 웅얼거리고 있었다. 이스드는 그 목소리에 얼룩진 고통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조차도 알 수 없는 기분이 심장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다 우현의 탓이었다. "잘 알 수 없지만 며칠 정도는. 너는 지금 어디에 있지?" "영주관에요. 아이겐튼 자작과 조금 아는 사이라서." 다시 고개를 든 우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스드가 마치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저녁 하늘의 진남색을 담아 조금은 차갑게 느껴지는 눈동자는 자신이 언제 그렇게 보았냐는 듯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잘못 본 건가?' 그러나 한 번 맛본 감정이 다리를 후들거리게 했다. 이스드는 비틀거리는 우현을 부축했다. "몸이 안 좋으면 돌아가서 쉬어라. 데려다 줄까?" "아, 아뇨. 괜찮습니다. 먼저 가볼게요." 만약 남빛의 눈동자가 품었던 감정이 상냥한 호감이었다면 매우 기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현을 집어삼키려 했던 것은 그런 다정한 색채의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조금 무섭게 느껴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스드는 허둥지둥 내려가는 우현을 보며 얕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저런 일이 겹친 나머지 우현은 저녁식사에 늦어버리고 말았다. 그다지 식욕은 없었지만 카이엔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현은 그가 먹지 않으면 자신도 안 먹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발하는 카이엔의 눈을 보며 결국 식탁 앞에 앉고 말았다.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은 분명 맛이 있는 것들뿐이겠지만 지금의 우현에게는 소태일 뿐이었다. '위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야.' 우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수프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간신히 몇 스푼 넘기자 속이 불편해졌다. 카이엔은 몇 번 식기를 움직이다 포기하는 우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요리사가 실망할 거다." 그렇지만 카이엔은 강요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속이 편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하고 싶어?" 카이엔이 그렇게 말한 것은 식사를 물리고 차가 나왔을 때였다. 우현은 하얀 찻잔 속에 일어난 붉은 파랑(波浪)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먼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엘 티에르에 간다고 해도 에코의 무리는 없다. 그렇지만 이곳에 가만히 있고 싶지는 않았다. 에코가, 티티가, 자신의 상냥한 가족들이 죽을지도 모른다. 우현은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움직여야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어디로? "구하고 싶은 거지?" 우현은 고개를 들어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준수한 외모의 젊은 영주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짐작 가는 곳이 있나요?" "아마도. 국왕의 문장을 가진 병사들이 끌고 갔다고 그랬지? 그랬다면 수도에 있을 가능성이 커." 단지 지고이네르를 탄압하고 싶었다면 영주들에게 명령하기만 하면 된다. 국왕의 군대가 굳이 나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카이엔은 새로이 들은 소식을 떠올렸다. 이번 탄압은 얼마 전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은 아르무드가 원인이라는, 라벤다의 늙다리 추기경들이 그 병을 지고이네르의 탓이라고 돌려 법황의 인가를 얻어내었다는 소문을. 이렇게 법황청이 나섰을 경우 잡힌 지고이네르는 법황령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는 라벤다로 끌려가는 것이 차라리 죽는 것이 훨씬 나을 일을 겪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카이엔의 생각 중 앞부분의 것만을 들은 우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위험할지도 몰라. 네 피부는 지고이네르와는 다르지만 명령에는 눈이 달려있지 않으니까. 만약 지고이네르를 잡아온 자에게 상금을 내린다는 포고문이라도 내려온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 구하려는 네가 오히려 먼저 죽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곳에 있으면 절대로 안전해. 나는 힘을 다해 내 영지에 있는 사람들을 지킬 생각이다. 그래도 움직일 건가?" 우현은 언젠가의 일을 떠올렸다. 퀴아네의 발톱에 만신창이가 되었던 날 보았던 아이들의 울먹이는 얼굴은 무엇을 생각하게 했더라? "에코 마마는 생판 남인 나를 무리에 넣어주었어요. 마마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미 죽었겠죠." 그때 우현은 같은 상황이 된다고 해도 또다시 아이들을 구하겠다고 마음먹었더랬다. 그들은 그에게 온정의 따스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었다. 죽는 것은 무서웠다. 죽음을 무릅쓰고 구하겠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단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뿐이었다. "수도에 가봤자 없을지도 몰라. 이미 라벤다로 보내졌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렇다면 라벤다까지도 갈 거예요. 법황을 만나 협박이라도 하겠어요." 추기경들의 요청과 법황의 인가. 형식뿐인 인가였지만 법황이 마음만 먹으면 그 인가를 취소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법황을 만나겠다는 우현의 말은 꽤나 그럴듯한 것이기는 했다. 이루어만 진다면 말이다. 카이엔은 엄청난 소리를 하는 우현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라벤다까지 가는 것도 큰일이지만 법황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라벤다 주재의 신성 기사단이 물샐 틈 없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법황청 안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마음은 알겠지만 그것만 가지고 되는 일은 세상에 없어." "법황청에도 사람은 살잖습니까. 신관으로 변장을 하거나, 아니면 식료품 수레에 숨어들면 어떻게 되겠지요."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은 없지만 모든 일은 마음먹은 것을 실행함으로 시작된다. 우현의 눈에서 진심인 빛을 읽은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군, 너는. 정말로 엉뚱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내버려두었다가는 에코가 날 죽이려고 들겠지. 수도까지 무사히 갈 수 있는, 그리고 법황청에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해. 들어보겠어?" 우현의 새카만 눈동자가 물을 먹은 듯 빛났다. 그리고 카이엔은 아주 조금 심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법황청에는 신관이나 왕족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어. 사실 그들조차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냐. 하지만 스무 살이 된 왕족은 반드시 법황청을 방문해 성인으로 인정을 받아야 해. 그들의 행차에는 수행원이 붙지." "그럼?" "그래. 국왕 폐하의 금지옥엽인 막내 공주님이 내년에 라벤다를 방문하게 되었다. 내년이라고는 하지만 거리가 있어 올해 말에 출발을 해야 하는데 내가 그 수호기사로 발탁되었어. 그리고 내게는 당연히 종자가 따르겠지." 사실 결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라고 중얼거리는 카이엔을 보며 우현은 기쁨으로 얼굴을 붉혔다. 카이엔은 머리가 다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눈으로는 그의 얼굴을 좇고 있었다. 문득 우현의 표정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카이엔은 괜찮아요? 괜히 수도에 갔다가 탄압에 말려들기라도 하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말려들 리 없다고 생각하니까. 일단 나는 머리도 눈도 검지 않고 말이지." 대답을 하는 목소리가 그리 개운치 않다. 카이엔은 앓는 이가 아픈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우현을 보았다. 검은 눈동자는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의 이끼빛 눈동자에 엷은 부러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수도 하샤라까지는 한참이 걸리니까 지금부터 잘 먹어서 체력을 쌓아둬. 준비가 되는대로 출발할 거야." 카이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동안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며 수호기사를 맡지 않으려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결국 맡게 되고 말았다. 무심코 쓴웃음을 짓는 그의 귀에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습니다, 카이엔." 순수한 기쁨과 고마움에 찬 우현의 얼굴은 마치 소년 같았다. 사실 스무 살인데다 동안인 그는 충분히 소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얼굴이었지만 겪어온 일이나 행동 때문인지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카이엔은 이끌리듯 손을 들어 우현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힘 내." 우현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4장 어긋난 길 -6- 우현은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영주관을 나섰다. 목적지는 신전이었다. 이스드가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추측이었다. 바삐 걸어가던 그는 눈에 익은 디자인의 옷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사람은 이스드가 아니었다. 옷의 모양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비슷했지만 이스드의 것이 좀 더 화려했으며 좀 더 물결치듯 부드럽게 흔들렸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 역시 신관이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에는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여있었다. 잿빛 옷의 신관들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실을 섞어 짠 호화로운 천을 덮은 관이 지나갔다. '장례식인가.' 우현의 가슴속에 한 줄기의 아픔이 달려나갔다. 그는 장렬에 이끌려 걷기 시작했다. 우현 역시 이곳에서 겪은 장례식이 있었다. 그날은 몸도 아프고 심적으로도 지쳐 있던 데다가 모리악 부부의 시중도 있어 다른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보게 된 장례식의 절차는 상당히 생소하게 느껴졌다. 흰옷의 신관이 기도를 올린 후 흙을 한 줌 집어들어 입을 맞춘 후 다시 대지로 되돌렸다. 그러자 인부들이 그 자리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고 있어?" 그래서 가까이까지 다가온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우현은 자신의 바로 곁에 서서 장례식을 바라보고 있는 이스드를 발견하고는 조금 미소를 지었다. "흙에다 입을 맞추고 다시 땅에 뿌리던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사자(死者)가 누울 땅을 축복하는 거지." 이스드는 흰옷 위에 잿빛 망토를 입고 후드를 머리까지 올려 뒤집어쓰고 있었다. 우현은 망토 사이로 슬쩍 드러난 흰옷을 보았다. 흰색 옷과 회색 옷의 차이점을 묻고싶었지만 당사자에게 하기에는 조금 안 좋은 질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던 길이었지?" 이스드는 우현의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며 말했다. 우현은 조금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만나러 신전에 가는 일이었죠'라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머쓱했다. 그런 그를 향해 이스드가 말했다. "역시 네게는 흰색이 가장 잘 어울려." "그, 그런가요? 하녀들이 멋대로 가져다가 입혔는데." 흰색의 간소한 셔츠에 흐린 하늘 같은 청회색의 바지가 시원해 보인다. 다소 예의 없는 옷차림이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묘하게 잘 어울렸다. 반면 이스드는 겹겹이 둘러입은 것으로 모자라 망토까지 걸치고 있었다. 덥지 않을까, 생각하는 우현의 손을 이스드가 잡아끌었다. "가지." "어, 어딜?" "신전에 가는 길 아니었나?" 나를 만나러. 이스드는 거기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짓고있는 미소는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우현은 가슴속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우현은 이스드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그가 데려간 곳은 신전의 뜰에 있는 나무 밑이었다. 그곳에는 의자가 놓여있었다. 의자에 앉은 우현은 이스드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곧 수도로 가요. 그러니까... 이름이 하샤라였던가?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만약 수도에 없다면 다른 곳에 가게 되겠죠. 사실은 그것을 말하러 왔어요." "...지고이네르?" 우현은 눈을 크게 뜨고 이스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고이네르라는 사실을 말한 적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별 이야기를 다 했으니 어쩌면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고이네르. 내 가족입니다." 우현은 어쩐지 이스드의 옆모습이 무섭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스드의 얼굴이 냉정한 윤곽을 품은 것도 남빛 눈동자가 날카로운 것도 단지 타고난 탓이리라 여겼다. "그럼 라벤다까지 갈 수도 있겠군." 그러나 이어진 말에 들어있는 지명이 우현을 움찔하게 했다. 마주친 남빛 눈동자는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거다. 7인의 추기경들이 지고이네르의 탄압을 주장했지. 그렇게 되면 잡힌 지고이네르는 전부 라벤다에 끌려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라벤다까지 갈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 되지." 이스드의 눈동자는 냉정한 빛을 내포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과 함께 바람이 맴돌았다. 여름의 바람은 뜨거웠으며 또한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시선을 들자 신전이 보였다. 신전은 대부분의 마을에 적어도 하나씩은 있었다. 우현은 멜도바 영지에서 지내던 때를 떠올렸다. 봄이 되면 영지민들은 씨앗을 들고 신전으로 가 축복을 받았다. 사람들은 기쁜 일이 있으면 신전으로 가 그 기쁨을 고했고 슬픈 일 역시 그렇게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우현은 두서없이 말을 꺼내었다. "나는 국왕보다 법황의 힘이 더 강하다고 들어서, 종교는 일반 사람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고상하고, 범접하기 어렵고, 어딘지 숭고하고.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까 아닌 것 같군요. 나는 약초의 씨앗을 가져가 신관에게 축복을 받은 적이 있어요.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겠죠." 잠시 말을 끊은 우현은 이스드를 바라보았다. 화를 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우현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현은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어째서입니까? 이렇게 사람들과 가깝고 또 축복을 나눠주면서 왜 다른 한 쪽은 탄압하는 거죠? 왜 힘을 휘두르는 건가요? 명색이 신관이면서. 그런 행동으로 도대체 무엇이 얻어진다고?" 사람들의 일상에 파고들 정도의 교세를 가졌다면 지고이나를 믿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그들을 사악하다고 몰아붙이지 않아도 에다마트의 교세는 강력했다. 그 힘을 굳이 자랑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에다마트의 은총 아래 모여들고 있었다. 아니, 사실 힘을 휘두르는 것은 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을 등에 업은 인간들의 행동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신관이라고 불렀다. 우현은 이스드의 잿빛 망토 아래로 드러난 신관복 자락을 보았다. 아무리 이스드가 자신과 아는 사이라고 해도 그 역시 신관이다. 법황의 명에 거역하려는 자를 내버려두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우현은 자신을 지고이네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퍼뜩 놀란 우현은 고개를 들었다. "혹시 나를 잡아갈 겁니까?" 이스드의 몸이 잠시 경직한다 싶더니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참담하게 느껴지는 눈동자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그지없이 수려한 얼굴이 슬쩍 일그러진 것이 더더욱 아파 보인다. 잠시 우현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서늘한 손가락이 우현의 뺨에 가볍게 얹혔다. "잡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너를? 숨겨진 말이 눈동자를 통해 전해졌다. 우현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스드는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중얼거렸다. "지닌 권력을 자신의 욕망의 충족을 위해 휘두르는 것은 저급한 자나 하는 짓이지." "그, 그렇..." '군요'라는 소리는 혀끝에서 묻혀버렸다. 우현은 바로 앞까지 다가든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마주 보아온 남빛임에도 지금의 것은 깊고 어두웠다. 언제나 느껴온 맑은 날 늦저녁의 하늘이 아닌 늪처럼. 늪의 진흙탕에서 자라난 수초들이 우현을 얽매었다. 우현은 자신의 뺨과 목덜미를 쓰다듬는 손가락을 느꼈다. 눈앞이 점차 어두워졌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뜨겁다.' 우현은 멍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했다. 스치는 뺨은 서늘했지만 입술은 불 붙은 듯 뜨거웠다. 이스드의 습기 어린 혀가 다가와 입술의 다물린 선을 따라 다소 거칠게 훑었다. 순간 숨이 가빠오는 느낌이라 입을 벌려 공기를 마시려던 우현은 산소 대신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떨림을 어떤 의미로 해석한 것인지 이스드는 우현의 입술을 아릿할 정도로 깨물더니 혀를 잡아채듯 휘감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스드의 입술은 뜨거웠지만 그 안은 시원했다. 부드럽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는 입맞춤이었다. 한 조각의 배려도 없는 그것은 마치 빼앗는 느낌이었다. 우현은 아플 정도로 자신을 휘감는 입술에서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이스드를 보았다. 키스에 열중했음인지 내리감긴 남빛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가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아니, 소리는 가슴에서 났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스드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이스드는 나직한 신음을 뱉으며 더욱 강하게 파고들었다. 그때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새가 거친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그 여파로 이파리들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두 사람 위에 떨어져 내렸다. 깜짝 놀란 우현은 이스드의 옷자락을 놓고 그를 밀었다. 우현이 시선을 돌려버린 것과는 달리 이스드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스드의 눈에 보인 밀빛 얼굴은 다소 창백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입맞춤으로 붉어진 입술이 눈에 박힐 듯 들어왔다. 이스드는 뜨거워진 숨을 간신히 억제하며 타액이 묻어 반짝거리는 우현의 입술을 쓸어주었다. 그것으로 정신을 차렸는지 그는 망연한 눈동자로 이스드를 보았다. 그 망연함은 순식간에 멈칫함으로 바뀌었다. "그, 그만 돌아갈게요. 준비할 것도 있을 거고..." 우현은 애써 웃으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스드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우현은 남빛의 눈동자가 등뒤에 따라붙은 느낌을 받으며 의연하려 애썼다. 그러나 다리가 점점 빨라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결국 뛰다시피 영주관에 돌아온 그는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상처가 쑤시는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자 그제서야 다리의 힘이 풀렸다. 그는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줄로만 알았다. 쿵, 하는 소리는 귀에 들릴 듯 크게 울렸었다. 이스드의 참담한 눈동자에 깃들였던 감정을 어째서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생각하자 가슴은 황산을 들이부은 듯 타 들어갔다. - 잡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말 너머의 의미가 귓가에 울렸다. 아직도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떨림을 억누르듯 시트를 움켜쥐었다. 입술이 닿았던 부분이 뜨거웠다. 이스드의 입술에 붙었던 불이 그대로 옮은 느낌이었다. 우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홀겹의 얇은 시트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찢어졌지만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어, 어떻게 하지, 슐리언?' 동경이랬다. 소년기에 흔히 느끼는, 누구나 한 번쯤은 거치는. 우현의 감정에 동경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깨끗하고 순수하며 올곧은 그 감정에 질척한 욕망 따위가 끼여들 자리는 없다는 정도는 알고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남빛 눈동자에 들어찬 늪이 그를 끌어당겼다. 뜨겁고 깊은 그것에 섞인 감정은 욕망이었다. 우현은 그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도, 도대체...」 기뻤다니. 이스드가 자신에게 품은 욕망도, 잡아갈 수 없다고 말하며 드러낸 참담한 비참함도 전부 심장이 무너져내릴 정도로 기뻤다. 우현은 그 두근거림의 의미조차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좋아...하고 있어?」 언어는 곧 의미. 말로 내뱉은 순간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이마를 짚었다. 델 정도로 뜨거웠다. 뚜렷한 확신이 그의 마음을 서서히 적셔갔다. 「좋아하고... 있어.」 웃고 싶다. 그러나 또한 울고 싶었다. 그는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에코도 티티도 그의 머리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우현은 두문불출 영주관에서 나가지 않았다. 혹여 이스드를 마주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얼굴을 마주쳤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미적거리는 사이에 출발이 도래했다. 제법 길어진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우현은 자신의 옷을 점검했다. 질끈 묶은 허리띠 아래로 짧은 자락이 늘어진 윗도리에 단정한 바지, 그리고 검은색의 부츠는 새것이었다. 날씨가 날씨이니 만큼 망토는 걸치지 않았다. 반팔의 헐렁한 소매로 바람이 숭숭 들어와 시원했다. 카이엔이 새로 마련해준 검을 허리에 찬 그는 방을 나섰다. 카이엔이 미소를 지었다. "잘 어울리네. 시동 같아." "칭찬이겠죠, 그 말?" 우현은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실은 기대와 긴장으로 손이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카이엔은 그의 기운을 북돋우려는 듯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우현 군, 자각편이었습니다. 덕분에 조금은 진도입니까?(생긋) 나름대로 급전개→친구를 위한 슐리언 군의 술책이 깨져버렸다는 거였습니다. ...비축분에 대한 애증이 절절한 요즘입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4장 어긋난 길 -7- 두 사람은 함께 뜰로 나갔다. 그곳에는 카이엔을 수행할 기사들과,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우현은 선조들의 슬기로움을 속담으로 실감했다. "아니, 다리엣 주교님?" 이스드 자라에 놀란 가슴이 흰옷 솥뚜껑을 보자마자 쿵덕쿵덕 방아를 찧어대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의 신관은 온화하게 웃으며 카이엔에게 다가왔다. 우현은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하샤라까지 간다고 들어서 말이지요. 긴 여행에는 신관의 축복이 빠질 수 없지요." 카이엔은 키가 작은 주교를 향해 몸을 숙였다. 다리엣 주교는 영주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카이엔은 주교의 손바닥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우현은 '성직자'라는 느낌이 확연하게 드는 상냥한 입맞춤을 보며 이스드를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뻐근해진 그는 흰옷에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흰색을 발견했다. "우현? 어딜 가려는 거야? 이제 출발을 할 건데." "잠깐만요! 아주 잠시만!" 우현은 계단을 돌아 내려왔다. 묘하게도 이스드에게서 풍기는 향내만큼은 금세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 멀어질듯 멀어질듯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만나고 싶지 않아 두문불출하던 때가 언제였던가 싶게 다급한 마음으로 뛰어간 그는 잿빛의 망토를 팔에 걸친 이스드를 보았다. 그 순간 우현은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울리는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이스드." 이스드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우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년의 검은 눈동자는 마구 흔들리고 있었고, 그것은 적어도 거부는 아니었다. 이스드의 안에서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안도가 치밀었다. 그는 자신 안의 격동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긴 여행에는 신관의 축복을." 이스드의 말을 들은 우현은 조심스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섬세한 손가락이 그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헤쳤다. 그의 희지 않은 밀빛이 건강해 보였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이스드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이마에 닿은 입맞춤은 경건했으며 또한 경애의 감정을 가득 담고 있었지만 정작 우현은 이마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답례는 알고 있겠지?" 이스드가 손을 들어올렸다. 우현은 허리를 숙여 그의 손바닥에 입술을 가져갔다. 어쩐지 이스드의 손바닥이 뜨겁게 느껴졌다. "하샤라로 간다고 했던가. 나 역시 그곳을 거쳐 라벤다로 갈 생각이니까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스드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우현은 용기를 내어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에 아침식사 분의 열량 전부가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스드의 눈동자가 상냥하게 휘었다. 그때 카이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현! 지금 출발할 거야!" "갑니다!" 우현은 냅다 소리를 질렀다. 곁눈으로 조금 더 냉정해진 이스드가 보였다. "갈게요. 또 봐요." 우현은 한 번 웃어준 후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돌아온 그에게 카이엔이 물었다. "언제 신관을 알게 된 거야? 여행용 망토를 걸친 것을 보니 이 마을의 신관은 아닌 모양이지?" "아, 이전에 우연히..." 우현은 대강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돌아온 것을 본 기사들이 자신들의 말에 올랐다. 뒤이어 말에 오른 우현은 망토라는 말에 문득 떠오른 것을 물었다. "신관의 옷에는 회색과 흰색이 있죠? 뭔가 차이가 있나요?" "일반 신관의 옷은 회색이지. 흰옷은 주교 이상의 신관만이 입을 수 있어." "주교...!" 우현은 조금 억눌린 소리를 내었다. 수많은 사제직 신관들 가운데에서 뽑히고 뽑힌 자가 주교가 되며, 그들 중에서 뽑힌 자가 대주교, 또 그 중의 극소수가 추기경이 된다. 사제는 무수히 많지만 주교는 오십 명이었으며, 대주교는 열 다섯 명이었다. 그리고 추기경은 대륙을 통틀어 고작 일곱 명이었다. 이 숫자는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주교는 넓은 영지에 내려와 있기도 하지만 대주교쯤 되면 수도나 주요 도시에... 우현? 어디 아파?" "아, 아뇨." 우현 역시 이스드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교씩이나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대번에 거리가 생겨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순간 떠오른 이스드의 친근한 웃음이 그 거리를 좁혀버렸다. '아무렴 어때.' 늦여름의 바람이 불어왔다. 우현은 그것이 불어들었으리라 생각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현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그쪽은 그가 자주 바라보곤 했던 방향이었으며, 또한 이번 여행에서 최후로 도착할 곳이 있는 방향이기도 했다. 그가 섬세한 손놀림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데 출발의 신호가 떨어졌다. 말이 첫 발을 떼었다. 그들이 빈말로라도 반갑다고는 결코 말하지 못할 일행을 만나게 된 것은 아이겐튼 영지를 출발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아, 이런 인연이 있나. 먼 곳으로 나가는 모양이군요." 우현은 클루딘의 이죽거리는 얼굴을 본 순간 그것을 마구 쥐어뜯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때수건색의 머리카락 가닥가닥이 전부 혐오로 물드는 느낌이었다. "클루딘 공이군. 어인 일이요?" "잠시 사냥을 나왔소." 클루딘의 응대는 카이엔이 맡았다. 카이엔은 우현의 앞을 막아서듯 말을 몰았다. 다른 이가 보기에는 우현을 감싸려는 듯한 움직임이겠지만 그가 보기에는 자신이 튀어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 여겨졌다. '무슨 이런 영양가 없는 짓을.' 우현은 내심 투덜거렸지만 카이엔의 행동으로 머리가 맑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가다듬었다. "어딜 그리 가십니까? 이런 화려한 일행으로." "하샤라에 갑니다. 티스베 공주님의 라벤다 행에 호위기사로 임명을 받아서 말이오." 우현은 클루딘의 얼굴이 순간 질시로 물드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가 그 표정을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뺀 순간, 공교롭게도 클루딘 역시 카이엔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숨김없이 읽을 수 있었다. 카이엔이 누군가를 가리려 한다는 것 정도는 클루딘 역시 알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 얼굴이 익숙하다는 사실과 그것에 드러난 표정을 깨달은 순간 분노가 등골을 타고 솟구쳤다. 발칙한 지고이네르 놈은 여전히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이곳까지 나온 이유는 카이엔의 출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영주가 없는 영지는 아무래도 어지러워지기 마련이다. 그 틈을 타 우현을 납치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부풀었던 희망은 흐지부지되었으며, 오히려 카이엔의 승승장구한 앞날을 확인하는 꼴만 되었다. 클루딘은 카이엔의 여행을 보고한 부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잘 다녀오시구려!" 잇새로 씹어뱉듯 으르렁거린 클루딘은 우현을 한 번 노려본 후 말고삐를 잡아채었다. 거친 손놀림을 느낀 말이 불만스러운 움직임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엘로소 영지에 돌아오자마자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지하감옥이었다. 음습한 감정이 축축한 습기가 되어 돌 벽에 들러붙어 있었다. 한여름의 폭염 속에서도 서늘한 장소이지만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당연한 것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신음과 비명이 터져 나오는 장소를 달가워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예외의 상황도 존재한다. 지하감옥의 돌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얼굴이 점차 비뚤어진 미소를 띄웠다. 실은 그 지고이네르 놈과 함께 이곳에 내려오기를 원했는데 홀로 오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우현을 놓쳤다고 모든 즐거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뭐지?" 클루딘이 눈살을 찌푸리면 근처에 있는 사람은 전부 피신해야 하며 물건들은 제 모습을 잃게 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러나 간수는 이번에는 그 정도로 넘어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그것이..." "말해라! 어제 저녁에 잡아온 자가 왜 이런 꼴이 되어있는 거냐! 누가 들어가서 저 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클루딘의 부하 하나가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무참하게 다져놓은 고깃덩어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모습을 보며 몰래 진저리를 친 그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참으며 축 늘어진 손목을 대강 짚었다. 잡힌 손목은 침묵했다. "이미 죽었습니다, 클루딘 님." 그의 말은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를 뚫고 클루딘에게 닿아 격렬한 악의가 되었다. 클루딘은 간수를 노려보았다. 그 곁으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숯불이 보인다. 클루딘은 여상스러운 태도로 인두를 하나 집어들어 숯불 속에 찔러 넣으며 슬며시 웃었다. "어찌된 일인지 자세히 말을 해봐." "그, 그것이..." 간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그는 얼른 전날 새벽의 상황을 설명했다. 원래도 그의 취미는 말을 듣지 않는 죄수를 데리고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 죄수는 지나치게 꼿꼿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몇 번 매질을 하려고 했을 뿐인데, 어찌된 일인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는 인간 대신 시체가 있었다. "호오? 지금 그걸 설명이라고 하는 건가?" "제, 제발 자비를... 클루딘 나리..." 간수는 땅에 얼굴을 박고 부들부들 떨며 애원했다. 인두는 이미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치익거리는 소리는 무엇이든 자신에게 먹여달라는 교태였다. 오줌을 지릴 정도로 잔뜩 질려있던 간수는 클루딘의 가벼운 웃음소리를 들으며 안도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클루딘은 간수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내가 원했던 만큼의 자세한 말이 전혀 되지를 않았잖아." "...! 크아아아아악!"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역한 냄새가 감옥 안에 퍼져나갔다. 간수의 비명에 클루딘의 부하들이고 죄수들이고 할 것 없이 얼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클루딘만이 홀로 눈을 형형히 뜬 채 인두 끝에서 모락 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본 죄수들 중에는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는 자들도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가 식을 때까지 간수를 지져대던 그는 곧 싫증났다는 듯 그것을 집어던졌다. 그러더니 피비린내를 가득 풍기는 시신을 흘긋 보고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재미없게스리. 그 지고이네르 놈과 대면을 시키고 싶었는데 말이야. 어이! 저 냄새나는 것을 당장 갖다버려!" 명령을 받은 부하 두 사람이 허둥지둥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이 시신은 늘 그러했듯 마대자루에 넣어져 영주관의 뒷문을 통해 버려질 것이다. 그곳에 자라나는 과실수가 유독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영지의 주민 전체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 과실을 먹는 자는 엘로소 가의 피가 이어진 사람 몇몇뿐이었다. 햇살이 쨍쨍하다. 꺼림칙한 얼굴로 자루를 집어던진 두 사내는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우거진 그늘이 어쩐지 음침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대자루 안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인 손가락을 알지 못했다. 약했지만 아직 맥박을 지니고 있었던 남자는 곧 마지막 숨결을 내뱉었다. 햇살에 드러난 머리카락은 흰머리가 많이 섞인 회색이었다. 우현은 고개를 들었다. 바람의 방향이 조금 바뀐 것도 같았다. 별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의미가 있다 해도 읽을 수 있는 우현이 아니었지만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여름치고는 시원하게 느껴지는 바람은 그의 볼을 스치고 어깨를 건드린 후 높이 솟구쳐 올라갔다. "뭐해?" "아니... 그냥." 이상하게도 가슴이 답답했다. 우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갈기를 내려다보았다. 울 이유는 전혀 없음에도 울고싶은 심정이었다. 제 4장 終結 어긋났다는 것의 하나는 지고이네르와의 길입니다. 언제 다시 만날지는 미지수 ^^ (퍽!) 다른 하나는 비밀입니다♡ ...그리고 무고한 사람을 또 죽이고 말았습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5장 거울 너머에 서있는 것 -1- 우현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뒤통수가 지끈지끈 아팠다. 손으로 더듬으니 불쑥 솟은 혹이 느껴졌다.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무스름한 회색의 돌벽 위에는 연한 색깔의 살점이 마치 크림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진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철창을 따라 흘러내리다 만 형상으로 굳어버린 피가 보였다. 우현은 철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지고이네르의 무리가 앉아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들을 당한 것인지 그들의 몸 여기저기에는 흉측한 화상자국이 있었다. 채찍으로 후려 맞은 것으로 보이는 상처는 이미 곪아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들 역시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붙잡혀왔을 것이다. 어쩌면 숲에서 만난 사냥꾼들에게 붙들린 것인지도 모른다. 우현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우현은 여행을 하며 몇 개의 영지와 도시를 거쳤다. 카이엔의 지위가 자작인 만큼 숙소는 각 영지의 영주관, 도시의 경우 시장의 집이 되었다. 덕분에 우현은 지고이네르의 탄압에 대한 영주들, 혹은 시장들의 의견과 탄압의 진행을 알 수 있었다. 의견은 카이엔을 의식했음인지 반대를 말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탄압의 모습이 뚜렷해진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우현은「그것」을 보고 말았다. 일행은 숲을 지나고 있었다. 나무가 한껏 우거져 어둠침침한 숲은 저녁 무렵의 어둑함을 한결 음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검은색이라는 색채의 문제는 아니었다. 용맹스러운 기사들조차 자꾸만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우현 역시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한바탕 전투가 끝난 후의 적막을 닮은 고요함이었다. 미묘하게 거슬리는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군." 카이엔이 중얼거렸다. 우현은 쭈뼛거리는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 억눌린 소리를 냈다. "흐읍!" 소리를 낸 사람은 종자로 따라온 소년이었다. 소년은 입을 틀어막고 있었는데, 주근깨가 잔뜩 박혀 더욱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는 짙은 혐오가 떠올라 있었다. 일행은 일제히 그가 본 것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런..." 누군가의 중얼거림이었다.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들이 본 것은 화살을 꽂은 채 쓰러진 소년의 시체였다. 이미 반쯤은 부패해 들어간 몸에는 들짐승이 뜯어먹은 자국이 역력했는데, 그나마 남아있는 부분은 들끓는 구더기로 뒤덮여 있었다. 퀭하게 뚫린 눈구멍으로 들락거리는 벌레의 모습이 보는 사람의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 "...지고이네르다." 카이엔이 중얼거렸다. 우현은 소년의 시체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과 가무잡잡한 피부가 보였다. 카이엔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린 우현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일행은 얼른 말을 출발시켰다. 이미 노숙을 할 장소를 찾아야 할 시간이었지만 그곳에 있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라고 생각해?" 카이엔이 물었다. 우현은 고삐를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있었다. "화살이 있었지. 자연사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아무래도..." 그는 말꼬리를 흐렸지만 우현 역시 상황을 짐작 못할 바는 아니었다. 인간이 인간을 사냥한다는, 더할 나위 없이 추악한 짓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견딜 수 없이 싫게 느껴졌다. 숲을 감돌고 있는 자욱한 원망과 열기 어린 악랄한 살기가 남아 온 몸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영지와 도시의 성격은 눈에 띄게 달랐다.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영주의 유무일 것이다. 왕국은 왕의 것이지만 영지는 영주의 것이다. 그만큼 영지는 영주의 지배 아래에서 폐쇄성을 띠었다. 게다가 바로 근처에 지배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사람을 은근히 주눅들게 만들었다. 도시는 자연발생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특히 상업은 영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업, 이득을 면밀하게 따져야하는 그것은 사람의 정신을 영리하게 만들어 단 하나의 이익도 소홀히 지나치지 않도록 만든다. 또한 시민들은 도시가 왕의 관할이라는 점에서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며, 영지의 주민들과는 달리 관리자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심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숲을 벗어난 일행이 도착한 곳은 바로 그러한 도시 중 하나였다. 숲에서부터 꼬박 하루를 달려 도착한 도시는 아이겐튼 영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활기로 가득 차있었다. 아이겐튼 영지에 감도는 분위기가 전원에서 느끼는 안온한 편안함이라면 도시의 활기는 시골 장의 어수선함과도 닮아있었다. 말이 시골 장이지, 도시 전체가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있으면 어수선함을 넘어서 뒤죽박죽이 된다. 카이엔은 도시에 발을 들이는 순간 느껴지는 분위기에 얼굴을 찡그렸다. "어지럽군, 그래." 예의에 어긋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라면 하샤라에 가는 것도 피하는 카이엔에게 도시의 활기는 그리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우현은 카이엔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다른 도시에도 들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어질러진 분위기는 아니었던 기억이 났다. "시장의 공관으로 가시겠습니까, 카이엔 님?" 카이엔의 곁에서 말을 몰던 기사가 물었다. 그러자 카이엔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관에 묵는다. 인간 사냥을 자행했을지도 모르는 시장과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 말투는 이제껏 우현이 보아온 카이엔의 성격으로는 짐작도 못 하도록 차가웠다. 우현은 무거운 기분으로 그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사실 우현이라도 시장이 지고이네르 사냥을 지시했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시장이고 뭐고 그 자리에서 뒤집어 엎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들이 투숙한 여관은 제법 호화로웠다. 작은 1인실을 배정 받은 우현은 땀과 먼지에 절은 몸을 씻었다. 더위에 지친 몸이 차가운 물을 만나자 살 것 같다며 탄성을 질러대었다. 말 위에만 앉아있어 굳어버린 몸을 가볍게 마사지하는 것으로 목욕을 끝낸 우현은 창가에 앉았다. 노을이 질 무렵의 시간은 사람에게 여유를 주는 때였다. 우현은 창틀에 머리를 얹고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내려가 볼까. 바깥은 더 시원할 것 같아.' 식사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잠깐 망설인 그는 계단을 내려가 뒷마당으로 나갔다. 늦여름의 오후는 아직 열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바람은 제법 선선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9월, 가을의 길목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우현은 나무를 베어내고 남은 그루터기에 주저앉았다. 늦은 오후의 하늘은 금실로 수를 놓은 주홍 비단이었다. 과연 바깥은 실내보다 시원했다. 그는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겼다. 젖은 채 풀어헤친 머리카락에 닿는 바람이 기분 좋았지만 마음은 그리 가볍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부패해 들어가는 시체였다. 엉망인 모습이었지만 팔다리는 가늘었다. 고작해야 10대 중반 정도밖에 되지 않은 소년일 것이다. 티티와 비슷한 나이일 모습을 생각하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그를 엄습했다. 우현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낮달이 야위어가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이, 총각?"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가늘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현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몸을 운신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노인이 담 너머에 구부정하게 서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세요?" "홀홀, 총각. 내가 방앗간에를 좀 찾아가려는데 말이야?" 길을 묻는 것이라면 상대를 잘못 골랐다. 우현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할아버지? 저는 오늘 여기에 처음 왔거든요?" "뭐? 오른쪽으로 가라고?" 노인이라 귀가 잘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우현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아니고요! 저도 이곳 지리는 전혀 모르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공유지? 공유지가 어딘지 알아야지." "그게 아니라요!" 우현은 몸을 숙여 노인의 귀에 얼굴을 가져가 숫제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저도! 이 마을에는...!" 다가드는 향기는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우현은 코끝에 다가온 꽃향기를 느끼고 얼른 몸을 뒤로 뺐다. 계절도 계절이지만 향이 지나치게 인위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조금 들이마신 것 뿐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 "이런, 아쉽게도." 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노인의 쭈글쭈글한 손에는 향을 묻힌 천 쪼가리가 들려있었다. 우현은 얼른 몸을 돌려 여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몸을 돌리자마자 거대한 몸이 보였다. 놀라 숨을 들이키는 그의 뒤통수에서 탁, 하는 큰 소리가 울렸다. '이런...' 방심해 버렸다. 우현은 이를 부드득 갈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시계는 검게 물들었다. 이것이 바로 우현이 음침한 감옥에 앉아있는 이유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축축한 습기가 스민 돌벽은 바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도록 시원했지만 그것은 그리 기분 좋은 냉기는 아니었다. 그는 철장에 묻은 핏자국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지고이네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상처만큼이나 처참하게 느껴지는 것은 텅 빈 채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였다. "포기한 겁니까." 우현은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되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철창에서 물러났다.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헤집자 뒤통수의 혹이 뜨끔하니 아팠다. '모자를 쓰고 나갔어야 하는 건데.' 여관의 마당이라고 방심한 것은 전적으로 우현의 탓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금속과 금속이 서로 마찰하는 소리가 소름끼치기 그지없었다. 우현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감옥 안의 공기가 바늘 끝처럼 예리해지고 산꼭대기처럼 희박해졌다. 우현은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새로 들어온 녀석이 있다고 들었는데, 너로군." 그러나 우현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는 철창 너머에 선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딱 벌렸다. 남자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었다. 게다가 그의 피부는 하스티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가무잡잡했다. 우현의 표정을 본 남자는 비릿한 내음이 날 듯 웃었다. "뭐야, 너는? 정말 지고이네르냐? 그것치고는 꽤..." 남자의 시선이 우현의 밀빛 피부를 훑고는 올라가 눈동자를 확인했다. 검은색을 본 남자의 얼굴에 잔인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재수 없는 눈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군." 우현은 그가 선반을 뒤지는 것을 조금은 위축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잔인함을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아니, 보았다고 하기에는 미묘하게 어긋나는 기분이었다. 긴장한 머리 한 구석을 열심히 굴리던 우현은 남자가 꺼내든 물건을 보고서야 그 기분을 어디서 느꼈었는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것이 딱 좋겠지." 그것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색의 채찍이었다. 우현은 간밤에 숲에서 느꼈던 악랄한 살기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점은 숲의 살의는 고작 잔재일 뿐이었지만 이 사람은 바로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현은 몸서리를 쳤다. 감옥의 벽에 들러붙어 있는 살점과 핏방울의 이유를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 천천히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이렇게나 소름끼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우현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소리가 손을 뻗어 심장을 움켜쥐는 느낌이었다. 올려다 본 남자는 웃고 있었다. 아마 이런 효과를 노리고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리라. "쌍판대기 하나는 반반한 놈이군. 기집년들이 환장했겠는데? 이 영지 저 영지 다니며 얼마나 씨를 뿌려댔냐?" 경멸과 증오를 한껏 담아 말한 남자는 자물쇠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낡은 자물쇠가 움직이며 나는 쇳소리는 이미 거슬리는 정도가 아닌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우현은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들었다. 이가 절로 부딪힐 정도로 두려웠지만 그런 것을 내보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남자는 두려움과 의지가 섞여 조금은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대부분 처음에는 그런 눈을 하곤 하지. 하지만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몇 대만 맞으면 눈물을 찔찔 짜고 침을 질질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될 걸?" 남자의 손이 올라가며 바람 소리가 일었다. 우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철썩, 하는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살갗에 묵직한 것이 다가왔다. 최초의 느낌은 그저 화끈함이었다. 고통보다 먼저 뜨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이 찢어지는 아픔은 그 다음이었다. "흐윽...!" 우현은 이를 악물었지만 작은 신음이 나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뇌까지 전부 고통으로 물들어버릴 것만 같아, 우현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 위로 몇 번 더 채찍이 떨어졌다. 때로는 소리가 더 무서운 선고가 될 수도 있다. 채찍이 얼얼한 감각을 남기고 다시 들려지면 그제서야 맞은 자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우현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사이 또다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다시 올 고통을 예고하는 비웃음이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움찔해버린 우현을 보며 통쾌한 웃음을 머금었다. 촤악! 채찍이 다시 한 번 후려쳐졌다. 조건 반사로 몸을 움츠렸던 우현은 그것이 자신이 아닌 벽을 후려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잠시 안도했다. 움켜쥐었던 주먹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즈려 물었던 이는 얼얼했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우현은 흐릿한 시계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이번에도 장의 제목은 꽤 중요하다고 (저만) 생각합니다 ^^;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5장 거울 너머에 서있는 것 -2- "어째서..." 우현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이를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갈아붙였다. 맞은 부분은 마치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고 쓰라렸으며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컸다. 그러나 이유 없이 가해진 폭력에 대한 분노와 나약하게 울어버린 자신에 대한 반발 역시 거세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당신 역시 지고이네르의 피를 이었잖아? 도망치도록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촤아악! 이번의 채찍은 이전의 배 이상은 되는 힘을 담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유연하게 날아든 그것이 우현의 머리를 후려쳤다. 채찍 끝의 매듭이 할퀴고 간 뺨에서 살이 뭉텅 떨어져나갔다. 그는 이를 부서져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축축하고 미지근한 것이 뺨을 타고 흘러 턱 밑에서 떨어져 내렸다. "다시 한 번 나불거려봐! 뭐? 지고이네르의 피?! 네놈들 따위와 똑같이 취급하지 마!" 계속해서 후려쳐진 채찍은 신음조차 잊게 만들었다. 팔과 허벅지의 옷이 찢겨지고 살점이 튀어 올랐다. 자신의 몸에서 튄 핏방울이 뺨에 와 닿는다는 것은 꽤나 생경한 느낌이었다. 채찍의 힘에 밀려 바닥에 쓰러진 우현은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우악스러운 손길을 느꼈다. "윽!" 강하게 잡아채진 머리카락이 뽑힐 듯 아파, 우현은 눈을 부릅뜨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의 얼굴에 분노가 스쳐지나갔다. "이 놈이 아직도!" 남자가 다시 채찍을 들어올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은 우현은 얼른 눈을 감고 머리를 움직였다. 츠륵, 하는 소리와 함께 관자놀이에서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칫 늦었더라면 눈을 잃었을 것이다. 우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과 가무잡잡한 피부가 우현의 분노를 다시금 부채질했다. "그 눈깔, 아직도 그렇게! 너 오늘 잘 걸렸다. 어디 한 번 죽어봐라!" "큭!" 남자의 발끝이 우현의 명치끝에 파고들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통증을 느끼며 쓰러진 그의 위로 몇 번 더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발끝이 옆구리에 파고든다. 얇은 팔과 마른 다리가 짓밟혔다. 마치 짓이기겠다는 듯 다가온 발이 머리를 즈려 밟았다. 사악, 하는 소리가 귓가에 다가와 묘하도록 울렸다. 우현은 그것이 돌의 우둘투둘한 면에 닿은 뺨의 살갗이 벗겨지고 피부가 짓이겨지는 소리라는 것을 고통의 끄트머리에서 느낄 수 있었다. "네깟 놈들은! 뭐? 자유로운 영혼으로 방랑을 하는 지고이네르?! 웃기지 마! 계집질이나 하고 애가 생기면 이리저리 도망이나 치는 주제에! 너희 놈들 때문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아온 줄 알아?! 단지 네놈들의 더러운 피가 조금 섞여있다는 것만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 너희 떠돌이 놈들은 모르겠지!" 그래서? 우현은 몇 번이고 이를 악물었다. 혀를 깨물었는지 입안에 찝찔한 것이 감돌았다. 그래서? 우현의 손가락이 으그극 소리를 내며 돌 바닥을 긁었다. 그는 손가락에 걸리는 축축하며 미끈미끈한 것이 자신의 피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네깟 놈들 따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조잡한 물건이나 팔고 다른 이를 등쳐먹기나 하는 네놈들 지고이네르 따위!" 남자는 숨을 몰아쉬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떠오른 것은 악의에 충만한 살의였다. 이 건방진 놈을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한이라는 생각이 표정 전체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목숨이 붙어있는 채로 넘겨야 상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새 내던져버렸던 채찍을 찾았다.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움켜쥐는 남자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것은 심하게 긁히고 쉬어있어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였지만 단 하나, 안에 깃들인 분노만은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남자의 눈에서 불꽃이 확 이는 것과 동시에 우현의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그래서? 네놈이 그런 일을 당한 것이 나 때문이야? 저 사람들 때문이야? 화풀이도 정도가 있...!" "닥쳐! 너 따위, 마음 편하게 돌아다니며 노래나 하고 춤이나 추는 너 따위가 뭘 알아?! 자유로운 피가 흘러? 웃기지 마! 단지 무책임한 것 뿐 아냐! 책임지지도 못할 아이를 만들어놓고!" 말을 하는 도중에도 채찍은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팔과 허리의 연한 살점이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고통이 오랫동안 이어지면 나중에는 그것을 느낄 수조차 없게 되어버리는 것을 남자는 알지 못했다. 우현은 피투성이의 얼굴로 악에 받친 미소를 지었다. "뭐야, 그런 거야? 아버지가 자신을 돌봐주기를 바랬던 거네?" '계집질'이라는 단어에서 얻은 힌트였다. 남자의 지고이네르 아버지는 마을 처녀를 임신시켜놓은 뒤 도망쳤던 모양이었다. 지고이네르의 처녀와는 달리 마을의 처녀가 영락했을 경우 그녀는 대단한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태어난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것에 동정을 하라고? 천만에. 남자가 얼마만큼 불행한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피해자는 우현이었다. 가해자를 동정할 이유도 없을 뿐더러 이미 수많은 지고이네르를 인사불성으로 만들어놓았을 그를 생각하니 동정은커녕 혐오만이 고개를 들었다. 게다가 어쩌면 에코와 티티 역시 비슷한 일을 겪었을지도 몰랐다. 그것이 우현을 머리끝까지 분노하게 만들었다. 우현의 말을 들은 남자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동작을 멈추었다. 잠시 망연했던 남자의 눈에 이전보다 더한 분노가 지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잠깐이었다. "자, 잘도 나불나불...! 어디서 그따위 헛소리를 해대는 거냐?!" "그럼 이건 어때? 아아, 불쌍하기도 하지. 이렇게나 착한 아이인데 단지 출생의 문제 하나 때문에. 나쁜 것은 네가 아냐. 다 네 무책임한 아버지가 나쁜 거야. 그리고 따스하게 포옹이라도 해 줄까? 동정을 바란다면 먼저 그 태도부터 고치시지. 힘들게 살아왔다는 이유로 무슨 짓이든 해도 좋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이상은 동정은 고사하고 경멸만 당하게 될 뿐이니까!" 우현의 충혈된 눈동자가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비웃음을 띠었다.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얼굴로, 자신의 몸에서 나온 피를 머금은 입가로 지은 조소는 꽤나 섬뜩한 것이었지만 분노로 눈앞이 어두워진 남자에게는 찢어 죽일 이유의 하나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너 따위..." "그래. 나는 지고이네르 따위야. 마음껏 너 따위라고 말해 보시지. 자기연민에 빠진 반쪽 씨." 어둑어둑한 감옥 안에 츠르릉, 하는 소리가 울렸다. 어슴푸레한 은빛이 어둠을 가른다. 우현은 얼른 몸을 피했다. 그러나 옷 앞섶이 후드득 뜯겨나가며 맨 안 쪽에 걸어두었던 목걸이가 드러났다. 그는 황급히 그것을 움켜쥐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머리 하나 정도의 상금이 없다고 해서 굶어죽는 것은 아니니까. 네놈만은 반드시 죽여버리고 말 테다!" 검이 거친 궤적을 그렸다. 검을 그리 잡아보지 않은 움직임이었지만 급소를 찔리면 죽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현은 몸을 틀어 검을 피했다. 그러나 때는 늦어, 그의 팔에는 긴 혈선이 그어지고 말았다. 뜨끔한 느낌과 함께 피가 울컥 비어져 나왔다. "죽어버렷!" 남자가 검을 쳐들었다. 우현은 섬뜩하게 번쩍이는 빛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죽을 수 없어!' 이런 곳에서, 이런 남자의 손에, 게다가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 만나지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었다. 우현은 힘껏 몸을 날려 남자의 가슴을 밀쳤다. 쿠당탕, 하는 소리가 크게 나며 두 사람 모두 나동그라졌다. 얼른 다시 일어나려던 우현은 팔을 조여드는 억센 힘을 느꼈다. "이 자식!" "놔!" 남자의 손가락이 피가 흐르는 상처를 파고들었다. 우현은 얼른 팔을 뿌리쳤다. 어떻게든 그곳을 벗어나려던 우현은 그러나 자신이 흘린 피의 웅덩이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제법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진 그는 다음 순간 곁눈으로 스쳐 지나는 은회색 궤적을 보고는 얼른 몸을 굴렸다. "...!" 조금만 늦었더라면 심장을 찔렸을지도 모른다. 우현은 팔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검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스쳤다지만 채찍질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피부는 금세 찢겨 떨어져나갔다. 상처에서는 여지없이 피가 콸콸 쏟아져 내렸다. 얼마나 피를 흘린 것인지 눈앞이 까맣게 몰리며 어지러웠다. 우현이 어찔해진 잠깐의 사이 남자는 손을 뻗어 새까만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잘도 요리조리 빠져나가 고생을 시키는구나. 하지만 네 운도 여기까지야!" 남자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얼굴에서 승리감을 본 우현은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이전에도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자신의 과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은 그에게 목걸이의 원래 주인을 떠올리게 했다. '이스드.' 일부러 축복까지 해주었는데. 마지막으로 이스드의 얼굴을 보고싶었다. 남자가 검을 고쳐 쥐자 은빛 검광의 번득임이 우현의 망막을 비추었다. 공포라는 이름의 식은땀이 우현의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검이 올라가는 순간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푸욱,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감옥 안에 울렸다. "크흑!" 자신의 것치고는 지나치게 낮지만 지금은 목이 잔뜩 쉬어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연히 느껴질 줄 알았던 아픔이 전혀 없었다. 우현은 자신의 머리채를 휘감은 손가락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남자의 왼쪽 가슴을 관통하고 나온 단검의 끄트머리였다. 피와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그것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서슬이 퍼런 빛을 지니고 있었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상처가 날 것만 같은 냉정한 분위기가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의 입에서 억눌린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읍...!" 우현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피가 점점이 튄 신관복을 입은 청년이 남자의 뒤에 서있었다. 화가 잔뜩 난 얼굴이 살벌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지금의 우현에게 그런 것 따위가 보일 리 없다. "이스드..." 잔뜩 쉬어 긁히는 목소리를 들은 이스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아직도 손끝을 바르작거리는 남자를 거칠게 밀쳐내었다. 우현은 남자가 쓰러지는 요란한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이스드를 올려다보았다. "이스드...?" 이스드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음성을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한참 동안 우현을 내려다보던 그는 결국 손을 내밀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팔을 움직이던 우현은 온 몸이 격렬한 고통을 호소하자 그만 신음하고 말았다. 이스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숙였다. 우현은 몸이 붕싯하니 떠오르자 깜짝 놀라 눈으로 이스드를 바라보았다. 잡티 하나 없이 희고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이스드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에, 저기, 내가 걸을 수..." "입 다물어라." 거부를 허락하지 않는 음성이었다. 우현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 말았다. 우현을 안아든 이스드는 철창을 밀고 감옥 밖으로 나왔다. 이스드가 다른 사람들도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현은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문으로 향하자 깜짝 놀라 신관복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이스드? 다른 사람들은..." 우현이 맞는 내내 한 쪽 구석에 몰려 눈을 돌리고 있던 지고이네르들은 그 소리에 반색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스드는 자신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는 그들을 냉정한 눈동자로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노려보는 등의 강렬한 시선은 아니었지만 마치 얼어붙은 듯 차가운 것이었다. 지고이네르는 일제히 눈을 피하고 말았다. "이스드?" 그때 우현이 그의 옷깃을 다시 한 번 잡아당겼다. 이스드는 긴 한숨을 쉬고는 건드리기도 싫다는 마음이 역력한 움직임으로 벽에 걸린 열쇠를 집어들어 감옥 안으로 던졌다. 쩔그렁, 하는 무거운 소리를 향해 지고이네르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이제 됐겠지?" 나직하게 중얼거린 그는 우현을 한 시도 더 이곳에 있게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잰걸음을 놀려 밖으로 나왔다. 우현은 이스드의 성격이 차갑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든든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 차가움이 너무나 기쁘다고 말한다면 이스드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새벽의 하늘은 이스드의 머리카락과 같은 짙은 남빛이었다. 그것을 보자 안전한 곳으로 나왔다는 실감이 들며 온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우현은 저도 모르게 이스드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분노와 오기로 억눌려있던 공포가 뒤늦게 찾아들어 안도보다도 강하게 그의 온 몸을 옥죄어왔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이스드는 진정이 된 듯 조용해진 우현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문득 이스드의 시선이 찢어진 옷자락에 가 닿았다. 우현은 순식간에 차가워진 분위기를 느끼고 아연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이스드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같은 남자끼리 맨살 좀 보인다고 부끄러워할 것은 없었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었다.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앞 섶을 움켜쥐었다. 그것을 본 이스드가 낮게 중얼거렸다. "무슨 짓을 당한 것은 아니겠지?" 이스드의 음성은 낮았지만 충분히 음산했다. 그래서 우현은 잠시 생각을 해야 했다. 무슨 짓이야 충분히 당했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아닌가. 그러나 이스드가 그것 때문에 새삼스레 무섭게 굴 이유가 없었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다. 우현은 찢어진 옷자락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도대체 이 사람은. 남자끼리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우현은 얼굴을 슬쩍 붉히고 말았다. 바로 그 남자끼리면서 키스를 한 두 사람이 아니던가. 짧은 시간 동안 참으로 다채로운 표정 변화였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가 생각에 잠기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마지막으로는 얼굴을 붉힌다. 문제는 그 마지막 표정이었다. "내 이놈을 당장..." 이스드는 잇새로 쏘아붙이며 감옥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이를 간들 어쩌랴. 이미 남자는 절단난 것을. 우현은 풋, 하고 웃으며 자신의 상처를 가리켰다. "뭔 일을 당하기는 당했죠. 이렇게." 조금 멈칫한 이스드는 곧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차가워졌던 분위기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 원래라는 것도 그다지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으며 충분히 화가 난 것이기는 했지만. 우현은 깨진 유리조각처럼 선명하도록 날카로운 분위기를 느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가만히 있어." 새빨갛게 입을 벌린 상처에서는 채 멎지 않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피에 젖은 옷감은 곧 상처에 들러붙어 치료를 성가시게 만들 것이다. 그 위로 이스드의 손이 와 닿았다. 그의 손이 연한 빛을 머금자 통증도 상처의 흔적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는 새삼 감탄하는 우현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에, 그것이..." 감옥의 문을 열었는지 지고이네르의 무리가 우르르 건물을 빠져 나왔다. 우현은 그들을 곁눈으로 보며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두 개의 눈동자와 세 치의 혀로 남자를 격분하게 만들었던 이야기를 들은 이스드의 얼굴이 일순 어마어마한 분노를 띠었다. 이럴 때에는 알아서 기는 것이 상책이다. 우현은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걸쳐라." 이스드는 잿빛의 망토를 내밀었다. 일순 '그가 이런 것을 가지고 있었던가'라고 생각한 우현이었지만 너무 아파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현은 잠자코 망토를 걸쳤다. 그는 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채찍으로 이리저리 얻어맞은 피부뿐만 아니라 옷까지 너덜너덜했던 것이다. 양쪽 모두 피로 얼룩져있을 때야 살갗이 보이지 않았지만 치료를 끝낸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남에게 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는 이스드였다. 이스드는 몸의 상처를 모두 치료한 후 우현의 턱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그는 채찍으로 뭉텅 패이고 돌 바닥에 긁혀 엉망진창인 뺨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움직이지 마." 빛과 함께 따끔따끔한 통증이 뺨을 감쌌다. 상처에 들어간 돌 조각과 흙모래가 빠지는 것이다. 신관이란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하는 우현의 볼을 빛에 휩싸인 손이 감싸쥐었다. 그의 뺨은 곧 원래대로의 건강한 빛을 되찾았다. 그것을 확인한 이스드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현은 이스드가 화를 푼 줄 알았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5장 거울 너머에 서있는 것 -3- "고마워요, 이스...!" 감사를 말하던 우현의 뺨이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붉게 물들었다. 그리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이스드가 때렸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던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이스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스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본 그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스드는 천천히 손을 뻗어 우현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흰옷의 팔과 좋은 냄새가 우현을 감쌌다. "바보냐, 너는.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행동을 할 리 없지. 도대체 그런 상황에서 사람의 화를 더 돋궈 무얼 어쩌겠다는 거냐? 내가 조금이라도 늦게 왔으면 어쩔 뻔 했어?" 이스드의 분노는 염려로 인한 것이었으므로 맞은 우현도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공격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안긴 채 어쩔 줄 몰라하던 그는 손을 뻗어 이스드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검은머리 위에 한숨이 울렸다. "손가락도 치료해야겠군." 한 번 더, 이번에는 정말로 상냥하게 끌어 안아준 이스드는 곧 팔을 풀었다. 우현은 그가 자신의 손가락을 잡는 것을 바라보았다. 감옥의 바닥을 마구 긁는 바람에 무참하게 부러진 손톱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빛이 우현의 손을 가볍게 감싸안았다.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문다. 게다가 손톱이 자라나기까지 했다. 우현은 원래의 세계에서라면 기적이라고 불렀을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빛의 온도는 상냥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언제 자신이 화를 내었냐는 듯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있는 이스드와 이 온기는 어딘지 닮아있었다. 이 신성력은 상냥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신은 자비롭겠지만. "이스드?" 이스드는 '왜?' 라고 대꾸하는 표정으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우현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말로 하면 그가 싫어할지도 모른다. 우현은 여전히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그러나 다른 때와는 달리 피가 묻어있는 옷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지고이네르를 잡아들이도록 명령한 자들을 굉장히 미워하게 될 것만 같았다. 소년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스드는 우현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지고 부르튼 데다가 핏물이 배어 묘하게 붉어진 것을 보아하니 입안이 상한 것이 틀림 없었다. "입 벌려라." 우현은 순순히 입을 벌렸다. 그러자 입안에 고여있던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멋지게도 씹어놓았군, 그래." 이스드는 우현의 턱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고위급만 입을 수 있다는 하얀 신관복의 순결한 소맷자락, 붉은 핏물. 우현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극렬한 대비를 이루는 두 색채가 그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남빛도...' 대단히 어울린다.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남빛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길게 늘어진 그것은 그의 뺨을 부드럽게 간질이고 있었다. '머리카락?' 그 부드러움이 무엇인지 눈치챈 순간 우현의 정신은 아득히 먼 곳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열린 입술 사이로 들어온 혀가 그의 혀를 휘감고 있었다. 분홍색의 잇몸을 쓸고 혀의 뒷면까지 샅샅이 훑는다. 볼 안쪽의 매끄러운 살이고 입천장의 오돌토돌한 면이고 할 것 없이 전부 쓸려야만 했다. 상처를 찾는 움직임은 부드럽기는커녕 딱딱했지만 그것은 어딘지 스스로를 억제하는 느낌이 강했다. 이스드의 입술을 느끼고 정신이 몽롱해진 우현은 사고의 끄트머리로 웃고싶어지는 것을 느꼈다. 건드려진 상처는 쓰라렸지만 묘하게 즐거웠다. 우현이 실제로 웃었는지 이스드의 눈썹이 슬쩍 움직였다. 두고 보라는 듯 눈가만을 움직여 웃은 그는 상처의 치료가 끝났음에도 입술을 점령하고 있었다. 피점령지의 원래 주인이 숨이 막혀 어깨를 두드려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은 과연 고위급 신관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한참 후에야 떨어진 두 개의 입술은 비슷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스드의 옅은 색 입술이 꽃처럼 붉어진 것을 본 우현은 멍한 정신으로도 '요염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이스드는 즐겁게 웃으며 다시 한 번 우현에게 키스했다. 닿자마자 금세 떨어진 베이비 키스였지만 우현의 정신을 일깨워 현 상황을 자각하게 하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처방이었다. "이...이...이..." 이름을 부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항의를 하고팠던 것일까. 목덜미까지 붉어진 얼굴이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이스드가 말했다. "치료를 받았으면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지." "무슨! 이, 이건 치료를 빙자한 성희롱입니닷!" "과연 그럴까?" 여유작작. 이스드는 우현의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감촉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 "그게 정말로 성희롱이었다면 나만 즐거워야 하는 거겠지. 하지만 너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내 착각일 뿐인가?" 새디스트다. 이 남자는 절대로 새디스트야. 우현은 이스드를 향해 눈을 치떴다. 새빨개진 얼굴로 그래봤자 효과는 제로일 뿐이었지만. 우현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뗀 이스드는 이번에는 붉어진 뺨을 만지작거렸다. 최고급 도자기처럼 고운 감촉이 그의 손끝을 만족스럽게 했다. 어떻게 보아도 명백한 성희롱이다. "...요." "응?" 이스드는 웃으며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우현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던 말을 다시 한 번 크게 외쳤다. "이...! 고맙다고 그랬습니다, 빌어먹을 변태 난봉꾼 신관님!" "풋..."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단어들의 나열이 어찌나 즐겁게 다가오던지. 이스드는 소리내어 웃으며 우현을 보았다. 씩씩거리며 노려보는 모습조차 보기 좋았다. 이스드가 우현의 어깨를 끌어당겼을 때였다. "우현!" 새벽의 공기를 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우현은 고개를 돌렸다. 카이엔과 일단의 기사들이 근처에 서 있었다. 카이엔이 우현의 실종을 안 것은 저녁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우현을 방문한 그는 텅 빈방과 아무렇게나 놓여진 모자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카이엔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카이엔은 급히 사람을 풀어 지고이네르 사냥꾼의 행방을 찾고 그들의 아지트를 조사하게 했다. 초조하게 기다리기를 또 한참, 한밤중이 지나 새벽이 다가올 때가 되어서야 우현이 있는 곳을 알아내었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우현을 찾는 사람은 그 하나만은 아니었다. 카이엔은 어느 허름한 건물에서 나오는 청년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흰옷의 청년이 안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보아도 우현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온 몸에 피칠갑을 한 소년을 보자 안도와 더불어 걱정이 머리를 들었다. "우..." 그때 우현을 안고있던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거리는 제법 되었지만 눈빛만은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산꼭대기를 뒤덮은 만년설과도 같은 차가움을 본 카이엔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모두들 청년이 우현을 내려놓고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다음으로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신성력이었다. 카이엔은 다급히 청년의 옷을 살펴보았다. 여기저기에 피가 묻어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명 주교 이상의 신관이나 입을 수 있는 신관복이었다. "도대체..." 누군가 중얼거렸다. 카이엔은 신관이 우현을 치료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슬슬 다가가도 좋으련만,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였다. 신관이야 워낙 수려한 얼굴이니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우현, 그마저도 산을 다섯 개는 겹쳐놓은 너머에 있는 듯 멀고 아득하게만 보였다. 카이엔이 정신을 차린 것은 작게 울린 소리 때문이었다. 신관복의 하얀 옷자락은 우아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신관의 손은 우현의 뺨을 때린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품에 끌어들인다. 다정한 포옹을 본 카이엔과 기사들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상황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아도 입맞춤이었다. 익숙한 것인지 아니면 놀란 것인지, 우현은 신관을 밀어내지 않았다. 때때로 오랜 기간 여자 없이 지내야 하는 기사들 사이에서 동성간의 섹스란 그리 드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조차 당황하게 만든 것은 입맞춤의 상대가 신관이라는 것과. 바로 그 신관이 시선을 움직여 그들을 노려보았다는 것이었다. 서릿발이 풀풀 날리는 시선은 오랜 기간 단련한 기사들마저도 움찔할 정도로 섬뜩했다. 그래서였을까. 입맞춤이 끝나고 얼굴이 시뻘개진 우현이 뭐라뭐라 바락바락 외치는 소리가 들려와도 그들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현이 뭐라고 말했는지 냉기를 날리던 신관이 나직한 소리로 웃었다. 그는 웃음을 띄운 그대로 우현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카이엔은 우현이 대단히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신관에게 몸을 기대는 것을 보고는 어쩐지 분해지는 심정을 느꼈다. "우현!" 카이엔이 부르자 우현은 얼른 몸을 돌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깃들인 반가움이 카이엔을 기쁘게 했다. 한 걸음 더 다가간 카이엔은 신관의 손이 우현의 어깨 위에 단단히 얹혀있는 것을 보았다. 길고 우아한 손가락은 고생이라고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러나 유약함은 찾아볼 수 없이, 오히려 강한 힘으로 우현을 얽매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진한 남빛의 눈동자가 쏘아보고 있다. 카이엔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움켜쥐었다. "카이엔?" 우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잔뜩 쉬어 칼칼한 음성이었으며 얼굴에는 어색한 빛이 떠돌고 있었다. 카이엔은 애써 상냥한 웃음을 지어주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우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카이엔들이 키스신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괜찮은 것 같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현은 이스드를 흘긋 보았다. 그러더니 우물거리며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냥, 잡혀갔었어요. 현상금을 노리는 사람들에게요. 꽤 위험했었는데 이 사람이 와서 구해주었어요." "그래? 어떻게?" 우현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난처한 듯 이스드를 보았다. 카이엔 역시 우현의 시선을 좇아 신관복을 살펴보았다. 많은 기사들을 거느린 영주이며 그 자신도 상당한 실력의 기사인 카이엔이 다른 사람에게서 옮은 핏자국과 누군가를 찌르며 튄 피를 구분하지 못할 리 없었다. 카이엔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그, 그런 가요?" 머뭇거리며 묻는 우현이었지만 상황을 아주 모르지는 않았다. 아무리 지고이네르의 탄압이 잔혹하다 한들 그것은 왕의 명령 하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이스드는 명령을 이행했을 뿐인 선량한 시민을 죽인 것이다. 게다가 잡은 지고이네르마저 풀어주었다. 이것은 왕의, 나아가서는 라벤다의 명령을 어긴 것이었다. 카이엔은 먹구름이 뒤덮인 듯 금세 어두워진 우현을 얼굴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상황이야 그러하다고는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고작해야 평민 한 사람이 죽었을 뿐이었다. 아이겐튼 자작 정도가 되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는 것이다. "우현..." "내가 한 일이니 내가 수습하겠다. 네가 그런 얼굴을 할 이유는 없어." 신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청명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꺼내려던 카이엔은 그가 적어도 주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래는 나 때문인데다가..." "하지만은 뭐가 하지만이냐. 내게 그 정도의 힘도 없다고 생각했어?" 우현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하는 어조가 부드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우현은 책임을 느끼는 듯 미간을 접었다. 소년 같은 얼굴에 잡힌 언밸런스한 주름이 그에게 애늙은이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나도 다 안단 말이죠. 그런 것, 싫어한다고 말했으면서." 그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챈 이스드는 낮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것에는 어딘지 자조하는 기색도 들어있었지만 우현은 알아채지 못했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말을 마친 이스드는 카이엔을 흘긋 바라보았다. 색이 다른 두 쌍의 눈동자가 마주치자 남빛의 눈동자에 매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진한 이끼빛의 눈동자는 조금 움찔했지만 그러나 담담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만 돌아가 쉬는 것이 좋겠다, 우현. 피곤할 테니까." 카이엔은 우현의 어깨를 다정한 형과 같은 태도로 두드려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서 피로를 본 우현의 얼굴이 미안함으로 물들었다. 카이엔은 이스드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그럼 우현은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출발을 해야 하니 잠깐 동안만이라도 쉬게 해주어야지요. 제 일행을 도와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스드는 대답하지 않은 채 우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역시 이곳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시선에 조금 머쓱해진 우현은 죄 없는 망토만 만지작거렸다. 그때 사라락 소리가 나며 이스드의 머리카락이 우현의 어깨 위에 늘어뜨려졌다. 귓가에 닿은 숨결에 조금 흠칫하는 우현에게 그가 속삭였다. "아까 끌어안으면서 느낀 건데, 살 좀 찌워야겠어. 나뭇가지 같잖아."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로도 심장이 터질 듯 쿵쿵거려 이성을 잠시 날려보냈던 우현은 이스드가 고개를 들고 짓궂게 웃는 것을 보고서야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우현은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 지금... 지금 뭐라고..." "응? 크게 말해줘야 하나?" 그렇게 말한 이스드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기사들의 시선을 느낀 우현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나, 남이사!" "호오? 과연 남의 일일까?" 하얀 얼굴은 짓궂음을 담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마치 우현을 꿰뚫을 듯 직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현은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현은 망토자락을 세게 펄럭거리며 몸을 돌렸다. 분한 듯 걸어가는 그를 일별한 이스드는 슬쩍 고개를 돌려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살피는 듯한 이끼빛의 시선이 이스드를 보고있었다. "다시 한 번 제 일행을 도와주신 데에 감사를 드립니다." "무슨 그런 말을. 나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며 기쁨인 것을 말이오." "...그럼 저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신관님." '제 일행'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주어 말했지만 '당연한 일'과 '기쁨'으로 반격을 당한 카이엔은 마지막으로 신관의 호칭을 힘주어 불렀다. 이스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5장 거울 너머에 서있는 것 -4- 일행은 여관에 돌아오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모두들 지쳐있었던 것이다. 해가 중천에 있을 무렵, 우현은 극심한 허기를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도 못 먹었지." 말로 하고 보니 더욱 배가 고프다. 그는 허겁지겁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여관의 1층은 대부분의 여관이 그러하듯 펍을 겸하고 있었다. 아직 낮이라 술을 마시는 사람보다는 식사를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적당한 시끄러움이 기분 좋게 내려앉아있는 오후의 펍, 우현이 등장하자 실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의 검은 머리카락과 눈에 쏠렸다. 몸을 훑는 시선 중에는 마치 상품을 보는 듯한 것도 있었다. 우현은 주먹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때 그의 귀에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일어났구나." 카이엔이었다. 방금 일어났는지 목소리가 조금 잠겨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시선을 교환하기에 바빴다. 우현은 모르고 있었지만 지고이네르를 닮은 자작이 왔다는 소문은 이미 도시 전체에 퍼져 있었다. 자작의 수행원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큰일이 난다. 그들의 시선이 포기를 담은 채 우현에게서 물러갔다. 카이엔은 작게 혀를 찼다. 음식이 나오자 두 사람은 묵묵히 식사에 열중했다. 카이엔의 생각은 진한 남빛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고위 신관에게로 닿아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우현이 알고 지낼만한 사람이 아니건만, 두 사람은 도가 지나치게 친밀해 보였다. 감자 수프를 휘휘 젓던 카이엔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제의 그 신관 말인데.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에피서스에서 우연히...!" 엉겁결에 대답을 해버린 우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한 번 나간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는 법이다. 그가 후회를 하거나 말거나 카이엔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에피서스? 그곳에서 말인가? 정말로 거기에 있던 신관이란 말이야?" "...네." 우현은 눈앞에 놓인 접시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머리 속에 메아리치는 단어는 바보, 바보, 바보. 그때 카이엔이 미심쩍다는 듯 말했다. "이상하군." "뭐가요?" "내가 알기로는 에피서스에 신관을 보낸 일이 없었다. 혹시 회담을 위해 법황 대리로 왔다는 대주교인가?" 우현은 고개를 저었다. 멀리서 확인한 실루엣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 대주교는 배불뚝이 난로의 체형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카이엔은 연신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뭐가 그렇게 이상해요? 전쟁터니까 신관 한 두 사람 정도는 있을 수도 있잖아요?" 우현이 묻자 카이엔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신성력을 지닌 사람을, 그것도 주교급의 신관을 라벤다가 함부로 내돌릴 리가 없잖아." 이상한 말이었다. 우현은 미간을 조금 찡그리며 물었다. "잘 모르겠네요. 신성력은 신관이니까 있는 것 아닌가요?" "달라. 신성력이라는 것이 신관 특유의 힘이니까 마치 상징처럼 생각하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 신관 열 명이 있으면 그 중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이나 될까 말까 한 정도다. 그가 그렇게나 젊은데도 주교급인 이유는 아마 그 신성력 때문이겠지. 신성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하지만 저 정도쯤 된다면 고작 에피서스에 파견되거나 하지 않아. 십중팔구는 라벤다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 것이고, 파견이 된다고 해도 일국의 왕궁 정도가 아니고서야...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구야?" 카이엔의 설명을 넋을 잃고 듣고있던 우현은 마지막 질문을 듣고는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이스드는 자신에 대해 비밀로 해달라고 말했었지만 우현이 알고 있는 사실도 거의 없었다. 카이엔은 부루퉁한 채로 음식을 찝쩍거리는 그를 보았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조금 궁금했을 뿐이니까." 그렇게 말한 카이엔은 곧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그러고 보니 나는 너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구나. 너의 신비한 등장에 대해서는 에코에게 조금 들었지만 네 입으로는 듣지 못했지. 언젠가 꼭 한 번 묻고 싶다고 생각해오기는 했다. 괜찮다면 지금 말해줄 수 있을까?" 카이엔의 미소는 '역시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의미였다. 그것을 파악한 우현은 잠깐 망설였다. 감출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카이엔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 달리 중요한 것도 없고, 단 하나의 사실만을 감춘다면 이야기를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우현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합니다, 카이엔. 아직은..." 아직은. 카이엔은 우현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해석했다. 갓 구워내어 따끈따끈 달콤하던 빵이 갑작스레 소태맛으로 변했다. "아직은, 이라면 언젠가는 말할 수 있다는 거겠지?" 카이엔은 씁쓸한 심정을 억누르며 웃었다. 그 말을 들은 우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우현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방으로 올라갔다. 내내 흘금거리는 시선들이 거북했기 때문이었다. 카이엔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호리호리하고 선이 가는 실루엣이 날렵하게 움직여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은 꽤나 보기 좋았다. 우현의 실루엣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테이블로 눈을 돌린 그는 반주로 나온 포도주 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아직은, 이라. 먼저 들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겠지." 입안에서 달큰하게 돌아야하는 포도주가 유난히도 쓴 오후였다. "자아. 등을 펴라고." 구부정하니 굽힌 우현의 등을 카이엔이 두드렸다. 우현은 카이엔을 흘겨보았다. "카이엔도 내 입장이 된다면 그런 소리 못 할 걸요." 그들은 도시의 공유지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상당수의 시민들이 몰려있었는데, 그들의 시선은 전부 우현의 검은머리로 쏠려있었다. 그는 절로 움츠러드는 어깨를 펴려 했지만 무의식중의 행동은 대단히 정직했다. 우현의 등은 또다시 구부정하게 되고 말았다. "앞을 보라니까." 카이엔이 다시 한 번 핀잔을 주었다. 우현은 마지 못해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때 하얀 옷자락이 그의 시선 끝에 잡혔다. 혹시 싶어 얼른 고개를 돌린 그는 곧 실망의 한숨을 쉬었다. 여자였던 것이다. '잘 해결된 걸까?' 흰 신관복은 주교급 이상이라니 이스드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현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쓸었다. 이스드의 손찌검보다 더 마음을 짓눌렀던 것은 그 안에 깃들였던 걱정이었다. "저 건물인가?" 카이엔의 목소리였다. 생각에 잠겨있던 우현이 고개를 돌렸다. 잿빛 건물이 그곳에 있었다. 우중충한 건물은 마치 그 주변만 침묵에 휩싸인 듯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간밤에 느꼈던 끔찍했던 고통이 생각나 주먹을 꽉 움켜쥔 우현은 자신이 했던 말을 찬찬히 떠올렸다. 당시에는 고통과 분노 때문에 정신이 없어 마구 내뱉었던 말들이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한 그 말은 우현 자신의 심장을 통렬하게 찔러대는 것들뿐이었다.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는 주제에 잘난 척 나불대기는.' 그는 자괴감을 느끼며 고삐를 움켜쥐었다. 머리 속에 아른거리는 것은 에피서스의 병동에 누워 꾸었던 그 꿈이었다. 노력하는 아버지, 돌아온 어머니, 자신을 찾는 두 사람. 그러나 생각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목이 졸려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 숨통을 조인 손가락의 새하얀 빛을 떠올리자 등골에 한기가 일었다.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잊어버려. 안 그랬으면 오히려 내가...' 내가, 그리고? 그 이상 무슨 일을 당했을 거란 말인가. 이미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남은 것이라고는 달랑 몸뚱이 하나 뿐이었는데. 그는 더 이상 빼앗길 것도 잃을 것도 없던 상황이었다. 아버지를 내버려 두어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그러니 그는 결국 전부 손 놓아 버린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우현? 괜찮아?" 카이엔은 우현의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그의 걱정스러운 눈동자를 바로 앞에서 본 우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흔들리자 이스드 특유의 냉정한 향기가 그리워졌다.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우현은 흰 옷자락에 묻어있던 향내를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조금 안정이 되는 자신을 느끼며 입을 일그러뜨렸다. 그것은 묘한 웃음이었지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이야.' 그러나 우현은 알지 못했다. 임시방편으로 붙여놓은 반창고는 조금의 물기로도 금세 떨어져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하수구는 이미 들끓고 있었다. 우현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도시 -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일 뿐이었지만 - 를 나서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드넓게 펼쳐진 숲이 그곳에 있었다. 바람이 불자 나뭇가지들이 흔들려 우아하게 노래했다. 앞면의 짙은 색과 뒷면의 옅은 색이 번갈아 뒤집히며 아름다운 반짝임을 만들어내는 나무들은 전부 은사시나무였다. "숲 전체가 한 종류의 나무로 이루어져 있어. 바람이 불면 그야말로 장관이지." 카이엔의 말이었다. 우현은 조그만 바람도 놓치지 않고 와사사삭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며 '사시나무 떨 듯'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들은 그 숲의 중간에서 멈추어 식사를 준비했다. 주로 움직이는 것은 종자들이었다. 그들은 바삐 뛰어다니며 물을 뜨고 나뭇가지를 주워모아 불을 지피고 음식을 만들었다. 우현 역시 종자들과 함께 심부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종자들 쪽에서 그를 어려워했다. 공식적으로 보면 그는 카이엔 아이겐튼 자작의 종자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주종보다는 오히려 형제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 이상한 위치가 종자들뿐이 아닌 기사들조차 우현을 멀리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색해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벅차 외부의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우현은 베어내고 남은 그루터기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카이엔은 그의 어두운 표정을 지고이네르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손에 들린 작은 병과 우현의 얼굴을 번갈아 본 카이엔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이곳을 벗어나면 언제 다시 시냇물을 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현." 우현은 고개를 들었다. 카이엔이 상냥하게 웃고있었다. 우현은 그가 건네주는 병을 얼결에 받아들었다. 흔드니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게 뭐죠?" "머리 염색약. 저쪽 시냇가에 가서 물들이고 와. 머리를 물에 적시고 나서 바르면 돼." 우현은 카이엔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여름의 바람은 잎이 무성한 나무들 덕분인지 대단히 시원했다. 오랜 기간 동안 쌓여온 나뭇잎들이 썩어 만들어진 폭신한 융단이 기분 좋게 밟혔다. 우현은 인간의 발이 꾸준히 닿아 만들어진 길을 따라 시냇가로 갔다.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반짝거리던 시냇물은 가까이에서 보니 눈이 부실 정도였다. "아?" 시냇가에 도착한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익숙한 모습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햇빛을 받아 반들반들 빛나는 잿빛 바위 위에 느긋하게 앉아있던 그 사람은 우현과 눈이 마주치자 슬쩍 웃었다. 냉정한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이, 이스드?" 이스드는 여전히 새하얀 옷을 입고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드리워진 햇살이 옷감에 스며들어, 마치 빛 속으로 녹아든 듯 아련했다. 환영인지 아니면 실체인지 착각할 정도로 먼 느낌에 놀란 우현은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발을 멈추었다. 그의 그러한 경직을 푼 것은 한 마디의 말이었다. "늦었군." 차가운 음색의, 그러나 우현에게 향할 때만은 확연히 누그러지는 음성이 졸졸거리는 소리에 섞여 울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우현은 잰걸음을 놀려 이스드에게 걸어갔다. "이스드? 어떻게 이곳에 있어요?" "어떻게라니? 저 도시에서 하샤라로 가기 위해서는 이 숲을 반드시 거쳐야 하니까 여기에 있는 거다." "어, 하지만 방금 늦었다고..." "그거야 당연하지." 이스드의 웃음이 짓궂은 빛을 띠었다. "너 때문에 밤새도록 뛰어다닌 기사들이 네게 이것 저것 심부름을 시킬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이곳에 와 기다리고 있었지. 헌데 너는 오지 않고 애꿎은 다른 종자들만 왔다갔다 하더군. 왜 빈손이지? 물동이는?" 우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병을 들어보였다. 이스드가 말했다. "거기에 물을 담아가려고? 한 모금 밖에 안 들어갈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머리 염색을 하러 왔어요. 아무래도 눈에 띄니까." "염색이라..." 말꼬리를 흐린 이스드는 손가락을 뻗어 우현의 머리카락을 한 자락 잡아들었다. 햇살을 반사하여 눈부신 윤기가 도는 새까만 머리카락은 금발이 가지는 메탈릭한 광택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스드는 그것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가 슬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가에 부드럽게 지어진 웃음을 본 우현의 심장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어, 저, 이스드?" "이 색깔, 마음에 들었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그제 같은 일은 다시 겪고 싶지 않으니까." 새벽이었으니 어제인가, 라고 중얼거리는 우현을, 이스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올려다보았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우현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귓가는 슬쩍 붉어져 있었다. 그것이 즐거워 다시 한 번 웃은 이스드는 손을 풀어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사르륵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가닥가닥을 보니 다시 붙잡고 싶어진다. 그는 손을 뻗어 이번에는 머리카락의 주인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우현은 염색을 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덕분에 새하얀 손가락은 목표를 잃고 허공에 걸렸다. "하..." 코웃음인지 자조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미묘한 웃음이었다. 우현은 고개를 들었지만 그가 본 것은 허공에서 멈춘 손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이스드?" "...아니. 별 것 아니다." 별 것 아닌 것이 아닌 것 같았지만 우현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이스드는 구라쟁이♬(어이;)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5장 거울 너머에 서있는 것 -5- 우현은 물가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닥에 있는 자갈 하나하나까지 전부 보이도록 맑은 시냇물은 유리의 잘린 단면 같은 색깔을 띠고 있었다. 그것에 감탄하며 머리끈을 푸는데 바위 위에 앉아있던 이스드가 다가왔다.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요. 옷에 튈지도 모르니까 저쪽으로 가있는 편이 좋을 걸요." 그러나 이스드는 우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근처에 주저앉았다. 우현은 포기하고는 허리를 숙여 물에 머리카락을 담갔다. "읏, 차거!" 날씨는 늦여름인데 물의 온도는 벌써 가을이었다. 찌르르한 냉기가 머리카락을 타고 올라와 등골을 따라 흘러내렸다. 어깨를 부르르 떤 우현은 손으로 물을 떠 머리카락에 끼얹었다. 머리가 충분히 젖었다 싶을 무렵, 우현은 손을 뻗어 염색약을 집어들었다. 뚜껑을 열자 독한 냄새가 어지러이 풍겼다. "도대체 무슨 색깔인 거지?" 어떻게 보아도 검은색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약액을 들여다본 우현은 이내 그것을 머리에 쏟아부었다. 질척질척 미지근한 느낌이 두피를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은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옷에 약이 튀지 않토록 조심스레 손가락을 놀려 머리카락을 비볐다. 잠시 그러고 있는데 서늘한 손가락이 다가와 우현의 목덜미를 스윽 훔치고 지나갔다. "히익! 뭐, 뭐죠?!" 부위가 부위인지라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킨 우현이 외쳤다. 그러자 바로 곁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이 묻어서. 아무리 봐도 빨강머리가 나올 것 같은데." "빨강..." 우현은 내심으로 신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곁눈질을 하니 이스드가 손가락에 묻은 염색약을 씻고 있었다. 그 손가락 끝에 묻은 색채는 다홍에 가까운 빨강이었다. 질색을 한 우현은 얼른 머리를 헹구고 몸을 일으켰다. "어디... 이런. 얼룩이 졌잖아." 이스드의 말을 들은 우현은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끝을 집어들고 살폈다. 워낙 새까매 제대로 염색이 되지 않은 머리카락은 검정과 심홍의 두 색깔로 얼룩덜룩이었다. 우현의 눈썹 끝이 축 쳐졌다. "이런 머리로 돌아다니는 것은 '날 좀 의심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데, 이스드는 어때요?" "동감이다." 짧게 대답한 이스드는 우현을 끌어다가 자신의 앞에 앉혔다.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드는 우현의 머리를 꾹 눌러 숙이게 한 그는 염색약 병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거 다 쓰지 않았어요?" "아직 조금 남았다. 가만히 있어봐."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무어라 더 말을 하려던 우현은 그러나 이스드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헤집는 것을 느끼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슬쩍슬쩍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손길이 너무나도 온화했다. 우현은 눈을 감았다. 가슴 속에서 치민 뜨거운 것이 머리끝까지 솟아올라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이스드는 귀 끝까지 붉어진 우현을 깊은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임에 따라 우현의 머리카락은 점차 그 색깔을 바꾸어 나갔다. 말 한 마디, 생각 한 번이면 될 것을 일일이 손으로 어루만져 감촉을 즐기고 있는 것은 손에서 놓아버렸던 머리카락의 흐름을 따라 그 주인을 붙잡고 싶었던 방금 전의 기분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우현을 놓쳐버리고 허공에 멈추었던 손을 떠올렸다. '잡고 싶었다니.' 멀어지는 우현을 붙잡고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허무함과 쓸쓸함은 태어나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우현은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로 이스드의 안에 있는 생소한 감정들을 일깨워 휘젓고 있었다. "다 된 건가요?" 이스드의 손이 멈춘 것을 느낀 우현이 물었다. 이스드는 그의 머리카락에서 손가락을 떼며 말했다. "이제 씻기만 하면 돼." 계속 숙이고 있던 고개가 아팠는지 좋아라 물가로 다가간 우현은 머리를 시냇물에 넣었다. 그 곁에 앉은 이스드는 손으로 물을 떠 우현의 머리카락에 끼얹어 주었다. 다 헹궜다 싶었던 우현은 고개를 들고 아무렇게나 머리카락을 비틀어 물기를 짰다. 그러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우현은 대강 마른 머리카락 한 웅큼을 집어들어 눈앞에 가져갔다. 입이 벌어지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우와아..." 깊은 윤기를 내며 빛나는 머리카락은 달콤한 자줏빛이었다. 그 짙은 색깔은 우현의 밀빛 얼굴에 썩 잘 어울렸다. "고마워요, 이스드. 어떻게 이런 색깔을 낸 거죠? 멋지다아!" 잠시 잠깐이지만 시름과 근심을 잊은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이스드의 대답을 바라지는 않은 것인지 우현은 연신 종알대고 있었다. "굉장하네. 어떻게 같은 것을 쓰고도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오는 걸까? 내가 너무 금방 씻어버린 건가요?" "그러길래 도와주겠다고 했을 때 얌전히 받아들였으면 좋았잖아?" 왜 안 나오나 했다. 우현은 이스드의 가벼운 비아냥을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그때 이스드의 팔이 뻗어나와 우현을 잡아당겼다. 얼결에 붙잡힌 그는 그대로 하얀 옷가지에 얼굴을 묻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가만히 있어." 금방이라도 몸을 돌리고 앞서 걸어갈 것만 같은 우현이지만 손을 뻗으면 잡힌다. 끌어당기면 다가와준다. 이스드는 깊은 만족감에 잠겨 한숨을 쉬었다. 그를 들쑤셔 이런 감정을 일깨운 것도 우현이었다. 이젠 자줏빛으로 변한 머리카락을 지분거리던 입술이 슬며시 내려와 이마를 꾹 눌렀다. 이스드의 서늘한 입술을 중심으로 피어난 뜨거운 기운이 우현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가만히 닿아있던 입술이 조용조용 움직여 말을 만들어내었다. "조심해서 행동하도록 해. 언제나 너를 보고 있을 수는 없는 거니까." 감시자라도 붙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라고 중얼거린 이스드는 곧 팔을 풀었다. 해방된 우현은 그러나 떨어지기를 주저하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둔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감정인 '좀 더 닿아있고 싶다'라는 마음이 그를 잡아끌고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스드가 말했다. "가봐도 좋아. 네 일행이 기다리고 있겠지." "이스드."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다가선 우현은 이스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키 차이는 머리 하나 정도. 의외의 상황에 놀랐는지 다소 흠칫하는 이스드의 어깨에 이마를 얹은 우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체온이 낮은 손가락이 다가와 우현의 뺨을 쓸어내렸다. 보물을 다루듯 섬세하게 움직인 그것은 곧 우현의 턱을 들어올렸다. 우현은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남빛을 보았다. 단지 본능적인 욕구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음이 그 안에 담겨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그는 스스로 고개를 들어 이스드에게 다가갔다. 기뻐서 미칠 것만 같았다. "왜 이리 오래 걸렸... 응?" 우현을 발견한 카이엔의 말이었다. 확실히 근사한 색깔로 잘 물들기는 했지만 그가 건네준 것은 붉은색이 나오는 약이었다. 원래의 머리가 워낙 검어서 그런가, 라고 생각한 그는 우현의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젠 누가 봐도 지고이네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군. 얼른 가서 밥 먹어." 아무 말 없이 불가로 다가간 우현은 자기 몫의 음식을 떠 아구아구 먹기 시작했다. 그 입술은 미미하게 붉어져 있었지만 그것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9월의 첫째 날은 가을의 길목답게 시원했다. 요정 같은 은사시나무의 숲을 지나친 며칠 후의 저녁, 그들은 울창한 숲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숲의 입구에서 노숙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들은 저녁을 날 채비를 서둘렀다. 노숙을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물과 안전이었다. 그들은 먼저 불을 크게 피워 퀴아네에 대비했다. 물은 오다가 본 샘에서 떠온 것이 있어서 한결 편했다. 곧 음식을 만드는 냄새가 주변에 그윽하게 퍼졌다. 놀고 있기 무엇하여 종자들 사이에 끼였다가 쫓겨난 우현은 문득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적금빛 노을조차 흐리게 보일 정도로 진한 안개가 자욱하게 껴있었다. "호수 때문이겠지. 숲 속에 제법 큰 호수가 하나 있거든." 우현이 안개에 대해 묻자 카이엔이 한 대답이었다. 그는 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숲을 돌아가는 것과 가로질러 가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빠른가를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도를 한 번 보고 숲을 한 번 본 카이엔은 고개를 저었다. "숲의 확장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다는 소문이 맞는 모양이다. 재작년에 이 근처에 왔던 적이 있는데 그때에는 이렇게까지 큰 숲이 아니었어. 돌아가려면 상당한 시간을 허비해야 할 것 같은데." 우현은 숲의 확장에 대해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엘 티에르의 경우에는 매년 숲이 움직이기까지 한다. 하물며 확장이 빠른 정도야 그리 특이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자 카이엔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엘 티에르는 신에게 바쳐진 특별한 숲이니까. 소문에는 그런 장소가 몇 군데 더 있다고 해. 이 대륙의 중심에는 엘루이다라는 이름의 넓은 사막이 있는데, 그 정 중앙에는 사철 꽃이 지지 않는 정원이 있다더군.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져 버려서 누구도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말이야. 그리고 엘루이다와 카라낫소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 루클르드 산맥에는 보석이 솟는 샘이 있다던가." 사막의 정원이라는 말에 혹시 신기루가 아닐까 생각했던 우현은 보석이 솟는 샘이라는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럼 사람들이 많이 몰리겠네요?" 우현은 어릴 적에 보았던 미국 서부 영화를 떠올렸다. 거기에는 금을 찾아 몰려드는 무법자들이 등장했었다. 사실 보석이 솟는 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욕심을 내어봄직한 장소가 아닌가.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래. 하지만 그 샘을 발견했다는 사람은 거의 없어. 루클르드 산맥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온 사람 자체가 드문 지경이니까. 큼지막한 보석을 가지고 와서 이게 그곳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가끔 있지만 정말인지 알 도리는 없지." "살아 나온 사람이 드물다니..." "퀴아네가 많은 곳이니까. 그곳에서 퀴아네가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말도 있어. 몇 번이고 토벌 부대를 파견하곤 하지만 도무지 근절되는 법이 없어서 골치야. 그 루클루드 산맥을 가로지르는 것이 라벤다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는 하지만 퀴아네 덕분에 멀리 돌아서 가야만 해." 라벤다. 우현의 최종 목적지가 될 수도 있는 장소였다. 그는 라벤다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지고이네르의 탄압을 주장했다는 7인의 대주교와 그들의 건의에 인가를 내렸다는 법황을, 이스드와는 달리 힘으로 타인을 억누르는 것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생각에 잠긴 우현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까매져 있었다. 진자줏빛 머리카락 사이로 엿보이는 그것은 오히려 검은머리일 때보다 훨씬 더 또렷하게 눈에 띄었다. 카이엔의 이끼빛 눈동자에 감탄과 더불어 부러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최초로 느낀 것은 진홍색이었다. 검은색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진한 붉은 색의 사방은 마치 어둠에 휩싸인 것만 같았다. 잠시 생각한 우현은 그 색깔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내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색깔이네.' 게다가 이전에 한 번, 이런 색깔에 둘러싸였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의 것과 다를 바 없는 목소리가 그를 조롱했었다. '꿈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쉰 우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막하도록 넓게 펼쳐진 같은 빛깔은 어떻게 보면 아주 좁은 공간을 물들인 것도 같아 보였다. 그는 팔을 길게 뻗어 휘저었지만 손에 걸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꿈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아무 것도 없으면 조금 불안해진다. 이전에 같은 빛깔 속에 있었을 때의 일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조금 머뭇거린 우현은 쭈뼛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별다른 일은 없었고,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냥 꿈인가보다." 그의 음성은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바람으로 만든 화살을 쏘아보낸 듯 직선으로 뻗어나간 목소리는 어느 순간 은은하게 메아리치며 흩어졌다. 바위에 부딪힌 물살이 맑게 방울져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진홍의 세상은 끝도 없었다. 그는 흘러내려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손가락 끝에 차가운 것이 걸렸다. 그는 전혀 덥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물방울이 맺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본 우현은 자신이 어느새 진하게 낀 안개 속에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개는 우윳빛이었지만 일견 투명하기도 한 신기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안개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뭐, 꿈이니까.' 그는 손을 내밀어 안개를 쓸었다. 안개의 가닥이 손가락으로 걷어졌다. 우현은 손가락 끝에서 금세 녹아버리는 그것을 보며 조금 웃었다. 그 소리마저 먼 곳까지 쏘아져나가 부딪혀 흩어졌다. 그는 말소리와는 달리 조금 으스스하게 들려오는 웃음의 파편을 들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조금 더 걸어가자 큰 호수가 나타났다. 호숫가에는 작은 오두막이 한 채 서있었다. 우현은 오두막으로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다. 그때 끼이익, 하는 오래된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조금 긴장한 우현의 눈에 비친 것은 그와 비슷한 또래의 처녀였다. 길게 늘어뜨린 은백색 머리카락은 명주실처럼 고왔고, 창백한 얼굴은 덧없게 느껴졌다. 처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아름다운 회색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눈이 마주치고, 세상은 검붉게 물들었다. "에...?" 그나마 있던 풍경들조차 전부 사라졌다. 남은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우현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회색 눈동자를 피해 얼굴을 돌렸다. 굉장히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처녀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툭 떨어질 듯 물기어린 눈동자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호소하는 듯 했다. '기분 나빠.' 우현은 너무나도 간절하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하는 처녀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거북스럽다 못해 기분이 더러웠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하나,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기분이 더 더럽게 되리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은 꿈이다. 멋대로 깨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면 악몽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대신 우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끄으으윽...」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눈을 뜬 우현은 그 신음소리가 귀에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은 딱딱하게 경직되고 말았다. '무슨...' 등골을 타고 서늘한 것이 솟아올랐다. 귀신의 차가운 손가락처럼 느껴지는 그것은 등뼈를 타고 올라와 목을 지나 머리까지 솟구쳤다. 검은 땅에 누운 시체의 흰 피부처럼 선연한 그것은 공포였다. '무슨 이런 꿈이...' 그의 손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점점 숨막히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우현의 눈이 점차 까맣게 물들어갔다. '아아, 그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했다. 손끝에서 뛰놀던 맥박과 터질 듯 짓눌러진 손가락,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술 냄새가 물씬 풍기던 마지막 숨결까지도. 우현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1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어쩌면 평생을 쫓아다닐 기억이었다. 신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툭, 고개가 꺾인다. 우현은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때 사락,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 나의... 나직한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우현은 귀를 막았다. 무엇도 듣고싶지 않았다. "우현?" 검붉은 세상이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걱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가 우현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우현? 괜찮아?"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얼굴에 얼룩진 눈물 탓인지 시계가 흐릿했다. "나쁜 꿈이라도 꾼 건가?" 그것은 카이엔의 목소리였다. 그제서야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우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짐짓 미간을 찡그리며 얼굴을 가렸다. 아무리 카이엔이라고는 하지만 눈물을 흘린 모습 따위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밤이라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우현?" 카이엔의 목소리는 형제처럼 다정했다. 우현은 재빨리 얼굴을 닦아낸 후 조금 웃었다. "괜찮아요. 좀 안 좋은 꿈을 꾼 것뿐이에요." 카이엔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카이엔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우현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줄 뿐이었다. 아직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총총히 뜬 별은 새하얀 빛을 뿜으며 우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모포 속으로 기어들었다. 꿈지럭거리며 편한 자세를 취하는 그의 머리카락에 상냥한 손가락이 닿았다. "괜찮아. 다들 무사할 거야." 우현은 그게 아니에요, 라는 말을 입 속으로 삼켰다. 카이엔이 생각하는 우현의 악몽거리란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걱정이 현실화되는 것 정도이리라. 하지만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고맙습니다." 우현은 간신히 입꼬리를 당겨 웃는 체 하고는 모포를 머리까지 끌어당겼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눈을 감았다. 어쩐지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5장 거울 너머에 서있는 것 -6- 눈두덩이 꽤나 뜨거웠다. 아마 부어있을 것이다. 원래의 세계에서라면 숟가락을 눈두덩에 대어 식혔겠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나무식기 뿐이었다. "뭐야, 젠장. 기분 나쁜 꿈이라니까." 우현은 일부러 투덜대었다. 찬물에 넣어 식힌 손가락을 눈두덩에 대자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것은 기분 나쁜 꿈일 뿐이다. 그는 자신을 달랬다. 내내 자욱하던 안개는 일행이 아침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우현은 벌레 씹은 표정을 한 채 안개를 바라보았다. "뭐해? 출발이야." 안장 위에 앉아 미적거리는 그를 보며 카이엔이 말했다. 우현은 마지못해 말을 몰아 숲 안으로 들어갔다. 맨 첫 발을 디디는 순간 우현을 휩싼 것은 뿌연 안개였다. 갑작스럽게 짙어진 안개를 보며 일행 모두가 웅성거렸다. "뭐야, 이거?" "기분이 나쁜데." 우현은 손을 내밀었다. 꿈과는 달리 걷어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축축한 기운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한기마저 감도는 그것은 숲 바깥의 공기와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었다. 숲 깊숙한 곳을 향해 들어갈수록 안개는 더더욱 짙어져만 갔다. 바로 옆 사람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 속을 걷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난감한 한숨을 내쉬었다. '공포 영화 같아.' 우현은 후덥지근한 풀 냄새가 자욱한 습기를 타고 더더욱 농후해지는 것을 맡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주변은 그 흔한 새 소리 하나 벌레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유일하게 들려오는 것은 길게 자란 수풀이 갈라지는 스사삭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 어떤 비현실적인 것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게다가 현실적인 위험, 즉 길을 잃는다든가 맹수가 나타난다든가, 아주 운이 없어 퀴아네가 등장하기라도 한다면 그들 일행은 크나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카이엔?" 우현은 곁에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곧 대답이 되돌아왔다. "왜?" 소리는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시 되돌아나갈 수는 없을까요? 이렇게 안개가 짙어서야 길을 잃기 십상일 텐데." "나도 그 생각을 했지만..." 카이엔은 엄지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지만 안개 때문에 서로의 모습을 보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뒤를 봐. 앞보다 더한 안개가 껴있다." 우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산 전체에 드라이아이스를 깔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짙은 흰빛이 자욱했다. 다시 앞을 보려던 그는 길게 자라난 가지 끝에 얼굴을 긁히고 말았다. "익!" "우현?" "별 것 아니에요. 나뭇가지에 긁혀서..." 우현은 볼을 감싸쥐며 중얼거렸다. 손에 묻어 나온 붉은빛이 안개 속에서도 선연했다. 문득 그는 간밤의 꿈에 휩싸인 듯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머리를 흔들어 자신을 다잡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꿈일 뿐이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추악한 부분이 타인에게 전부 까발려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추악함은 진실이기에 더더욱 커다란 상처를 준다.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무덤까지 가지고 갈 기억. 꿈으로 인해 새롭게 불러일으켜진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였지만 동시에 그의 현재를 구성하는 파편이었다. '조금 기분 나쁜 꿈을 꾼 것뿐이라고.' 새하얀 처녀는 나타날 리 없고 사방은 검붉은 빛깔도 아니다. 이곳은 꿈속이 아니었으며 안개는 그저 근처에 호수가 있기 때문에 이리도 자욱한 것일 뿐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한껏 조여든 심장을 달래었다. 정말로 새하얀 처녀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주변은 뿌연 안개로 가득하기는 했지만 검붉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호수의 망령이 풀어놓은 희디흰 옷자락은 일행의 발을 꽁꽁 묶었다. 우현은 안개가 너무 짙으면 불이 잘 붙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부싯돌을 몇 번이나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불씨는 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식사는 건량으로 대신해야 했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불을 피우지 않으면 퀴아네가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음산한걸."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기사는 모두의 마음을 대표했다는 이유로 순식간에 눈총을 받게 되었다. 아주 조그만 소리에도 흠칫 놀라 방비를 단단히 하는 기사들에게 안전하게 보호받는 기분은 제법 그럴 듯 했다. 우현은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모포를 펴고 누웠다. 그러나 이런 저런 생각이 겹쳐 잠이 오지 않았다. 졸린 눈을 간신히 뜨며 불침번을 서는 사람도 괴롭겠지만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자는 것 역시 나름대로는 괴로웠다. 그는 눈을 감고 기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아무도 없이 안개만이 떠도는 숲에서 홀로 모포를 덮고 누워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가슴께로 가져갔다. 금속의 단단한 감촉을 느끼자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었다. 숲 특유의 습습한 흙내음이 모포 너머로 전해졌다. 달리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시골은 아주 오래 전에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우현은 서울 토박이로,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서울에서 지내는 분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흙내음은 어쩐지 고향에 온 듯한 안온함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안에 있는 짙은 향수를 자극했다. 습기가 가득 뭉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시원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듯 쓸고 지나갔다. 숲 특유의 깊고 풍부한 향기를 지닌 바람의 손길은 차가움 가운데에 약간의 다정함을 품고 있었다. 그 느낌이 그리운 누군가를 닮은 것 같아, 그는 목걸이를 움켜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심호흡을 했다. 이끼 냄새와 나무의 냄새가 뒤섞인 포근한 향이 폐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우현의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앉았다. 잠시 후 목걸이를 쥐고있던 손가락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땅위에 내려앉았다. 우현이 안온한 잠에 빠지거나 말거나 기사들은 단단히 경직한 상태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영주를 모신 일행이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보호하는 대상인 젊은 영주는 잠이 오지 않는지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결국 일어나 앉았다. 카이엔은 자신과는 달리 새근새근 숨을 몰아쉬며 잠이 든 우현의 기척을 느끼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담이 크군." 그때 바람의 장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부스럭거림이 들려왔다. 일행 모두가 몸을 한껏 긴장시켰다. 카이엔이 손을 뻗어 우현을 깨우려는 찰나, 그들의 앞에 무엇인가가 휙 지나갔다. 흐릿하게나마 작은 몸체를 가진 것으로 확인된 그것을 본 기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픽 웃어버렸다. "다람쥐야?" "그냥 들쥐 같은데." "원, 긴장하고 있다가 손해봤어." 카이엔 역시 긴장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다음 호흡과 함께 들어온 냄새가 심상치 않았다. 카이엔이 그것을 알리기 위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근처 수풀이 요란하게 부스럭거렸다. 안개와 어둠에 가려져 흐릿하게밖에 보이지 않는 그것들은 몸집이 매우 컸다. 곧이어 들려온 의미를 알 수 없는 음성이 그 정체를 짐작하게 했다. "그으으으으..." 퀴아네가 내는 특유의 소리가 듣는 자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기사들은 검을 뽑아들었다. 안개 속에서도 번쩍거리는 검광의 은빛이 기사들의 눈을 희롱했다. "크르르르르으..." "카욱, 카욱... 카르르르..." 한 두 마리가 아니다. 기사들은 연이어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긴장했다. 쉬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 기사가 반사적으로 움직여 카이엔을 밀쳤다. "크윽!" 나무 밑둥에 머리를 부딪힌 카이엔의 귀에 흙이 파헤쳐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정확히 그가 있던 장소에서 들려왔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 카이엔은 재빨리 일어나 자신의 롱 소드를 뽑았다. 검을 뽑는 순간 퀴아네의 팔이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얼른 검을 움직여 그것을 쳐내며 이를 갈았다. 우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주변이 아수라장이 된 것이 어렴풋하게나마 보였다. 그러나 뇌는 안개에 절은 듯 마음대로 돌아가 주지 않았다. 아주 잠깐 동안 뜨여있던 검은 눈동자가 다시 눈꺼풀 속으로 빨려들듯 가려졌다. - 나의... 색이 흐릿한 목소리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 것이다. 우현은 간신히 눈을 떴다. 그러나 머리가 너무나 무거워 가누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떠받치고 일어났다. 사방은 조용했다. 안개는 마치 달빛처럼 교교하게 흐르고 있었다. 우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을 뻗었다. 안개는 퇴락한 집에 잔뜩 걸쳐진 거미줄처럼 쉽게 걷어졌다. 그는 멍한 머리로나마 주변을 살폈다. 사방은 검붉은 색이 아닌 연회색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마는 것은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깔려있는 경험 때문일지도 모른다. - 나를... 우현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길은 그의 앞에 구불거리며 펼쳐져 있었다. 하얗고 좁은 그것은 가끔 움직여 변하기도 했지만 걸어가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 나의... 여린 목소리에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우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가슴께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 아래에 있는 심장이 쿵쿵 움직여 고동을 보내며 흐느낌에 동조하고 있었다. 우현은 비슷한 소리로 작게 흐느낀 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던 퀴아네가 흠칫하며 물러나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이어진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길 이외에는 전부 안개였다. 그것은 길의 끝에 있을 무엇인가를 가려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가는 그의 코끝에 시원한 물내음이 스쳐지나갔다. 우현은 마치 베일을 덮어씌운 듯 몽환적인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길의 끝에 자그맣게 서있는 오두막이 눈에 들어왔다. 끼이익. 낡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는 무거운 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꿈...인가?" 흰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평소라면 그것을 보며 남빛 머리카락을 떠올렸을 우현이었지만, 지금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꿈에서 본 처녀였다. 옷자락에 뒤이어 드러난 것은 길게 늘어뜨린 은백색 머리카락이었다. 처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것이 툭 떨어져 창백한 뺨을 타고 구르자 숲 전체가 진동하며 외쳤다. - 나를... 그 외침이 우현의 머리까지 파고들어 뒤흔들었다. 그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검붉게 물들었다. '기분 나쁜 색.' 우현은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팔을 뻗었다. 거친 나무껍질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바뀌었다. 우현의 눈과 같은 색깔을 가진 공간이었다. 몽환이 한 겹 쓰인 듯 보이는 것까지 똑같은 공간에 선 우현은 더더욱 멍해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희끄무레한 무엇인가가 보였다. - 나의... 그의 머리 속에 애절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우현은 홀린 듯 발걸음을 떼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라든가 여행의 목적, 일행의 안위, 심지어는 에코와 티티, 그리고 이스드마저 잊혀졌다. 해야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저 하얀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 사람의 말은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우현은 검은 공간을 딛고 걸어갔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5장 거울 너머에 서있는 것 -7- 은백색의 머리카락은 길다 못해 검은 공간의 바닥까지 닿아 흩어져 있었다. 거미줄을 닮은 그것은 아름다운 광택을 발하며 우현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기어이 은발의 처녀에게 다가간 우현은 그녀를 향해 흐리멍텅한 시선을 던졌다. 처녀가 고개를 들었다. 회색의 커다란 눈동자는 눈물을 담고 있었다. - 나의... 처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그것은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현은 천천히 들어올려지는 그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 손을 잡아 줘. 그 음성에 담긴 것은 거역할 수 없는 힘이었다. 우현의 손이 실에 조종되듯 움직였다. 그의 드러낸 팔과 손은 밀빛이었다. 그 색채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빛깔과 마주 닿으려는 찰나였다. '우현.' 낮은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지만 그의 정신을 일깨우는 무엇인가를 담고 있었다. 밀빛의 손이 하얀 손을 지척에 두고 멈칫했다. 그 순간 우현의 주변에 새하얀 빛이 작렬했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잔뜩 원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빛이 사라진 후 남은 것은 우현 한 사람 뿐이었다. 그는 가만히 선 채 먼 곳을 응시했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그의 등뒤에서 움직임의 파장이 느껴졌다. 우현의 눈에 익숙한 디자인의 흰옷을 입은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그 신관은 눈이 부실 정도로 고운 은발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에 온통 심각한 빛을 띤 그는 모종의 결단을 내린 듯 고개를 들었다. 소녀는 회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의 앞에는 같은 빛깔의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서 있었다. 20대 초반인 그녀는 제법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었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들의 곁에 은발의 신관이 다가왔다. 신관과 여인은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소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우현은 신관의 손에서 반짝이는 은빛을 보았다. 움직임은 순간이었다. 소녀의 얼굴에 긴 혈선이 그려졌다. 하얀 얼굴에 그어진 붉은 줄기는 선명해서 더욱 슬펐다. 소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두 남녀가 무어라 대답을 했다. 신관이 다시 손을 쳐들었다. 여기까지 오면 결과는 더없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쓰러져 피를 흘리는 것은 신관과 여인이었다. 소녀는 큰 눈 가득 눈물을 담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들을 깨우려는 듯 어깨를 흔들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사람들이 지워졌다. 우현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자신의 뺨을 쓸었다. 눈물이 걸린 뺨은 축축했다. 그의 것이 아닌 감정이 멋대로 가슴속을 파고들었고 무음의 외침이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울렸다. 외로워, 쓸쓸해, 곁에 있어 줘. 매우 사소한, 그러나 너무나 간절한 희망이 우현의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 나의... 예의 그 목소리였다. 우현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컴컴한 암흑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그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나의 곁에 있어 줄 거야? 내내 끊어져 들리지 않았던 말이 이제야 끝을 맺었다. 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곁에 있어줄게." 언어는 약속, 약속은 마음. 무서울 정도의 욕망이, 소녀의 곁에서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마음이 샘솟듯 솟구쳤다.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요구했다. - 나를 좋아해 줄 거야? "응." 조금의 지체도 없이 흘러나온 승낙이 기쁜 듯, 목소리가 엷은 웃음을 띠었다. - 너의 이름을 걸고 약속해?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나를 좋아해 준다고 네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어? "약속해. 우현이라는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 - ...우현. 목소리가 이름을 부른 순간, 강력한 현기증이 우현을 휩쌌다. 그는 검은 어둠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지는 것과 동시에 정신을 놓았다. 새하얀 얼굴에 도드라진 회색 눈동자가 몽환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은발을 걷어내었다. 그러자 원망스러운 빛이 가득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 원망은 그녀의 앞에 서있는 청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처녀는 청년의 남빛 눈동자를, 그리고 그의 흰옷을 무섭도록 노려보았다. 그녀의 분홍색 입술이 나풀거렸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 청년, 이스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이스드는 그로서는 드물게도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닮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얼굴이군." 색채가 조금 다를 뿐이었다. 처녀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결코 보고 싶지 않을 표정이 처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방해하지 마. 방해하면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가만 두지 않겠어." "하, 굉장한 말이군. 고작해야 이 정도의 것으로 내게 대항하겠다는 말인가?" 이스드는 코웃음을 치며 주변에 떠도는 안개를 가리켰다. 처녀의 머리카락을 닮은 안개는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흐르고 있었다. 처녀는 입을 다물었지만 잠시 후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 사람이 약속했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했다고." 이름이란 그 사람의 본질로, 마녀들은 그것을 상대방을 얽어매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마녀의 앞에서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은 아무리 애를 써도 깨뜨릴 수 없었다. 설사 그것이 맨 정신이었을 때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약속이라고 해도. 처녀가 덧붙였다. "당신이 진 거야." 그녀의 자신만만한 말을 들은 이스드는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한숨의 잔재는 이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시간 끌기였다는 건가? 제법이다, 라고 칭찬을 해주고는 싶지만." 그의 얼굴 위에 차가운 것이 한 층 덮였다.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품은 채 처녀를 찔러 죽일 듯한 시선을 보내었다. "아무리 이름을 건 약속이라고 해도 어느 한 쪽이 죽어버리면 어찌할 수 없는 거겠지." 그가 손을 움직였다. 처녀가 몸을 움찔했다. "아, 알고 있어? 나를 죽이면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한다고! 내가 없으면..." "이 세상에 내가 하지 못할 일이 존재할 것 같으냐."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도록 차디찼다. 처녀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나는 그 사람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그래도 죽일 수 있다는 거야?!" 처녀의 발악과도 같은 외침을 들은 그는 그러나 중얼거릴 뿐이었다. "같은 것은 역시 껍데기뿐인가. 그였다면 이런 소리는 하지 않았을 테지." 죽든 살든 상대에게 부딪혀 위기를 타개하려 할 것이다. 곧은 눈동자를 한 채 상대의 잘못에 대한 독설을 퍼부을지도 모른다.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진 이스드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우현이 위험하지 않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지는 일이어야만 하는 것이겠지만. 처녀는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청년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주춤거리는 그때 이스드가 움직였다. 그가 가볍게 손을 내젓자 은빛을 띤 투명한 구슬이 나타나 처녀의 몸을 가두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해쓱하게 질려버렸다. 숨이 막혀 버둥거리며 구슬의 벽을 두드리던 그녀는 곧 불타오르듯 벌건 안색을 한 채 쓰러졌다. 그 안에는 조금의 공기도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후 안개가 잔뜩 흐르고 있던 공간이 깨어져 나갔다. 안개가 사라지자 드러난 것은 작은 오두막의 실내였다. 나무로 만든 집기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그곳 어디에도 우현의 모습은 없었다. "잔재주를." 가볍게 비웃은 이스드는 눈을 감고 팔을 뻗었다. 곧 허공에 가로누운 사람이 나타났다. 우현이었다. 그는 우현을 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그와 동시에 우현의 몸이 가볍게 움직여 그의 팔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다니까. 괜한 일에 휘말려 드는 것에는 세계 제일이다." 본인이 들었더라면 무어라 반박을 하며 대들었을 말을 거리낌없이 말한 그는 우현의 이마 위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평온한 얼굴과 숨결은 소년이 깊은 잠에 들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스드는 잠시 미소를 띤 채 우현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여린 볼을 쓸었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피부는 아직 젖어있었다. '게다가 쓸데없이 상냥하기까지.' 만약 우현이 본 환상이 그의 앞에 펼쳐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코웃음을 치며 '그래서 내게 어쩌라고?' 따위의 대사라도 내뱉었을지 모른다. 외로움과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싶다는 간절한 욕구, 인간의 온기를 그리는 마음은 과거의 우현에게도, 그리고 죽어버린 처녀에게도 존재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우현이 걸려든 것이겠지만 이스드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속이야 어떻든 겉은 너무도 닮아있었다. 같은 얼굴 정도에 흔들릴 그는 아니었으므로 가차없이 죽이기는 했지만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마음의 같은 얼굴, 그러나 전혀 다른 색채. 단지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은 그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 "숱하게 많은 세상마다 하나씩의 자신이 있다고 했던가." 우현의 세계에도 이스드를 닮은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원래대로라면 우현은 그 사람을, 그리고 이스드 자신은 죽은 처녀를 만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한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남빛의 눈동자가 단단한 것을 품은 듯 빛났다. '설사 그렇다 해도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너와는 다른 사람이야.' 그는 우현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잠이 든 우현은 그의 팔 안에서 자꾸만 미끄러지고 있었다. 이스드는 무어라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듯도 싶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두 눈은 진한 곡선을 그리며 닫혀있었다. "우현."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할 한없이 다정한 울림을 품은 음성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풍부한 반응을 보여주던 우현의 얼굴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였던 건가." 이스드는 혀를 차고는 우현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매끄러운 피부가 손끝에서 녹아들듯 감미로웠다. 그의 남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내리깔렸다. "우현..." 그는 새근새근 깊은 숨을 내쉬는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우현의 눈꺼풀이 미동했다. 우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검붉은 어둠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흠칫 놀란 그는 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본능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빠져나가야 해.' 그가 성마른 몸짓으로 발걸음을 뗄 때였다. 「끄윽...」 숨이 잔뜩 억눌린 소리였다. 우현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신음이 이어졌다. 「으윽... 끅, 그만...」 우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신음은, 숨에 가쁜 헐떡임은 하나도 남김없이 그의 귀에 파고들고 있었다. 술냄새가 물씬 풍겨 그의 후각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우현의 꽉 감은 눈꺼풀 위로 새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떠올랐다. 검붉게 되어 터질 듯 부풀어올랐던 혈관과, 우현의 손가락 사이로 비져나왔던 두툼한 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 그런 거야? 분노에 가득 찬, 그리고 어딘지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우현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신의 음성에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 아버지가 자신을 돌봐주기를 바랬던 거네?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 따위는 없었다. - 그럼 이건 어때? 아아, 불쌍하기도 하지. 이렇게나 착한 아이인데 단지 출생의 문제 하나 때문에. 나쁜 것은 네가 아냐. 다 네 무책임한 아버지가 나쁜 거야. 그리고 따스하게 포옹이라도 해 줄까? 말이 달리 매끄럽게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말들은 그가 언제나 듣고싶어 하던 것이었으니까. 누군가 다정하게 위로해주고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해주기를 바랬다. - 동정을 바란다면 먼저 그 태도부터 고치시지. 힘들게 살아왔다는 이유로 무슨 짓이든 해도 좋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이상은 동정은 고사하고 경멸만 당하게 될 뿐이니까! 하지만 이 역시 알고있었다. 우현은 처음부터 자기연민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유야 무엇이든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우현아.」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의 호명이었다. 우현은 귀를 눌렀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우현아, 이 녀석. 엄마한테 혼났냐?」 언제였더라. 밤새 공부는 않고 게임만 한다고 꾸중을 들었던 때였나. 아니면 동네 놀이터에서 애들이랑 싸웠을 때였던가. 아니면 학습지를 밀렸던 때인지도 모른다. 「쉿.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어머니가 잠시 시골에 내려갔던 날 저녁, 곤드레 만드레 취해 돌아왔던 아버지는 장난스레 눈을 찡끗거리며 그렇게 말했었다. 우현은 북받쳐오르는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짓이겼다. '그만 해...' 한 귀로 흘러드는 다정한 과거, 다른 귀로 흘러드는 처참한 과거. 눈앞에는 귀신의 안색처럼 새하얀 손가락이 검붉은 목을 힘껏 조르고 있었다. 내내 들끓고 있던 오물이 하수구를 역류하여 범람했다. 대강 붙인 반창고가 오물에 쓸려 떨어지자 처음과 조금도 다름없이 새빨간 환부에 소금이 끼얹어졌다. 우현은 발작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워! 그만 해, 제발!' 입을 아무리 벌려 악을 써도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그는 머리카락을 미친 듯이 쥐어뜯었다. 어느새 흘러나온 눈물이 뺨을 뒤덮고 있었다. '이젠 싫다고!' 그때였다. 검붉은 공간에 하얀 점이 하나 떠올랐다. 바늘구멍처럼 작은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 한 덩어리의 빛무리가 되어 우현을 감싸안았다. 검붉은 어둠이 그를 빼앗으려 끈덕지게 매달렸지만 빛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떨치고는 우현을 끌어내었다. "...우현." 익히 들어와 귀에 익은 미성이었다. 우현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상대방을 보았다. 흐릿한 시계로 남빛의 머리카락에 후광처럼 감싸인 하얀 얼굴이 보였다. "빛은... 당신의 것?" 이스드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뻗어 우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걷어내었다. 우현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차갑고 무감동한, 그러나 어딘지 깊은 격정을 담은 얼굴은 신처럼 아름다웠다. 우현은 이스드의 손을 잡아 그 손등에 경건하게 입술을 댔다. 후두둑 쏟아진 눈물이 이스드의 손등에 떨어졌다. 우현은 잔뜩 긁힌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나의 구원인 겁니까?" 대답은 우현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격하게 파고드는 입술을 느낀 그는 팔을 뻗어 이스드의 목을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처참함이 아닌 다른 의미의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반창고와 하수구는 5장 4편에서 잠깐 나왔던 단어들입니다. 우현은 자신의 죄책감을 애써 눌렀지만 그건 임시방편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더랬지요. ...상처가 곪아 터진 것치고는 약하지만 더 이상 괴롭혔다가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제 양심이 콕콕 찔려서;;(거짓말)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5장 거울 너머에 서있는 것 -8- 몇 번이나 각도를 달리한 입술이 깊이 파고들었다. 잠깐 잠깐 떨어진 이스드의 입술이 산소를 가득 품고 다가와 우현의 입안에 불어넣어 주었다. 짭쪼름한 맛이 나는 입맞춤은 어딘지 간절하다. 우현은 결 고운 남빛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박아넣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울지 말아라." 맞닿은 입술이 가만히 속삭였다. 우현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가 울면 언짢아져. 전부 부수고 싶어진다." 그가 말하는 '전부'는 어쩐지 섬뜩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면서도 연신 우현의 입술을 핥고있는 그는 말과는 대조적으로 어딘지 귀여웠다. 우현은 눈물 젖은 얼굴로 푸흡 웃었다. 그러자 그는 마주 웃으며 우현의 얼굴을 꼼꼼이 닦아주었다. 젖은 볼의 차가움이 이스드의 마음에 몇 개나 되는 동심원을 일으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우현은 순간 숨을 멈추었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누워있던 것처럼 보이는 침대 곁에는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가 본 것은 그 위에 앉아있는 흰옷의 해골이었다. 약간의 살점이 붙은 뼈가 마치 팔인 양 침대 위에 걸쳐져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도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 위에는 실크 드레스를 입은 해골이 앉아있었다. 우현은 그 드레스를 알고 있었다. "설마..." 꿈이 아니었던 것일까. 우현은 이스드를 보았다. 남빛의 눈동자는 여느 때와는 달리 미묘한 위화감을 품고 있었다. "...죽었나요?" 이스드는 비스듬히 시선을 빗겨 우현을 외면했다. 그러나 우현은 서글프게 웃을 뿐이었다. 얼굴이 꼭 닮은 처녀는 행동마저도 그와 비슷했다. 그녀가 시켰던 맹세를 떠올린 우현은 그러나 그녀를 원망할 수 없었다. 그의 안에 아프도록 파고들었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우현이 다시 떠올린 감정들에 눈살을 찌푸리자 이스드가 팔을 뻗어 그를 끌어당겼다. 포근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힘으로 강하게 감싸안긴 그는 여전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이스드." 같은 얼굴을 아무 거리낌없이 죽였다는 것에 꺼려할 줄 알았던 우현의 인사는 이스드에게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우현에 대해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점점 겁장이가 되어가는 기분이었지만 그리 싫지 않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스드? 아까 내 이름을 불렀죠? 처음으로 들은 것 같은데, 안 그래요?" 고개를 든 우현은 그 까만 눈동자를 기쁘게 빛내고 있었다. 눈물이 배인 눈도, 적을 해치울 때의 눈도, 고통을 참을 때의 눈도 근사하지만 역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웃음을 담은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는 지금 이스드를 곧게 향하며 요구하고 있었다. "만난 지가 언젠데.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불러줄 수 있어. ...우현." 이름이란 본질. 힘을 지닌 자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강력한 마법을 만들어내 상대방을 얽어맬 수 있다. 우현의 심장이 크게 고동쳤다. 은빛 머리카락의 처녀가 불렀을 때와는 비교도 못할 현기증이 달콤하게 밀려들었다. 그의 느낌을 알아챈 이스드는 짓궂음 반 상냥함 반을 담아 웃었다. "우현." 뻗어나온 손이 자줏빛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우현." 매끄러운 볼을 스친 손가락은 곧 입맞춤으로 붉어진 입술을 매만졌다. "우현." 언어에 담긴 꿈결같은 다정함이 우현을 잠으로 이끌었다. 까무룩 잠에 빠지기 전, 그는 졸음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당신에게 말해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이스드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우현이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 나를 싫어할지도 몰라요. 나는 굉장히 추악한 인간이니까. 그래도 나는..." "내가 너를 싫어하게 될 일은 없다. 그리고 너는 결코 추악하지 않아. 오히려..." 이스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현이 진실로 기쁘게 웃고있었기 때문이었다. 달처럼 휘어진 눈매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로 빛나고 있었다. "당신에게라면 무엇이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끝으로 우현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스드는 우현을 들어 안고는 오두막을 나섰다.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던 밤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 우현의 자줏빛으로 변한 머리카락을 검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스드는 그 마음에 드는 색에 입술을 묻고 중얼거렸다. "나를 구원이라고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너다." 우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잠에 취해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나뭇가지에 가로막혀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그렇게 있던 그는 주변이 시끄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이스드가 곁에 있었던 것 같은데 우현이 지금 있는 곳은 웬 바위 위였다.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이스드가 조용히 데려다 놓고는 사라졌으리라고 생각한 우현은 바위 위에서 내려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나뭇가지 사이로 아른거린 모닥불이 그를 이끌었다. 가물하게나마 일행을 확인한 우현이 다음으로 느낀 것은 비릿함이었다. 훅 끼친 피 냄새를 맡고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린 그는 다음 순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피 냄새라고? 어째서?' 코끝을 스치는 비릿함은 제법 흥건했다. 잠시 후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상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깨에서부터 복부까지 긴 상처를 입은 종자가 연신 신음하고 있었다. 피가 콸콸 흐르는 그의 상처는 날카로운 발톱에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 종자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한 기사가 동료의 팔을 지혈하고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종자도 있었다. 늑골이 부러진 기사는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무슨... 도대체 이게..." 우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우현?" 카이엔이었다. 우현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은 그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다친 데는 없어?" "나는 괜찮지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숲 전체가 시끄러울 정도로 처절한 싸움이었음에도 우현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카이엔은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대답했다. "퀴아네의 습격이 있었어.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습격이 있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내 옆에서 자고 있었잖아?" "그것이... 나도 몰라요. 꿈을 꾸었다 싶었는데 눈을 뜨니 저쪽에 있는 바위 위에 누워있었어요." 우현은 이스드의 이름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했다. 무어라 더 묻고싶었던 카이엔은 그러나 누군가가 나직하게 신음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우현도 덩달아 그쪽에 시선을 주었다. 기사 하나가 붕대를 감고 있었다. 등에 상처를 입은 듯 어떻게든 붕대를 처매려 하지만 움직임이 수월하지 않았다. 우현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기사에게 다가갔다. "뭐지?" 우현이 다가왔음을 느낀 기사는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꿋꿋하게 물었다. 이제까지 우현은 일행에서 껄끄러운 존재였다. 지고이네르, 영주의 손님, 이 일행에서는 종자, 한편으로는 고위급 신관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있는 소년. 게다가 그는 다가가기 힘든 어떤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대함에 있어 불편한 것이 당연했다. 우현 또한 기사들을 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근엄하게 앉아있었고 종자들에 대해서는 차갑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물음도 무뚝뚝하기 짝이 없어, 그는 조금 쭈뼛거리고 말았다. "치료를... 제대로 상처를 봐야 합니다." 잠시 우현을 올려다본 기사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갑옷을 입고 있어 퀴아네의 독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워낙 힘이 강한 터라 살은 온통 뭉개져 있었다. 기사는 등뒤의 기척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상처를 제대로 볼 수나 있는 거냐?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기절하는 것은 아니겠지?" 우현은 대답하지 않은 채 허리춤의 수통을 빼들었다. 뚜껑을 열자 향긋한 술 냄새가 흘러나와 그의 정신을 일순 어지럽게 만들었다. "조금 아플지도 몰라요." "뭐?" 기사가 무어라 길게 대꾸하기도 전이었다. 우현은 그의 상처에 술을 들이부었다. 순간 기사는 뜨끔하다못해 화끈한 아픔을 느끼고 신음했다. "으윽, 뭘...!" "상처를 깨끗하게 하는 겁니다." "이건 조금이 아니잖아, 조금이!" 우현은 약병을 열던 손을 멈추었다. 기사 역시 자신이 무엇을 말했는지를 깨닫고 머쓱하니 입을 다물었다. 우현은 곧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어진 말에는 웃음기가 묻어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하는 편이 상처에는 좋으니까요." 곧이어 상처 위에 약이 덧발라졌다. 기사는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어이, 그 약 확실한 거야? 상처에 바르는 것 맞냐고?" 어둠 속이라 병에 써있는 글자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허튼 약을 바르느니 일단 지혈이나 하겠다고 생각했던 기사는 우현이 너무나 거리낌없이 약을 꺼내자 조금 불안한 듯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소리를 섞어 웃었다. "냄새가 다르잖아요." 물론 약마다 냄새가 다르다고는 하나 분간을 하는 것이 쉬울 리 없다. 의외라고 생각한 기사는 약을 바르는 손길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쑥스러움을 섞어 퉁명스럽게 말했다. "꽤나 익숙한 모양이네." "네." 우현은 이번에는 기사가 감다가 만 붕대를 집어들었다. 영 깨끗하지 못한 붕대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것을 전부 걷어치운 그는 자신의 짐에서 깨끗하게 삶아 말린 붕대를 꺼내었다. 혹시나 하고 가져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멜도바 영지 최고의 의원 밑에서 조수로 있었거든요." 잿빛의 머리카락과 괄괄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고집이 하늘을 찌르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상냥했던 모리악. 생각에 영향을 받은 우현의 목소리가 녹을 듯 부드러워지자 그것을 들은 기사 역시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위렌 클레이트다. 네 이름은?" "우현. 성은 없습니다." 그들 쪽이야 가벼운 분위기였지만 다른 한 구석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행히 퀴아네의 독을 없애는 약을 가져와 부상자의 치료가 용이했지만 이미 죽은 자에게까지 듣는 약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실력이 뛰어난데다가 무거운 갑옷까지 걸쳤던 기사들의 부상은 대체로 가벼웠지만 종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퀴아네의 손톱에 머리가 움푹 패여 목숨을 잃은 종자도 있었다. 한 종자는 뒤통수를 얻어맞고 눈을 잃었다. 너무 강한 힘에 안구가 제 자리를 이탈하여 튀어나온 것이다. 그밖에도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신음과 흐느낌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그들은 부상자의 치료를 모두 끝낸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간이 흘러 날이 밝아왔기 때문도 있었지만 더 이상 그곳에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욱했던 안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덕분에 길을 가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숲을 헤쳐 길을 만들며 나아가던 그들은 제법 나무가 적은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쉬어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다. 이대로 계속 길을 재촉하는 것은 무리인 듯 싶습니다." 카이엔은 아이겐튼 영지의 기사 단장이며 일행 중 최고 연장자인 키아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하고 불침번을 선 데다가 퀴아네의 습격을 막아내고 부상까지 당한 기사들의 안색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휴식을 허락 받은 기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주저앉았다. 개중에는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카이엔 역시 가까운 곳에 검을 둔 채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의 시선이 창백한 얼굴의 우현에게 닿았다. "너도 눈 좀 붙여라. 안색이 말이 아닌데." 우현은 고개를 저으며 약간 웃었다. "저는 밤에 좀 자서 괜찮아요. 카이엔이야말로 눈 좀 붙여야지요." 카이엔은 우현의 얼굴을 뜯어보았지만 그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젓자 '알았다'며 눈을 감았다. 곧 카이엔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불편한 자리임에도 개의치 않고 금새 잠에 빠지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우현은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대부분 자리에 눕거나 혹은 나무 둥치에 기대어 눈을 붙이고 있었지만 몇몇은 꼿꼿이 앉아있었다. 그는 그들 중 위렌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사실 물을 것도 없었던 것이, 위헨의 얼굴은 피곤에 물들다 못해 찌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싱긋 웃었다. 그러자 20대 후반의 얼굴이 삼 년쯤 젊어 보였다. "다들 자는 중에 퀴아네라도 습격해오면 어쩌려고 그래? 너야말로 안 자?" "잠이 안 와요. 제가 불침번을 설 테니 그만 자요." 우현이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잠을 청할 기사들이 아니었다. 위렌을 포함한 몇몇 기사들은 고집을 부리며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경계했다. 그러나 고집이란 정신이다. 지칠 대로 지친 육체는 주인에게 휴식을 요구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피곤에 못 이겨 고개를 끄덕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사방은 시끄러웠다. 전날은 소리는커녕 날개 끝 하나 깜짝하지 않던 매미는 한낮의 빛을 타고 신나게 울어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끼르륵거리고 울며 이 가지 저 가지를 건너갔다. 톡톡 토그르르 하는 것은 다람쥐의 작은 발바닥이 내는 소리다. 멀리서 산짐승이 바스락거렸다. 햇살에 데워진 공기가 뜨거움을 발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나무로 둘러싸인 숲은 시원했다. 나뭇잎을 뒤흔들고 다가온 바람이 우현의 머리카락을 슬며시 건드리고 지나갔다. 햇살 한 모금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스며들어 그의 볼에 떨어졌다. 아름다운 은발을 안개처럼 펼치고 있던 처녀는 외롭다고 말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끝에 결국 그들을 죽여버린 처녀는 또 다른 우현의 모습이었다. 그의 심장을 무리하게 뚫고 들어왔던 처녀의 감정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 곁에 있어줄게, 좋아해 줄게, 손을 잡아줄게. 우현이라는 이름을 걸고 약속해. 주변을 전부 잊어버린 상황에서 했던 약속은 사실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너무나 닮고 닮고 또 닮아서, 몽환과도 같은 안개의 잠에서 깨어난 지금도 마음은 여전히 아팠다. 이스드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처녀와 함께 오두막에 살면서 다른 사람을 끌어들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뺨에 드리워진 햇살이 한 줄기의 투명한 동정을 비추었다. 우현은 손을 들어 얼른 그것을 닦아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작이고 기사고 종자고 할 것 없이 전부 잠에 빠져있었다. 그는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얹었다. 제 5장 終結 이름을 부르는 저 장면이 저로서는 최대한의 닭살입니다. 팔에 뭔가가 막 돋아서 죽는 줄 았았어요; 5장의 제목인 거울 너머에 서있는 것은 우현의 입장에서 보시면 됩니다. 우현이 거울 앞에 서서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일 뿐이지요 ^^; 그러니까 앞부분의 혼혈 남자도, 뒷부분의 은발 처녀도 우현을 비추어낸다는 의미입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6장 운하의 도시 -1- "그래, 그렇게. 자세 좋아." 우현은 위렌의 말을 들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시선의 끝에 닿아있는 것은 날카로운 화살촉. 세모꼴의 촉이 앞서 달려가는 노루를 향했다 싶은 순간 우현은 손가락을 풀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시위가 핑 하는 소리를 내며 풀리자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는 숨을 죽이고 화살의 궤적을 바라보았다. "아, 이런..." 화살은 노루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땅에 박히고 말았다. 위렌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고는 우현의 손에서 활을 빼앗아 화살을 걸었다. 그가 쏜 화살은 정확히 노루의 목을 꿰뚫었다. "오늘 저녁은 노루 고기다. 얼른 뛰어가서 가져오라고." 위렌을 향해 콧잔등을 찡그려 보인 우현은 그러나 재빠른 몸놀림으로 달려갔다. 목이 관통되었음에도 노루의 사지는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뭐해? 피가 무섭냐?" 멀리서 위렌이 조롱했다. 우현은 노루를 짊어지고 일어났다. 화살 끝에 달린 깃이 그의 뺨을 간질였다. 우현에게 활쏘기를 배우는 것이 어떠냐고 말한 것은 바로 위렌이었다. 말하자면 치료에 대한 대가였지만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우현이 아니었다. 덕분에 여행하는 내내 그에게 검술을 가르치던 카이엔은 부하에게 제자를 빼앗겼다며 장난스레 투덜거리고 있었다. "너, 확실히 재능있는데." 위렌이 말했다. 노루를 짊어진 채 끙끙거리던 우현은 도와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위렌을 흘겨보았다. 위렌은 짐짓 손사래를 쳤다. "정말이야. 이런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 능숙하게 활을 다루는 녀석은 네가 처음이야." "그야 그렇겠죠. 건틀렛이 다 해지도록 연습을 시킨 누구누구 덕분입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참으로 훌륭한 스승이로군. 엄한 스승이야 말로 보물이지."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다. 우현은 뻔뻔스레 대답하는 위렌을 뒤에 두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킥킥거림은 단호히 무시하면서. 위렌이 잡은 노루가 불에 올려지자 곧 맛있는 냄새가 사방에 흩어졌다. 다 익은 부분을 떼어 한 입 베어물자 금방 잡은 고기 특유의 냄새가 입안에 맴돌았다. 그 노린내는 피 냄새를 닮아있었다. 우현은 토막난 채로 한 켠에 놓인 노루 고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피가 뚝뚝 듣는 생고기는 선명한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입가를 씁쓸하게 올렸다. 이미 죽은 짐승의 노린내와 핏물에서 살아있는 것의 생명력을 실감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 해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없건만 어찌하여 인간은 같은 인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는 것일까. 우현의 자조가 깊어졌다. 그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우현?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고 있길래 불러도 모르는 거지?" 카이엔이었다. 우현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곁에 다가와 앉은 카이엔이 곁눈질을 했다. 혀를 넘실대는 황금빛 모닥불을 받은 우현의 자줏빛 머리카락이 주금(朱金)의 빛을 띠고 선명하게 빛났다. 머리카락의 색이 바뀐 지금 우현을 지고이네르로 볼 수 있는 것은 새까만 눈동자와 눈썹이었다. 그마저도 길게 자란 앞머리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은 카이엔은 우현의 머리카락을 치워 눈을 드러나게 했다. "카이엔?" "슬픈 일이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색깔을 살기 위해 감춰야 하다니." 지고이네르의 자랑인 검은색. 카이엔은 두 가지 중 하나도 물려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안에 흐르는 피에는 바람의 자유분방함이 섞여있었다. 어릴 때 가끔 찾아오는 지고이네르들의 검은색을 얼마나 동경했던가.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라고, 카이엔은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생각했다. 순혈의 지고이네르도 아니면서 오히려 그들보다 더욱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우현에게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제 사흘 정도가 남았을 뿐이다. 내일 쯤이면 하샤라의 성벽이 보일 거야." 우현의 몸이 눈에 띄게 경직했다. 수도 하샤라,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도시. 그런 우현의 머리카락을 카이엔이 쓰다듬었다. "만날 수 있을 거다." 위로를 들은 우현이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아니 지은 만 못한 억지 미소였다. 기대란 참혹한 것이다. 희망이 오랜 겨울을 참을성 있게 버텨낸 매화나무가 맺어낸 첫 꽃망울이라면 기대는 그것이 아름답게 피어나리라는 상상이다. 기대는 희망이 현실이 되는 동안을 즐거이 지내도록 도와주지만 세상의 모든 희망이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우현은 어떻게든 기대를 억누르려 애썼다. 그러나 버릇없는 감정은 주인의 말을 외면하기 일쑤였다. 우현은 결국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누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샤라로 향하는 길은 쭉 곧았으며 잘 닦여있었다. 마차 세 대는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길의 양옆에는 거목들이 우거져 있었다. 울창한 숲은 아직은 진초록색인 이파리를 달고 있었다. 얼핏얼핏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고, 아주 가끔은 그들의 지저귐 소리도 느껴졌다. 승마 코스로서는 매우 훌륭한 길이었지만 기대와 들킬지도 모른다는 긴장으로 초조한 우현이 즐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카이엔은 자신의 곁에서 말을 달리는 우현을 흘긋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까만 우현의 눈동자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카이엔이 낮게 웃었다. "그렇게 긴장하고 있으면 수문장이 의심해. 죄인이 아닌가 하고 말이야." "그, 그렇겠죠?" 우현은 차가워진 손을 문질러 식은땀을 닦았다. 그는 앞머리를 정돈하고 눈을 내리깔아 검은색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수문장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그들을 통과시켜 주었다. 카이엔이 가지고 온 서류를 본 수문장은 감히 그 이상의 조사는 하지 못한다는 듯 굽신거리며 얼굴도 들지 않았다. 우현은 그를 지나며 약한 한숨을 쉬었다. 성문을 통과하자 밝은 햇살이 우현의 눈을 찔렀다. 숲의 조용한 빛에 익숙해있던 그의 눈이 반사적으로 찡그려졌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다른 지방에 비해 세련되고 정교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 또한 윤기가 흘렀다. 건물들 역시 우아하기 짝이 없었다. 멋진 조각으로 장식된 어느 건물은 벽 전체가 대리석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정교하게 조각한 기둥이 현관을 떠받치고 있는 집도 있었다. 우현은 사진집에서나 보았음직한 아름다운 건물들을 보며 순간 넋을 잃었다. "입 다물어라. 하샤라의 먼지가 전부 네 입으로 들어가고 있어." 위렌의 정직한 충고에 따라 입을 다문 우현은 이번에는 근처를 지나가는 여인의 머리모양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벌집 모양으로 쌓아올린 머리카락의 높이는 적어도 50cm는 되어 보였다. 그때 시선을 느낀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우현은 자신이 무례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여인은 오히려 우현을 향해 눈을 찡끗거렸다. "인기 좋은데? 저 아가씨 방금 너한테 윙크했지? 꽤 괜찮은 여자인데, 어때?" "장난하지 말아요, 위렌!" 고개를 돌린 우현은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처녀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머리 모양이 그에게 레사티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베슬렌이 한 말을 떠올렸다. '수도에 올 일이 있으면 자기 집에 찾아오라고 했었지.' 우현은 말을 몰아 카이엔에게 가까이 갔다. 반가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이 내내 창백했던 볼에 맑은 홍조를 가져다 주었다. "카이엔? 혹시 베슬렌이라는 사람 알아요?" "시누크 베슬렌 말인가? 얼굴이야 알지만..." 카이엔은 말끝을 흐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에는 우현이 귀족을 안다는 것에 대한 신기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괜찮으면 그 사람을 만나게 해줄 수 있어요? 그 사람의 집에 레사티나가 있을 거예요." 레사티나의 이름을 입에 담는 짧은 순간, 우현의 얼굴이 꽃처럼 활짝 피었다. 카이엔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문득 '츳'하는 소리를 들은 우현은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에 있는 사람은 위렌이었지만 그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가을이었다. 10월 초의 바람은 제법 스산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우현은 그 속에서 얼핏 물 냄새를 맡았다. 그는 위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근처에 강이 있나요?" "도시 전체를 양분하는 운하가 있어. 저쪽에 있지만 건물에 가려져 있으니 보이지는 않을 거야." 우현은 위렌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과연 빽빽하게 들어찬 아름다운 건물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시골뜨기의 느낌이네요. 이곳에 이렇게 화려한 거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시골뜨기지 뭐야. 안 그래?" 우현은 반박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전 세계에서의 그는 서울 토박이였지만 이곳에서의 그는 시골뜨기였다. 그것이 어쩐지 우스워진 그는 조금 웃고 말았다. 그러나 그 웃음은 활기가 빠진 것이었다. '제발 아직 라벤다로 보내지지 않았기를, 제발 아무 일도 없이 무사하기를.' 그것은 어찌 보면 무모하며 기약 없는 소원이었다. 카이엔은 희미하게 굳어진 우현의 얼굴을 일별한 후 생각에 잠겼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하샤라에 있는 아이겐튼 가의 저택이었다. 이 집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어, 우현은 정원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건물도 정교한 문양의 철창도 아름다웠지만 무엇보다 일품인 것은 우아하게 꾸며진 정원이었다. 한 곳에 소복하게 도드라진 장미 나무는 늦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이제 노랗게 물들어갈 은행나무는 장미의 뒤를 지키는 기사마냥 서있었다. 단풍나무는 키를 낮추어 그늘을 드리웠고, 거대한 침엽수들은 저택을 지키겠다는 듯 굳건한 자세로 서서 강철같이 단단한 초록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어딘가에 허브의 밭이 있는지 바람이 불 때마다 다가온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우현은 손질이 적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이 정원이 대번에 마음에 들었다. "아름답네요." 우현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곁에 있던 카이엔은 부드러운 소리로 웃었다. "지고이네르의 취향은 비슷비슷한가 보지? 내 어머니도 이 집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셨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집이 아닌 정원이었지만." 그의 말은 우현에게 굉장한 기쁨을 주었다. 현관 앞까지 간 그들은 말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몰취미한 번쩍거림은 카이엔도 전대의 아이겐튼 자작도, 그리고 지고이네르 출신의 아이겐튼 자작부인도 기피하는 것이었다. 낡은 듯 보이는 구리와 청동, 은은한 검은빛을 발하는 은, 암적색과 검은색의 톡톡한 천이 한데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촛대를 눈여겨본 우현은 그 세공의 정교함에 감탄했다. 그가 방을 구경하는 사이, 하녀들과 하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여 저택을 되살렸다. 그들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습기를 몰아내기 위해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배가 고플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차렸으며 먼지를 씻어낼 목욕물을 준비했다. 또한 일단의 하녀들이 다가와 일행을 방으로 안내했다. 우현은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여행 내내 찌들었던 피로가 단숨에 풀리는 느낌은 무척이나 좋은 것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긴장과 걱정, 그리고 불안정한 기대는 내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진정해, 진정해. 네가 마음 졸인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 마인드 컨트롤을 하듯 중얼거린 그는 목욕통에서 몸을 일으켰다. 욕실에서 나오자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지 새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호텔 서비스가 이런 기분일까?' 가뿐해진 몸으로 내려간 식당은 이미 음식의 향연이었다. 깨끗해진 몸과 새 옷, 맛있는 음식과 달콤한 술은 사람의 마음을 풀어지게 한다. 그날 밤 우현은 피로와 긴장, 안도와 기대가 섞인 심정으로 깊이 곯아떨어졌다. 느지막이 일어난 우현은 번쩍거리는 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카이엔과 마주쳤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모자를 쓰고 공작새의 깃털까지 근사하게 단 그는 목을 조이는 칼라가 갑갑한 듯 연신 얼굴을 찡그리며 목 언저리에 손가락을 넣어 잡아당기고 있었다. "멋진데요? 데이트라도?" "그럼 오죽이나 좋겠냐마는. 왕궁에 간다. 하샤라에 왔으니 국왕 폐하를 뵙고 인사를 올려야지." 카이엔이 움직일 때마다 실크의 물결이 우아하게 넘실거렸다. 카이엔의 뒤로 몇몇의 기사들이 모양은 비슷하나 덜 화려한 옷을 입고 등장했다. 그 중에는 위렌도 있어, 우현은 '하루 종일 혼자 있어야 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의 표정을 읽은 카이엔이 웃었다. "정 심심하면 서재에 가서 책이라도 읽든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책을 펴보아도 머리 속에 들어올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우현도 카이엔도 알고 있었다. 늦은 아침식사를 마친 우현은 기분전환 삼아 정원으로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서라도 밖에 나가 사람들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지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그이니 길만 잃을 뿐이다. 장미를 구경하고 은행나무 사이를 거닐어 정원의 안쪽으로 들어간 그는 작은 허브 밭을 발견했다. "역시 있었구나." 그는 무릎을 꿇고 허브의 내음을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허브 밭은 저택의 담과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붉은 벽돌담 위에는 앤티크 풍의 철창이 세워져 있었다. 우현은 철창에 다가가 몸을 기댔다. 아래쪽에 난 길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는 익숙한 향내를 맡고 정신을 차렸다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적당히 해라. 이스드가 여기에 있을 리 없잖아.' 아마 낮이 되면서 데워진 공기에 떠오른 허브의 향내가 두터워졌기 때문이리라. 우현은 맥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스드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던 것이 엊그제인데, 이제는 고민은커녕 어떻게든 한번이라도 더 만나고 싶어하는 자신이 여기에 있었다. '마음이라는 건 참 이상한 거야.' 그렇게 생각한 그가 쓴웃음을 지었을 때였다. "굉장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 냉정하다, 차갑다, 얼음이 뚝뚝 떨어진다. 그 이외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목소리였다. 그러나 우현은 같은 목소리가 내는 또 다른 느낌도 알고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그는 조금 전 바랬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스드!" 그의 목소리가 남빛의 결 고운 머리카락 위에 울렸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6장 운하의 도시 -2- 제법 큰 외침을 들은 이스드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즐거움을 본 우현은 내내 초조하고 불안했던 심정 속에 달콤한 기쁨이 스미는 것을 느꼈다. "열렬한 환영인사군." "어, 어떻게? 어떻게 이곳에?" "아는 사람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이 정도쯤 되면 우연도 굉장하다고 해야겠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태연한 이스드의 모습이 더욱 굉장하다. 그러나 사정을 알 리 없는 우현은 미소를 띠었다. 이스드는 담 밑으로 바싹 다가갔다. "나올 수 있겠어?" 특별히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중얼거렸다. "네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서 그런다." 우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스드라는 존재가 커다란 위로의 덩어리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나갈 테니까." 우현은 우물우물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문지기에게 이야기를 해 문을 열게 한 그는 담을 돌아 이스드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스드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현으로서는 어느 숲에서 은발의 처녀에게 얽매일 뻔했던 날 이후 처음으로 이스드를 만난 것이었다. 무척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미묘한 아련함을 주었다. 그는 이스드를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이스드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 남빛과 흰빛의 교차, 잘 다듬어진 얼굴, 바늘 끝도 안 들어가도록 쌀쌀맞은 분위기에 차가운 눈매. 그러나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이스드의 요소들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빛과 흰빛은 여전하고 얼굴의 생김도 그대로였지만 건드리지도 못하게 차가운 분위기는 점차 누그러졌고 눈매는 당황한 빛을 띠며 부드러워졌다. '당황해?' 우현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이스드는 손가락으로 우현의 이마를 밀며 투덜거렸다. "사람을 그리 뚫어져라 쳐다보다니." 그러더니 잿빛의 망토가 출렁거리도록 어색하게 큰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몸을 돌린다. '귀엽다'라는, 성인 남자 대부분이 길길이 날뛸 수식어를 떠올린 우현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것을 본 이스드는 먼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어, 어라? 같이 가요!" 이스드가 이끌어 간 곳은 광장이었다. 가지런하게 깔린 포석이나 깔끔한 골목이 일반 영지나 도시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아이들이 깔깔대며 뛰자 깜짝 놀란 비둘기떼가 푸드득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그들에게 시선을 준 우현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를 따라 이스드를 잡아끌었다. 좋은 일이 있었는지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가 손을 마주잡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자는 소의 뿔처럼 생긴 머리장식을 하고 비즈가 박힌 헤어네트로 머리카락을 감싸고 있었는데, 뿔의 양 끝에서 내린 하얀 베일이 그녀의 뺨을 감싸고 흘러 발치까지 닿아있었다. 자칫 암소처럼 보일 그 장식은 턱이 뾰족한 하트형의 얼굴에 잘 어울려 그녀를 사랑스러운 인상으로 만들어주었다. 두 남녀가 걷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뿌렸다. 우현은 자신이 있는 곳까지 날아온 그것을 붙잡아 들여다보았다. 색색으로 곱게 물들인 종이조각이었다. 한 쪽에 모여 앉은 악사들은 내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현악기와 관악기가 어우러진 소리가 흥겨웠다. 가지각색의 옷을 입은 남녀들이 그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결혼식?" 우현이 중얼거리자 그 소리에 화답하는 듯한 환호성이 일었다. 손을 잡고있던 남녀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음악소리가 더욱 흥에 겨워졌다.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몸짓이 점점 즐거워졌다. "자요! 신랑이 내는 겁니다. 한 잔 쭈욱!" 우현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나무 잔을 얼결에 받아들었다. 황금빛의 맑은 술이 찰랑찰랑 물결치고 있었다. 맥주인가 싶어 한 모금 마신 그는 기분 좋은 달콤함에 얼핏 미소를 지었다. "뭐지?" 이스드가 잔에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우현은 그의 입가에 잔을 대주었다. "꿀술인 것 같은데, 마셔볼래요?" 이스드는 아무 거리낌도 없이 잔에 입술을 가져갔다. 한 모금 마신 그는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이렇게 말했다. "지독스럽게도 달군." 단 것을 싫어함. 약점이라도 잡은 느낌에 즐거워진 우현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술을 마셔본 경험이 얼마 없는 얼굴이 다소 달아올랐다. 술잔을 건네주었던 남자가 물었다. "다시 한 잔 마실라우?" "좋..." "아니, 됐소." 좋다고 말하려는 것을 냅다 가로챈 이스드는 우현을 끌고 걸어갔다. 나무 그늘이 우거진 곳에 다다라서야 손을 놓아준 그는 우현의 이마를 퉁기며 말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것에 욕심을 내서 어쩌겠다는 거냐." "하지만 맛있었는데. 게다가 공짜잖아요. 아깝다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것 같군요, 이스드는." "...충분할 정도로 실감하고 있다, 이 말썽 덩어리." 이스드는 의자를 끌어다 우현을 앉히고는 붉어진 얼굴을 망토 자락으로 감춰주며 중얼거렸다. 어디까지나 모르는 것이 죄다. 서늘한 향기에 감싸인 우현은 이스드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딱 기분 좋을 만큼 어지러운 정신을 뚫고 소리들이 느껴졌다. 한 귀로 들려오는 음악소리, 다른 한 귀로 들려오는 웃음소리. 지고이네르들과 있을 때에는 일상이던 소리들이 한꺼번에 밀려들고 있었다. 울고싶었다. "우현." 막막한 그리움과 아득할 정도의 두근거림. 교차하는 감정 속에서 우현은 손을 뻗어 이스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잠시 움찔했던 이스드는 그러나 잠자코 우현의 머리를 안아주었다. 새하얀 손가락 위에 흩어진 자줏빛이 달콤했다. 이스드는 아찔할 정도로 선명했던 검은색을 떠올리며 자줏빛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울지 않아요." "안다." "반드시 만날 겁니다." "그래." 우현은 끄으윽 소리를 내며 이를 악물었다. 울까 보냐. 전부 잃어버린 어린애처럼 울 것이라면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 그러므로 그는 지고이네르를 생각하며 울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곳에 있다면 어떻게 그 장소를 알아낼 수 있을까. 과연 카이엔이 그것을 알아낼 수 있을까. 알아낸다 한들 구할 수는 있는 것일까. '아니, 잠깐만.' 지고이네르가 어디에 있는지 당장이라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가 직접 붙잡히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카이엔에게 부탁해서 미행을 붙이면...' 그때 생각에 잠겨 뻣뻣하게 굳은 우현의 얼굴을 들어올리는 손길이 있었다. 그의 얼굴을 잠시 살핀 이스드가 차게 말했다.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스드의 눈길은 마치 머리 속까지 꿰뚫는 것 같았다. 우현은 나쁜 짓을 생각하다 들킨 어린아이와도 같은 심정이 되어 눈을 피했다. 그러나 이스드는 가차없었다. "만약 네가 직접 붙잡혀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당장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군. 죽음의 입구로 스스로 걸어가고 싶은 거냐?" "하지만!" "기다려라. 아이겐튼 자작 정도라면 네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금세 알아낼 테니까." 우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마음이 어지간히도 불안정한 모양이었다. 이스드의 눈동자가 더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다시 우현에게 돌려진 눈동자 속에는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로 앞에 고위급의 신관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음에도 그것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이 강직함과 순수함이라니. 이스드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우현." 이스드는 우현의 손을 잡아끌어 일으켜 세웠다. 밤처럼 새까맣고 아기처럼 커다란 검은자위가 이스드를 향했다. 그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숙여 우현의 눈꺼풀에 키스했다. 불안스레 흔들리는 눈동자도 아름답지만 역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싶었다. "춤을 출 줄은 알겠지?" "네?" 우현이 얼빠진 소리로 반문하는 사이 이스드는 그를 이끌어 광장의 한가운데로 나갔다. 신랑 신부를 중심으로 어우러진 무리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이, 이스드? 잠깐!" "출 줄 몰라?" "알아요...가 아니라!" 춤을 추는 법은 알고 있었다.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연습하여 봄 축제 때에는 슐리언과 멋드러진 춤을 추고 말겠다는 셰리의 원대한 포부에 휘둘려 하는 수 없이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남자 둘이 춤을 추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텐데요?" "그렇게 생각해?" 이스드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무리 중에는 여자가 모자라 남자들끼리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즐거운 결혼식, 즐기기만 하면 장땡인 것이다. 그들과 이스드를 번갈아 본 우현은 이내 포기하고는 얌전히 걸어갔다. '어차피 남녀의 스텝은 같으니 상관 없겠지.' 타이밍도 좋게 끼여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정중히 인사를 한 후 손을 내밀었다. 우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스드의 손에 자신의 것을 얹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어깨를 스치고 손바닥을 부드럽게 마주한다. 한 걸음 물러선 후 두 걸음 다가서서 등을 맞대고, 다시 물러서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화려한 기교 따위는 없이 소박한 민속춤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마음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스드." 서로의 왼쪽 어깨에 바른 손을 올리는 순간 우현이 웃으며 이스드를 불렀다. 이스드가 침울해 있는 그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이런 어울리지도 않은 춤을 청했다는 것을 모를 우현이 아니었다. 매정한 얼굴, 차가운 눈매, 냉정한 말투. 그러나 종종 발휘되는 상냥함이 따스한, 좋아하는 사람. "고마워요." 우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이스드의 눈매가 부드러움을 품고 휘어졌다. 노을이 다채로운 그라데이션의 옷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시간, 두 사람은 화려한 저택들이 늘어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자줏빛의 머리카락이 불꽃 같은 색깔을 띠고 타오르자 그 아래의 얼굴이 한결 창백해 보였다. 뚜렷한 생명력을 담은 듯 반짝거리는 머리카락과 시체 같은 안색의 언밸런스한 조화가 어딘지 위태로웠다. "우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스드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어 우현을 불렀다. 돌아보며 빙긋 웃는 앳된 얼굴은 어딘지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왜요?" "...내일도 찾아오겠다." '내일 시간이 어떻냐'도 아닌 '내일도 찾아오겠다'라는 확정이 더할 나위 없이 이스드답게 느껴졌다. 우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주겠어요?" 우현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긴장이 깃들여 있었다. 그는 자신을 직시하는 이스드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웃었다. "이전에 말했었죠?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고." 우현의 눈동자에서 떨림을 발견한 이스드는 아무 말 없이 팔을 뻗어 그를 끌어당겼다. 우현의 손가락이 이스드의 옷자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혹시, 가 아니라 역시 데이트?;) 아무리 남자가 남아돈다고 해도 괜찮은 남자에게는 댄스 파트너가 몰리기 마련. 그럼에도 여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두 사람(게다가 하나는 신관)은 평소와는 다른 의미로 눈에 팍팍 띄겠지요. 날개동의 모 님(가명제^^)이 리퀘(?)하셨던 축제에서의 댄스 신입니다. 별로 므흣하지가 않군요. 역시 이게 저로서는 최대한의 러브러브입니다아;(포크 댄스에서 러브러브를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만;;)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6장 운하의 도시 -3- 하루 동안 묻은 먼지를 씻어낸 우현이 식당으로 내려갈 때였다. 화려하게 차리고 나섰던 카이엔 일행이 피곤한 안색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먼저 우현을 알아본 위렌이 손을 흔들었다. "안색이 확 폈네? 아침만 해도 시금치처럼 처져있더니. 괜히 사왔나?" 짐짓 중얼거리며 우현을 바라보는 폼이 뭔가가 있는 모습이었다. 우현은 대답 대신 위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뻔뻔하며 우기기에 강한 위렌이지만 말없는 시선에는 약하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있는 그였다. 아니나다를까, 위렌은 망토 뒤에 숨기고 있던 손을 빼어 우현에게로 내밀었다. "옛다. 가져가라." 위렌의 손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고급품인 활이 들려있었다. 궁술을 배우는 동안 다뤄보았던 위렌의 것보다 조금 작은 그것은 우현의 손에 딱 들어맞았다. "컴포짓 보다. 잘 써." "아, 어어... 고마워요, 위렌." "나는 고르기만 한 거야. 돈을 낸 사람은 우리 근사한 영주님이시지." 우현은 카이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딘지 어색한 얼굴로 선 카이엔은 괜스런 헛기침을 하며 다른 곳을 보고있었다. "고맙습니다, 카이엔." "아니, 뭐... 종자로 수행하려면 필요할 테니까." 갑작스러운 선물에 익숙하지 못한 우현은 머쓱함에 얼굴을 붉히며 활을 받았다. 그것을 본 위렌은 손을 뻗어 우현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으앗, 위렌! 잠깐, 잠깐! 아프다고요!" "우크큭, 귀여운 녀석. 가서 밥이나 먹자." "귀엽다니! 어디가 말입니까!" 기운차게 반발한 우현은 도망치는 체 잰걸음을 옮기는 위렌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걸어갔다. 걱정을 끼치고 다시 위로받는 것으로 상대방의 관심을 느끼고 좋아하는 것은 어린아이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자신이 그 꼴이었다. '그래도 기뻐.' 역시 자신은 인복이 있다. 그는 카이엔을 흘금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자작님은 역시 바쁜 것인지 카이엔은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저택을 나섰다. 우현은 활을 들고 정원으로 가며 투덜거렸다. "과녁 백 번 맞추기라니, 도대체." 위렌이 내준 숙제였다. 하인에게 부탁하여 허브밭 근처에 과녁을 마련한 우현은 팔목까지 올라오는 건틀렛을 끼고 손가락을 움짓거려 보았다. 손가락의 상태 오케이, 화살도 잔뜩 가져다 놓았다. 마침 바람이 잠들어 대기마저 조용했다. 왼편에 과녁을 두고 일직선으로 선 후 정면을 향한다. 화살을 들어 시위에 끼우는 것과 함께 몸을 틀어 과녁을 바라본다. 전신의 상태를 유지한 채 두 팔을 들어올려 수평이 되도록 만든다. 한 손으로는 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밀어 활시위를 팽팽하게 만든다. 수도 없이 행해온 일련의 동작들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우현은 과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커다란 종이 위에 그려진 노란색 동그라미에 시선을 고정하니 살촉이 흐릿해졌다. 그는 단단히 긴장한 시위를 놓았다. 시위가 피잉, 하는 소리로 울었다.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날아간 화살이 따닥 소리를 내며 과녁에 들이박혔다. 왼쪽으로 치우친 화살을 본 우현은 츳츳 혀를 차며 다시 시위를 당겼다. 그렇게 몇 개나 되는 화살을 쏘고 있을 때였다. 우현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향기를 알아차리고는 냅다 담벼락에 매달렸다. 잿빛의 망토를 걸치고 후드까지 뒤집어쓴 이스드가 저택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스드읏!" 큰 소리로 부르자 이스드뿐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들마저 우현을 올려다 보았다. 우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이자 이스드가 미소를 지었다. "뭐 하고 있었어?" "활 쏘기 연습이요. 잠깐만 기다려요. 곧 내려갈 테니." 우현은 화살이 담긴 전통이니 활이니 하는 것들을 지나가는 하인에게 맡기고는 문을 향해 달려갔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문이 움직였다.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틈새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온 우현은 이스드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그렇게 급히 달려오지 않아도 괜찮은데." "으응, 하지만 기다릴까봐서요." 우현은 싱긋 웃으며 이스드를 올려다 보았다. 언제나와는 다른 의미로 고동치는 심장은 두려움을 말하고 있었다. '아냐. 이 사람이라면 괜찮아.' 근거가 없기에 더욱 강력한 믿음이었다. 그는 이스드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요."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그래서 차분하게 앉아 심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우현이 찾은 곳은 근처에 있는 신전이었다. 고해의 장소로는 완벽하다, 고 중얼거리며 쓴웃음을 지은 그는 어두컴컴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뒤따라온 이스드는 어느새 망토를 벗었는지 새하얀 신관복 차림이었다. 어둑한 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른 흰빛이 우현의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 모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열린 창으로 바람이 들어왔는지 벽에 걸린 촛불이 격한 일렁임을 보였다. 흐릿하게 드리워진 두 개의 그림자 역시 촛불에 맞추어 연약하게 흔들렸다. "이스드." 이스드는 내내 향하고 있던 것에서 시선을 들어 우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깍지를 낀 채 불안하게 뒤틀리던 손가락은 우현의 눈동자에도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스드는 손을 뻗어 우현의 턱을 들어올렸다. 사심 없이 새까만 눈동자는 오히려 이쪽의 치부를 자극하는 느낌이었다. "말을 할 때에는 사람의 눈을 보고 하는 거다." "알아요." 우현의 입가에 불안정한 미소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고이네르도, 이곳 사람도 아니에요. 나는..." 길지 않은 고백 내내 촛불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스드는 촛불의 황금빛이 우현의 얼굴에 드리운 음영을 바라보았다. 대륙 사람들의 잡티 많은 백색과도, 지고이네르의 매끈한 가뭇함과도 다른 얼굴은 그윽하다는 단어가 어울릴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목구비의 윤곽도 많이 달랐다. 움푹 들어가지 않은 대신 얇은 선을 그린 듯 겹이 진 눈꺼풀, 뚜렷하게 뻗지 않은 대신 동그스름한 코, 음영이 짙지 않은 대신 선이 부드러운 뺨. 이러한 요소들에 부드럽게 뻗은 목이 더해진 것을 도대체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하는 것일까. 이스드는 익히 알고는 있었으나 적용할 대상이 없어 떠올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단어를 기억 한 끄트머리에서 꺼내어 우현에게 가져다 붙였다. 참으로 단아한 생김이다, 라고. 우현은 초조와 긴장에 시원함이 섞인 얼굴로 이스드를 보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거기에 생각이 미친 이스드는 내심으로 자조를 삼키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요? 말했잖아요?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니까요. 친아버지요!" "그래서?" "이스드..." 우현은 맥빠진 소리를 내며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그것을 본 이스드는 나직하게 웃었다. 이내 우현이 발끈했다. "설마 내가 이제까지 한 이야기를 농담으로 들은 것은 아니겠죠?" "그거야말로 설마겠지. 단지." 말을 끊은 이스드는 우현의 뺨에 손을 얹었다. 뺨에 보르르한 솜털조차 사랑스럽다니, 걸려도 된통 걸린 것이 분명했다. "단지?" "나는 너를 알고있을 뿐이다. 너는 네 아버지를 죽인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 이스드가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우현은 입술에 닿는 숨결을 느끼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몸만이 아닌 마음의 거리 역시 제로에 한없이 가까웠다. "또한 나와 네가 만난 것은 네가 이곳으로 온 이후다. 내가 마음에 담은 것은 아버지를 죽이고 빛에 이끌려 이곳으로 온 너다. 그 이전의 네가 아니라. 총명한 너이니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우현의 턱을 스친 입술이 뺨에 닿았다가 관자놀이로 향했다. 귓가에 느껴지는 숨결이 간지러워 목을 움츠린 우현은 목덜미에 닿은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정신이 몽롱해지며 몸 어딘가가 뜨거워진다는 생소한 감각이 한꺼번에 찾아든 것에 당황한 그는 그러나 이스드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생경한 감각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좀 더 닿아있고 싶은 마음이 훨씬 강했다. 어느새 풀린 허리띠가 스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스탠드 칼라의 단정한 상의가 헤쳐지고 셔츠의 단추가 끌러졌다. 이 대륙의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손끝이 우현의 등을 쓸어내렸다. 말캉한 감촉의 무엇이 우현의 목덜미에서 섬세한 쇄골로 미끄러져 잠시 머물렀다. "흐읏...!" 우현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을 때였다. 허공에 걸린 깃발처럼 펄럭이던 촛불이 훅 소리를 내며 꺼졌다. 갑작스레 찾아든 어둠이 두 사람의 실루엣을 희끄무레하게 떠올렸다. '그, 그러니까 지금...?' 무엇을 어찌하여 도대체 왜 이런 장면이 도출된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도록 패닉 상태에 빠져 가만히 앉아있는 우현과는 달리 이스드의 행동은 신속했다. 잠시 멈칫했던 그는 흐트러진 옷을 가다듬고는 우현의 옷까지 챙겨 입혀주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움직이는 이스드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엣, 저기, 지금 그게 말이죠, 에에..." 도무지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현이었다. 열이 오른 듯 들뜬 감각도 감각이지만 남자끼리 이런 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일반적인 남학생으로서 남자끼리의 섹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러니까 지금 이스드가 하려고 한 것이...?' 우현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붉어졌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버벅거리고 있는 그의 앞에 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우현은 그 손을 얼결에 붙잡고 일어났다. "이만 나가지." 문이 열리고 눈부신 빛이 눈을 찔렀다. 미간을 찡그린 우현은 무심코 이스드를 돌아보았다. 이스드의 단정한 얼굴은 눈에 띄도록 강한 당혹함을 담고 있었다. 우현의 시선을 느낀 그는 입끝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내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게 되어버려. 이런 식으로 말이야." 그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우현의 쇄골을 쿡 찔렀다. 고개를 숙인 우현은 풀어헤친 채인 겉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 위에 선명히 찍인 붉은 색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귀끝까지 새빨개져서는 자신의 쇄골만 멀뚱멀뚱 바라보는 우현의 머리 위에 가벼운 한숨이 내려앉았다. "때마침 촛불이 꺼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거겠지. 그만 옷을 여며라, 우현." 우현은 이스드가 건네주는 허리띠를 받아 겉옷을 단단히 여몄다. 흘금 바라본 이스드는 어쩐지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이라, 우현은 얼굴을 붉힌 자신이 바보가 되어버린 느낌을 받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모양이군요." 우현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불퉁한 말은 그의 입술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이스드는 눈썹을 장난스레 찌푸리며 대답했다. "신관은 색을 가까이 하면 안 된다. 알고 있을 텐데." "그런 것치고는 꽤나 능숙한 것 같습니다만." 이놈의 주둥아리, 라고 탓해 보지만 멋대로인 입술은 주인의 난감함을 알아주지 않았다. 우현은 입을 꾹 다물고 이스드를 곁눈질했다. 이스드의 입술이 짓궂은 호선을 그렸다. 그야말로 '아차!'였다. "능숙해? 뭐가?" "...이 망할 난봉꾼 신관!" 도무지 말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심통이 잔뜩 난 우현은 애꿎은 흙무더기만 턱턱 차댔다. 그러나 쑥스러움을 감추려 한다는 진짜 의도를 알아차린 이스드는 즐겁게 웃을 뿐이었다. 그것이 우현의 심통을 더욱 돋군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신관이면서, 신관이면서, 신관이면서!" "그래, 그래." "크아악! 그렇게 웃지 말아요! 웃지 말라니까아!" ...라고 밝게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이 파렴치한 놈! 후안무치! 네 놈의 양심은 토끼의 간이냐, 이리 냈다 저리 들였다 하게! 네 입에서 「만난」이라는 소리가 나오다니! 그런 위로를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해?! 그러자 제 안의 이스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전부 거짓말은 아니니 상관 없잖아." ...뻔뻔한 놈. 내 자식이 맞는 모양입니다.(사실은 미수라는 사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발버둥; 파일 번호가 46인데...데...;;;) 우현이 받은 컴포짓 보는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이른바 복합궁입니다. 양궁이나 우리나라의 국궁이 여기에 속하며, 크기는 작으나 파괴력과 사정거리는 굉장한, 가장 발달한 활의 형태입니다. 사실은 갑옷도 뚫는다는 석궁이 제일 좋았지만요. 생각해보니 은근슬쩍 고백신이군요.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6장 운하의 도시 -4- 우현은 신전의 뜰을 가로지르는 내내 투덜거렸지만 그 입가에는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는 시선을 흘금 움직여 이스드를 올려다 보았다. 다시금 잿빛 망토를 걸친 이스드는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밀어내지 않았다. 얼굴 찌푸리지 않았다. 화를 내거나 질책하지 않았다. 이스드는 그저 담담하게 우현의 행동을 받아들여줄 뿐이었다. 용서받은 느낌에, 우현은 문득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스드, 이스드. 「고해」에 대한 「보속」은요?" "보속?" "네. 내가 있던 곳에서는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을 고해라고 합니다. 그것을 들어준 사제는 보속이라고 하는 속죄를 알려주고요. 보속까지 해야 고해가 제대로 끝나는 거죠. 이스드는 내게 뭔가 시킬 일이 없나요?" "글쎄, 시킬 일이라. ...키스 세 번이라든가." "이, 이봐요! 성스러운 신관님이!" 그렇게 이스드와 더불어 투닥거리며 신전을 나선 우현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벌써 점심 때가 됐네. 가요, 이스드. 내가 살 테니까." 웃으며 말한 우현은 눈을 찡끗거리며 덧붙였다. "높으신 분은 생각도 못할 곳일 걸요." 우현이 이스드를 끌고 간 곳은 광장이었다. 결혼식으로 활기에 차있던 어제에 비해 다소는 조용한 그곳을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휘젓고 있었다. 우현은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잘 피해 걸어다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 광장에 와서 결혼식 구경을 했다고 하니까 빨간색 수탉이 그려진 간판을 단 식당이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아, 저기 있네. 혹시 못 먹는 음식 있어요?" "단 것." 재빨리 나오는 대답으로 보아하니 어제 마신 꿀술에 어지간히 질린 모양이다. 우현은 킥킥 웃으며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훅 하고 끼친 열기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인지라 식당 안은 발을 디딜 틈도 없이 붐비고 있었다. 우현은 목청을 높여 떠드는 사람들 사이를 잘 비집고 들어가 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맞은 편에 자리를 잡은 이스드는 주변을 흘금 둘러보더니 한 마디로 평을 내렸다. "마뉴스 같군." "마뉴스?"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지은 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이지. 마뉴스의 붉은 불길은 무쇠마저도 순식간에 녹여버린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 놓여진 사람들은 죽지도 못하는 몸으로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겠지." 말하자면 지옥처럼 시끄럽다, 는 의미다. 다소 어색하게 웃은 우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남빛 눈동자를 보고서야 껄끄러움을 풀었다. 그를 겨냥하고 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때 사람들을 간신히 헤치고 다가온 점원이 성마르게 물었다. "주문은 뭘로 할 건가요?" 이스드의 위치를 생각하자면 오만불손이 극에 달한 말투라,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안절부절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이스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우현을 볼 뿐이었다. 우현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매운 것 괜찮아요?" 이스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 위렌에게 들은대로 주문을 한 우현은 점원이 가자마자 이스드를 흘금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아챈 이스드는 입술 끝을 들어올려 짓궂게 웃었다. "왜?" "점원의 행동에 화가 나지 않았을까 걱정했어요." "화? ...아아, 그렇군. 무슨 소리인가 했다. 처음부터 예의를 기대하지 않았으니 화를 낼 이유도 없는 거지." 부드러운 어조와는 달리 상당히 무례한 의미를 담은 말이었지만 우현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들었다. 그때 아까의 점원이 다가와 음식 접시와 함께 나무 잔을 내려놓았다. 시키지도 않은 것이라 혹시 하고 들여다 본 우현은 잔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에 미소를 지었다. "어제의 꿀술이 이 식당에서 나온 거였나 봐요! 땡잡았네." "이 집 음식은 대체로 매우니까. 식후에 마시는 달달한 술은 천상의 맛이지." 사내들의 걸죽한 음성으로 시끄러운 식당 내에서 우현의 것처럼 쟁쟁한 목소리는 오히려 귀에 확확 들어온다. 그것을 들은 중년 남자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우현의 말을 받았다. 우현은 남자를 향해 미소로 답례하고는 맵게 양념한 닭요리를 맛보았다. "여기 음식 치고는 매운 편이기는 하네요." 극상으로 매운 고추를 흔한 조미료로 사용하는 대한민국 출신의 우현이다. 이 정도는 매운 축에 들지도 않았다. 맞은편을 보니 이스드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요? 맛이 없어요?" 우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이스드는 이내 고개를 젓더니 생각을 더듬듯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조리하여 방금 나온 뜨거운 음식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와 마주 앉아 하는 식사도 처음이다. 기분이 이상하군." 우현은 눈을 크게 떴다. 이스드의 표정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스드의 손을 움켜쥐었다. 따스한 온기에 고개를 든 이스드는 새까만 눈을 마주하고는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다. 아니, 즐거워. 확실히 높은 신분의 나로서는 생각도 못할 장소인걸." 이스드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일그러진 우현의 눈썹을 손가락으로 펴주며 다시 웃었다. 식사가 재개되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겨있던 우현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왜 그러지?" 그 변화를 재빨리도 알아챈 이스드가 물었다.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던 우현은 결국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에 지고 말았다. "그, 그게 말이죠. 내 생각일 뿐인데에... 으음... 이스드가 아까 나한테 그, 마, 마음에 어떻게 했다고오..." "마음에 담았다, 너를." "네, 그거..." 데친 문어처럼 시뻘겋게 익어버린 우현은 어물거리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혹시 그게 내가 이스드를 높은 사람 대하듯 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 해서요. 그러니까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스드를 대해서 이스드가 나를 마... 거기에 그렇게 했다고, 쩌으기..." 이스드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우현의 포크가 애꿎은 접시 가장자리를 끽끽 긁어댔다. 이스드는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눈을 둘 곳을 몰라 두리번거리던 우현은 화끈거리며 타오르는 얼굴을 식히려는 생각에 나무 잔에 든 것을 들이켰다가 더욱 벌개지고 말았다. "아핫핫, 이거 술이네요. 참, 그렇지! 이스드는 단 걸 싫어한다고 했죠?" 우현은 이스드의 잔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하얀 손이 뻗어나와 두 개의 잔을 모두 낚아채어 갔다. "아앗, 그건 내 건데!" "압수다. 어제처럼 되면 곤란해." "네?" 무엇이 어떻게 곤란한지 모르는 우현은 눈만 둥그렇게 뜰 뿐이었다. 두 개의 잔을 우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놓아둔 이스드는 곧은 시선을 들었다. 남빛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만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우현은 심장에 꿀술보다 더한 달콤함이 스미는 것을 느꼈다. "네가 말한 것도 어느 정도는 작용을 했을지 모르지.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단지 네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사로잡히기에 충분했다는 기분을. 이스드는 말을 삼키며 일어섰다. "이, 이스드?" "숙제다. 네가 스스로 깨달아라." "네에?" 이스드는 잿빛 망토 자락을 가볍게 흩날리며 식당을 나섰다. 등 뒤에 느껴지는 허둥지둥한 기척이 즐거웠다. 길가에 드문 드문 늘어선 노점의 물건을 향해 고개를 빼고 과즙 반 물 반인 길거리표 주스로 목을 축인다. 지나가는 꼬마가 입에 문, 반달 같은 고구마 튀김을 보고는 끝끝내 가게를 찾아내어 자기 입에도 무는 우현은 지금 그가 하는 행동이 전형적인 데이트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이스드가 밀어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그의 머릿속에서 수도에 온 목적은 깜빡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게 이것 저것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던 그들은 깔끔하게 구획된 거리 안쪽으로 어두컴컴하니 그늘이 진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지고 지저분해진 포석이 깔린 그곳은 바로 너머의 깨끗한 건물들 탓인지 더욱 어두운 느낌이었다. 우현이 그곳을 기웃거릴 때였다. "응?" "왜? 무슨 일 있어?" 우현은 귀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요. 어린아이의..." 그때였다. 끼야악 소리를 지르며 나동그라진 무엇이 있었다. "이크!" "뭐야? 부랑아인가?" 거리의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미끄러져 나온 것은 이제 고작 여남은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였다. 아이는 근처에서 거닐던 사람들이 몸을 움츠릴 만큼 지저분했다. 우현은 아이가 미끄러진 포석 위로 길게 남은 혈흔을 발견했다. "저 아이, 다친 것 같은... 이스드?" 황급히 달려가려던 우현은 자신의 어깨를 단단히 틀어쥐는 손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순간 남자의 것인 고함이 터져나왔다. "잡종인 것으로 모자라 도둑질이라니! 이리 와! 내가 직접 네 몹쓸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어!" "자, 잘못했어요! 한 번만 눈 감아 주세요, 나리!" 골목 안에서 달려나온 사내는 제법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비척거리며 일어나려는 아이의 손목을 붙들고 으름짱을 놓았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모자에 달린 문장을 보아하니 꽤나 권세있는 귀족가의 하인 같은데 하필 저런 사람을 건드리나, 그래." "저 아이도 딱하게 됐... 어럽쇼? 저 머리카락 좀 봐." 아이가 쓰고 있던 허름한 모자가 훌떡 벗겨져 나갔다. 그 아래로 드러난 검은 고수머리를 본 사람들이 그것을 손가락질했다. "그러고 보니 저놈의 피부색도 그렇네. 아무리 땟국이 꼈다지만 저렇게 검을 수는 없지." "퉤엣! 더러운 지고이네르 잡종놈이었군." "어째 손버릇이 나쁘다 했지. 제 출신 어디 가겠어?" 여기저기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발칵 화를 냈을 우현은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때가 줄줄 흐르는 검은머리가 그의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우현." 이스드의 나직한 음성이 바로 곁에서 울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우현은 자신이 검자루를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스드가 말했다. "다친다. 자칫 잘못하면 너마저 위험해." 그때 굵직한 비명이 울렸다. 우현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머리카락을 붙들린 아이가 사내의 손을 힘껏 깨물고 있었다. "이 더러운 놈이!" 아이를 힘껏 뿌리쳐 길에 처박은 사내는 허리춤을 더듬어 채찍을 잡았다. 매끈하게 빠진 채찍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 아이의 머리를 후려쳤다. "아아악!" 아이의 관자놀이가 터져 피가 흘렀다. 매듭 따위는 없이 매끈한 채찍이지만 어린아이 특유의 연약한 피부는 그것을 견뎌내지 못했다. 뱀이 춤추듯 차르륵 치켜올라간 채찍이 다시 내리쳐졌다. "어디, 오늘 한 번 죽어봐랏!" 연신 후려치는 소리가 울리며 아이의 몸에 하나 둘 씩 징그러운 자국들이 새겨졌다. 작은 몸에서 흐르는 피는 붉은데도, 그것을 보는 자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색깔임에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우현!" 이스드의 만류조차 들리지 않았다. 채찍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겪었던 아픔이 떠올라 잠시 멈칫했던 우현은 그러나 이를 즈려물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6장 운하의 도시 -5- 맑기만 한 하늘을 배경으로 움직인 채찍이 공기를 가르며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바람이 흩어지는 위협적인 소리를 들은 아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제 곧 팔이나 다리, 아니면 등이 터질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예상과는 달리 이어진 아픔은 없었다. "이건 또 뭐야?" 난폭했던 사내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공기도 달라져 있었다. 아이는 눈물과 땟국으로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호리호리한 선의 누군가가 눈앞에 서있었다. 등을 돌린 그는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 검집에 똬리를 튼 모양으로 둘둘 감긴 채찍을 본 아이는 그제야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놈은 지고이네르다! 사정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젊은 혈기만 믿고 나서지 마!" "그렇습니까?" 상황에 맞지 않게 차분한 미성이었다. 팔을 흔들어 채찍을 떨쳐낸 그는 자줏빛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청량한 사람이라, 아이는 문득 넋을 잃고 그를 주시했다. 그때 그 사람이 몸을 돌렸다. 아이는 이제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의 앳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상하군요. 나는 이 아이의 눈동자가 파란색으로 보이는데 말입니다. 잡혀가는 것은 순혈의 지고이네르뿐 아니었나요?" 생명줄이다. 그것을 직감한 아이는 파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사내가 비아냥거렸다. "허어! 정의의 사도 납셨군.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 잡종놈은 내 지갑까지 슬쩍하려 했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아이는 소년의 눈을 피했다. 이제 자신은 영락없이 팔을 잘리게 생겼다. 그러나 소년은 역시 생명줄이었다. "증거 있습니까? 이 애가 댁의 물건을 훔치려고 했다는 증거 있냐고요?" 소년은 입가를 슬쩍 끌어올리며 그렇게 물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아도 비웃음이었다. 사내가 격분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어린 놈이!" "미안해서 어쩌나. 올해로 스물, 성인입니다." "이 자식! 감히 에파시오 자작님을 모시는 나를 방해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참지 못한 사내가 검을 뽑았다. 날이 잘 선 검은 갓 장만한 듯 깨끗했다. 그것을 본 소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정당방위. 먼저 검을 들이댄 것은 그쪽입니다." 소년의 손에 들린 검이 츠릉 소리를 내며 빠져나왔다. 그는 익숙한 자세를 잡고 서서 사내를 노려보았다. 옷에 아무 문장도 달고 있지 않으니 귀족을 모시는 사람은 아니다. 게다가 차림새는 평범한 소년 그 자체였다. 에파시오 자작의 이름을 듣자마자 꼬리를 내려야 할 상대가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드는 것을 본 사내는 당황하고 말았다. "못 들었어? 나는 에파시오 자작님을 모시는 사람이라니까!" "그 말은 좀 전에도 들었습니다. 이크!"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채찍이 날아왔다. 사내가 냅다 집어던진 그것을 절묘하게 피한 소년은 그대로 달려나가 사내의 틈을 노렸다. 챙,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검이 맞부딪혔다. 비리비리하게만 보였던 소년은 의외라 생각될 정도로 빨랐다. 사내는 급히 검을 떨쳐냈지만 그보다 먼저 소년이 한 발 물러섰다. 소년은 자신의 손바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과연 카이엔. 그냥 영주님이 아니었잖아?"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몰려있는 시선이 많았다. 이대로 망신만 당하고 돌아가면 사내는 에파시오 자작에게 혼쭐이 나고 만다. 그는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댔지만 소년은 그것을 피해 나갔다. "잘 좀 해봐요. 그렇게 무식하게 움직여서야 어디 걸리는 게 있겠어요?"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결국 제풀에 먼저 지친 것은 사내 쪽이었다. 그는 어깨로 숨을 쉬며 성마르게 소리쳤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에파시오 자작님이 이 일을 아시면..." "거 참, 내세울 것이 그렇게도 없습니까? 그리 억울해하지는 말아요. 나 역시 출중한 자작님을 모시고 있으니까. 계속할 건가요?" 그때였다.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빙글거리고 있는 소년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잿빛 망토가 펄럭거리자 그 아래에 있는 백의가 엿보였다. "그만. 더 이상은 허락하지 않는다." "뭐야? 댁은 또 뭐길래 허락한다 만다 소리를 함부로...!" 짜증과 분노가 극에 달해 있던 사내는 다음 순간 아무렇게나 지껄였던 혀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잿빛 망토의 청년이 그를 노려보았던 것이다. 날카로운 눈매에 깃들인 열기와 전신에서 풍기는 위압감에 금방이라도 넙죽 엎드려버릴 것만 같았다. 잿빛의 망토는 여행 중인 신관의 것. 그 아래의 백색 신관복은 귀족도 함부로 못 할 고위 신관이라는 표식이었다. '내가 어쩌자고...!' 무릎을 덜덜 떨며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까' 생각하는 사내를 구원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방금 전까지 맞붙어 싸우던 소년이었다. 소년이 쓰러진 채인 아이에게 달려가자 신관의 시선이 움직였다. 사내는 그 틈을 타 꽁지에 불 붙은 듯 도망쳤다. "어이, 괜찮아? 이봐!" 우현은 아이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니면 크게 다쳤는지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현은 아이의 코밑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규칙적이고 평온한 호흡이 느껴졌다. "아, 다행이다." 그는 아이를 안고 일어났다. 언제 다가왔는지 이스드가 바로 옆에 있었다. 올려다본 우현은 그러나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뻗어나온 손이 우현의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너라는 사람은 도대체!" "이, 이스드?" "조심하라 일렀는데 들어먹지를 않는구나. 그리도 그들이..." 매몰차도록 단정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이스드는 어딘지 낯설었다. 불안해진 우현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기, 이스..." "네 일행이 오는군. 저녁에 방문하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그만 가봐야겠다." 이스드는 우현의 손이 채 닫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우현은 잿빛의 망토가 붕싯하니 떠올랐다 가라앉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는 근처까지 다가온 말발굽 소리를 듣지 못했다. "우현?" "어이, 우현? 무슨 일이야?" 카이엔과 위렌을 선두로 한 일단의 기사들이 다가오자 몰려있던 구경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아이가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깨어났다.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현은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를 뒤져 약과 붕대를 꺼냈다. 아이는 상처에 술이 부어지고 약이 발라지는 데도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가무잡잡한 피부의 귀족과, 머리는 자줏빛이나 눈썹과 눈동자는 새까만 소년을 번갈아 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끝났다. 잘 참네." 치료를 마친 우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이 아이에게 다소나마 남아있던 망설임마저 날려버렸다. "지고이네르? 맞죠? 형은 나랑 동족인 거죠?" "지고이네르가 맞기는 한데..." 우현은 혼혈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동족이라 칭하는 아이를 살펴보았다. 지고이네르에 대한 원망은커녕 반가움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보니 가슴이 짜안 했다. 아이는 기어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 "엄마랑 같이 끌려왔는데 나는 순혈이 아니라고 풀려났어요. 형은 기사고 저 분은 귀족님이죠? 제발 부탁이에요. 시키는 건 다 할 테니까 우리 엄마 좀 구해주세요!" 난감한 착각이었다. 우현은 카이엔을 올려다 보았다. 지금도 잔뜩 신세를 지고 있는 마당에 멋대로 구한 아이의 부탁마저 떠맡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카이엔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네 이름은?" "훌쩍... 탄틴이요." "그래, 탄틴. 끌려갔었던 곳이 어딘지 기억해낼 수 있어?" "그럼요!" 카이엔은 어리둥절한 우현을 보며 싱긋 웃었다. "선이 이렇게 닿게 되다니." 깨끗한 모습으로 잠이 든 탄틴은 상당히 사랑스러웠다. 우현은 아이의 짧은 고수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티티와 그리 다를 바 없는 머리모양이었다. "완전히 잠이 들어버렸군." "내내 긴장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카이엔에게 물어볼 것이 있는데, 역시 밖으로 나가야겠죠?" 서재로 건너간 두 사람은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목재의 차가움이 머리를 맑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우현이 어떻게 말을 떼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카이엔이 먼저 말했다. "무엇을 물어보려는지는 알 것 같아. 먼저 베슬렌. 현재 하샤라의 자기 집에 있다는군. 두 번째, 지고이네르. 어디에 갇혀있는지 알아내지 못했어." "그럼..." "그래. 내게 그들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극비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탄틴에게 물어본 거야." 의자에 길게 기대어 앉은 카이엔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스운 일이지. 그렇게 쉬쉬 하면서 저런 아이 하나의 입을 생각하지 못하다니." "뭐가요?" "기가 막힌다고 하는 편이 옳을까. 지고이네르의 지저분한 아이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은 거야. 단지 방심한 거라면 멍청한 놈이겠지만 이 경우에는 오히려..." 하나의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다. 우현은 카이엔이 삼킨 말을 알 수 있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카이엔이 말을 이었다. "어디에 있는지만 알 수 있다면 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아. 어디에나 돈에 약한 인간은 있는 거니까." 돈이라니, 우현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카이엔, 지금 무슨 소리에요? 설마 뇌물을 쓰겠다는 건..." "왜 아니겠어." "하지만!" 이곳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신세를 졌다. 이 이상 폐를 끼치게 되다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카이엔은 오히려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하지 않았나? 내 어머니 역시 에코의 무리에 있었다는 것. 따지고 따지면 너와 나는 형제 비슷한 관계가 되는 거지. 그들을 구하고 싶은 것은 너만이 아니라고." "그렇지만..." "안 그러면 어쩔 거야? 설마 너, 무작정 쳐들어가서 난리 법석을 떨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우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엔은 한숨까지 섞어가며 말했다. "그럴 생각이었군." "그게 말이죠..." "쓸데없는 생각은 마. 구하기는커녕 너조차 위험하니까." 그 순간 우현의 뇌리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나직한 음성은 바로 곁, 귓가에서 울렸었다. - 다친다. 자칫 잘못하면 너마저 위험해. 걱정해주었는데. 우현은 이스드의 마지막 목소리를 떠올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 했던 음성은 이내 차분해졌지만 그것이 오히려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느낌이었다. '나한테 화가 났겠지.' 그것은 몸이 오싹 떨릴 정도로 무서운 생각이었다. 우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약속조차 없이 헤어진 이스드를 언제 다시 만나 사과를 할 수 있을지 생각하니 심장이 조여들었다. "우현?" "에? 아아, 그렇고 보니 카이엔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못 했네요. 에파 뭔가 하는 자작의 부하를 상대하는 게 어렵지가 않았다니까요? 전부 카이엔이 내내 지도해 준 덕분이에요." 애써 웃는 얼굴이건만 흔들리는 눈동자는 불안해 보였다. 그래서 카이엔은 자신들이 오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그 사람, 잿빛 망토를 걸친 누군가에 대해 물을 수가 없었다. 어제 갑작스럽게 저희 집 케이블이 안 되더라고요. 케이블 TV와 인터넷을 함께 신청했던 저로서는 당황 당황. 오늘 A/S 받고 괜찮아져서 올립니다 ^^;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6장 운하의 도시 -6- "저기라고?" 카이엔이 다소 어이없는 목소리로 묻자 탄틴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은 장대한 건축물의 뒷문을 질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거 참..." 카이엔의 중얼거림에는 한숨이 섞여있었다. 우현도 따라 한숨을 쉬었다. 탄틴이 안내해 준, 지고이네르가 갇혀있다는 곳. 그곳은 다름 아닌 왕궁이었다. 아무래도 습격할 생각은 버려야 할 듯 싶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카이엔은 자기 몫의 일을 훌륭히 마친 탄틴에게 상으로 꿀과자를 내렸다. 아이가 그것을 허겁지겁 입에 넣는 사이, 카이엔은 우현만을 데리고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의 서늘한 공기는 그들의 가라앉은 마음 같았다. 우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어려운 거죠?" "일단은. 왕궁 지하 감옥에 가뒀다는 것은 그만큼 엄격한 감시를 받고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 간수들 중에는 돈에 약한 녀석이 반드시 한 둘쯤은 끼여있을 테니까 말이야. 일단 이쪽 일은 나에게 맡기고..." 거기까지 말한 카이엔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다시 나갈 준비를 하도록 해." 우현은 으리으리한 저택을 올려다 보았다. 카이엔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우아한 화려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한 그것은 어떻게 보아도 귀족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저택의 외관이 아니었다. 카이엔은 침을 꿀꺽 삼키는 우현을 즐겁게 곁눈질했다. 넓은 정원을 말을 타고 가로지르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문이 닫히자 어두운 실내에 적응하지 못한 눈앞이 새까매졌다. 우현이 연신 눈을 깜빡거리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아이겐튼 자작님." 근엄한 표정에 다소 날카로워 보이는 노란색 눈동자. 어둠에 익숙해진 검은 눈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베슬렌 님." 그러나 우현의 눈동자는 연신 움직이고 있었다. 베슬렌의 뒤를 살피고 계단참을 바라보고 혹시나 하여 의자를 흘금거린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모습은 응접실 어디에도 없었다. 레사티나의 성격이라면 우현이 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냅다 달려나와 끌어안는 것이 정석일 것임에도. 우현의 눈동자가 순간 불안함을 띠었을 때였다. "그녀를 만나려는 거라면 직접 방문을 해야 할 걸세. 요즘은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 있거든." "아아, 그렇군요." 확실히 함부로 나돌아다녔다가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우현은 베슬렌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계단을 올라 긴 복도를 걷던 베슬렌이 문득 멈춰섰다. 주변의 어느 방보다 호화로운 문을 본 우현은 베슬렌이 레사티나에게 품고 있는 마음의 정도를 짐작하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겠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한 베슬렌이 문을 열었다. 이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레사티나가 스커트를 종아리까지 걷어붙이고 달려오...는? "우현!" 우현은 눈을 휘둥그래 떴다. 구불구불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도도하니 아름다운 얼굴도, 미소를 머금고 가늘어진 장밋빛 입술도 머리 속에 남아있는 그대로건만 느릿느릿한 움직임은 그의 예상에 없던 것이었다. 게다가. "레, 레사티나? 설마...?" 불룩 튀어나온 배라니. 우현의 시선이 어디에 가있는지 깨달은 레사티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야, 정말! 기껏 일어나기까지 했는데. 몸이 무거워져서 서있는 것조차 힘들단 말이야. 얼른 와서 부축하지 못해?" 정신을 차린 우현은 얼른 다가가 레사티나를 붙들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베슬렌이 다가가 그녀의 가무잡잡한 팔을 붙들고 의자로 이끌었다. "얌전히 앉아있으라고 했잖아." "나한테 명령하지 말라고 했죠? 뭐하고 서있어? 얼른 이리 와서 앉아." 베슬렌은 대하는 목소리에 서있던 날은 우현을 대하는 순간 봄날 눈 녹듯 누그러졌다. 우현은 베슬렌의 미간이 구겨지는 것을 보며 난감해지는 것을 느꼈다. 레사티나가 팔을 내밀고 졸랐다. "이리 오라니까." "어...응." 우현이 다가가자 레사티나는 가늘가늘한 팔을 뻗어 그를 꼭 끌어안았다. 고급스러운 향내와 실크의 냄새에 순간 당황했던 우현은 구불구불 흩어진 머리카락에 안도했다. "레사티나..." 지고이네르다.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팔에 힘을 주었다. 레사티나가 웃었다. "어리광 부리기는. 좀 보자. 머리 색깔 근사하게 바꿨구나." "레사티나는 이게 뭐야. 배만 볼록이지 엄청 말랐잖아." 그 말을 들은 레사티나는 묘하게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배를 쓸었다. 가슴 아래에서 조여지는 넉넉한 드레스도 그 배를 감추지는 못했다. "입덧이 심해서 음식 냄새만 맡아도 괴로워." "아이를 위해서라도 먹어야 한다고 그랬잖아." "닦달은 그만 하라고 했죠!" 베슬렌을 향하는 목소리에 또다시 날이 섰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어째서 우현을 끌어다가 다시 팔 안에 품는 것일까. 불룩한 배 덕분에 가슴에 닿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린 우현은 연신 베슬렌을 곁눈질했다. 부리부리한 안광이 희번득거리고 있었다. '보지 말걸 그랬다.' 하녀가 티 세트를 날라와 티 타임이 시작되었지만 레사티나의 신경질은 여전했다. 유독 베슬렌에게만 짜증을 부리니, 성격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 그가 가만히 참고 앉아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먹기 싫다고 했잖아요!" "입에 넣지도 않고 그런 소리 하지 마. 일단 먹으라고." "다 토하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고서 하는 소리인가요? 안 먹는다고 했어요!" 우현은 이어지는 싸움을 묵묵히 들으며 과자를 씹었다. 옅은 달콤함이 꽤나 맛있는 과자였는데 레사티나는 입에 대지도 못하고 있었다. 베슬렌이 권하면 권할수록 얼굴에 짜증이 도는 것을 보아하니 역효과건만,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굳건한 귀족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숨을 쉰 우현은 베슬렌과 레사티나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과자 접시를 잡아채며 물었다. "레사티나, 단 것 좋아하지 않았어?" "지금은 싫어. 구역질이 난다고. 뭐야, 너도 억지로 입에 처넣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 즉시 네 옷에다가 다 뱉어줄 거야." '너도'라. 우현은 베슬렌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노란 눈동자가 은근히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걱정이 되어도 그렇지.'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억지만큼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우현은 레사티나의 앞으로 과자 접시를 밀어주며 말했다. "삼키지 않아도 돼. 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냄새가 싫은 거면 코를 막아도 되잖아." 레사티나는 머뭇머뭇 우현과 접시를 번갈아 보았다. 우현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재촉했다. "얼른." 쓴 약을 한 동이 들이키라 한들 이보다 더 싫어할 수 있으랴, 라는 식의 표정을 지은 레사티나는 코를 막은 후 손가락 끝으로 과자를 집어 입에 던져넣었다. 얼굴이 금세 구겨졌지만 당장 뱉어내지 않는 것을 보니 그럭저럭 참을만은 한 모양이었다. 베슬렌이 당겨앉으며 물었다. "먹지 않고 물고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냐?" "그게... 「탄수화물」 아니지, 곡물로 만든 것은 타액만으로도 소화가 되거든요. 그냥 물고만 있는 것으로도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래도 싫어." 어느새 뱉어냈는지 레사티나가 부루퉁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로 싫어하는 표정을 보고 미안해진 우현은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 "혹시 먹고 싶은 것은 없어? 임신하면 먹고 싶어지는 게 한 둘 정도는 있다고 들었는데." 우현은 이전에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우현을 가졌을 때 하도 입덧이 심해 죽도 못 넘길 지경이었는데 외할머니가 오셔서 라면을 끓여주셨다고 한다. 그랬더니 한 냄비 다 비우고, 그것도 모자라 남은 임신 기간 내내 라면으로 살았다던가. 그는 덧붙였다. "옥수수죽 같은 것도 좋으니까 뭐든 말해." "그런 빈민가에서나 먹는 음식을..." 뭐라뭐라 떠드는 베슬렌은 무시. 레사티나의 까만 눈동자가 강아지처럼 변했다. 눈썹 끝을 축 늘어뜨린 그녀는 우현을 보며 머뭇머뭇 말했다. "...보리빵. 그게 먹고싶어." "보리빵?" "응. 왜, 있잖아. 다들 함께 돌아다닐 때 먹던, 돌에다가 구운 거. 내내 먹고싶었는데 다들 비웃을 것 같아서..." 베슬렌을 보는 우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중한 누이가 먹고 싶은 음식도 제대로 말하지 못할 여건을 만들다니.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지은 죄가 있는 베슬렌이었다. 우현은 소리를 딱딱 끊으며 재료를 불렀다. "보릿가루랑 물, 그리고 얇고 넓적한 돌을 준비해 주세요. 지금 당장." 할 말은 무지하게 많았지만 지금은 이게 먼저였다. 뜨겁게 달궈진 돌 위에서는 이스트를 넣지 않아 제대로 피지 않은 보리 반죽이 익어가고 있었다. 우현은 마구잡이로 뻗어나오는 손을 말리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한 마디 할 뿐. "뜨거워." "핫, 뜨으..." "뜨겁댔잖아. 익걸랑 먹어, 레사티나." 충고고 뭐고 들릴 리가 없다. 걸신들린 사람 마냥 빵을 주워먹던 레사티나는 뜨거운 돌에 손을 데고도 해죽 웃었다. "맛있다." "거기 무화과랑 건포도 든 것도 좀 먹어." "으응." 가을의 색채가 슬슬 드러나는 베슬렌 저택의 정원. 군고구마 구워 먹으면 딱 좋을 모닥불이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선 두 귀족 나리께서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남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슬렌이 말했다. "그게 그렇게 맛있나, 레사티나?" "말 시키지 말아요." 톡 쏘아대는 말에는 그러나 아까와 같은 퉁명스러움은 없었다. 한참 후에야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일어난 레사티나는 우현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내일도 부탁해." 그리하여 우현, 출근 결정되다. 우현의 팔에 기댄 레사티나는 조심조심 걸어 계단을 올라갔다. 지나가다 마주친 하인들이 미심쩍은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지만, 우현이 그들을 향해 쏘는 듯한 시선을 되돌리자 너나 할 것 없이 찔끔하며 분분히 흩어졌다. "졸립다." "그래? 그럼 올라가서 바로 자. 먹은 게 죄 살로 가게." "그런 악담을." 킥킥거리고 웃은 레사티나는 그러나 정말로 졸렸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눈을 감았다. "머리 좀 쓰다듬어줄래?" 길고 구불구불한 검은머리. 우현은 장난치듯 그것을 손가락에 감았다. 지독한 그리움이 밀려들어 코끝이 찡했다. 레사티나는 잠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현? 내일도 올 거지?" "응." "모레도 오지?" "여기에 머무는 내내 올게. 됐지?" "으응..." 몸이 불편하면 약해진다더니 어리광을 부리던 레사티나는 이내 잠이 들었다. 그녀의 숨을 확인한 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베슬렌을 보았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선이 짙은 눈매는 그로서는 보기 드문 단호함을 품고 있었다. 베슬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섰다. 또다시 이모 군은 나와주지도 않고; 레사티나의 입덧은 우현의 잦은 외출을 위한 복선(?)이었습니다아 ^^; 입덧의 라면 이야기는 반 정도는 진실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막내를 가지셨을 때 삼시 세끼 죽어라 라면만 드셨다지요. 그것도 장수면이라는 제품 하나만 죽어라고. 둘째 때에는 고기만 줄창 드셨다나요. 그나마 두 녀석은 제대로 된 음식이지만 첫째인 저 때에는 콜라, 사이다와 수박만 가지고 사셨답니다. 제가 제대로 태어난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6장 운하의 도시 -7- 서재의 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베슬렌이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은 우현은 경직한 얼굴을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를 흘긋 본 카이엔은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화가 단단히 났구만.' 그때 우현의 음성이 울렸다. "건방지다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전(前) 아이겐튼 자작님과 같은 행동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레사티나가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 정도는 마련해 주세요. 개밥이든 돼지가 먹는 꿀꿀이죽이든 임산부가 먹고 싶다면 먹여야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을, 먹고 싶다고 말도 못하도록 되어 버렸다니. 도대체 이 저택의 사람들은 레사티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아무리 지고이네르라고 해도 주인의 아이까지 가진 몸인데!" 우현은 레사티나를 부축하는 동안 마주쳤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레사티나에 대한 걱정이라든가 하는 눈빛을 담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속에서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다. "아니면 귀족 나리의 총애란 이 정도였던 겁니까?" "말이 지나치군. 지고이네르의 주제를 지켜라." "지고이네르 주제에 한 말씀 더 올리자면, 저는 인간이 만든 룰보다 레사티나가 더 소중할 뿐입니다." 순간 서재에 차가운 정적이 감돌았다. 카이엔조차 당황하여 우현을 바라보았다. 베슬렌이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 그 말은 무슨 의미로 한 것인가? 인간이 만든 룰이라니." 자칫 잘못하면 상당한 의미로 해석될 말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우현은 아차 싶었다. 이곳은 엄격한 신분제의 사회. 신이 인정한 권리인 신분제를 부정하는 것은 반역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성 모독까지 가능한 중죄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는 신분을 따로 정하지 않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 제게 있어 신분에 따른 차등은 레사티나 개인의 행복보다 못한 것일 뿐이지요." 지고이네르인 체 은근슬쩍 우회하여 한 말이었지만 100%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전 세상에서의 인간은 - 재산과 권력에 따른 힘의 차이는 어떨지 몰라도 - 기본적으로 평등했다. 우현은 베슬렌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맞받아쳤다. "레사티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나조차 알지 못했던 일이다. 이제 알았으니 그 일에 대해서는 내가 처리하지." 베슬렌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우현의 말에 담긴 심각성을 넘어가 주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우현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마디 덧붙였다. "먼저 베슬렌 님의 태도를 생각해 주세요. 옥수수죽은 빈민가에서나 먹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시니 레사티나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이겠지요. 그나마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랬다. 멜도바 영지에서 지내던 때, 그야말로 피죽 한 그릇 얻어먹지를 못해 비쩍 마른 아이를 본 적도 있었다. 탄틴은 또 어떠한가. 도둑질을 하지 않고는 먹을 것을 구할 방법이 없었던, 그래서 손이 잘릴 뻔한 위험에 처했던 열 두 살의 어린아이. 아이겐튼 저택에서 지내는 지금도 먹을 것만 보면 환장을 하고 달려들어 배탈이 나도록 먹어대는 탄틴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답답함이 머리끝까지 솟구친 그는 아무렇게나 내뱉고 말았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하찮게 여기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고백에 아무 이유 없이 그런 행동을 했을 사람은 아니라 알고 있다던, 지금의 우현을 마음에 담았다던 이스드. 어쩌면 지금쯤 화가 잔뜩 나있을 그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카이엔이 갇힌 지고이네르의 명단을 입수하려 동분서주하는 내내 우현은 레사티나를 방문하여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음식이라고 해야 허술한 보리빵이나 구운 감자 정도였지만 그녀는 기가 막힐 정도로 정도로 식탐을 하고 있었다. "정신의 문제였던 것 아냐?" 모닥불을 들쑤시던 우현이 지나가듯 물었다. 입가에 검댕을 잔뜩 묻힌 채 뜨거운 감자 껍질을 마구 벗기던 레사티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이그, 좀 얌전히 먹으라고. 베슬렌 님이 정떨어진다고 할라." 우현은 레사티나의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투덜거렸다. 배시시 웃은 레사티나는 감자를 한 입 베어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신의 문제라는 게 무슨 의미야?" "여기서는 내내 혼자잖아. 불안해서 밥을 못 먹은 게 아닌가 하고." "뭐, 그럴지도. 감자 하나 더 줘." 레사티나는 괜한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대답했다. 우현은 후후 불어 식힌 감자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렇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혼자가 아니잖아. 베슬렌 님은 레사티나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던데? 신경질 부려도 다 받아주고. 먹으라고 닦달했던 것도 걱정되서 그런 거였잖아?" "신경질이야 받을만하니까 부리는 거야. 내가 임신한 걸 누구 탓이라고 생각해?" "거야..." 여자들이 아이를 낳을 때에 남편 탓을 한다더니 딱 그 짝인 모양이었다. "나도 다 생각하고 있어. 그 남자는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옆에 두고 임신까지 시킬 정도로 무른 사람이 아냐. 게다가 이 미천한 평민의 성질을 받아줄만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 그리고 뼛속까지 지고이네르인 레사티나는 마음에도 없는 남자의 집에 멸시를 당하면서까지 붙어있을 여자가 아니었다. 우현은 빙긋 웃었다. 그런 그를 레사티나의 미심쩍은 시선이 훑었다. "왜? 내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어?" "불어." "어, 어어?" 난데없이 뭘 불란 말인가. 레사티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를 할 게 있지 않아? 예를 들어 여자라든가." "무슨 소리야, 그게?" 우현은 은근슬쩍 레사티나를 외면했지만 그것에서 오히려 확신을 얻은 그녀는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말을 이었다. "하나, 너는 나랑 있는 내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 둘, 내가 베슬렌이랑 키스하는 것을 보고서도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눈빛이 깊어져. 그리고 결정적인 셋." 레사티나가 웃었다. 우현은 오한을 느꼈다. "베슬렌에게 그랬다면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하찮게 여기면 안 되는 거라고. 그런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할 정도로 자랐다는 건 역시 「그것」밖에 없지." "그, 그것이라니?" "빼기는. 당장 말하지 못해?" 까만 눈동자를 고양이처럼 빛내며 달라붙는 레사티나를 우현이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얼굴에 맑은 홍조를 띄운 그는 하늘을 한 번, 모닥불을 한 번, 돌 위에서 잘 익어가는 빵을 한 번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역시, 라고 중얼거린 레사티나는 우현에게 다가앉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흥미진진」이라는 글자를 읽어낸 우현은 시선을 빗기며 중얼거렸다.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냐. 하지만 나한테는 과분할 정도의 미인에 아는 것도 많고, 성격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한테는 상냥하고, 능력도 있고..." "죽음으로 염장이다, 너." "말하라고 해서 한 거잖아. 그리고 임산부가 '죽음으로'가 뭐야? 태교에 신경 좀 쓰랬지?" "태교는 거울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해." 뜨끈뜨끈한 빵을 집어 지익 물어뜯은 레사티나는 입을 우물거리며 우현의 말을 되새겼다. 성질나게 미인. 머리 좋음. 성격이야 어쨌든 우현에게 잘한다니 됐다. 그런데. "능력? 뭐하는 여잔데?" "...나 간다." "뭐? 우현!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가버리면 어떻게 해?" 우현은 레사티나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황급히 말에 올랐다. 뒤뚱뒤뚱 걸어오는 레사티나가 보였지만 지금 잡히면 끝장이었다. 그는 먼지 나게 말을 달려 저택을 벗어났다. 그녀가 무어라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우현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여자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하냐?" 게다가 신관. 어쩐지 암담한 상대라는 생각은 단지 그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하스티아의 수도 하샤라는 거대한 운하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 덕분에 하샤라 어디에서나 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말을 느긋하게 걸리던 우현은 골목 너머를 흘긋 바라보았다. 수면에 인 물결이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말을 틀어 운하로 향했다. 운하는 대단히 넓었다. 프러시안 블루의 어두운 물 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곤돌라가 떠있었다. 색색의 곤돌라들이 사람과 짐을 실어나르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 그것을 구경하는지 아니면 물살에 생각을 띄워보내는지, 운하 주변에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하릴없이 서있었다. 마침 생각할 거리가 있던 우현은 고삐를 나무에 묶고 자신은 길의 구획을 나누는 담 위에 걸터앉았다. 여자가 아니다. 그것으로 모자라 색을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신관. 게다가 뭐 하나 빠지는 구석 없이 잘나기만 한 사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우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역시 화가 나있을까?" 우현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 목소리가 그의 안에서 되풀이되었다. - 조심하라 일렀는데 들어먹지를 않는구나. 그리도 그들이... 이스드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이스드가 남겼던 붉은 울혈은 서서히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쇄골에 손가락을 얹은 우현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뭐 하는 짓이람, 이게." 우현은 고개를 들었다.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가 우아한 걸음으로 운하 근처를 거닐고 있었다. 곤돌라에서 내린 짐을 등에 진 장정들이 급한 걸음으로 상점에 들어갔다. 으슥하니 그늘진 곳에서는 허름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산책 중이던 남녀가 동전을 뿌리자 왁 하고 달려든 아이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었다. 여자가 그것을 보고 웃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젠 체했다. 운하의 도시, 물빛과 하늘빛이 만나 이루어진 풍부한 아름다움과 찬란함. 그러나 우현은 빛이 강할 수록 그늘은 더욱 검게 드리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도 저기도 다르지 않은 점은 있는 거구나." 하얀 옷자락을 나부끼는 몇몇이 우현의 시선을 붙잡았다가 흩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흰옷을 찾고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피식 자조하고 말았다. "그만 돌아갈까." 우현이 맥없이 중얼거리며 일어날 때였다. 그의 코끝을 살풋 스치고 지나가는 향기가 있었다. 먼 곳에서부터 풍겨오는 듯 아득한 향기는 그러나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다리 위에서 흔들리는 잿빛의 끝자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떻게 단번에 알 수 있었을까. 돌다리의 색깔에 녹아들듯 우중충한 회색은 눈에 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익숙한 흰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름답게 물결치던 남빛의 긴 머리카락도 후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등을 돌리고 있는 그는 우현이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사람이 분명했다. "이스드!" 이름을 부른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은 망토의 끝자락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돌아보는 얼굴은 대리석처럼 냉담한 흰색. 그것을 보자 다른 것은 느낄 수도 없었다. 우현은 내내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했다. "미안, 정말로 미안해요! 걱정을 끼칠 생각은 없었어요. 단지 나는..." "우현? 다 좋은데 말이지, 사과의 말도 상황을 봐가면서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차가운 음색에 슬핏 묻어나는 웃음기가 우현의 고개를 잡아끌었다. 얼굴을 든 그는 남빛 눈매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스드를 볼 수 있었다. 그것에 우현의 표정이 환해지려는 찰나, 이스드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에?" 설화석고처럼 새하얀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우현은 구경이라도 난 듯 - 사실 구경이 난 것은 맞지만 - 몰려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운하, 냅다 소리를 질러버린 자신, 그리고. 우현은 자신이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지를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손은 이스드의 팔과 망토를 동시에 붙잡고 다른 쪽 손은 다리의 난간을 짚고 있다. 거의 필연적인 전개로 이스드는 그의 팔안에 감싸여 있었으며, 두 사람의 몸은 정신이 없었다는 말로는 변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었다. "이, 이건... 이건..." "덮치는 자세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군." 말을 차마 잇지 못하는 우현 대신 이스드가 중얼거렸다. 우현의 얼굴이 퍼엉 소리가 날 정도로 붉어졌다. 귀에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그 붉음을 더욱 재촉하여, 이스드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우, 웃지 말아요." 얼른 몸을 뗀 우현이 말했지만 이스드의 웃음은 이어질 뿐이었다. 나직하니 계속되는 쿡쿡거림이 대단히 기분 좋은 듯 느껴져 안도하는 우현이었지만 부끄러움은 별개다. "그만 웃으라니까요, 정말!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너는 나만 보면 웃지 말라고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웃게 되는 때도 있지 않을까? 갑작스레 덮치는 것보다야 흔한 경우로." 우현 패. "정말 성격 좋군요." "깨달음이 늦군." 우현 2패. 얼굴을 잔뜩 붉힌 채 파르르 하는 우현의 소년다운 팔을 덥썩 붙잡은 이스드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짓눌려 길을 비킨 사람들 사이로 유유자적하게 걸어가는 이스드를 보며 「마이 페이스」 내지는 「고잉 마이 웨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는 없으리라 생각하는 우현, 스무 살의 가을이었다. 파일 번호로 어느새 50 번째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쩐지 숨이 차네요 ^^;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6장 운하의 도시 -8- "아, 잠깐만요. 저기에 말을 두고 왔어요." 우현은 잡힌 채인 팔을 끌어 방향을 틀었다. 밤색의 윤기 흐르는 고개를 숙여 풀을 우적우적 뜯고 있던 말은 주인을 알아보고는 반가운 듯 투레질을 했다. 상아색의 갈기를 슥슥 쓰다듬어준 우현은 이스드를 흘금 보았다. 내내 그를 보고있던 이스드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고 물었다. "왜 그러지?" "그... 화는 풀렸나요?" "그렇게 적극적인 사과를 듣고서도 계속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남빛 눈동자에 떠오른 짓궂음을 본 우현은 낮게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그런 것은 좀 잊어요." "왜 잊어야 하지? 매우 멋진 사과였는데. 평생 길이 간직할 즐거운 기억이야." "그러니까..."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쉰 우현은 다음 순간 이스드의 음성에 여느 때보다 몇 배는 짙은 장난기가 서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말하는 투 역시 어딘지 즐거워 보인다. 검은 눈동자와 마주친 남빛이 웃음을 띠고 휘어졌다. 하얀 손가락이 우현을 향해 내밀어졌다. "보고 싶었다." 남자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손가락이 우현의 볼에 닿았다. 한동안 머물며 가볍게 움직이던 손가락은 곧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미끄러져 우현의 목덜미를 스치고 떨어졌다. 아주 사소한, 그러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허용하지 않을 접촉들. 우현은 괜스레 말의 갈기만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스드 역시 오늘을 대단히 기뻐하고 있는 거라고, 며칠 보지 못한 동안 내내 조바심을 내고 있던 사람은 우현만이 아니라고. "오늘 일정은 어때요? 아직도 할 일이 남았나요?" "아니. 이제 다 끝났다. 저녁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너는 어떻지?" "나야 뭐 남아도는 게 시간이죠." "그럼..." 어미를 미묘하게 끈 이스드는 우현에게 한 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사락 하는 소리와 함께 향기가 풍겼다. 적당히 달콤하고 미묘하게 서늘한, 이스드 특유의 향기가. "함께 갈텐가?" 마주 닿은 손가락은 조금 서늘했다. 끼익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노가 움직이면 배는 가벼운 흔들림을 남기고 앞으로 나아간다. 뱃전에 기대어 앉은 우현은 주변의 경치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 은은한 주황색의 빛이 섞인 건물들은 오히려 정교한 예술품에 가까웠으며, 그것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풍경은 어딘지 동화적인 색채가 강했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곤돌라가 아치형의 우아한 다리 밑을 지났다. 서늘하게 드리워진 그늘에 적응하지 못해 눈을 깜빡거리던 우현은 다리 밑에 쭈그리고 모여 앉은 한 무리의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지저분하니 허름한 옷 아래로 비쩍 마른 팔다리를 가진 아이들이었다. 아마 탄틴도 저런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는 거지?" 우현은 이스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렇게나 앉아있는 우현과는 달리 쓸데없을 정도로 곧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앉아있으면 불편하지 않나요?" "버릇이 되어서 오히려 편하다. 그것보다 대답." "별로...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어요." 말하자면 탄틴은 이스드가 화를 내게 만든 계기 같은 것이었다. 우현은 간신히 그를 만난 지금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스드는 조금 미심쩍은 듯 '흐음'하는 콧소리를 내며 우현을 보았다. 우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스드가 옆에 있으면 다른 생각을 하기도 힘든 걸요." 우현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운하의 잔물결 하나하나가 반사해내는 햇살은 따사로운 향수를 느끼게 했다. 그것 때문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옆에 있기 때문일까. 아무리 분위기 무마용이라지만 이런 말을 꺼낼 수 있는 것은 분명 물결과 햇살이 만들어낸 분위기에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현은 손가락 끝으로 물을 휘젓는 체하며 쑥스러운 얼굴을 감췄다. 그런 그를 흘금거리는 시선이 있었다. 이스드는 사공을 향해 무시무시할 정도로 얼어붙은 시선을 건넸다. 뱃전에 몸을 기댄 채 수면을 바라보는 우현은 어딘지 나른해 보였다. 평상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인지라 지금의 나른함은 다른 사람의 몇 배는 몽환적이었다. 오후의 햇살을 받은 밀빛 피부는 황금빛의 신비스러운 색채를 자아내었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강한 음영을 받아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검은 속눈썹이 천천히 깜빡거린다. 품은 생각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새까만 눈동자가 미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스드? 왜 그렇게 보고 있어요?" 이스드를 향한 순간 나른하기만 하던 얼굴이 생기를 띠고 움직였다. 표정없던 눈동자가 이스드의 모습을 담았다. 다물려 있던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여 미소를 그렸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느낌은 분명 주관적인 마음에 기인하는 것이 분명하겠지만 자신의 마음에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이스드였다. "어라? 이스드?" 뱃전에 얹힌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친 이스드는 느린 움직임으로 우현에게 다가갔다. 배가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그의 귓전을 스쳐 지나갔다. 사공의 몸이 크게 경직되는 것이 보였다. 이스드는 그 어느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우현의 입술을 가볍게 훔쳤다. "으아아앗!"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곤돌라가 뒤집혔다. 너무나 당연한 순서로 운하에 곤두박질친 우현은 마찬가지로 물에 빠진 이스드를 향해 외쳤다. "도대체 뭐하는 겁니까, 지금! 사, 사공도 있는데..." 기세 좋게 시작한 목소리는 그러나 뒤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수심이 깊지 않은 곳에 있던 지라, 물을 흠뻑 뒤집어쓴 채 주저앉은 이스드는 우아한 몸짓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했다." "내가 못 살아아아!" 먼저 몸을 일으킨 이스드는 머리를 움켜쥐고 절규하는 우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노려보는 시선에 질린 사공이 곤돌라를 끌고 허둥지둥 도망을 가거나 말거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며 쳐다보거나 말거나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이 모습이라니. 우현은 그의 성장과정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싶어졌다. "어서." 이스드는 우현의 물끄럼한 시선에도 내민 손을 치우지 않았다. 그것을 붙들고 일어선 우현은 철벅철벅 소리를 내며 운하에서 걸어나왔다. 얼굴을 찡그리고 싶은, 소리를 내어 웃고 싶은 미묘한 감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다녀왔습니다." 아이겐튼 저택에 돌아온 우현은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 음성을 들었는지 서재에서 얼굴을 내민 카이엔이 그를 향해 손짓을 했다. "이리 좀 들어와, 우현." 카아엔은 평소와 다름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따라들어간 우현은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명단인가요?" "그래." 우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동작으로 그것을 집어들었지만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마음은 급한 속도로 명단을 훑어내리고 있었지만 눈은 글자들을 느리게 더듬거리고 있었다.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 첫 페이지를 본 카이엔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알만한 이름은 없었다. 탄틴의 어머니 역시 없더군." 순간 명단이 작은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우현은 잔뜩 굳은 얼굴로 카이엔을 보았다. "그래. 라벤다로 이송되었다." 반쯤은 실망스러운, 나머지 반쯤은 예측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우현은 의자 위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쥐었다. 심호흡이 몇 번 서재 안에 울렸다. 그의 다소는 덜 마른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던 카이엔은 곧 어둡게 자조하며 주먹을 쥐었다. "...쉬어라." 다음날 아침, 우현은 언제나의 일과대로 레사티나를 만나기 위해 마굿간에 갔다. 그런데 그곳에 선객이 있었다. "카이엔? 아침 일찍 나갔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요?" "지금 막 돌아오는 길이야. 레사티나에게 가는 건가?" "네." 우현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말에 안장을 얹었다. 등자를 밟고 말에 올라타는 움직임이 날렵하다. 펄럭거리다가 내려앉는 옷자락이 마치 나비의 날개 같아서, 카이엔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서고 말았다. "카이엔?" "아..." 카이엔은 어느새 움켜쥐고 만 우현의 옷자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내내 가지고 싶어했던 것을 태어날 때부터 지닌 자에 대한 솔직한 부러움이다.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할 생각도, 표정에 드러낼 생각도 없는 카이엔이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웃으며 손을 떼었다. "함께 가지. 나 역시 베슬렌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거든." 카이엔은 씁쓸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좋은 거겠지.' 진솔한 우애를 비추는 검은 눈동자. 그것에 두근거리는 깨끗한 마음. 더럽혀지지 않아 소년 같은 감정이라는 것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분 좋은 것이다. 카이엔은 앞서 가는 우현의 뒷모습을 보며 이번에는 진짜의 미소를 지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이 가을의 쓸쓸함을 고즈넉하게 바꿔주었다. 레사티나는 며칠 사이 잘 먹어 윤기가 오른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운 채 우현의 앞에 과자며 케이크를 밀어다 주었다. "많이 먹어. 모자라면 또 가져오라고 시킬 테니까." 베슬렌은 뒷전이다 못해 안중에도 없었다. 우현과 카이엔은 어딘지 심기가 불편해보이는 베슬렌을 보며 난처하게 웃었다. 베슬렌은 빈 찻잔을 내밀며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레사티나. 나도 한 잔 더." "거기에 포트가 있으니 직접 따라 드셔요. 자, 우현? 아아, 해야지." "레, 레사티나. 나도 손이 있는데..." "아아, 해. 얼른." 이전부터 우현은 여자들의 억지에 약했다. 마지 못해 입을 벌려 레사티나가 내밀어준 케이크를 삼킨 그는 누가 봐도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분위기를 전환하려 했다. "아, 하하하...하하... 그, 그러고 보니 카이엔? 베슬렌 님에게 물을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참. 깜빡 잊을 뻔했군." 레사티나와 베슬렌을 번갈아보던 카이엔이 일순 진지한 표정을 띄웠다. 내내 베슬렌을 곯려먹던 레사티나마저 그를 바라볼 정도였다. "베슬렌 경은 얼마 전 에피서스에서 있던 전투에서 참모를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만, 혹시 그때 신관이 종군했었나요?" 우현의 눈동자가 휘둥그래졌다. 그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카이엔을, 그리고 베슬렌을 바라보았다. 베슬렌의 대답이 이어졌다. "무슨 의도로 물으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겐튼 자작님, 당시 에피서스에 신관은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레사티나의 몸에 상처 따위가 남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레사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어루만졌다. 에피서스에서 있었던 마지막 기습 때 입었던 상흔이 갈색으로 남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상처를 입은 사람은 레사티나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서울 정도를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던 우현의 모습을 되새겼다. "우현, 너는..." 고개를 돌린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채 카이엔을 응시하는 우현을 볼 수 있었다. 레사티나의 부름에 곧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린 그는 그러나 평소와 같은 편안한 미소는 지어주지 않았다. 집 근처에 재패니즈 레스토랑이 하나 생겼습니다. 가게 이름은 나루토. ...여우가 서빙을 하는 가게일까요. 동생은 닌자가 분신술을 써가며 서빙하는 게 아니냐고 묻습니다만.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7장 여정 -1- 구불구불 흘러내린 스트로베리 블론드의 찬연한 아름다움은 차마 마주 보기도 두려울 정도로 눈부시며, 가장 화창한 날의 하늘을 그대로 옮겨 담은 듯 고운 빛깔의 눈동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다. 잡티는커녕 먼지 한 톨 범접하지 못할 새하얀 피부는 갓 내린 눈. 왕실 정원사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꽃보다도 고운 뺨은 장밋빛이며, 가련하게 다물어진 입술은 꽃물을 떨군 듯 붉기만 하다. 하스티아 왕가의 금지옥엽 티스베 공주에 관한 이야기였다. "며칠 전에 우연히 봤다는 거 아냐. 진짜 눈이 돌아갈 지경으로 아름다운 분이시더라고. 어때? 너는 아이겐튼 자작님의 종자니까 티스베 공주님도 자주 봤겠지?" 밀짚색의 머리카락을 새집처럼 헝클어뜨린 소년 종자의 말에, 우현은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소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거 이상하다. 소문에는 티스베 공주님이 아이겐튼 자작님을 연모한다고..." "유타! 이 녀석, 또 어딜 가서 수다질을 하고 있는 게냐!" 소년, 유타는 목을 움츠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크, 주인님께서 부르시네. 있다가 보자!" 허겁지겁 뛰어가는 유타는 어느 기사의 종자였다. 그는 그 또래의 소년답게 하스티아 최고의 미소녀라는 티스베 공주의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카이엔과 공주와의 핑크빛 소문이었다. 카이엔 자신은 소문일 뿐이라고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글쎄. "소문만은 아닌...!" 누군가와 부딪힌 우현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안 봐도 훤했지만 그래도 일부러 부딪힌 이상 얼굴을 봐주는 것이 예의라는 놈일 터다. "잘 보고 다녀!" 아니나다를까, 익숙한 남자가 우현을 내려다 보며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뭐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 짝이라 생각하며 코웃음을 친 우현은 상대도 하기 싫다는 것을 온 얼굴로 나타내며 돌아섰다. 우현이 그 남자와 마주친 것은 지금으로부터 17일 전, 티스베 공주가 왕궁을 나선 바로 그 날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가락질을 하며 '너...너...'만 연발하는 남자와는 달리 우현은 그가 누구인지 기억을 하지 못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칼자루부터 움켜쥐며 고함을 쳤다. "마침 잘 만났다! 그때 내가 너 때문에..." "누구신지요?" 잊지 못하여 이를 득득 갈고 있는 상대의 첫 마디가 '뉘신지?'라니, 한껏 전의를 불태우던 남자로서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남자의 뒤로 우현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금실로 정교하게 수를 놓은 상의를 입은 고동색 머리카락의 청년이었다. "무슨 일이냐?" "에, 에파시오 자작님..." 에파시오 자작. 우현은 청년의 이름을 듣고서야 남자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앳된 얼굴에 미미한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고, 남자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에파시오 자작님, 이 놈입니다요! 그때 광장에서 자작님을 능멸했던 놈입니다!" 에파시오 자작의 눈썹이 실룩거리는 것을 본 우현은 변명을 해도 별 소용이 없겠구나 싶었다. 상대는 귀족.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상대할 방법은 전무. 그러나 이래저래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우현? 허어, 제레온?" "오랜만이군, 카이엔. 호위 기사를 수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이야."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의외의 상황에 눈만 데룩데룩 굴리는 남자와는 달리 우현은 안정을 되찾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카이엔은 짐짓 친근한 몸짓으로 우현의 어깨 위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소개하지. 이쪽은 우현. 내 종자로 수행하고는 있지만 내게는 친형제나 다름없는 아이야." "그렇다고는 해도 아랫사람의 교육은 제대로 시켜야 하는 법이네. 자네가 그리 감싸니 귀족을 능멸하고 다니지 않은가." 카이엔은 아무 말 없이 우현을 보았다. 이때다 싶은 우현은 두 자작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이전에 제가 구해온 탄틴이라는 혼혈 아이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카이엔 님? 저는 단지 저 사람이 그 아이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더 보지 못해 말렸을 뿐입니다. 그때 분명 에파시오 자작님을 모시는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저 역시 자작님을 모시고 있다고 대답했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신관님께서 나서주셔서 싸움을은 그것으로 끝이 났지요. 이것이 전부이니 어디가 능멸인지 알려주신다면 사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주인에게 이끌려가는 남자를 웃음으로 전송했다. 카이엔의 말에 의하면 저 에파시오 자작은 아랫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앞세웠다가 창피를 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하니 남자는 꽤나 곤욕을 치를 것이 확실했다. 생각에 잠겨있던 우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번 저래?" 카이엔과 위렌이 그곳에 서있었다. 우현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공주님의 말 상대는 무사히 마치신 건가요?" 우현의 장난스러운 말을 들은 카이엔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긴 한숨을 쉬었다. 티스베 공주, 왕이 가장 사랑한다는 이 소녀는 천혜의 미모와 끝이 없는 총애, 그리고 높은 신분의 세 가지 재료를 고루 섞으면 나올 수 있는 소녀의 전형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우현은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수두룩함에도 불구하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모로 따지자면 세계 제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는 그였다. 타인의 아름다움에 무감각해진 그에게 있어 티스베 공주 따위는 트럭으로 준다 해도 사양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면역 체계가 잡힌 것으로, 백신이 되어준 누군가가 안다면 대단히 흐뭇해 할 것이 틀림없는 일이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인기 있는 남자는 피곤할 뿐이지요." "지금쯤 잔뜩 기대에 차있을 오스버그 집사님을 실망시켜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자작님." 위렌이 한 말을 우현이 받았다. 그것에 더더욱 쳐진 카이엔의 어깨는 단지 위렌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잔인한 놈, 이라고 내심 중얼거린 위렌은 젊은 자작의 어깨를 기운 내라는 의미를 담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실례합니다만, 아이겐튼 자작님?" 사내들의 걸걸한 목소리 속에서 한 줄기 봄바람처럼 느껴지는 여성의 음성이 우현의 귓가에 스쳤다. 고개를 돌린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는 우아한 여성을 볼 수 있었다. 청록색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올린 그녀는 티스베 공주의 유모인 사비나였다. "공주님께서 함께 만찬을 즐기자 청하십니다." 소문은 소문만이 아님에, 단지 카이엔만 불쌍할 뿐이다. 가을의 바람이 소슬하게 불었다. 바람에 휘덕휘덕 흩날린 불길이 사람들의 얼굴에 어두운 일그러짐을 던졌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기사들은 불길이 비쳐 황금빛이 된 얼굴을 술로 더욱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앉아 무기며 갑옷을 손질하는 것은 종자들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둘러앉아 있었고 시종들은 한 쪽에 모여앉아 허겁지겁 수저를 움직여 늦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딘가에 끼여앉아있을 트루바두르(음유시인)가 노래 연습을 하고 있는지, 연습 특유의 무성의함이 엿보이는 음률 사이사이로 악기의 소리가 울렸다. 여인의 흐느낌마냥 서러운 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가늘가늘한 소리를 위태롭게 이어가고 있었다.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에 기대고 앉은 우현은 트루바두르가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악기는 라리나, 나무 등으로 둥글게 테를 만들고 짐승의 창자를 꼬아 만든 현을 단, 지고이네르가 특별히 사랑하는 악기였다.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포장마차가 무대로 바뀌면 에코는 라리나를 들고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 청승맞다 싶을 정도로 높은 라리나의 소리와 여성치고는 낮고 허스키한 에코의 목소리는 썩 잘 어울렸다. 그것을 생각하자 눈에 습기가 배어, 우현은 얼굴을 찡그렸다. '기집년처럼 질질 짜지 마. 누가 죽었어?' 에코라면, 그녀가 이끄는 무리라면 필시 무사할 것이다. 괄괄하고 대가 센 에코를 죽일 수 있는 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달래며 먼 하늘을 보았다. 석양이 진 저 편, 라벤다가 있다는 먼 서쪽을. 그런 우현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네요." "꼬장꼬장 꼿꼿한 녀석이니까. 남 앞에서 울 바에야 혀를 깨물겠지." 티스베와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카이엔과, 그런 그를 수행한 위렌이었다. 그들은 우현과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있었다.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낮이야 어쨌든 밤은 우울해지리라 생각했는데 어찌어찌 잘 참고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또 그것 나름대로 섭섭했지만 사내 자식으로 태어나서 금세 약해지고 징징거려 아무에게나 매달린다면 그것 역시 짜증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나가던 종자 몇이 우현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그가 얼굴에 미소까지 띠며 인사를 받는 것을 본 위렌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저렇게 웃으면 안 될텐데. 안 그렇습니까, 카이엔 님?" 반은 농담 삼아 한 말에 카이엔의 얼굴이 험하게 구겨졌다. 우현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마 뜨거라 싶어 난처한 웃음을 지은 위렌은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이, 비실이 꼬마! 거기 혼자 앉아서 뭔 청승을 떨고 있는 거야?" "누가 꼬마라는 겁니까, 배 나온 곰 아저씨!" 안 그래도 그 즈음 나오기 시작한 배가 신경쓰이는 위렌이었다. 그는 우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그래도 비실이라는 말은 인정하는 모양이지?" "뚱띵보다는 비실이가 나으니까요." "내 어디가 뚱뚱하다는 거야! 이건 전부 고된 훈련으로 인한 성과인 근육이라고!" "훈련 두 번만 받았다가는 굴러다니겠군요?" 화난 척 푸르르 하는 위렌과 새침한 척 고개를 돌리는 우현을 본 카이엔은 짐짓 혀를 찼다. "내 보기에는 둘의 수준이 똑같은데, 뭘." "카이엔!" "자작님!" 동시에 터져나온 노성을 들은 카이엔이 시원스레 웃었다. 가을 저녁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일치단결하여 쀼루퉁한 척 카이엔을 노려보는 두 사람의 눈매 역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한가한 가을, 히쉬미른과의 국경선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날의 저녁이었다. 정식으로 임명된 호위 기사가 스물 다섯에 그들이 데리고 온 부하 기사가 대략 팔십 정도. 여기에 일반 병사가 이백 명이며 기사들을 위한 시종 오십 명이 붙었다. 각 기사들이 종자를 적어도 한 명 씩은 데리고 왔으니 이 또한 상당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의원, 예식을 위한 전례관, 공주의 개인 교사들과 시녀 등등. 이들이 티스베 공주의 라벤다 방문을 위한 일행이었다. 정신 나간 왕이 아니고서야 자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허락할 리 없는 인원 구성이다. 우현은 평원에 펼쳐진 갑주들을 보며 질린 한숨을 쉬었다. 번쩍거리는 것이 보기만 해도 더운 느낌이었다. "좀 많군." "어쩔 수 없지. 우리 쪽 인원도 유별나니까 말이야." 카이엔과 제레온 에파시오 자작의 대화였다. 어찌된 일인지 에파시오 자작을 수행한 종자는 예의 그 남자가 아닌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잘렸군.' 아마도 그래서 더욱 기를 쓰고 시비를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우현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신경을 껐다. "우현, 이리 와." 소년 종자와 더불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우현을 카이엔이 불렀다. 에파시오 자작이 은근히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모른 체 무시하고 카이엔에게 다가간 우현은 그가 가르키는 대로 고개를 돌렸다. "어때?" "뭔지는 모르겠지만 수가 상당하군요." "그렇지? 히쉬미른의 기사들이다. 우리 일행이 어지간히 거슬린 모양이야." 타국의 군대를 자국에 들이는 것이 미친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군주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성년식을 위해 라벤다로 가는 왕족의 일행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국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이렇게 군대를 보내서 감시하게 하는 거지." "그럼 오히려 이쪽이 위험하게 되는 것 아닌가요?" "그건 괜찮아. 라벤다의 보복이 두렵지 않은 나라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되나, 라고 중얼거린 우현은 옆얼굴에 따끔거릴 정도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기사 몇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그리 좋지만은 않은 느낌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위렌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겁니까?" "꼬마는 몰라도 돼. 고생은 우리 자작님이 하시는 거니까." "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우현과 연신 웃기만 하는 위렌,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는 카이엔까지. 오늘도 남의 시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세 사람이었다. 한 번 썼던 것은 한글 오류로 다 날리고(뭐가 손상된 파일이냐, 도대체!) 다시 쓰니 참... 허무하네요. 이번 장 역시 이스드는 아주 나중에서야 등장합니다. 놈이 어지간히 비싸게 굴어서...쿨럭.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7장 여정 -2- 은은하게 메아리치듯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 그녀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가끔 손을 뻗어 마구잡이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곤 했던가. 어린아이 취급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에코가 품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중한 것은 잃고난 후에야 그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다고 했던가. 함께 있을 때에도 충분히 소중했지만 지금의 마음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우현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구름으로 흐려진 잿빛 밤하늘에는 별빛 하나 달 한 조각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반듯이 누워 잠이 든 카이엔과 코까지 드렁드렁 곯아대는 위렌이 있었다. '꿈이었구나.' 마냥 즐겁기만 했던 과거를 꿈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잔인한 일이었다. 우현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다음날이 고되다는 것을 알고있었지만 안 그래도 얕았던 잠이 다시 찾아올 것 같지도 않고 등에 배긴 모래알도 성가시게 느껴져, 그는 결국 일어나 앉았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모닥불은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그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우현은 근처에 수북한 잔가지 몇 개를 집어 불 속에 던져넣었다. 순간 화르륵 일어난 불길이 탐욕스러운 기세로 나뭇가지를 먹어치웠다. 그 빛을 본 것인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기사단 쪽에서 절겅거리는 울림이 일었다. 히쉬미른의 국왕이 보낸 감시용 기사단이었다. '저런 사람들을 근처에 두고 잘도 자네.' 우현은 쓴웃음을 입가에 걸고 위렌을 흘금거렸다. 어딘지 불편한 기색으로 잠든 카이엔은 그렇다 쳐도 위렌은 너무나도 편안한 모습으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하기사 타국의 기사단과 보내는 첫 번째 밤에 '이제 불침번을 서지 않아도 되겠군'이라고 중얼거린 신경줄의 소유자이니 말 다한 것이겠지만. 하샤라를 떠나온 지 어느덧 이십 여 일 남짓. 라벤다까지는 앞으로 삼 개월도 더 걸린다고 한다. 우현은 모포로 몸을 둘둘 말고 앉았다. 싸늘한 밤에 홀로 깨어있다는 것은 내면에 숨겨진 그리움을 건드리는 느낌이었다. 에코, 티티, 지고이네르, 그리고. "역시 만나는 것은 어려울까나..." 우현의 말꼬리가 한숨을 담고 흐려졌다. 그 동안 잘도 마주쳤던 이스드였다. 목적지가 같았던 것도 있지만 인연은 인연인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꿈처럼 아름다운 외모에 신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짓궂은 행동, 이름을 불러주던 낮은 미성, 명백한 애정을 담고 다가오던 스킨십들. 이스드의 최종 목적지 역시 라벤다라고 했었다. 다른 때에는 불쑥불쑥 잘도 나타나던 그가 어째서 이렇게 안 보이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우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목적지만 같을 뿐 길은 수도 없이 많다. 오히려 이제껏 마주친 것이 기적에 다름 아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사막을 걷는 여행자의 눈앞에 오아시스가 솟아나는 것과 같이, 메마른 모래밭에서 한 떨기 장미가 꽃을 피우는 것과 같이, 생판 알지 못하는 타인끼리 만나 애정을 주고받는 것과 같이. 그래, 이미 서로를 좋아하게 되어버린 시점에서 기적이었던 것을. '보고 싶다.' 마음이란 참으로 미묘하다. 내내 억눌려있던 감정이 솟구치듯, 우현은 자신의 머리 속에 범람한 생각들을 가누지 못해 당황하고 말았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 단 하나의 바램을 담은 욕구가 그의 가슴에 폭풍을 만들었다. "하, 이런..." 그가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어지간히 빠진 모양이라고, 자조를 섞어. 인원이 인원인지라 퀴아네조차 섣불리 다가오지 못해, 우현은 육체적으로는 제법 편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할일이 없는 것 또한 고통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한가한 시간이면 카이엔과 위렌에게 이에라 르페이토 대륙에 관한 이것 저것을 배우곤 했는데, 그것은 그가 청했다기보다는 시간을 때우다 못한 두 기사님이 자청하여 나선 일이었다. 티스베 공주가 트루바두르의 노래에 심취한 어느 날의 저녁, 카이엔은 히쉬미른 다음으로 가게 될 나라인 아르세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르세니아 사람들은 피부의 색소가 특히 옅지. 여자들은 그 종잇장 같은 피부를 자랑으로 여겨서 외출을 할 때에는 반드시 모자과 베일을 쓴다고 하더군." "지고이네르와 나란히 서면 굉장하겠는데요?" "그렇겠지. 그러고 보니, 아르세니아인과 지고이네르의 피가 섞이면 너와 같은 피부가 나오지 않을까?" 카이엔의 말을 들은 우현은 조금 쓴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냥 노란 거에요." "뭐... 그렇다고 하지. 아르세니아의 영토는 상당한 규모다. 넓이로만 따지면 우리 하스티아를 능가할 정도야." 넓이로만, 이라. 카이엔의 말에서 미묘한 무엇을 집어낸 우현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현재 아르세니아는 왕위 계승 문제로 시끌시끌 하고 있지. 왕에게는 애첩 소생의 첫째 왕자와 정비 소생의 둘째 왕자가 있는데, 둘 모두 각각의 장단점이 있어서 누구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모양이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겉으로나마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요 근래에 왕이 급격히 쇠약해진 바람에 암투가 치열해져서 형제끼리 다투는 소리가 나라 밖까지 들리고 있지. 창피한 일이야." "에에... 그럼 그 나라는 지금 불안정한 것 아닌가요? 그런 나라를 가로질러 가도 괜찮은 겁니까?" 공주를 호위하는 일행이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가는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현의 말을 들은 카이엔은 손가락을 들어 땅바닥에 지도를 그리며 대답했다. "우리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야.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이것을 봐. 하스티아에서 히쉬미른을 거쳐 아르세니아로 들어가는 것 이외에 라벤다로 가는 길은 엘루이다 사막을 건너 루클루드 산맥을 타는 것뿐이야. 하스티아와 히쉬미른을 합한 것 만큼 넓은 사막을 건너 그 험한 산을 오르는 것보다야 이 편이 낫겠지." "흐음, 그런 거군요." 우현은 카이엔이 그린 지도를 바라보았다. 라벤다까지는 아직도 한참이 남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카이엔을 보았다. 길게 자란 앞머리에 가려져있던 까아만 눈동자가 드러나는 것을 본 카이엔은 가슴을 무엇에 찔리는 느낌을 받고 자조하고 말았다. "왜? 물어볼 것이라도 있는 건가?" "그게... 내내 궁금했던 것이 있었어요. 법황은, 저어, 약점 같은 것은 없나요?" 신뢰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지나치게 솔직하다. 카이엔은 어이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설득해서 안 되면 약점이라도 붙들고 협박할 생각으로 묻는 거냐?"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정곡을 찔린 모양이다. 카이엔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지고의 존재가 약점을 노출한다는 것은 차라리 죽여달라는 애원에 다름 아니겠지. 안 그래?" "아, 그런가요, 역시?" "질렸다. 도대체 어디 출신이기에 그렇게 막무가내인 거냐, 너는? 뭐... 약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거기까지 말한 카이엔은 우현을 곁눈질했다. 언제 쩔쩔매고 있었냐는 듯 눈까지 빛내며 경청하는 모습을 보니 어린아이가 따로 없다. 어린 소년만을 총애하는 변태 귀족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위험한 생각을 하며, 카이엔은 슬금슬금 말을 흘렸다. "약점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그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네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들은 이후에 실망을 하든 어쨌든 그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다." "카이엔, 길게 끌지 말고 얼른 좀 말해봐요." "성질 급한 것은 에코를 쏙 빼닮았네. 누가 마마 아니랄까봐 이렇게 애를 물들이고..." "카이엔!" 우현은 숫제 달려들 듯 상체를 내밀며 카이엔을 째려보았다. 내내 여유 부리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코앞까지 다가온 까만 눈동자에 놀란 카이엔은 얼른 시선을 먼 하늘로 비꼈다. "약점은 두 가지야. 첫째, 법황이 에다마트께서 그에게 내린 힘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 자비로우신 신은 자신이 내린 힘으로 인해 귀중한 목숨이 사라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니까. 두 번째는, 흠흠, 법황이 성적인 교합을 가지는 것. 그 두 가지 죄를 범하는 즉시 신이 법황에게 내린 힘은 사라지게 되지. 왜 약점이 못 되는 것인지 알겠어?" 약점이란 이용할 수 있을 때에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현은 잔뜩 부풀었던 기대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찌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치명적이기는 하네요. 이용할 방법이 없어서 문제지." 사실 법황의 약점을 알아봐야 소용없으리라는 것쯤은 우현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행동이 만용에 한없이 가깝다는 것도. 그가 고개를 푹 숙이자 머리카락이 길게 흘러내려 얼굴을 감추었다. 앳된 얼굴에 어둡게 드리워진 그늘이 그의 무력감을 말해주는 것 같아, 카이엔은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자줏빛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이 적막하다 못해 적적할 지경이었다. 뒤척거리다가 간신히 잠을 청한 우현은 어디선가 나는 흐느낌에 퍼뜩 눈을 떴다. '뭐, 뭐지?' 오밤중의 흐느낌, 그것도 조그만 크기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우현의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괘, 괜찮아, 괜찮아. 여기는 다른 세계라고. 귀신 같은 게 있을 리...' 그때였다. 잠시 끊어졌던 흐느낌이 더흑, 하며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더욱 절절하게 변했다. 퍼드득 놀라 사색이 된 우현은 모포를 꽉 움켜쥐고는 잠을 청하려 애썼다. 그러나 식은땀이 흐른 등골은 축축했으며 목덜미께는 섬뜩하니 차가운 입김이 닿는 느낌이 있었고, 잔뜩 긴장한 숨소리는 평소보다 크게... '잠깐, 숨소리?' 분명 흐느낌과 함께 '더흑'하는 숨소리가 났었다. 긴장을 탁 푼 우현은 허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흐느낌에 섞여 간간이 들려오는 목소리 - 그만, 이라든가 싫어 같은 - 를 들을 수 있었다. '나 바보 아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귀신 같은 게 나타날 리가 없잖아. 그러나 저러나 싫어, 라니?' 숨죽여 끅끅거리는 소리에 섞인 거친 숨소리는 보통의 스무 살이라면 금세 알아들을 수 있을 열기를 품고 있었지만 그는 우현, 포르노 비디오는커녕 텔레비전도 제대로 보지 않고 건전한 십대를 보낸 쑥맥이었다. 싫어, 라고 말하는 앳된 목소리에 '누군가가 종자를 괴롭히는 모양이다'라고 결론을 내린 그는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한반중의 초원은 어둑어둑했다. 어슴푸레 비치는 달빛과 별빛에 의지하여 주변을 둘러보던 우현은 모두들 곤히 잠든 중에 유난히도 방정맞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저건가.' 덩치가 제법 큰 것을 보니 기사인 모양이었다. 말려야 하나 가만히 있어야 하나 망설이던 우현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보이기 시작한 형체들이 이상야릇한 포즈로 엉켜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기사라고 추정되는 인물의 몸짓은 어떻게 보아도 '그것'. 우현은 순간 얼굴을 붉게 물들였지만 그 색깔은 곧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나, 남자?' 위에 있는 기사는 그렇다 쳐도 아래에서 신음하는 사람 역시 남자였다. 몇 번 인사를 건네어 얼굴을 익힌 종자 하나가 연신 흐느끼며 몸을 뒤틀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면 그렇다. 이 일행에서 여자라고는 티스베 공주와 그녀를 시중들기 위해 따라온 시녀들, 그리고 공주의 유모 사비나가 전부였다.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이 긴 여행길에 공주를 수행할 정도로 사랑받는 시녀를 억지로 도모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그래도, 그래도...' 자신 역시 누구누구와 더불어 비슷한 장면을 연출해낸 적이 있다는 사실 - 미수이기는 했지만 - 을 까맣게 잊어버린 우현은 컬쳐 쇼크로 그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말았다.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은 우현은 그 종자를 향해 슬금슬금 돌아가려는 눈을 억지로 되돌리며 고민에 빠졌다. 분명 소년은 싫다고, 그만 하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그건 강간이라는 이야기였다. 우현은 카이엔을 흘금 바라보았다. 아무리 친하다고는 해도 기본적인 인상이 성실하고 점잖은 영주님이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거북한 상대였다. '역시 이런 일은 능글이 아저씨 같은 위렌이...' 본인이 안다면 펄펄 뛰었을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우현은 아침 세수를 끝내고 돌아오는 위렌을 붙들고 한적한 곳으로 갔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카이엔이 두 사람을 부르려 했지만 한 호위 기사가 그를 붙들었다. "할 이야기가 있는데, 아이겐튼 자작." 며칠 동안 피해다녔던 인물을 재수 없게 맞닥뜨린 카이엔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는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기사의 얼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기사는 여유만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느물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7장 여정 -3- 자신이 보았던 것을 전부 이야기한 우현은 위렌을 올려다보며 그가 무어라고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위렌은 묘한 눈을 한 채 우현을 보더니 고개를 돌리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진짜 못 산다, 못 살아."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든다. 바보 취급하는 느낌에 조금 울컥 한 우현은 위렌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으억! 무슨 짓이야, 이게!" "도대체 내 이야기는 어느 귓등으로 들은 겁니까?" "다 들었다, 들었어. 그러니까 네 말은 간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깼는데 기사 하나가 그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게 아니잖아요!" 결국 우현은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짐짓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막는 위렌의 얼굴이 그의 화를 돋궜다. "강간이었다니까! 그건 범죄잖아요!" 그때 턱 하는 소리를 내며 내려앉은 것이 있었다. 솥뚜껑 같은 손이 내려와 우현의 머리카락을 온통 흐트러뜨렸다. 말 돌리지 말라고 화를 버럭 내려는 우현의 귀에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단 진정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 네가 무엇을 봤는지는 알겠는데, 하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시작한 위렌의 이야기는 우현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창백하니 질린 얼굴로 위렌에게 되물었다. "그, 그러니까... 그게 당연한 거라고요? 종자가 기사에게 당하는 게?" "그래. 기사들 사이에서는 흔하게 있는 일이야. 너도 알다시피 기사는 오랜 기간 동안 여자를 안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하지만 성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잖아?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그 상대가 되는 거야. 네가 본 건 종자였지만 때때로 나이가 어린 기사수련생이 그 상대가 되기도 하지." 기분 나쁘다. 그것을 얼굴에 써붙인 듯 보이는 우현을 향해 위렌은 다소의 장난기를 섞어 덧붙였다. "이건 약과야. 마을과 떨어져서 초원에서만 지내야하는 목동들은 양이나 염소를 상대로..." "그, 그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현실을 외면하면 안 되지. 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 하나다. 너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상대로 보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 너도 남자니까 알겠지만 한 번 꼴리면 앞 뒤 못 가리는 것이 사내란 족속이니까." "그, 그래도... 그렇지만 내가 그런 상대로 보여요?" 자신이 남자답게 우락부락 생겼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 우현이었지만 여자 얼굴이라는 생각 역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라면 나 같은 얼굴은 죽어도 안기 싫어'라고 중얼거리는 우현을 본 위렌은 입을 딱 벌리더니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뭐야, 그 사람. 손이 꽤 빠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이었던 건가." "네?" "어, 아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동안 하나쯤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너를 안고 싶어한 남자 말이야." '그런 비위 좋은 사람이 있을 리가'라고 대답하려던 우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익어버렸다. 기억을 하고 만 것이다. 어두컴컴한 신전, 간간이 흔들리던 촛불, 흘러내리던 허리띠와 어느새 끌러진 셔츠, 옷깃 사이로 파고들어 등을 천천히 쓸어가던 부드러운 손가락의 센슈얼한 느낌과. 쇄골에 남았던 붉은 인장. "정말로 없었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까지 곁들인 채 은근슬쩍 물어오는 위렌, 과연 능글이 아저씨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귀끝까지 붉어진 채 신빙성 없는 대답 - 고개만 붕붕붕 - 을 한 우현은 얼른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달라.' 하얀 손가락이 일으켰던 미묘한 감각이 '그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면서도 왜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를 곰곰이 생각한 우현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 이스드는 달랐다. 감정으로 충만한 눈동자로 마주보고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손가락으로 보듬고 하는 것은 단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그럼. 같은 선상에 놓으면 섭하지.' 생각에 마침표를 찍은 우현은 어느새 캠프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른 아침의 산책에 배가 고픈 것을 느끼고 잰걸음을 옮기던 그를 익숙한 목소리가 끌어당겼다. 우현이 그 목소리에 반갑게 반응했을 때였다. "몇 번을 말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그 아이는 단순한 종자가 아니라 나의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된다는 자체가 나에 대한 모욕입니다." "호오, 그런가? 단지 그런 관계인 것치고는 보호가 상당히 살뜰한데 말이야.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것은 알고 있나? 자네가 한낱 종자를 그리 싸고도는 이유는 그 아이 살맛이 기가 막히기 때문이라는 소문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돌아가십시오, 마크리아 백작님." 바보가 아닌 이상 금세 알아차릴 수 있는 내용의 대화였다. 안 그래도 위렌과의 대화로 등골에 한기가 서렸던 바가 있는 우현은 마크리아 백작의 느물거리는 표정과 어조에 얼굴을 잔뜩 구기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카운터를 먹인 말이 있었다. "지금은 좋게 가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두도록 해. 자네의 고운 종자를 노리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나야 워낙 신사라 억지로 무엇을 해 볼 생각은 없지만 다른 녀석들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한 번 쯤 돌리는 편이 호기심을 죽이는 데에 더 큰 도움이 될 텐데." '신사라는 사람이 종자와 자도록 해달라고 그 주인에게 요청을 하냐? 게다가 뭘 어째? 돌려?' 여자 취급을 받는 것도 기분 나쁜데 겁탈의 예고(?)까지 하다니. 우현은 멀어져가는 마크리아 백작을 힘껏 노려보았다. 백작이 가고 나서야 우현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카이엔은 아차 싶었는지 애써 웃음을 띄웠다. "언제부터 있었어?" "...방금 그건 뭐죠?" "나 씻어야 할 것 같은데. 밥은 먼저 먹고들 있..." "방금 그건 뭐냐니까요." 여느 때와는 달리 단호한 말투를 들은 카이엔은 그냥 넘어가기에는 글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설프게 웃은 카이엔은 뒷짐을 진 채 모른 체하고 있는 위렌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요지부동. 카이엔은 결국 자신이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한숨을 쉬었다. 우현이 말했다. "기사들이 같은 남자를 욕구 해소의 상대로 삼는다는 것은 방금 위렌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 상대가 종자나 기사수련생이라는 것도요. 방금 그 사람은 나를 그런 상대로 삼겠다고 온 건가요? 보아하니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게다가 마지막 말은 뭡니까? 그 사람 말고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건가요?" 침묵이 오히려 대답이라. 우현은 카이엔이 지금껏 몇 번이나 이런 청을 거절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중에는 오늘처럼 높은 지위의 사람도 있었을 텐데, 우현은 지금까지 카이엔이 그것에 대해 무어라고 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미안합니다, 카이엔. 변명이겠지만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남자의 자존심 - 여자 대신으로 여겨지다니! - 이 울었지만 어쨌든 사과는 사과. 카이엔은 고개를 숙이는 우현을 만류했다. "달라, 우현. 네가 아니라 다른 종자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나는 내 밑의 사람들을 함부로 여기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내가 되는 거잖아요. 정말로 미안해요, 카이엔." 그제야 우현은 밤마다 자신을 둘러싸듯 하여 잠을 청하는 카이엔과 위렌을, 자신이 혼자 있을 때마다 주변을 맴도는 아이겐튼 가의 기사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호는 기쁘지만 여자 취급은 역시 거슬린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고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나를 상대로..." 자신을 모르는 것도 모르는 것이지만 이것은 오히려 미지의 영역을 갑작스레 맞닥뜨린 것에 가까웠다. 이스드야 좋아하는 감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쳐도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런 식으로 보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그였다. 위렌은 고뇌하는 우현을 흘금 보고는 입가에 쓴웃음을 걸었다. 깨닫고 나니 카이엔에게 말을 거는 기사들이 전부 변태로 보이고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들이 징그럽기 짝이 없다. 우현은 덩치가 큰 위렌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되도록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다. '도대체 내가 왜'라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날 위렌이 한 말 덕분에 그런 짜증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이제야 뭔가를 깨달았구나." 깨닫기는 뭘 깨닫는단 말인가. 우현은 고삐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히쉬미른의 수도인 에페르토에 닿은 일행은 왕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여관에 짐을 풀었다. 티스베 공주를 포함한 몇몇 지체 높은 기사들은 공주와 함께 히쉬미른의 왕궁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며칠을 기거했다.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은 이국의 수도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즐겼지만 우현은 여관의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창가에 의자를 끌어다놓고 앉아 내려다 보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잘 보인다. 우현은 문득문득 시야에 스치는 흰옷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자신을 느끼고 실소했지만 그럼에도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에페르토 체류 마지막 날, 태양이 붉은 옷자락을 길게 끌며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시간이 되었다. 우현은 쓴웃음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페르토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러 내려오라는 목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왔다. 에페르토를 떠나면서 일행의 자리 배치가 다소 달라졌다. 카이엔이 티스베 공주의 마차 바로 곁에서 말을 몰게 된 것이다. 그동안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고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에게 곁을 맡기라는 핑계를 대며 후미에서 말을 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공주의 억지에 진 모양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수순으로 아이겐튼 가의 기사들 역시 공주의 마차 근처로 다가가게 되었는데, 우현을 홀로 놔두는 것이 못내 걱정이 되었던 카이엔은 결국 그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직권남용 아닌가요?" 한낱 종자 주제에 공주의 근처를 차지했다는 의미의 시선을 느낀 우현이 카이엔에게 말했다. 그러나 젊은 자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편하자고 내 종자 불렀다는데 누가 뭐라고 그래. 너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확실히 사소한 일이기는 했지만 세상 만사의 대부분은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어느날 저녁, 드물게 혼자 있는 우현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늦가을의 싸늘한 바람을 받으며 트루바두르의 라리나 소리를 즐기던 우현은 근처에서 들려오는 비단 스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그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는 상대를 올려다 보았다. 옅은 바다색의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붉은 머리칼의 소녀가 그곳에 서있었다. 손을 가져다 대면 그대로 미끄러질 듯 부드러워보이는 우윳빛 피부와 그 위에 얇게 떠오른 장밋빛 홍조, 입고 있는 드레스와 비슷한 색깔의 눈동자. 꼭 다물린 붉은 입술과 가볍게 쳐든 턱이 다소 오만하다는 인상을 주는 소녀는 우현을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녀의 아름다움에 잠시 넋이 나간 우현을 일깨운 것은 공주의 유모 사비나였다. 소녀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그녀는 위엄이 서린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아무리 무지몽매하다 해도 이리 어리석을 수 있을까! 공주님을 뵈었으면 마땅한 예를 취해야 할 것 아니냐!" 공주를 대하는 마땅한 예 따위를 우현이 알 리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까딱하여 인사했다. 이곳이 아무리 신분제 사회이고 이 소녀가 공주라고 해도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다니, 우현의 안에 내재되어 있던 자존심이 부글거리며 끓었다. "이런 무엄한!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 따위 행동을..." "됐어. 어차피 멍청한 평민이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어." 이런 것을 보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는 것이리라. 우현은 치떠지려는 눈을 억지로 내리깔았다. 지금 눈을 들었다가는 카이엔에게 피해가 갈 행동을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런 그를 향해 황공하옵게도 공주가 직접 물었다. "네가 아이겐튼 자작의 종자라고 들었어. 사실이냐?" "...네." "최근 소문을 듣자 하니 아이겐튼 자작이 자신의 종자를 지나치도록 극진히 아낀다고 하던데, 혹시 너와 자작은 그런 관계인 거냐?" 이전 같으면 '그런 관계라니, 무슨?'이라고 되물었을 우현이지만 이제는 안다. 그는 눈에 불이 켜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도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이따위 소문을!' 누군지 걸리면 몽둥이로 뒤통수를 후려치리라 다짐하는 그의 귀에 사비나의 재촉이 들려왔다. 그는 애써 정중한 말투를 꾸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자작님은 마음이 넓은 분이신지라 이 부족한 종자도 내치시지 않고 잘 보살피시는 것뿐입니다." "역시 그렇겠지? 너 같이 못생긴 것을 총애할 아이겐튼 자작이 아니니까." 못생겨서 미안하다, 라고 내심 중얼거린 우현은 시선을 들어 공주를 흘금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외모에 균형이 잘 잡힌 몸매, 천진난만한 눈동자. 어지간한 남자라면 넘어가지 않고는 못 배길 모습이었다. 그는 공주의 얼굴에 떠오른 명백한 안도를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뭐야, 생각보다 귀엽잖아?' 이 얼굴로 진심을 담아 조르면 국왕이 아니라 국왕 할아버지라고 해도 그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겐튼 가에 경사가 났다며 즐거워하고 있는 우현, 당사자인 카이엔이 알면 낙심 백만 배라는 사실은 요만큼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7장 여정 -4- 그 뒤로도 우현은 종종 티스베 공주와 얼굴을 마주하곤 했다. 카이엔이 공주에게 불려갈 때 함께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녀는 그럴 때마다 이런 저런 것으로 우현을 골탕먹이려 들었다. "이건 메스롭이라고 하는 놀이야. 할 줄 알아?" 꽃과 풀을 아라베스크풍으로 정교하게 새긴 보드는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위에서 움직이는 말은 상아로 세밀하게 만든 예술품. 장기나 체스와 비슷한 듯 하지만 말을 옮기는 방식이 좀 더 복잡한 그 게임을 앞에 둔 우현은 묵묵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티스베 공주는 금방울을 울리는 듯 영롱한 목소리로 깔깔대며 웃었다. "뭐야, 이런 것도 못 하는 거냐?" 가벼운 경멸이 어린 목소리였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이 예쁜 공주님의 방식이 열 살 어린아이와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베이비시터 아르바이트를 하는 기분으로 넘겨버리는 우현을 향해 카이엔은 미안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공주가 다시 말했다. "그럼 할 줄 아는 게 뭐야? 글은 읽을 줄 알아?" "공주님. 그를 놀리는 일은 그만 하세요." 보다 못한 카이엔이 공주를 만류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차라리 내버려두는 편이 나은 법이다. 공주의 하늘색 눈동자가 질투로 짙어졌다. "글을 읽을 줄 아느냐고 묻는 것이 왜 놀리는 일이 되는 겁니까, 아이겐튼 자작? 어차피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이 아닌 걸요." 바로 그 부분이 문제라는 것을 이 철없는 공주가 알았으면 좋겠다. 카이엔은 얕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제가 잘못 알고 무례한 말을 했군요, 공주님.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그는 글을 읽을 줄 압니다. 상당이 어려운 서적도 금세 이해를 할 정도로 지식의 수준도 뛰어나지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을 얕보면 안 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피터지게 공부해야 하는 그들 중에서도 우현은 특히 장학생이었다. 법학이나 신학, 그리고 신학의 시녀인 철학 등 기본 지식이 필요한 책을 제외하면 그가 이해하지 못할 책은 이에라 르페리토 대륙에 없었다. 오히려 수학이나 의학 등은 우현이 웃어넘길 정도의 수준인 책들도 있었다. 구구단이 없어 같은 숫자를 몇 번이고 더하는 것으로 곱셈을 대신하고 허벅지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통증의 이유를 빗물이 괴어 썩은 곳에서 어미아비 없이 태어난 두꺼비 때문이라고 본다니, 말 다한 것이다. 카이엔의 말을 들은 티스베 공주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우현을 보았다. "글을 읽을 줄 안다고? 어떤 선생이 평민 따위에게 글을 가르쳐준단 말이냐?" "아는 신관에게 배웠습니다. 마음이 넓고 관대하신 분이라서 이 미천한 평민에게도 아무 거리낌없이 글을 가르쳐 주시더군요." 일견 공손해보이는 말 속에 은근히 감추어진 비꼼을 알아채기에는 공주의 수준이 너무 낮았다. 일부러 이런 식의 대답을 하며 공주의 반응을 즐기는 우현, 대놓고 그의 약점을 들추어 점수를 깎으려는 공주의 행동보다 한층 더 고단수라 할 수 있었다. 카이엔은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은근한 미소까지 지으며 맞받아치는 우현을 보며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신관? 흥, 보나마나 평민 출신의 별볼일없는 신관이었겠지. 그러니 시간이 남아돌아 평민 따위에게 글을 가르친 거고." 신관 본인이 들었더라면 '처음부터 예의바른 말을 기대하지 않았으니 화를 낼 이유도 없다'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과거의 기억을 되살린 우현은 이스드와 티스베 공주가 마주쳤을 때의 상황을 상상하고는 빙긋 웃고 말았다. 그러자 정적인 생김새 가득 밝은 빛이 퍼져, 카이엔은 정신없이 우현을 바라보았다. 그것에 심통이 난 공주는 심술궂은 어조로 덧붙였다. "알고 있는 글자는 이핀트뿐이겠지? 너 같은 게 레판트의 아름다움을 알 리 있겠어?" 아무리 티스베 공주가 카이엔의 주의를 끌고자 한다 해도 이런 방식은 전혀 좋지 않았다. 우현은 카이엔에게 있어 어떠한 의미로든 소중한 사람이었으므로 지금 공주의 행동은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역효과만 낳을 뿐이었다. 결국 한 마디 하려고 입을 여는 카이엔을 향해 우현은 열심히 눈짓을 해 그만두도록 했다. 이 역시 공주에게는 역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티스베 공주는 갈구고 우현은 갈굼 당하고 갈굼의 원인인 카이엔은 노심초사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일행은 히쉬미른의 끝자락에 다다르게 되었다. 아르세니아와의 국경선을 지척에 둔 어느 영지에서 짐을 푼 일행은 모처럼의 편안한 잠자리와 제대로 된 식사를 흡족할 만큼 만끽할 수 있었다. 티스베 공주가 열을 낸 것이다.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앞에서는 예쁘게 있고 싶다는 욕심에 얇고 화려한 드레스를 고집했던 공주는 결국 영지를 코앞에 두고 앓기 시작했다. 카이엔과 대화를 하겠다며 마차의 창을 내내 열어둔 것이 또 하나의 화근이었다. 시녀들이 부산을 떨고 의원이 달려왔다. 게다가 환자에게는 최악일 차디찬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 일행은 결국 영지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인기있는 남자는 고생이라니까." 위렌의 평이었다. 영주관 안에서 머무르는 공주나 카이엔 등과는 달리 작위가 없는 기사인 위렌은 우현과 같은 여관에 투숙했다. 마음에 드는 술을 마음껏 마시고 좋아하는 도박을 실컷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하는 위렌은 기사로서는 실격일지도 모르지만 우현은 그와 방을 쓰게 되어 여러모로 안심이었다. "그럼 위렌은 카이엔과 같은 고생은 결코 하지 않겠군요?" "나를 뭘로 보는 거냐? 이래봬도 내가 얼마나 인기있는데! 네가 영지에서의 나를 못 봐서 이러는 거야. 내가 지나가기만 하면 아가씨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쓰러진다고!" 확실히 위렌은 준수한 편이었으며 키도 훤칠한데다 고된 훈련으로 몸매도 다부져 아가씨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이었다. 우현은 킥킥 웃으며 위렌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그 모습을 본 위렌은 투덜거렸다. "뭐냐, 뭐. 안 믿는 거냐? 나중에 두고 보라지. 영지에 돌아가서 똑똑히 보여줄 테니 말이야." 영지에 돌아가서, 라. 좋은 말이다. 우현은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법 강해진 빗발이 잿빛 공기를 배경으로 은실처럼 빛났다. 고즈넉한, 아늑한, 외로운, 번잡스러운 심사가 복잡스레 얽힌 감정이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때였다. 삐그덕거리며 문이 열리더니 주변의 소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우현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곧 그의 새까만 눈이 커졌다. "유타?" 비에 젖어 축 늘어진 밀짚색 머리카락과 그 아래의 얼굴은 우현의 눈에 충분히 익은 것이었다. 그러나 갈색의 주근깨가 고동색으로 보일 정도로 창백해진 안색이나 아픔으로 경직한 표정은 유타의 얼굴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뚝뚝 떨어지는 새빨간 피라니. "유타, 도대체 이게..." "야, 괜찮냐?" 종자 몇이 유타에게 다가가 물었다. 유타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으며 씹는 듯 말을 내뱉었다. "마을 불량배들에게 걸렸지 뭐야. 돈을 내놓으라기에 싫다고 했더니 다짜고짜로 덤비는 거야. 뭐, 나는 팔 조금 다치고 말았지만 놈들은 꽤 당하고 도망갔지. 아야야, 만지지 말고 의원 좀 불러봐." "의원은 공주님 따라서 영주관에 들어갔잖아. 여관 주인에게 말해서 여기 의원이라도 부를까?" "의원을 부르면 돈은 누가 내고?" 가난한 종자에게 의원의 왕진비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기사들은 모른 체하고 종자들은 입을 꾹 다무는 것을 본 우현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일어났다. "저기, 나 약이 있는데." "어, 우현? 진짜야?" "그럼 거짓말 해서 뭐하냐." 상처에 사용하는 약이야 대부분의 기사들이 가지고 다니지만 이 또한 가격이 꽤나 비싼 편이라 종자들에게까지 주어지지는 않았다. 종자들은 반색을 하며 유타의 곁을 내주었다. 주머니에서 약과 붕대를 꺼낸 우현은 유타의 상처를 살폈다. 조금 거칠게 난 절상이었다. "이 상처를 가지고 비를 맞으면서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해. 비를 맞고 가만히 서있는 것보다야 맞으면서라도 걸어오는 편이 낫잖아." "말은 잘 한다." 꿰매야 할 듯 보이는 상처였지만 우현은 그럴 능력도 생각도 없었다. 위렌에게서 빼앗아온 술병을 기울여 손을 씻고 상처를 소독한 - 이때 펍 안에 굉장한 비명이 퍼져나갔다 - 그는 약을 바르고 붕대를 맸다. 일련의 동작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본 유타가 물었다. "꽤나 익숙하잖아? 이런 일 많이 해봤냐? 아이겐튼 자작님이 자주 출진하시는 거야?" 그냥, 이라고 대답하여 얼버무린 우현은 작은 매듭을 짓는 것으로 붕대감기를 마쳤다. 곁에 있던 다른 종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아버지가 의원인 거야?" 우현은 고개를 들어 그 종자를 바라보았다. 선셋 옐로우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우현의 눈이 자신에게 쏠리자 뺨까지 붉히며 어물어물 말했다. "아니, 우리 형이 잠시 의원 밑에서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네가 방금 한 것처럼 매듭을 짓더라고. 그래서 혹시나, 하고..." 사내 자식 주제에 숫기 없기는, 이라고 생각하며 대강 고개를 저은 우현은 곧 덧붙였다. "아버지는 아니지만 아버지 같은 분 밑에서 있기는 했어. 지금쯤 엘로소 영지에서 열심히 환자를 돌보고 계시겠지." 자신을 지극히 아껴주었던 모리악 부부. 두 사람의 계획이 어쨌든 모리악 부부가 우현을 자식처럼 여겨준 것만은 사실이었다. 일이 잘 해결되면 어떻게든 만나보리라 생각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본 위렌은 조용히 혀를 찼다. 그리고 공주가 회복하는 며칠 동안 우현은 밀려드는 환자로 인해 눈이 핑핑 돌아갈 지경이었다. 검을 손질하다가 손가락을 베었다는 기사의 상처를 죽일 듯 노려보며 약을 바른 우현은 침대 위에 대 자로 누우며 투덜거렸다. "도대체 뭐냐고, 뭐! 다들 왜 저러는 거야?" 모르는 것이 죄다. 좀처럼 보기 드문 밀빛의, 잡티 하나 없는 피부에 갸름하니 섬세한 턱선, 어딘지 밋밋한 느낌이 들지만 선이 부드러운 코에 불그스름한 입술. 자줏빛의 머리카락을 길게 내려 눈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어딘지 기묘한 위화감을 주는 신비한 분위기의 소년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금지된 것에 이끌리며 가려진 것의 베일을 벗겨 이면을 보고 싶어한다. 그 동안은 아이겐튼 자작의 철통 방어가 있어 가까이 가지도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현의 근처에는 위렌 하나뿐이었으며, 그 기사는 일정 선을 넘지 않는 이상은 소년에의 접근을 막지 않았다. 뭐, 직접 접근하고 나서 신비가 깨지든 친근감을 느끼고 더욱 접근하고 싶어하든 그것은 본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위렌이 뭐라고 좀 해요! 나는 종자일 뿐이고 의원이 아니라고!" "글쎄. 꽁꽁 감싸고 있다가 폭발한 누군가에게 덮침을 당하게 하기 보다는 이런 식으로나마 접근을 허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래?" 무슨 소리인지 우현이 알 리 없다. 덮침을 당한다는 의미만 이해하고는 몸을 부르르 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냐?" "약초 캐러요." "상처에 바르는 약이라면 내 걸 줄테니까 그냥 있지 그래?" 위렌은 자신의 약병을 던졌다. 그것을 가볍게 받아낸 우현은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다른 약초도 있어야할 것 같아서요. 이왕 주는 것은 잘 받아 쓰겠지만." 이내 탁탁탁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따라갈까 싶어 몸을 일으켰던 위렌은 그러나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너무 보호하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만 자극할 것 같았다. '뭐, 녀석도 남자니까 괜찮겠지.' 우현은 미리 보아둔 근처 야산으로 향했다. 비는 그쳐 공기는 청명했으며 하늘은 맑았다. 그는 발 밑의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하여 걸음을 딛었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거둘 수 있는 약초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현은 민들레나 질경이의 뿌리를 캐고 들장미의 열매를 땄다. 민들레의 뿌리는 열을 내리고 소화를 도우며 질경이의 뿌리는 이뇨제로, 장미 열매는 신진대사를 돕는 데에 쓰였다. 그는 쓸만한 약초를 따라 점점 야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건 뭐더라?" 버드나무의 껍질이 어디에 쓰이던가 싶어 기억의 창고를 탈탈 뒤지던 때였다. 우현의 귀에 무엇인가가 주르륵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앗! 이런..." 뒤이은 목소리를 들으니 나이가 지긋한 여성이었다. 우현은 더 볼 것 없이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얹은 듯 부드러운 백발을 깔끔하게 빗어올린 노파였다. 아마도 비에 젖어 부드러워진 흙을 잘못 밟아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우현은 얼른 달려가 노파의 곁에 앉았다. "괜찮으세요?" 노파가 고개를 들었다. 그 나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또렷하니 맑은 라벤다색 눈동자였다. "아무래도 발목을 삔 모양이야. 좀 일으켜주게나, 젊은이." 부드러운 말투와 표정이 고아한 인상마저 준다. 우현은 손을 내밀어 노파를 부축하다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넘어지면서 긁혔는지 노파의 손바닥은 온통 엉망이었다. 그것을 본 노파는 멋쩍게 웃었다. "모처럼 날씨가 맑아서 약초를 캐러 나왔지. 예감이 좋아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런 봉변을 당하다니. 뭐, 자네를 만났으니 이것으로 좋은 걸까." 다친 발목이 어지간히 아플 텐데도 노파는 유쾌한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 있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어깨를 감싸 일으킨 우현은 결국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업히세요.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내 집은 이 산을 올라가야 있는데 괜찮겠어?" "그럼 혼자 올라갈 수 있으세요?" 우현의 반문을 들은 노파는 두 번 사양할 것도 없이 냉큼 업혔다. 우현은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한 발 한 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날에는 집에 계셔야죠." "괜찮은 약초를 발견할 것 같은 느낌이 있었거든. 아,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게." "읏차, 산 속에서 사시면 불편하지 않아요?" 우현이 노파를 추스르며 물었다. 그녀는 나직하니 웃은 후 대답했다. "나 같은 여자는 마을에 내려가면 안 돼.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거든." "네에? 무슨 그런..." "자, 다 왔네. 저기야." 노파의 쪼글쪼글한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는 작은 오두막이 한 채 있었다. 많이 낡은 듯 여기저기 썩어들어간 오두막이었다. 우현은 오두막의 문을 간신히 열고 안으로 들어가 의자 위에 노파를 앉혔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물을 끓여서 찜질을 해드릴게요." "부엌 아궁이에 불을 피워놓았으니까 그것을 쓰면 될 거야." 우현은 들어오면서 보아둔 뜰에 있는 작은 샘에서 물을 길어와 불에 올리고 삔 곳에 잘 듣는 약초를 잘 으깼다. 그러고 나니 할 일이 없어, 그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외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아늑한 집이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접시도 하나, 수저도 하나, 의자도 하나라는 점이었다. '이런 곳에서 혼자? 혹시 자식들이 버린 건가?' 그때 물이 끓었다. 우현은 그것을 대야에 붓고 찬물을 섞어 온도를 맞추었다. 뜨끈뜨끈한 찜질이 기분 좋은 듯, 노파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 됐다 싶은 시점에서 대야를 치우고 약초를 바른 우현은 붕대를 단단히 감아 움직이기 쉽도록 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끝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발목 조심하시고..." "오랜만의 손님인데 그냥 보내기 섭섭하군, 그래. 바쁜가?" "바쁜 것은 아니지만 곧 해가 질 것 같아서요." 해가 지면 산길을 내려가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돌아가지 않으면 위렌이 걱정할 것이 뻔했다. 노파는 진심으로 아쉬운 얼굴을 하고는 내려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우현이 감사하다고 인사하자 노파는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는 젊으니까 이런 늙은이의 충고 따위는 흘려들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고, 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 우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노파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것이었다. 온화한 듯, 진심으로 걱정을 하는 듯한 저 웃음은 분명. '...할머니?' 얼굴도 무엇도 닮지 않았다. 단지 하나, 짓고 있는 표정이 비슷할 뿐. 그것 하나만으로도 노파의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의 진실에 감싸여 살아가지. 그것은 나도 자네도 마찬가지야. 그러나 기억해두게. 자네가 생각하는 진실의 1/3은 거짓이고 1/3은 착각이며 나머지 1/3만이 진짜라는 것을." "네?" 우현은 노파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되묻자 노파는 서글프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세상이 끝났다고 여겨질 때, 세상 어디에도 그 한 몸 붙일 곳이 없다고 여겨지는 그때 나를 기억하게. 그게 언제가 되든 나는 이곳에 있으니까." 그리고 노파는 손수 문을 닫았다. 오도카니 선 채 어설프게 만들어진 문짝을 바라보던 우현은 몸을 돌렸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노파에게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는 곧 그날 일을 잊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7장 여정 -5- 히쉬미른을 지나자 이번에는 아르세니아의 기사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갑옷의 위용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초라한 듯 보이는 기사단의 모습을 본 우현은 카이엔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뭐야, 이것밖에 안 돼? 히쉬미른의 기사단은 이것의 배는 됐는데. 이건 나를 무시하는 처사일까?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이겐튼 자작?" 파란 눈을 빛내며 묻는 티스베 공주는 자신이 언제 아팠냐는 듯 생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여전히 얇았으며 어깨가 깊이 파여있었다. 가을을 지나 슬슬 겨울로 접어드는 날씨가 춥기는 추웠는지, 그녀는 드레스 위에 톡톡한 모직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카이엔은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 나온 기사단의 수가 적다고 투정하는 공주를 보며 무어라 대답을 할지 고심했다. 종달새가 지저귀듯 연신 종알거리는 공주가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안에 깃들인 지고이네르의 피는 온실 속의 장미꽃을 반기지 않았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고 대답했다. "아르세니아도 시국이 시국이니까요. 왕위 계승으로 왕자들이 다투는 바람에 내부의 치안도 엉망이리라 생각합니다. 이 정도 보내온 것도 공주님에 대한 환영의 마음을 최대한 보인 것이겠지요." 그러니 제발 공주가 아르세니아 왕궁에 가서 '왜 이렇게 기사들을 조금 보냈어요?'등의 말을 지껄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카이엔이었다. 우현은 카이엔의 미간에 보일 듯 말 듯 드러난 주름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애보기는 여러모로 고생길이다. 겨울에 마악 접어든 날의 하늘은 티스베 공주의 눈동자만큼이나 맑고 아름다웠다. 어떻게든 공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껏 치장하고 다가온 호위기사 하나가 그렇게 나불대자 마음이 혹한 공주는 마차에서 내려 말을 타고 가겠다고 졸라댔다. "공주님, 위험하니 그대로 마차에 계시는 편이..." 유모인 사비나가 아무리 말려도 마이동풍. 제멋대로인 공주는 안 된다는 소리를 들으면 더욱 하고싶어하는 이상 성격의 소유자였다. 결국 어린애라는 말이 되지만, 며칠 사이 그것을 절실하게 느껴버린 카이엔은 한숨을 한 번 쉬는 것으로 고충을 표현할 뿐이었다. 곧 공주가 탈 말이 마련되었고, 그녀는 카이엔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랐다. 백마와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 그리고 그 위에 우아한 자세로 앉은 아름다운 공주란 한 폭의 그림에 다름 아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공주의 연분홍 드레스가 나풀거리고 하얀 망토가 흩날렸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올 한올 흩어지는 스트로베리 블론드는 달콤하기 이를 데 없었고 영롱한 웃음소리는 가히 천상의 음악에 비견할만 했다. 우현은 공주를 홀린 듯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내심 혀를 찼다. '역시 사람은 미모가 제일인가.' 순간 심장을 내달린 욱신거리는 통증이 있었다. 짙은 남빛의 머리카락, 웃음을 머금은 눈동자, 가늘어지던 눈매와 나직하니 다정한 미성. 얼마를 보지 못했을까. 우현은 고개를 저어 괴로움을 달랬다. '영원히 볼 수 없는 것도 아니잖아. 그도 라벤다에 간다고 했으니까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마차 안이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티스베 공주는 종종 카이엔과 사비나를 졸라 말에 올랐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로, 공주는 아침식사 직후부터 말을 타고 싶다고 졸라 결국 승낙을 얻어내었다. '아무리 마차 안이 답답해 견딜 수 없다고 해도 말에 타면 엉덩이가 아플 텐데 잘도 타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한 우현은 곧 공주의 홍조 띤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공주의 곁에 아무도 없을 리가 만무하다. 그녀의 곁에는 카이엔이 딱 붙어있었다. '엉덩이가 아플 틈도 없겠네.' 사랑에 빠진 공주의 귀여운 속셈을 알아챈 우현은 소리를 죽여 킥킥거렸다. 근처에서 말을 몰던 위렌이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한참을 말을 몰아가던 그들의 앞에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야산이 나타났다. 기회다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무서웠던 것인지, 공주는 카이엔의 곁에 더욱 붙으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카이엔의 마음이 아무리 다른 밭에 가있다 해도 그도 어쩔 수 없는 남자다. 예쁜 소녀의 붉힌 볼과 보호를 바라는 눈동자에 보호본능이 무럭무럭 솟구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위렌이 그런 자신을 보고 웃거나 말거나, 그는 평소보다 다정한 얼굴로 공주를 이끌어 숲에 들어섰다. 공주가 정말로 숲을 무서워 했다면 마차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카이엔, 그 역시 단순하기가 아메바에 버금가는 생물이라는 '남자' 중 하나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끼르룩 울며 날개를 쳤다. 그 바람에 후드득 떨어진 낙엽을 맞은 공주는 연약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산길은 이상한 느낌에 휩싸여 있었다. 우현조차 느낀 그것을 기사들이 모를 리 없었다. 주변을 둘러본 카이엔이 공주를 향해 말했다. "공주님, 아무래도 마차 안에 들어가시는 편이..." 그때였다. 요란한 굉음이 일며 무엇인가가 떨어져 내렸다. 말이 우는 소리와 사람들의 신음소리, 여자들의 비명과 남자들의 고함, 갑주들의 절그럭거림. 그 모든 것이 자욱하니 일어난 흙먼지에 묻혔다. "뭐냐, 뭐! 이런 젠장!" 앞이 보이질 않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턱이 없다. 위렌은 바로 옆에 있었던 우현을 찾았다. "우현, 어어이! 거기에 있냐?" "아, 네에! 그, 그런데 이...콜록 콜록, 이게 도대체..." 흙먼지에 정신없이 콜록거리면서도 상황을 묻는 것을 보니 무사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위렌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얼굴을 찡그렸다. "꺄아아아악! 뭐야, 뭐야, 뭐어!" "잠시만, 공주님! 이런, 좀 놓으십시오!" 겁먹고 당황한 공주가 마구 끌어안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말 위에서 떨어질 뻔한 카이엔은 간신히 고삐를 움켜쥐며 몸을 지탱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는 역겨운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르륵거리는 소리는 호흡처럼 조용했다. 그것은 여기저기에서 울리며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곧 뿌옇게 일었던 흙먼지가 잦아들었다. 사람들이 흐릿하나마 서로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무렵, 행렬의 선두에서 처절한 비명이 일었다. "으아아악!" "뭐야, 무슨 일이야?" "크흑!" "어디냐!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거야! 대답해!" 시야가 채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들려온 비명들은 사람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기에 충분했다. 말들마저 긴장하여 투레질을 해댔다. 우현은 고삐를 단단히 쥐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퀴아네다! 제길, 퀴아네의 습격이다!" 흙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일행은 소리 없이 다가와 사람과 말을 할퀴고 물어뜯는 퀴아네를 볼 수 있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퀴아네를 본 우현은 두툼한 살덩이에 파묻힌 눈동자를 직시하고는 숨을 들이켰다. "흐읍...!" 검을 뽑을 새도 없이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퀴아네는 우현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듯 살덩이를 실룩대더니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갔다. "뭐, 뭐지?" 솔직히 의문보다는 안도가 더 컸지만 가만히 안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몸에 흙과 흰 가루를 잔뜩 얹은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수는 무척이나 적었다. 이상하게 여긴 우현은 뒤를 돌아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대한 통나무들이 그들의 뒤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일행은 그 뒤에 있는지 뭐라 뭐라 질러대는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퀴아네는 지능이 떨어진다고 누가 그런 거야!" 우현은 검을 뽑으며 낮게 외쳤다. 스르릉, 하는 소리에 반응했던 퀴아네 둘은 그러나 우현을 흘금 보더니 다른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퀴아네들의 이상 행동을 본 것은 우현만이 아니었다. 공주의 곁에 붙어 검을 휘두르면서도 연신 우현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주던 카이엔 역시 그것을 보았다. 습격한 퀴아네의 수는 스물 남짓. 그 전부가 우현을 피하고 있었다. 모종의 확신을 얻은 카이엔은 소리 높여 외쳤다. "우현! 이쪽으로!" 엉거주춤 있던 우현은 카이엔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말고삐를 돌렸다. 급하게 다가가는 그의 앞을 막는 것은 인간과 말뿐이었다. 그가 다가오자 카이엔은 가쁜 숨을 고르며 말했다. "잘 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공주님의 곁을 떠나면 안 돼. 알겠어?" 우현은 멋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의 손에 공주가 탄 말의 고삐를 넘겨준 카이엔은 그제서야 자유로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공주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말갈기만 붙들고 엎디어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퀴아네가 재빠르고 힘이 강하다 해도 상대는 갑옷을 제대로 갖춘 기사였다. 두세명의 기사들이 퀴아네 하나에 한꺼번에 달려들어 팔을 베고 가슴을 찌른다. 그렇게 공격을 당해 무릎을 꿇은 퀴아네의 목을 치면 상황은 끝이었다. 퀴아네 역시 동족의 수가 자꾸만 줄어드는 것을 알았는지 목표를 인간에서 말로 바꿔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상한데." 우현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지금껏 퀴아네가 이런 식으로 덤벼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숫자도 상당하지만 방법도 이제까지와는 다르다. 진화를 했다든가의 의미가 아닌 다른 느낌으로... "발버둥?" 그래, 마치 발버둥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우현은 지금이 초겨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퀴아네는 겨울이 되면 동면을 한다. 퀴아네의 생태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똑같이 동면을 하는 곰이나 뱀은 동면에 들기 전 음식을 많이 먹어둔다고 했다. 만약 그것과 같은 의미라면 급한 마음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던 우현은 그래서 위험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의 곁에는 퀴아네가 다가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너무 안심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말 울음소리가 요란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우현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그의 손아귀에서 말고삐가 스르륵 빠져나갔다. 공주의 말이었다. "꺄아아아악!" 어느새 다가온 퀴아네가 공주의 말을 할퀴었다. 상처를 입은 말은 당황하여 마구 날뛰었다. 거기에 퀴아네가 다가서자 더욱 당황한 듯, 말은 공주를 태운 채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캬아악! 살려줘! 이걸 좀 멈춰!" "이런, 제길! 이럇! 뒤따라가자!" 우현은 자신의 실수를 탓하며 말의 배를 걷어찼다. 그가 탄 말은 긴 울음을 내며 달렸지만 상처를 입고 사나워진 공주의 말은 속도가 매우 빨랐다. 귓가로 스쳐지나는 바람이 휭휭 소리를 냈다. 한동안 이렇게 빠른 속도로 달린 적이 없어 다소 당황했던 우현은 그러나 공주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고 몸을 숙였다. "얼른 가! 착하지. 저 말을 따라잡아야 해!" 그가 말의 귓가에 속삭이며 독려하자 그것을 알아들은 듯 말은 더욱 속력을 높였다. 몸체에 비해 부러질 듯 가느다란 네 개의 다리가 땅을 박차고 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달려나갔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쳐 따끔따끔한 통증을 가져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카이엔이 지키라고 말했는데!' 공주의 곁을 떠나지 말라는 말은 단지 옆에 붙어있으라는 의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현은 형제 같은 카이엔을 떠올리며 자책했다. 만약 공주가 다치기라도 하면 우현은 어떻든 카이엔은 심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기회가 왔다. 공주의 말은 퀴아네의 손톱에 당한 것, 빨리 달릴 수록 독이 일찍 퍼지는 것이다. 점점 느려지는 공주의 말을 거의 따라잡은 듯 싶어 회심의 미소를 지은 우현은 손을 뻗어 공주의 말고삐를 잡아채려 했다. 그러나 운은 그의 것이 아닌지, 공주의 말은 우현과 아슬아슬한 지척에서 갑작스레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뭐... 으와아악!" 갑작스레 땅이 꺼지는 느낌에 놀라 소리를 지른 우현은 곧 전신을 강타하는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하필 그곳에 낭떠러지가 있었던 것이다. 정신없이 굴러 바위와 돌부리에 긁히고 엉망이 된 채로 땅에 떨어진 그는 눈앞에 뱅뱅 도는 별을 보며 잠시 깜깜해진 시야를 추슬렀다. "젠장..." 다행스럽게도 낭떠러지는 높지 않았다. 우현은 욱신거리는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편으로는 멀어지는 공주의 뒷모습이 있었고 바로 근처에는 다리가 부러진 말이 힝힝거리고 있었다. 말을 슬픔에 찬 눈으로 내려다본 그는 몸을 돌려 공주를 뒤쫓아갔다. '어차피 얼마 달리지 못할 거야.' 그의 예상대로 공주의 말은 곧 비척거리더니 무릎을 꿇고 고꾸라졌다. 공주는 또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에 있는 힘껏 캭캭거리고 비명을 질렀다. 멀리 떨어진 곳까지 크게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우현은 다리에 힘을 주어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혹시나 다치기라도 했다면, 하고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지만 막상 공주를 마주한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퀴아네가 뿌린 검고 흰 가루 - 흙과 밀가루로 추정된다 - 에 얼룩이 되고 이리저리 찢겨나간 드레스는 그렇다 쳐도 흙먼지와 눈물이 섞인 땟국이 줄줄 흐르는 얼굴이라니. 하스티아 최고의 미소녀라는 호칭이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사람이 온 것도 모르고 빽빽 울어대는 공주를 보아하니 그리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우현은 웃음을 꾹꾹 억눌러 참고는 공주의 어깨를 짚었다. "흐어억!" 거의 경기 수준이다. 우현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떼었다. 그러나 공주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것이 너무나 안심되었는지 그에게 매달려 펑펑 울기 시작했다. "엉엉... 몰라아! 아바마마에게 전부 다 일러바칠 거야! 으아아앙..." 그러니까 뭘 어떻게 일러바친다는 것인지. 퀴아네의 습격이 카이엔들의 탓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이렇게 얘기하면 하스티아에 돌아간 후 자신의 목을 보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있는 우현이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공주님? 그만 우세요. 이제 괜찮으니까." 연신 쿨적거리며 손수건을 받아든 공주는 패애앵 소리가 나도록 크게 코를 풀었다. 우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번에는 쓰다 남은 붕대 쪼가리를 꺼냈다. 수통의 물로 그것을 적신 그는 더러워지고 엉망이 된 공주의 얼굴을 세심하게 닦아주었다. 말 위에 납작 엎드려 있었기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괜찮다니까요, 공주님? 자, 얼굴 좀 들어봐요. 하스티아에서 제일 가는 얼굴이 엉망이잖아요." 어쩔 수 없는 맏형 근성이다. 지고이네르와 생활하던 짧은 사이에 붙어버린 버릇에서 향수를 느낀 우현은 조금은 서글프게 웃었다. 얼굴을 다 닦은 후에야 정신을 차린 티스베 공주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방향을 알 수 없이 어둑어둑한 숲속에 믿음직스럽지 못한 종자와 단 둘이라니. 티스베의 얼굴이 막막한 공포감으로 일그러졌다. "여, 여긴 도대체 어디야? 가는 방향은 아느냐?" "대강은. 일어날 수 있겠어요?" 그러자 티스베 공주는 손을 처억 들어올려 우현에게 내밀었다. 일어나도록 부축하라는 의미다. 우현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부축했다. 일어난 그녀를 잘 살펴본 우현은 그녀가 다친 곳 없이 무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운도 좋은 공주님이다. "저쪽입니다. 조금만 가면 낭떠러지가 있어요. 거길 올라가면 일행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어지간히 불안했음인지 티스베 공주는 별말없이 우현의 곁을 걸었다. 우현은 공주의 얼굴을 흘금 보았다. 입술이 바짝 말라있음에도 두려움이 심해서인지 갈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수통을 열어 공주에게 건네주었다. "드세요." "응? 그건 뭐냐?" "물이요. 목이 마르신 것 같아서요." "그따위 것을 왜 내가 마셔야 하지? 불결하게스리 네 물통의 것을 왜? 차게 식힌 홍차가 마시고 싶어. 아니면 시원한 과일 주스나. 사비나가 만든 사과 주스가 좋다고!" 현재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무척 피곤한 상태의 우현이었다. 주는 거나 얌전히 처먹어, 라는 말이 그의 혀끝까지 올라왔다. 우현은 짐짓 싱긋 웃으며 수통을 가볍게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갈증을 자극했는지 공주는 망설이다가 그것을 받아 들이켰다. "뭐야, 미지근하잖아." 공주가 아니라 웬수다. 돌려받은 수통은 어느새 텅텅 비어있었다. 우현의 웃는 입가가 다소 실룩거렸다. 한 응석이 이어진 투정을 불러왔다. 조금 걷던 티스베 공주는 이내 우뚝 서서는 짜증이 잔뜩 깃들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가 아파." 우현은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라는 시선으로 공주를 보았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공주는 이번에는 팔까지 들어올리며 명령했다. "피곤해. 나를 업어라."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를 들은 우현은 기분이 팍 상하고 말았다.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지기까지 한 그였다. 옷은 먼지투성이로 너덜너덜했으며 피부에는 멍이니 긁힌 상처가 잔뜩 있을 것이 뻔했다. 그런 자신을 보고서도 쫓아와줘서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는 뭐가 어째? 피곤하니 업으라고? 물론 애보기라는 미션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한 자신에게도 잘못은 있겠지만 공주의 투정까지 받아주라는 미션은 카이엔의 말 중 없었다. 그의 생각을 모르는 공주는 이번에는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귀머거리니! 업으라고 하는데 왜 말을 듣지 않느냐!" 「아, 씹! 이 기집애가 진짜 오냐오냐 받아주니까!」 우현 드디어 폭발. 그간 쌓인 것이 꽤 되는 모양이다. 차마 이핀트로 욕을 하지는 못하는 것에서 한 가닥 남아있는 이성을 엿볼 수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호통을 -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 들은 티스베 공주는 눈썹을 상큼 치뜨며 외쳤다. "지금 뭐라고 말을 한 거냐! 감히 내 앞에서..." 조금만 더 말하면 우현에게 남아있던 한 가닥 이성마저 끊길 그 시점에서 공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언제든 어느 세상이든 여자의 눈물이란 치명적인 무기다. 우현은 그녀가 안쓰럽다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그게..." "왜 소리를 지르는 것이야? 놀랐단 말이다."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할 말을 다하는 공주라니, 어느 의미로는 대단하다. 우현은 한숨을 푸욱 쉬고는 소맷자락으로 공주의 눈물을 훔쳐주었다. "쉬잇, 괜찮아요, 응? 저쪽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퀴아네가 있는 줄 알고 소리를 지른 겁니다. 공주님한테 한 말이 아니라고요." "퀴, 퀴아네라고?" "하지만 착각이었어요. 다람쥐더군요." 우현은 역시 적응력이 뛰어난 모양이었다. 있지도 않은 다람쥐를 죄인으로 몬 그는 공주가 얇은 드레스만을 입고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얼른 망토를 벗어 공주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자요. 업혀요." "훌쩍... 으응." 아무리 우현에게 마음에 둔 님이 있다고 해도 녀석 역시 남자다. 잘 빠진 몸매의 공주님을 업자 이 대륙의 여인답게 풍만한 가슴이 그의 등을 짓눌렀다. 아무 것도 모르는 공주는 귀끝까지 빨개진 우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더워?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아, 예에. 그렇지요, 뭐어..." 여러가지로 여인들에게 휘둘리는 우현이었다. 그 자신도 깨닫고 있는 사실이니 무어라고 하겠냐마는서도. 그는 제법 무거운 공주를 업고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해서 발을 떼었다. 두 사람이 낭떠러지에 다다랐을 때, 해는 이미 서녘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빛에 의지하여 길을 찾은 우현은 아까 자신이 버려두고 갔던 말을 볼 수 있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아 버둥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잠시만요." 티스베 공주를 내려놓은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빼어들었다. 붉은 햇살이 스민 검이 황금빛으로 번득이자 공주가 흠칫 몸을 떨었다. "무엇을 하려고?" "이 말은 이제 데려가지 못해요. 괴롭게 내버려두느니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겠지요." 우현은 말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말은 버둥거리는 것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은 자비를 구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어서 죽여달라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우현은 갈색의 반지르르했던, 지금은 흙먼지가 앉아 지저분해진 몸뚱아리와 상아색의 갈기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이겐튼 영지에서부터 그를 태워 꽤나 정이 들었던 녀석이었다. 우현은 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공주에게 말했다. "공주님이 보기에는 안 좋을 장면일 테니까 눈을 감아요. 머리부터 망토를 뒤집어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현의 뒤에서 화라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걸었다. 서녘 끝에 매달린 태양의 마지막 빛이 검끝에 스몄다. 우현은 있는 힘껏 검을 내리쳤다. 울컥하니 오른 피가 그의 옷자락에 튀었다. "자, 다 됐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우현은 말의 시체를 몸으로 가리며 공주의 팔을 끌었다. 이 이상 어두워지기 전에 위로 올라가야 했다. 낭떠러지를 이모저모로 살피던 우현은 길게 늘어진 덩굴을 발견했다. 힘 주어 매달려도 멀쩡한 것이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저 공주가 이걸 타고 올라갈 수 있을 리 만무하니...' 어쩔 수 없다. 그는 덩굴을 베어낸 후 공주를 보았다. 그녀는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것도 저 정도면 맥이 빠진다. "제 뒤에 서세요." "응?" 공주는 순순히 우현의 말을 들었다. 공주가 뒤에 서자 우현은 자신의 몸과 그녀의 몸을 한데 묶었다. "뭐야, 지금? 뭐하는 건데?" 신뢰가 쌓였는지 아니면 단지 피곤한 것인지 공주의 목소리에는 다소의 의문만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우현은 매듭을 단단히 지었나 확인하며 대답했다. "저 위로 올라갈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주님의 몸을 제게 고정해야 하거든요. 자, 이제 꽉 잡으... 캑! 콜록, 목은 잡지 말고 허리를..." 그럭저럭 자세가 잡힌 것을 확인한 그는 덩굴에 매달렸다. 유격훈련이고 뭐고 전혀 알지 못하는 우현은 그래서 이런 식의 자세가 손에 얼마만큼의 타격을 주는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등에 매달린 무게까지 있어, 몇 걸음 올라가기도 전에 주르륵 미끄러진 그의 손바닥은 피칠갑을 하고 말았다. "읏, 뜨뜨! 젠장..." 이대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우현은 붕대를 꺼내어 상처 난 손바닥에 칭칭 감았다. 이까지 이용하여 매듭을 지은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호기롭게 외쳤다. "좋아, 다시 한 번!" 손으로는 덩굴을 단단히 움켜쥐고 발로는 낭떠러지를 딛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나아가는 그의 등에는 공주가 매달려 있었다. 다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는 위험천만한 자세임에도 티스베 공주는 태평했다. 티스베 공주는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아버지와도 이렇게 밀착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소년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보았다. 얼굴이 시뻘개지고 핏대가 설 정도로 힘을 써가면서 위로 올라간다. 두 사람의 무게를 끌어올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지 못하는 그녀였지만 우현이 지금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땀에 젖은 우현의 등과 맞닿은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그녀는 우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티스베 공주가 이렇듯 얌전히 있어준 덕에 우현은 그럭저럭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거의 다 올라왔다 싶을 무렵이었다. 우현은 치밀어오르는 기쁨을 억지로 담담하게 누르고 침착하려 애썼다. '한 발만 더!' 그는 손을 뻗어 덩굴이 아닌 대지를 붙들려 했다. 그 순간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이리저리 쓸린 덩굴이 투둑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강하게 힘을 주고 있던 손이 허전함을 느낀 그는 얼른 손을 뻗었지만 그것을 허공을 움켜쥘 뿐이었다. "큭...!" 이제 방법은 하나다. 공주를 위로 가도록 해서 그녀가 최대한 충격을 덜 받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는 몸을 뒤집으려 했다. 그때였다. 소리로 하자면 '탁' 정도가 되지 않을까. 우현은 무엇인가가 자신의 손목을 힘있게 감아쥐는 것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상대의 손목을 거머쥐었다. 부드럽게 감기는 피부의 감촉이나 다소 서늘한 체온이 눈물나게 익숙했다. 우현은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도 잊은 채 넋을 잃었다. "그렇게 정신을 놓고 내게 매달리면 기쁘지만 곤란해. 어떻게든 올라오라고... 우현." 말 끝에 가만가만 붙은 이름은 무척이나 정다운 어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음성에 정신을 차린 우현은 돌부리니 바위 등을 붙잡고 기어올랐다. 우현이 올라올 때까지 든든한 힘으로 지탱을 해준 손가락은 그가 무사한 곳에 다다랐을 때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우현은 고개를 들어 자신이 느낀 감촉과 들었던 목소리가 진실인지 확인했다. 너무나 보고싶어서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사람은 확실한 형체를 지니고 있었다. 우현은 천천히 손을 뻗어 새하얀 뺨에 댔다. 그의 손에 닿은 핏기 없는 뺨이 부드럽게 움직여 미소를 그려냈다. "아-" 그리고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현은 마구잡이로 손을 뻗어 이스드를 끌어안았다. 서늘한 내음이 눈앞에 있는 그를 실감하게 했다. 그 느낌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진 우현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보고싶다고는 생각했지만 눈물이 나올 정도라고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이스드, 이스드, 이스드!" "응, 그래. 나다." 그럭저럭 무사한 것 같구나, 라고 덧붙이는 목소리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웃음이 섞였다. 우현이 부둥켜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가만히 있자 이스드는 자줏빛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얼굴을 보고싶다고 생각했다. 내내 보고싶다고 생각한 것은 우현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으로 되었다고, 그는 품에 안긴 몸을 내려다보며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이제야 조금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면 그를 아는 사람들은 혹여나 비웃을까. "그런데... 우현?"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우현은 자신을 부르는 상냥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본 하얀 얼굴은 어쩐지 몇 달 전보다 더욱 잘생겨진 것 같았다. 콩깍지의 위력이라는 놈이었다. 조금은 멍하니 풀린 새까만 눈동자를 본 이스드는 그로서는 드물게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그 뒤에 붙은 것을 어떻게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티스베 공주였다. 덩굴이 끊어지는 순간 정신을 놓아버린 그녀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 하며 허둥지둥 단검을 꺼낸 우현은 간단히 덩굴을 끊고 공주를 안전하게 눕혔다. 이스드는 일련의 조심스러운 동작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후우, 이제 좀... 에?" 휙하니 끌어당겨진 몸이 하얀 품 안에 포옥 하는 느낌으로 안겼다. 우현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간 이스드는 동그스름한 귓바퀴를 입술로 지분거리며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 색기가 잔뜩 깃들인 남자의 음성은 여자의 가슴 감촉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우현은 그날 경험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게다가 점점 아래로 아래로 내려만 가는 입술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던 그는 이스드가 몸을 일으키며 나직하게 웃는 것을 듣고나서야 비로소 파르르 대들었다. "말했잖아요! 이런 것은 서, 성희롱입니다!" "알고 있어. 모르면 할 리가 없잖아?" 놀려대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인 건가. 우현은 주먹을 움켜쥔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드러난 목덜미가 붉어진 것은 이스드만이 본 즐거움이었다. 멀리서 불빛과 함께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말은 곧 약속. 한 번 말을 했으니 지켜야겠지요. 모 동에서 7장 4편의 리플에 '다음 번에 이스드가 나와요'라고 적는 것으로 모자라 '분량을 늘려서라도...' 어쩌구 말했으니 오늘 등장을 시킵니다, 휴우. 다른 때의 배는 되는 양이군요. 뭐, 제 무덤이니까요(으쓱) 그나저나 먼지투성이인 우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술로 더듬는 저 남자, 비위가 상당히 좋든지 아니면 욕구불만으로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봬지 않든지 둘 중 하나겠군요(웃음)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7장 여정 -6- 모닥불의 열기가 기분 좋았다. 어른어른하는 황금빛이 눈을 간질여, 우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잠이 덜 깨어 흐릿한 시야로 하얀 얼굴이 보였다. 까만 하늘을 바라보는 듯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시선은 어딘지 굳은 것 같았다. '이스드?' 속으로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는데 소리로 나온 모양이었다. 이스드는 시선을 내리고 단정한 입가에 미소를 걸며 말했다. "좀 더 자라. 아직 한밤중이야." "으응..."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끄덕거린 우현은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을 통해 끊임없이 전해지는 쓰다듬는 감촉은 누구의 짓인지 너무도 분명했다. 곁에 있다는 뚜렷한 증거인 감각이 우현을 기쁘게 했다. 그는 가물가물하니 멀어지는 정신 너머로 저녁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마도 이스드는 혀를 찼던 것 같다. 너덜너덜 엉망이 되어버린 옷차림과 먼지가 잔뜩 앉아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된 모습을 보고 말이다. 그것이 마치 야단을 치는 느낌이라 우현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도대체 말이다, 너라는 녀석은..." 그리고 한숨 한 번. 그것으로 잔소리를 마친 이스드는 우현의 손을 잡아올렸다. 거칠게 감은 붕대 군데군데에 피가 묻어있었다. 이스드가 말했다. "무모함도 이 정도면 훌륭한 바보다." 찔리는 구석이 적지 않게 있는 우현은 그저 얌전히 치료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알지 못했지만 기절에서 마악 깨어난 공주와 지척까지 다가온 일행들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낮은 탄성이 들려오고난 후에야 그것을 깨달은 우현은 공주의 초롱초롱한 시선을 마주하고는 곤혹스러워 지는 것을 느꼈다. "엣, 저어..." "그 분은 누구? 아는 사이냐?" "네. 제게 글을 가르쳐주신 신관님이십니다."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그것도 백의를 입은 신관. 일행들이 이스드를 초빙(?)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안 그래도 퀴아네의 습격으로 사상자가 상당했던 것이다. 우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스드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이제껏 알아온 이스드의 성격이라면 이런 제안을 쉽사리 승낙할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드는 의외로 흔쾌히 대답했다. 게다가. "안 그래도 나 역시 라벤다로 가는 길이었소. 어차피 가는 길이 같으니 사양을 할 이유가 없겠지." 아랫사람을 대하는 느낌이 역력한 말투였다. 그럼에도 귀족 출신의 호위기사들은 그의 말투를 트집잡지 않았다. 약한 자에게는 강하나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하다. 그것을 깨달은 우현은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지금 이 상태다. 우현은 졸음이 쏟아지는 눈을 들어 이스드를 보았다. 이상스러울 만큼 거리가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해죽 웃고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본 이스드는 피식 웃었다. 퀴아네에게 당했다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돌아오니 우현은 이미 잠이 들어있었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곁에 앉은 이스드는 열린 옷깃 사이로 보이는 상처에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어째서 상처가 있음에도 말하지 않은 거냐.' 혀를 끌끌 찬 그는 우현을 일으켜 품에 기대게 하고는 상처를 치료했다. 옅은 빛이 그들의 주변으로 퍼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것을 안 이스드는 우현을 더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말하자면 해충 방지, 대인 경고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명백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연신 흘금흘금 그들을 향하고 있었다. 너무나 바쁜 나머지 수반을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이스드는 그래서 기사들의 일부가 어떤 시선으로 우현을 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잠깐만으로도 상황 파악은 충분하다. 이스드는 날카로운 시선을 들어 주변을 훑었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우현이 부스스 눈을 떠 이스드를 본 것은. "...스드?" 웅얼거리며 나온 이름은 그의 것. 이스드의 안색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미소를 떠올린 채 말했다. "좀 더 자라. 아직 한밤중이야." "으응..." 이스드는 다시 눈을 감는 우현을 더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다소 말랐다고는 해도 어린아이를 대하듯 안기에는 버거운 어엿한 남자의 몸을 가진 우현이었다. 그럼에도 아이처럼 파고드는 모습은 어떻게 보아도 애정 결핍. 안 그런 듯 보이는 평소의 모습이 오히려 이스드에게 확신을 주었다. 이스드는 자신의 안에 솟구치는 다정스러운 감정을 인식하고는 입술을 내려 우현의 이마에 댔다. 지나치도록 부드러운 감정은 오히려 파괴적이다. 자신의 냉랭한 내부를 무너뜨릴 듯 흔들리는 격랑은 전적으로 우현의 탓이었다. 그가 최초로 부린 고집을 이루기 위해 치룬 한동안의 격무와 그것으로 인한 피곤함이 전부 보답을 받은 첫째 날의 밤이었다. 우현을 눈을 뜨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입만 뻥끗거렸다. 기가 막히도록 단정한 얼굴이 바로 앞에서, 게다가 눈까지 감고 있었던 것이다.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른 그는 이스드의 품에 안긴 자신을 자각하고는 얼른 도망쳤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치며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뭐, 뭐뭐뭐, 뭐뭐뭐뭐뭐!' 자고 있다, 자고 있다. 이스드가 자고 있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손가락을 들어 이스드만을 가리키는 우현, 최초로 함께 맞은 아침 - 오해하지 말자 - 이 어지간히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등을 통해 느껴지는 이것은 굉장한 양의 시선들이었다. '끄아아아악! 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스드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가 그렇게 패닉 상태에 빠져있는데 이스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품에 있던 따뜻한 것이 사라진 게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듯 얼굴을 찡그린 이스드는 얼어붙은 채인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우현은 이스드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잠시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있던 그는 이스드의 어깨를 마구 밀어대며 외쳤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아! 잠꼬대는 자기 집에서나 해요!" "그럼 집에서는 해도 된다는 거냐?" 우현의 말을 받아 이죽거린 것은 위렌이었다. 우현은 간청하는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남의 연애사정에 참견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아서." "뭐, 뭐, 뭐라고 한 겁니까, 지금!" "별 말 아니야. 단지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으면 더욱 더 남의 눈에 잘 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왔다." '게다가 하룻밤 내내 부둥켜안고 있었는데 새삼 뭘'이라고 중얼거리는 위렌, 여러모로 강한 남자라는 것을 우현은 새삼 깨달았다. 그가 유유히 떠나자 우현은 자꾸만 자신을 끌어당기는 이스드의 품으로 얌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서늘한 향기가 기분 좋았다. 주변에 사람들만 없었으면 참으로 즐겁게 시작된 아침일 텐데, 라고 생각하는 우현, 역시 녀석도 남자였다. 아침식사가 끝난 후 잠시 사라졌던 이스드는 말을 한 마리 끌고 나타났다. 밤색의 평범한 터럭이 주인과 지나친 미스매치를 이루는, 그래서 오히려 기가 막히도록 눈에 띄는 말이었다. 내심 '이스드라면 백마나 흑마를 타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던 우현은 그래서 킥킥 웃고말았다. "뭘 그렇게 웃고 있는 거야? 자, 네 말이다." 죽은 기사가 타고 있던 말을 끌어온 위렌이 핀잔을 주었다. 우현은 바뀐 주인이 익숙지 않은지 이리저리 투레질을 하는 말을 잘 달래며 물었다. "그런데 카이엔은요? 아까부터 보이지를 않던데 또 공주에게 붙잡혀 있나요?" "...나쁜 놈." "네?" 위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눈치를 못 채면 카이엔이 불쌍하다. '아니, 알아도 불쌍한가.' 어차피 우현의 마음은 정해져 있다. 위렌은 '축 실연' 등의 문구를 떠올리며 우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는 그냥 그렇게 살아라." "그거 지금 욕으로 받아들여도 좋은 겁니까?" "어? 그걸 이해할 머리도 있었어?" 그렇게 장난을 치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우현보다 먼저 그것을 알아챈 위렌은 자신을 무시무시하게 바라보는 남빛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슬그머니 손을 치웠다.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을 기분 좋게 만끽하고 있던 우현은 다소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돌렸다. "아, 이스드." 살벌했던 남빛 눈동자가 어느새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져 있다. 위렌은 들리지 않도록 투덜거렸다. 일행에서 카이엔과 우현의 자리는 공주의 마차 옆이다. 마차 곁으로 다가간 우현은 어딘지 좋지 못한 안색의 카이엔을 볼 수 있었다. "카이엔, 어디 아파요?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아아, 잠을 좀 설쳤다. 그런데 우현..." "아이겐튼 자작? 우현이 왔어요?" 기묘하다. 우현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 목소리를 인식한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순간 그는 그 목소리가 티스베 공주의 것이며, 그녀가 최초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저 공주? 혹시 아침을 잘못 먹었나?' 그도 그럴 것이 공주의 목소리에는 역력한 반가움이 깃들여 있었던 것이다. 공주의 유모인 사비나가 무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훈계 반 사정 반의 목소리였다. 곧이어 마차 문이 벌컥 열리더니 로즈 핑크의 드레스 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우현!" 공주다. 스트로베리 블론드를 아무렇게나 풀어내린 그녀는 우현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에 깃들인 솔직한 기쁨을 본 우현은 당황하고 말았다. "우현, 몸은 좀 괜찮아?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낭떠러지에서 굴렀다고 하던데." "에? 아아... 괜찮습니다. 별로 다친 곳도 없고, 이ㅅ... 신관님이 치료해주셨으니까요." 카이엔의 얼굴에 다소 미소가 떠올랐다. 아름다운 공주님이 예쁘장한 소년에게 달려들어 말을 거는 장면이 상당히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사랑스러운 것이 막무가내인 공주인지 순진하게도 당황한 소년인지는 그만이 아는 바다. 그러나 그가 그날 아침 처음으로 떠올린 미소는 곧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곧 출발할 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티스베 공주. 그만 그를 놓아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차디찬 목소리였다. 그 안에 서린 냉기에 다소 움찔한 공주는 백의 위에 잿빛의 망토를 걸친 아름다운 신관을 돌아보았다. 주교급의 신관 쯤이 되면 아무리 공주라 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게다가 남을 부리는 것에 익숙한 이스드의 분위기는 티스베 공주마저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녀는 얌전히 우현을 놓아주었다. "공주님, 그만 마차에 오르세요. 오늘부터는 내내 마차에서 가시기로 한 약속을 잊지 않으셨지요?" 그 짧은 틈을 탄 사비나가 잽싼 동작으로 공주를 마차 안에 태웠다. 그 뒤를 따라 마차에 몸을 실은 사비나는 곧 작을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오랜 시간 왕가에서 일을 해와 눈치가 빠른 그녀의 시선은 우현을 향하고 있었다. 아이겐튼 자작이라면 상관없다. 인물도 좋고 혼혈이라는 핸디캡을 상쇄할 정도로 능력도 있는 사람이다. 지위가 조금 낮다고는 하지만 공을 세우게 한 후 높은 작위를 내리면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저 소년, 자작의 종자에 불과한 우현은 아니었다. 애지중지 길러온 공주가 고작 저런 소년에게 눈을 돌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딸이라 해도 국왕이 진노할 것은 불 보듯 훤했다. 사비나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우현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것을 본 이스드가 물었다. "추운가?" 자기 망토까지 벗어줄 기세다. 우현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앞을 향하는 우현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본 이스드는 곧 마차를 노려보았다. 공주의 행동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은 사비나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가둬둘 것을.' 어찌 보면 파괴적인 생각이었지만 이스드 자신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감금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우현이 이렇게 놓여서 지내지 않았더라면, 자유분방하게 웃고 뛰고 싸우지 않았더라면 이스드의 이런 마음은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뜨겁고 격렬하며 그럼에도 어딘지 온유로운 감정이 없었더라면 하고 바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없애라고 한다면 그것은 싫었다. 자신의 마음을 곰곰이 들여다본 이스드는 우현의 옆얼굴을 보았다. 동그스름한 윤곽이 어딘지 온화해보이는 앳된 얼굴은 그에게 있어 세상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우현은 지금 그의 곁에 있었다. '아아, 그런가.' 이스드는 미소를 지으며 결론을 내렸다. 자신은 지금 행복한 것이 분명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7장 여정 -7- 트루바두르의 라리나 소리가 애절하게 울려퍼지는 저녁이었다. 따뜻한 스튜로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방만한 자세로 앉거나 누워 그 소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연신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짙은 자줏빛이 특별히 달콤한 포도주를 연상시키는 머리카락을 가진, 호리호리하지만 어딘지 강단 있어 보이는 체격의 소년은 나무 둥치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그의 피부는 몇 대 전에 지고이네르의 피가 섞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들 정도로 독특한 색깔이었다. 그것은 혼혈로서는 가장 유명한 아이겐튼 자작의 피부보다는 옅었는데, 굳이 말하자면 밀이삭의 색깔과 비슷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열 일고여덟 살 정도 되었을까 싶은 소년은 현재 티스베 공주의 일행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소년의 눈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길게 내린 앞머리에 가려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가 그렇게 앉아있을 때면 제법 친하다고 자부하는 유타마저도 함부로 가까이 가지 못했다. 기사들은 안 보는 척 점잖게, 하인들이나 종자들은 저희끼리 수군거리며 소년을 연신 곁눈질했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언제부터인가 그 독특한 분위기의 소년 종자가 자신의 라리나를 즐겨듣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트루바두르는 연습을 하는 체 음을 고르며 다음 곡을 생각했다. 그런데 트루바두르가 마음을 정한 순간 일행들의 분위기가 일천했다. 마치 스쳐지나가던 차가운 바람이 그 자리에 머무는 느낌이었다. 계절이 겨울이라 찬바람이 불어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일행 중 어느 누구도 이 독특한 한기를 겨울 바람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혼자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가슴 깊이 스미는 한기는 얼음물을 들이켰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새하얀 신관복 자락을 우아하게 펄럭거리며 다가온 신관이 소년의 앞에 멈추어 말을 건넨 것이다. 그 신관은 일개 종자인 소년으로서는 함부로 올려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높은 신분의 사람이었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별로... 라리나 소리가 좋아서요." 먼 곳의 안개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던 소년의 분위기가 신관의 등장과 동시에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는 것은 몇 번을 보아도 신기한 변화였다. 이러한 변화는 신관도 마찬가지로, 겨울 숲마냥 싸늘하기만 했던 분위기는 소년이 미소를 띤 얼굴로 올려다보는 것과 동시에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신관의 얼굴은 다소 찌푸려져 있었다. "내게서 떨어져 외따로 있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일렀거늘. 너에게는 학습능력이라는 것이 없는 거냐, 우현?" 신관, 이스드는 한숨까지 섞어가며 훈계했다. 그러자 우현이라고 불린 소년은 목을 움츠리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질 수밖에 없는 입장인 이스드는 우현의 곁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우현이 얼굴을 찡그렸다. "옷 더러워져요." 이스드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우현을 잡아끌었다. 나무 둥치 대신 이스드의 가슴에 기대게 된 그는 발버둥을 쳤다. "이, 이스드! 자꾸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말라니까요!" "이런 식이라니, 어떤 식?" "이스드!" 이스드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일행에서 우현 하나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부를라치면 이스드는 남빛 눈동자에 차가움을 가득 담고 상대방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상대는 위압감에 짓눌려 도망도 못 가고 달달달 떠는 것이다. 그런 이름을 마구마구 불러젖힌 우현은 기어이 이스드의 팔에서 벗어났다.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이스드를 노려보는 눈동자는 제법 무서웠지만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는 박력이 없었다. 이스드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뭐가 문제인데? 사람들이 보는 것? 지금이 어둡지 않다는 것? 잘 때에는 잘도 안겨오면서." "그, 그, 그런 발언이 문제인 겁니다, 당신은!" 그랬다. 이 두 사람이 밤마다 서로에게 의지하여 잠을 청한다는 것은 일행 중에서는 이미 비밀도 아니었다. 두 사람의 포옹이 그다지 에로틱한 분위기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한 쪽은 안 그래도 주목받던 종자이며 다른 한 쪽은 왕족마저도 함부로 못 하는 주교급의 신관이다. 눈에 띄기로는 일행에서 1, 2위를 다투는 두 사람인 만큼 소문거리로는 최상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추악한 소문도 얼마든지 있었다. 실제로 종자란 기사들의 시중을 드는 것뿐 아니라 성욕을 해소하는 도구로도 이용되곤 했다. 얼굴 반반한 종자치고 기사와 몸을 섞지 않은 녀석이 없었으며 때때로 기사들은 서로의 종자를 빌려주기도 했다. 게다가 신관은 이성과의 접촉이 엄격히 금지되는 족속들이다. 남자만이 득시글거리는 신전에서의 남색따위는 그리 경악할 일도 아니었다. "그건 추워서 본능적으로 움직인 거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잖아요!" "섭섭하군, 우현. 나는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라 일부러..." "이스드읏!" 그러나 현재로서 가장 지지를 받고있는 것은 반응이 격렬한 소년을 놀리는 것에 재미를 붙인 신관이 소년의 성질을 득득 긁고있다는 설이었다. 사람의 몸이란 정직하여, 한 번 몸을 섞으면 남자든 여자든 눈의 태깔부터 달라진다. 눈동자는 묘하게 물기를 띠며 눈매는 교태로운 휘어짐을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현의 반응은 색기의 파편 하나 엿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리기만 했다. 이제 사람들은 두 사람의 주고받음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 좀 놓으라고요! 이스드는 상식이라는 것이 없어서 아무렇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결국 결론은 그거로군? 사람들의 시선 말이야." 그러나 이 구경에는 맹점이 하나 있었으니 신관의 행동이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잽싸게 얼굴을 돌렸다. 그 직후 이스드의 눈동자가 주변을 훑었다. 남빛의 날카로운 눈매는 서릿발과도 같은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직격당한 자들은 꽁꽁 언 채 뻣뻣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으며 알아서 긴 일부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몰래 쉬었다. 결국 해충 퇴치 내지는 영역 표시인 셈이었지만 북풍 같은 기도를 담은 눈동자는 그런 유치한 이유를 싹 잊게 만들 정도였다. "자, 됐지?" 이스드의 목소리에서 은근한 자랑스러움까지 느낀 우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옆에 없으면 찡찡거리며 달려오고 멀리 가있다 생각하면 금세 달라붙어 부비적거린다. 그런 주제에 독점욕은 남의 몇 배는 되는지 다른 사람이 쳐다보는 것조차 허용을 못 하겠다는 듯 눈을 부라리고 나서는 것이다. '완전히 어린아이가 따로 없다니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현의 관점으로,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기겁을 할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찡찡거림은 찡찡거림이다. 조용히 서서 한기와 위압감을 풀풀 풍겨대며 우현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는 그 행동을 어리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어디에?'라고 묻는 서릿발 만땅인 음성도 찡찡거림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대단한 변화였다. 우현은 이스드를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에피서스의 밤,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구며 앉아 캐스터네츠를 깎던 그에게 다가와 상처를 치료하며 조심하라고 비웃던 이스드. 차가운 말투와 냉정한 얼굴에 기가 질려 금방이라도 막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더랬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차갑기 그지없지만 우현에게 하는 행동만은 다정했다. 우현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그는 그래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손길이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마를 짚은 채인 그의 손목에 다소 체온이 낮은 손가락이 감겼다. 우현이 '어어' 하는 사이에 몸은 어느새 하얀 품에 감싸여 있었다. "이스드!" "사람들의 시선도 없고 날도 어두워졌다. 이 정도면 훌륭한 조건이지. 안 그래?" 어째서 이렇게 밝히는 것일까. 사소한 스킨십을 거의 집착 수준으로 즐기는 이스드를 본 우현은 한숨을 쉬고는 얌전히 안겼다. 포기한 것이다. 그런 그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본 이스드는 손을 가볍게 움직여 우현의 등을 토닥거렸다. "내가 앱니까?" 우현은 투덜거렸지만 기분이 상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스드의 서늘한 품속은 감정적으로는 매우 따뜻했던 것이다. 라리나의 소리로 감상적이 되어있었던 우현은 그의 부드러운 스킨십에 안도하고 의지하는 자신을 느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그에게 안주하고 있었다. 겨울의 대지는 차갑다. 모포를 통해 올라오는 냉기에 몸을 움찔한 우현은 이스드의 품에 깊이 파고들었다. 선잠이 들었던 이스드는 그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언제나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되어있는 그의 신관복은 주변의 냉기를 차단했지만 그것은 이스드 한 몸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어지간히도 추운지 자꾸만 파고드는 우현을 잠에서 깨지 않을 만큼만 강하게 끌어안은 이스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잠이 든 사람들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얼굴을 찡그린 그는 결국 우현을 조심스레 들어안고 자리를 옮겼다. 불침번을 서는 기사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얼굴을 들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힌 나무뿌리가 마치 의자처럼 올라와 있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스드는 우현의 가는 몸을 힘주어 안았다. 편안한지 샐쭉 미소를 지은 입술이 마치 장미 봉오리가 피어나는 것만 같아, 이스드는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으음..."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순간 우현이 낮게 잠꼬대를 했다. 나쁜 짓이라도 한 듯 - 사실 사회 통념상 도둑 키스를 좋은 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 화들짝 놀란 이스드는 그것이 잠꼬대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소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한 생활을 수반을 통해서가 아닌 몸으로 직접 느낀다는 것은 대단히 즐겁고 또 설레는 일이었다. "콜록..." 우현이 작게 기침을 했다. 손을 들어 주변의 온도를 가늠한 이스드는 우현의 이마에 손가락을 댔다. 곧 옅은 빛이 일며 우현의 주변에 따스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스드는 그것이 정말로 기뻐져서 미소를 지었다. 신은 알고 있을까. 신이 그에게 내려준 힘은 현재 한 인간을 위한 사소한 배려에 쓰이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이런 얼빠진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조한 그는 그러나 우현을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한밤중의 냉랭한 공기 속으로 그보다 한층 차가운 음성이 나직하게 울려퍼졌다. "엿보는 것이 취미인가." 이스드의 말이 떨어지고 얼마 안 있어 그들의 근처에서 부스럭거림이 일었다. 잠시 후 이스드의 앞에 그림자가 하나 다가왔다. 훤칠하니 키가 큰 청년이었다. 이스드가 말했다. "누군가에게 내려다보이는 것에는 익숙하지가 않네만, 아이겐튼 자작." "그 반대의 경우는 익숙하다는 겁니까, 신관님." 이스드의 말을 앉으라는 의미로 해석한 카이엔은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이스드는 카이엔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우현을 보듬어 안았다. 뺨 한 조각 머리카락 한 올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듯한 행동을 본 카이엔은 안도 반 쓰라림 반인 심장을 감내해야 했다. "그를 정말로 아끼는 모양이군요." "그건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자작." 카이엔은 이스드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미모로 명성이 자자한 귀부인들의 잘 가꿔진 모습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 얼굴이었다. 차가운 눈매는 강력한 힘을 품은 듯 자신만만한 느낌이었으며 콧날은 성격을 나타내는 듯 날카로웠다. 섬세한 턱선은 태생이 고귀한 자 특유의 느낌을 풍기고 있었으며 손은 부드럽기만 했다. "나는 관찰당하는 것 역시 익숙하지 않아." "우현이 바라볼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셔서 말이지요.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카이엔이 대답하자 그때껏 차갑기만 했던 이스드의 음성이 날카로움을 품었다. "그대의 입에서 나오는 그의 이름은 내게 불쾌하게 들리는군." "그렇습니까? 허나 너무 밀어붙이는 신관님의 태도 역시 보기에 썩 좋지는 않습니다." "이 역시 자작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되는군."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것이지요." 즉각즉각 잘도 응수하고 있는 카이엔이었지만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매서워만지는 이스드의 위압감은 이미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전장의 피 냄새 어린 살기와는 다른 느낌의 살기가 카이엔의 전신을 자극했다. 그는 검에 손을 가져가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죽는가.' 등골이 서늘해졌다. 카이엔은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그 순간 그를 감싸고있던 살기가 사그라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리둥절해진 카이엔의 귀에 이스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라, 자작." 이스드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카이엔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카이엔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깊은 잠에 빠진 우현의 얼굴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 얼굴을 내려다보는 이스드의 얼굴도 비슷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카이엔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귀에 쓸데없는 말을 불어넣은 것이 바로 자작이었지." 멜키세덱의 눈에 속한 첩자니 어쩌니 우현에게 말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카이엔이 대답하지 않자 이스드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 우현에게 향하는 것과는 명백하게 다른, 차가운 경멸과 가소로운 것을 보는 듯한 감정 이외에는 아무 것도 담지 않은 웃음이었다. "믿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자작이 믿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으니까. 아니... 연적을 믿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연적. 우현이 들었더라면 팔을 긁고 경기를 일으킬 단어였지만 카이엔에게 있어 그것은 협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침을 꿀꺽 삼킨 카이엔은 진득한 살기를 담은 남빛 눈동자를 간신히 마주보며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내 감정을 알아달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알고 있다. 만약 그런 기미가 보였더라면 내가 손수 그대의 숨통을 끊었겠지." 이스드의 눈동자는 진심이었다. 카이엔은 기가 막혔다. "당신은 도대체...! 그 정도로 사람을 죽인다는 겁니까?" "시끄럽다. 자작때문에 그가 깬다면..." 이스드는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카이엔은 뒷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카이엔은 비척거리며 돌아섰다. 세상에 하고 많은 좋은 사람들을 놔두고 도대체 어디서 저런 상대를 고른 것인지 생각하니 우현의 머리를 퍽퍽 후려치며 훈계라도 하고 싶었다. 엿보는 것이 취미인가, 라는 이스드의 말을 워드치며 저는 궁시렁거렸습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이냐!'라고 말이죠(웃음) 앞부분은 쓰는 내내 닭살이 돋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벅벅벅!) 아, 이스드가 끊은 말 이후의 것은 '우현의 잠을 깨우면 죽여버리겠어'입니다 ^^;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7장 여정 -8- 주변이 시끄러운 것으로 보아 하루가 시작한 모양이었다. 평소의 배는 되는 따스함을 느끼며 모포 속에서 부비적거리던 우현은 가까운 곳에서 울리는 나직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곧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넘겨졌다. 기분은 좋았지만 다른 이유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우현은 미간을 조용히 구기며 눈을 떴다. "...후우." 예상했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은 유난히도 얼굴이 가깝다. 정신을 차린 우현은 자신이 일명 '공주님 안기'라는 방식으로 안긴 채라는 사실을 깨닫고 소리 없이 절규했다. "내가 왜 이렇게 안겨있는 겁니까." 우현이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자 이스드는 여유작작 웃으며 대답했다. "뭔가 문제라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물어오는 것이 오히려 우현에게 의욕 상실을 가져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좀 더 길게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밤새 그를 안고 있던 이스드는 팔이 저린 듯 관절을 이리저리 굽혔다 폈다. 그것에 다소 미안해진 우현은 그러나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하는 시선의 양을 느끼고는 마악 피어오른 미안함의 궁둥이를 걷어차 날려버렸다.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가운데에서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은 게 그나마 구제려나.' 일행에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수상함의 정도가 더욱 심해진다는 것을 우현이 좀 알았으면 좋겠다. 그는 피어오르는 머쓱함을 머리를 긁적이는 것으로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마구 헝클어뜨리면 나중에 고생하게 된다." 뒤에서 다가온 손길이 우현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만져주는 손길이 잠이 올 듯 나른하여 눈을 가늘게 뜬 우현은 그러나 다음 순간 정수리에 와닿는 말캉한 감촉을 느끼고 몸을 굳혔다. 촉, 하는 소리는 감촉에 뒤이은 확인사살이다. "어, 어버버... 어버버버버..." "새로 난 머리가 까맣다. 다시 물들여야겠군." '그런 문제가 아니야!'라고 힘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우현은 그러나 정말로 기분이 좋은 듯 보이는 이스드의 얼굴을 보고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말았다. "어째서 이렇게 남의 눈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겁니까아..." "흐음? 나로서는 대단히 신경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현뿐 아니라 이스드의 말이 들리는 범위 내에 있던 일행 전부가 '그게 어디가 신경을 쓰는 사람의 태도입니까!'라고 외치고 싶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스드의 발언은 나름대로는 사실이었다. 다시 만난 이후 제대로 된 입맞춤도 한 번 없이 뽀뽀만 세 번 - 그나마 우현은 지금의 한 번 이외에는 전부 자고 있었다 - 이다. 이 정도면 대단히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현이 들었더라면 바락 바락 악을 쓸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이스드는 애꿎은 우현의 머리카락만 지분거리며 싱긋 웃었다. "게다가 해충 퇴치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니까." "하아? 한겨울에 무슨 벌레 타령입니까?" 우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지만 이스드는 '그런 것이 있다'라고만 할 뿐 자세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이스드로 인한 아침의 작은 소란은 날카로운 시선 몇 번에 금세 가라앉았다. 우현은 내내 흘금거리는 사람들을 무시하려 애쓰며 식사를 했다. 작은 빵조각과 따뜻한 스프, 말린 과일 몇 조각에 묽게 우려낸 차가 전부인 식사였지만 이스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높으신 분 치고는 대단히 적응이 빠르네요." 우현이 무심코 말하자 이스드가 고개를 들었다. 남빛의 머리카락과 새하얀 얼굴, 거기에 어우러진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목구비가 곱상하게 느껴질만도 한데 이스드의 얼굴은 날카롭고 고귀한 인상을 풍길 뿐이었다. 그의 차가운 인상에 일조하는 옅은 색 입술이 움직였다. "확실히 나는 높은 지위에 속하는 고귀하신 몸이지. 하지만 이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갓 만들어 따스한 음식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먹는다는 경험은 너와 함께 했던 그때가 최초였다. 독 검사를 마쳐 차갑게 식어만가는 음식을 넓은 식탁에 혼자 앉아 예법에 따라 묵묵히 먹는 것보다는..." 독 검사라는 말에 놀란 우현이 이스드의 팔을 잡았다. 그것에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는 봄볕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마주앉아서 먹는 것이 훨씬 기분 좋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이스드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조금의 거짓도 허세도 섞여있지 않은 진실한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우현은 마음이 아팠다. 과거 이스드가 했던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되돌린 적이 있었던가. 그때 이스드는 참혹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었다. 아마도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라고. 그때는 잘못했다는 감정에 치우쳐서 그 안에 깃들인 막연함 같은 것은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우현이었다. 그래, 막연했다. 자신의 상황에 확신조차 가지지 못하고,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그래서 질문을 받았을 때에 확실한 대답조차 하지 못했던 이스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드는 자신의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것이겠지만 우현은 그것이 더욱 슬프게 느껴졌다. 슬픔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만큼 슬픈 것도 없으며 외로움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만큼 외롭게 보이는 사람도 없다.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스드의 손을 움켜쥐었다. 의외의 행동에 다소 당황한 이스드가 우현을 보았다. 자신을 향하는 눈동자는 맑기만 한 검은색. 지닌 감정을 언제나 솔직하게 드러내는 그것은 지금 이스드만을 향하고 있었다. 순간 가슴에서 시작된 열기가 머리까지 잠식하는 것을 느낀 이스드는 정신이 아찔해진다는 생소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이스드, 내가..." 그때였다. 마차가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치 굴러떨어지듯 마차에서 뛰어내린 시녀가 실크가 찢어지는 듯 날카로운 비명을 올렸다. "공주님이, 티스베 공주님이 없어지셨습니다!" 주변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짐을 지킬 일행 몇몇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공주를 찾는 일에 투입되었다. 우현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나뭇가지를 들추며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라니.' 시녀가 소리를 지르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현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스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냉정함을 지우고 웃는 얼굴만 했으면 좋겠고 마음 깊이 포근한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것이 그때 우현이 했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머리가 식은 지금은 창피하기만 했다. 자신이 떠올렸던 감정에 쑥스러워진 것이 아니었다. '내 한 몸 건사도 못하면서 도대체 누굴 지켜주겠다고...' 게다가 이제껏 이스드에게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아온 그였다. '이스드가 들었더라면 얼마나 기가 막혀 했을까.' 우현은 말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 시각, 이스드는 모닥불 곁에 앉아있었다. 너풀거리는 신관복을 입고 숲속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우현의 우김에 따른 결과였다. 다른 때였더라면 무시하고 따라갔을 테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올곧은 눈동자. 먼 곳에 있는 희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검은 눈은 순진하고 또한 엄격했다. 스스로에게조차 도피를 허용하지 않는 그 눈은 결벽증적인 자존심마저 느끼게 했다. 그래서 그가 기댔을 때 너무나도 기뻤다. 기쁨이라는 감정이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뻤다. 그런데 그 감정마저 약과였다. 이스드는 가슴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미친 듯이 쿵쿵거리는 심장이 겹겹한 옷 너머로 느껴졌다. 그 곧기만한 시선을 온전히 받는다는 느낌은 이런 것이었다. 우현이 붙들었던 손은 아직도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엇을 말하려고 한 거지." 이스드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또렷한 검은 눈동자 가득 부드럽고 안타까운 감정을 가득 채운 채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우현의 눈동자에 들어있던 것에 심장이 요동쳤다. 시야가 이지러져, 이러다가 정신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스운 생각도 했었다. 이스드는 심장을 뒤덮은 옷자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심장이 지끈거릴 지경의 달콤한 괴로움, 마음을 뒤흔드는 부드러운 감정, 포근하나 어딘지 격렬하고 저린 감각이 심장에 차다못해 범람하여 이스드를 잠식했다. 우현은 아까 하려던 말을 입밖으로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표정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었던 이스드는 그러나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스드는 우현의 손이 닿았던 부분에 입술을 대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까지 나를 휘두를 생각인 거냐, 너는." 눈앞에 있다면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붙들고 깊이깊이 입을 맞출 텐데. 감정의 격류를 못 이겨 눈가를 찡그린 그는 그러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 행복해서 당장 죽어도 좋다는 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생각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죽을 만큼 행복했다. 숲 깊숙한 곳으로 걸어들어간 우현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이런 곳까지 왔을까.' 수많은 기사들 가운데에 있는 마차에서 공주만 살짝 빼돌려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공주의 실종을 납치가 아닌 장난기가 발동한 도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현은 공주와 단둘이 있었던 잠깐의 시간을 떠올렸다. '그 건방지고 겁많은 공주가 이런 깊은 숲에 혼자 들어올 수나 있을까.' 빽빽한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가려 어두운 사방. 그것에 이름 모를 새들이 끽끽 울어대는 소리가 어우러진 숲은 대단히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확신한 그는 몸을 돌려 노숙을 했던 곳으로 걸어갔다. 공주를 찾느라 꽤나 깊이 들어왔는지, 그는 한참을 걸은 후에야 모닥불의 빛을 볼 수 있었다. 빛 옆에 있는 백의가 우현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이...!" 우현이 이스드의 이름을 부를 때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려든 무엇인가가 우현을 덮쳐들었다. 뒤늦게서야 그것을 알아챈 그가 돌아섰지만 상황은 이미 종료. "우현!" 옅은 하늘색의 실크드레스 덩어리가 우현을 덮쳐들었다. 발육이 좋은 몸은 여자라고 해도 무게가 상당했다. 그는 결국 공주라 생각되는 물체를 등에 얹은 채 엎어지고 말았다. "우, 우현? 우현!" 티스베 공주가 당황하여 우현을 불렀다. 마구 흔드는 손길이 매우 거칠다. 이건 역시 괴롭힘의 한 방법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든 우현은 포기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 먼저 내려오시는 편이..." "으응!" 간신히 일어난 우현은 공주를 보았다. 여전히 얇게 차려입은 공주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것을 보니 화를 낼 생각도 사라진다. 우현은 망토를 벗어 공주의 어깨에 걸쳐주며 말했다. "어째서 이런 곳에 계신 겁니까?"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하다. 우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공주는 연신 종알대며 그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도대체 사비나는 왜 나를 그렇게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겨울이니 감기가 들까봐 창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한다. 안 그래? 전혀 나가게 하지를 않는 거야. 마차 문에 손만 가져다 대도 잔소리를 늘어놓으니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거기까지 말한 공주는 우현을 보며 방긋 웃었다. 깨물어주고 싶도록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이어진 발언은 우현을 피곤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됐어. 이렇게 너를 만났으니까." "공주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러니까 이 공주는 사비나가 나가지 못하는 것에 반발하여 아예 도망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도망의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하려 하지 않는 우현, 훌륭한 현실도피였지만 이스드는 그곳에 없었다. 공주는 그런 우현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몰래 놀러가자. 응?" "공주님, 그것이..." 이 막무가내인 공주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우현은 마음을 굳세게 먹고 입을 열었다. "돌아가야 합니다, 공주님." "놀자니까?" "모두들 걱정하고 있어요. 얼른 돌아가시지요, 공주님." 우현의 안색에서 우김이 먹히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 공주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엄지손톱만큼이나 긴 속눈썹을 얌전하게 깔며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만이면 되니까... 응?" 파닥파닥 움직이는 스트로베리 블론드의 속눈썹이 마치 부채 같았다. 대리석보다 매끄러운 뺨은 싸늘한 공기 덕분에 평소보다 붉어져 있었으며 물기를 머금은 듯한 하늘색 눈동자는 간청하듯 우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헤롱헤롱하여 넘어갔을 모습이었지만 우현에게는 미모공격에만큼은 막강한 백신이 있었다. "안 됩니다." 백신이 있는 모닥불가를 흘금 바라본 우현은 공주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의 필살기가, 그나마도 아버지에게나 쓰던 최고의 무기가 먹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공주가 당황한 사이 우현은 그녀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예쁜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으며 그 위에는 나뭇잎이 얹혀있었다. 귀엽기도 했지만 어쩐지 안쓰러워, 그는 결국 공주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업히세요." "응?" "피곤하잖아요." 으응, 소리를 내며 얼굴을 붉힌 공주는 우현의 등에 얌전히 업혔다. 망토를 걸치고도 얼어있던 몸이 우현과 닿은 부분부터 사르르 풀렸다. 공주는 소년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우현이 나타나면 어디로 끌고 들어가 입을 맞출까를 진지하게 고심하고 있던 불순한 신관은 나무 사이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냉정함과 험악함이 평소의 몇 배나 되는지라, 함께 남아 짐을 지키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안 그래도 떨어져 있던 몸을 슬금슬금 움직여 더욱 멀어졌다. 그리고 험악한 시선은 이스드만의 것은 아니었다. "공주님!" 안절부절못하고 기다리던 사비나는 공주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소리부터 높였다. 우현은 사비나의 음성에 다소 움찔한 공주를 느끼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내내 길러준 유모만은 무서운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그를 향해 사비나는 잡아먹을 듯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우현은 자신이 아직도 공주를 업고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자, 이만 내려오세요." 천한 종자가 공주님을 업는 것도 거슬린다는 거냐, 등의 생각을 한 우현은 공주를 채근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공주는 고개만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사비나의 시선이 더더욱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낀 우현은 난감한 음성으로 말했다. "공주님." "싫어. 마차 앞까지 업어라. 다리가 아프단 말이야." 그거야 네가 멋대로 가출(?)을 하니까 그런 거잖아, 라는 말을 삼킨 우현은 묵묵히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드디어 땅을 밟고 선 공주는 이번에는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우현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무슨 폭탄이냐 싶은 우현은 그저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이거 나 줘." "네?" 그는 공주가 가리킨 '이것'을 보았다. 그가 내내 걸치고 있어 제법 먼지가 묻은 망토였다. 그것을 마치 보물처럼 품에 안은 공주는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우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뒷걸음질을 치며 대답했다. "에에, 뭐어..." "주는 거지?" "그... 좋으실대로 하..." 우현이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득달같이 달려든 사비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공주님! 망토는 가져오신 것만 해도 몇 개나 있지 않습니까! 굳이 남의 것을 탐내지 않으셔도..." "남의 것을 탐내는 게 아니라 우현의 것이니까 가지고 싶은 거야." "공주님!" 이미 들은 것을 흘려버리는 우현, 여전히 현실도피 중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사비나가 무서운 시선을 던졌다. 얼른 가버리라는 것도 망토를 돌려달라고 말하라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쯤은 허락한 것을 되물릴 수도 없어 미적거리는 그의 귀에 구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티스베 공주. 공주에게는 수많은 옷이 있지 않습니까. 허나 평민에게 옷은 매우 귀중한 물건입니다. 그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 돌려주시지요." 절대영도라는 말이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우현은 기쁘게 돌아보았지만 마주한 것은 싸늘한 표정이었다. 이스드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는 것을 알아챈 우현은 망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왜?' 결국 사비나의 채근과 이스드의 살벌한 눈동자 덕분으로 우현의 망토는 다시 주인에게 안기게 되었다. 엉거주춤 그것을 받아든 우현은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공주를 보고서야 '줘도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스드가 풀풀 풍기고 있는 한기가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마차에 오르시지요, 공주님. 아침식사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사비나..." "어서요." 사비나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들어가던 공주는 고개를 돌려 우현을 보았다. 우현이 어색하게 웃자 사비나와 이스드 양쪽 모두의 시선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티스베 공주." 공주의 시선이 움직여 이스드를 향했다. 얼음이 뒤덮인 듯한 표정과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위압감. 공주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것을 본 이스드는 입가에 옅은 조소를 띄우며 말했다. "기억해 두기를. 그대의 철없는 행동으로 인한 대가는 그대 주변의 사람들이 고스란히 받게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티스베 공주를 한 번, 그리고 사비나를 한 번 노려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 팔목을 붙잡힌 우현은 그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 이스드? 잠깐만요. 도대체 방금 그게 무슨..." "버려라." "에엣?" 이스드는 두 번 말하지 않았다. 우현의 손에서 망토를 빼앗은 그는 그것을 둘둘 말아 자신의 말 안장 주머니에 넣었다. 평민에게 있어 옷은 귀중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태도였다. "이스드!" "필요하다면 내 것을 내어주지." "아니, 여분의 것은 있지만 그것보다도..." 우현이 미적거리자 이스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돌려받고 싶은가?" 우현은 이스드를 보았다. 하는 말은 분명 의향을 묻는 것인데 짓고 있는 표정은 '돌려달라고 말하면 가만 안 둔다'라니. 이 정도면 솔직하지 못한 것인지 너무 솔직한 것인지 판단할 수조차 없어진다. 우현은 한숨을 쉬는 것으로 망토를 포기했다. 그제야 이스드의 얼굴에 서려있던 차가움이 한 꺼풀 벗겨졌다. '도대체 내 망토가 어쨌길래...' 공주가 자신의 망토를 달라고 했다. 그것을 이스드가 만류했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 망토가 어째서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현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느, 늦었습니다(쿨럭) 다음주 일요일에 남동생(!)이 결혼을 하거든요. 그 준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보니 그만...(그러니까 왜 사고를 치고 결혼을 하냔 말이다, 이 망할 녀석아!) 새로 가족이 될 아가씨가 동인녀이기를 바라는 저는 너무 큰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웃음) ...늦은 죄로 오늘은 양이 쪼끔 더 많습니다아; 어제 동생(결혼하는 녀석 말고 다른 녀석입니다)과 대화 중에 웃긴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시작은 후뢰시맨을 맡았던 배우들이 지금 얼마나 늙었는가, 였던 것 같은데요. 그게 천사들의 합창이라는 드라마에 나왔던, 정말로 천사 같았던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갔습니다. 동생 : 그러니까 그 애들이 지금은 느끼하게 변했단 말이지. 옛날에는 미소년 합창단에 있을 법한 녀석들이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듣고있던 저는 순간 미소년 합창단이라는 말에 번뜩. 나 : 미소년 합창단? 동생 : 응. 나 : ...그거, 빈 소년 합창단 아냐? 동생 : 응? 그런가? .............그렇구나. 미소년 합창단! 그래, 걔들이 좀 예쁘기는 하지. 하지만 넌 남자잖아, 이놈아! 이렇게까지 동인녀인 누나의 영향을 받아 찌들다니! 이 누님, 진실로! ...기쁘구나(히죽) 나 : 야! 너 그 말, 저기 나루토만큼이나 웃겨.(마침 장소가 집 근처 일식 레스토랑 나루토 앞이었습니다) 동생 : 그만 웃어!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7장 여정 -9- 티스베 공주의 난데없는 탈주라는 이벤트를 겪은 며칠 후, 일행은 어느 영지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동안 노숙으로 일관해야 했던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온 영주가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언제나와 같이 티스베 공주와 몇몇 귀족들은 영주관으로, 기사 중 격이 낮은 사람들과 종자, 하인들은 여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여느 때와는 다소 다른 일이 생겼다. 영주의 시선이 백색 신관복을 포착해낸 것이다. 어지간한 영지에서도 보기 힘든 백의의 신관이 일행에 끼여있다니. 영주는 하스티아의 국왕이 티스베 공주를 익애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이스드에게 다가간 영주는 가슴에 손을 대고 정중히 인사했다. "에다마트에게로의 인도자께 메토디오가 인사드립니다. 어째서 이런 곳에 계신 겁니까? 저쪽으로 가시지요." 영주가 말한 '이런 곳'이란 여관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틈이었으며, '저쪽'은 티스베 공주 및 귀족들이 있는 곳이었다. 영주의 말을 들은 이스드는 영주가 무안해할 때까지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신관님?" "제안은 감사하나 나는 이들과 있을 생각이오. 그러니 영주는 영주의 일을 하기 바랍니다." "시, 신관님?" 이스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돌렸다. 남겨진 영주의 당황한 얼굴을 본 우현은 쓴웃음을 삼키며 이렇게 말했다. "곤란한 것 같은데요." "내 알 바 아니다." 여전히 냉정한 목소리다. 티스베 공주를 찾아 데려온 그날 이후, 이스드는 우현에게 다소 쌀쌀맞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것에 불안해진 우현은 어떻게든 이스드의 상냥함을 되돌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밤이 되면 근처에 다가와 잠을 청하는 것으로 보아 크게 분노한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그나마의 구제였다. 우현은 한숨을 쉬었다. "제발 부탁이다. 저 서슬 퍼런 신관님을 어떻게 좀 하라고!" 유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다소 쌀쌀맞다는 수식어도 우현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이스드의 행동은 살벌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지경이었다. 덕분에 일행은 좌불안석. 지금도 이스드가 영주의 요청을 거절하자 여러가지 의미의 한숨이 일행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유타의 말을 들은 우현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해봤자..." "그렇게 말해봤자, 가 아니겠지! 냉큼 달려가서 애교를 떨든 눈물을 떨구든 해!" 우현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타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뭐가 불가능하다는 거냐!" "바보냐, 너는! 내가 여자야? 너 같으면 다 큰 사내놈이 애교 떨고 징징 짜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겠어?" 오히려 더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라고 중얼거리는 우현을 향해 유타가 폭탄을 던졌다. "그럼 마지막 방도 밖에 없네. 스트립을 해라. 자고로 누드에 약하지 않은 남자는 없..." "조용히 죽어라." 스릉, 하는 깊은 소리가 나며 우현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타는 히이이익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노, 농담이다! 야, 임마? 이 정도로 동료를 죽일 셈이냐! 어, 어이? 우현?" "성불해라." 우현, 나름대로 쌓인 모양이다. 그가 그렇게 조용히 날뛸 때였다. 찌르는 듯한 시선이 그의 옆얼굴을 휘어감았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이스드가 그곳에 있었다. 우현과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을 까딱거린 이스드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거겠지, 저건?' 검을 집어넣은 우현은 이스드를 따라갔다. 언뜻 아쉬움이 가득한 공주의 얼굴을 본 것도 같았지만 무시했다. 우현에게 주어진 방은 제법 괜찮은 1인실이었다. 짐을 내려놓은 우현은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영주관의 객실에 있을 침대에 비교하면 형편없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종자 주제에 쪼르르 따라들어갈 수는 없는 거잖아?' 함께 들어갔다면 공주의 등쌀과 그것으로 인한 사람들의 주목으로 괴로움의 연속일 것이 뻔했다. 차라리 편한 마음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우현은 이내 긴 한숨을 쉬고 말았다. '편하기는 개뿔이 편하냐.' 따라오라고 손짓까지 했던 이스드는 그러나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안 그래도 이스드에 한해서는 소심해진 우현인지라 감히 노크를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작 한다는 일이 이스드의 방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문에서조차 무언의 거부를 느끼고 자기 방에 틀어박히는 것 정도다. 답답함을 느낀 그가 머리를 마구 헤집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것을 듣지 못한 그는 연신 끙끙거리며 애꿎은 머리카락을 괴롭힐 뿐이었다. "자학이 취미였다는 것은 미처 몰랐군." 서늘한 가운데에 어딘지 재미있다는 듯한 기색을 담은 목소리가 방에 울렸다. 우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내 생각하고 있던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것은 상당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래, 당황한 게야. 그것뿐이라고.' 우현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려 연신 되뇌였지만 사람 일이 어디 마음 먹은대로 되던가. 그는 이스드의 눈을 피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스드는 우현의 뒷머리에 손가락을 박고 들어올려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에에... 그... 무슨 볼일이라도?" 우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남빛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곧이어 서늘한 향기가 다가왔다. 우현은 자신의 바로 앞에서 흔들리는 신관복 자락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 염색이 필요할 것 같군." 잠시 우현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있던 이스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우현은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사소한 스킨십은 이전부터 빈번한 일이었는데도 오늘따라 유난히 쑥스러웠다. 그는 용기를 내어 손을 뻗었다. 이스드의 등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기 직전 이스드가 몸을 일으켰다. "내 방으로 가자." 이스드는 우현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그리 굵지도 않은 손목에서 나오는 힘은 상당히 강하여, 우현은 찍소리도 못하고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과연 고귀하신 신관님의 방이다. 우현은 이스드의 방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벽지에서부터 물컵까지, 사소한 하나하나마저도 전부 고급품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가볍게 웃은 이스드는 누군가가 대령해놓은 물통을 두드렸다. "당장 이리로 와서 머리를 적셔라. 그 상태로는 오래지 않아 네가 누구인지 들키고 말 걸." 우현은 웃옷을 벗고 물통에 머리를 담갔다. 딱 좋은 온도의 물이 온몸을 따끈따끈하게 데우는 느낌이었다. 그가 다시 머리를 들자 이스드는 귓가에 입술을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워낙 가까운 거리였던지라 이스드의 숨결이 우현의 목덜미에 닿았다. 물기 젖은 피부에 닿은 공기가 한기를 느끼게 해,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한기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우현은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그 기묘한 느낌을 무시했다. 염색약으로 추정되는 액체가 머리에 부어졌다. 이스드의 말에 따라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지는 손가락을 느낄 수 있었다. 정수리 부분에서 시작한 그 움직임은 곧 목덜미께로 서서히 옮겨가기 시작했다. "내, 내가 할 수 있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아도 사심이 가득한 손길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우현이 바둥대자 이스드가 엄격하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만면에 웃음을 떠올린 상태인 이스드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참고있는 중이었다. 즐겁다. 자신 때문에 의기소침하여 침울해하고 눈치를 보는,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주려 하는 우현을 보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즐거운 것은 이렇게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렇게 오래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단지 주제를 모르는 공주의 곁에 다시는 가지 못하도록 경고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에 자극되어, 결국은 한참동안이나 살갑게 만지지를 못했다. 도자기 같은 피부는 손을 대면 스르륵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 든다. 실크 같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기는 느낌은 최상이었다. 이스드는 염색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뺨을 어루만졌다. 뜨거웠다. 우현을 바라보는 것은 이스드 만이 아니었다. 엄포를 놓기는 했지만 쉽게 볼 수 없는 상대인 아이겐튼 자작, 철없는 것이 오히려 최강의 무기인 티스베 공주, 그리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는 기사들에 하인들, 심지어는 새파란 종자들까지. 객관적으로 보면 절색이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는 생김인데도 한 번 그에게 시선을 붙인 사람은 좀처럼 떼지를 못한다. 그것에 조금 심술이 난 이스드는 우현의 머리 위에 아무렇게나 물을 끼얹었다. "어엇!" 물이 옷에 튄 모양이었다. 우현은 다소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숙인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말도 잘 듣지, 라고 중얼거린 이스드는 우현의 머리카락을 물통 속에 넣고 깨끗하게 헹궜다. 사실 이런 과정 따위는, 아니 애초에 염색 자체가 필요없었지만 일련의 자질구레한 것조차 그에게는 기쁨이었다. "다 된 건가요?" "아니, 아직이다." 소매가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우현의 머리를 헹구던 이스드는 문득 뽀얀 목덜미에 시선을 주었다. 그동안 볕 아래에서 살아서 다소 그은 우현은 그러나 스탠드 칼라의 웃옷에 가려져있던 목덜미만은 이스드만큼이나 희었다. 아주 가늘지만은 않은 남자의 목이다. 선이 곱기는 하지만 여자에 비할까. 그럼에도 홀린 듯 손을 움직인 이스드는 언젠가처럼 우현의 목덜미에 맺힌 물방울을 훑었다. "읏!" 우현이 낮게 신음했다. 그러자 이스드의 눈동자가 순간 어두워졌다. 누구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격렬하게 끌어안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들고- '나만의 것으로 한다면.' 이스드는 고개를 숙였다. 매끄러운 피부에 혀끝을 가져다 대자 우현이 파르르 떨었다. 맺혀있던 물방울이 달콤하게 느껴진다니, 자신은 제대로 미친 것일지도 모른다. 이스드는 다소 비릿하게 웃으며 여린 살갗을 깊게 빨아들였다. "흐으..."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우현은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이런 계집애 같은 소리를, 그것도 이스드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시야가 어두워진다 싶었는데 목에 까끌한 감촉의 무엇인가가 닿았다. 그렇지만 어째서? 염색약 특유의 싸한 냄새가 진동하는 현 상황의 어디가 이 상태를 만들어낸 것일까. 마지막으로 촉, 하는 소리를 내며 목덜미에서 떨어진 이스드는 이번에는 우현의 턱을 들어올렸다. 흠뻑 젖어 축 늘어진 자줏빛 가닥가닥을 머리 뒤로 쓸어넘겨준 그는 마치 깨지는 것을 대하는 듯 조용한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남빛 눈이 무엇을 품고있는지 모를 우현은 아니었다. 우현이 눈을 감자 겨울 바람으로 마른 이스드의 입술이 반듯한 이마에 닿았다. 잔뜩 억눌린 움직임이 오히려 뜨겁게 느껴진다. 그것을 깨닫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우현은 손을 뻗어 이스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불이 붙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막무가내인 거친 입맞춤이었다. 아플 정도로 부딪혀온 입술이 우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우현 역시 이스드의 뒷머리를 끌어당기며 연신 각도를 달리해 입술을 부딪혔다. 입술의 말캉한 감촉도 혀의 뜨거움도 타액이 흘러내리는 간질간질한 감촉도 느낄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머리가 불타버릴 정도로 뜨겁다는 것. 뜨겁고 뜨거워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눈이 마주치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떨어진 두 사람은 또다시 마구잡이로 입술을 겹쳤다. 손은 상대의 가슴팍이며 어깨를 정신없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손끝에서 버스럭거리는 옷이 너무나 거슬렸다. 이스드가 우현의 셔츠 단추를 푼 것과 우현이 이스드의 신관복 자락을 끌어올린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머뭇거리는 것이 역력한 움직임으로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듣지 못했던 두 사람은 그러나 두 번째로 문이 울리고 나서야 누군가가 밖에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스드는 잔뜩 낮아져 긁히고 숨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냐." "다, 다름이 아니라... 메토디오 영주 부인께서 병이 나셨습니다. 신관님께서는 모쪼록 와주셔서 치료를..." "후우- 가겠다." 발소리가 후다닥 하며 멀어졌다. 열이 오를대로 오른 상태에서 방해를 받고 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의 혈관을 타고 뛰노는 듯 어색한 열기가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본격적으로 할 마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녀온다." "그래요. 잘 고쳐줘요." "...다녀온다." "알아요." "...다녀오겠다고 했다." 우현은 그 와중에도 훗 웃고 말았다. 되풀이될수록 깊어지는 저 느낌은 분명 투정이었다. 그의 웃음소리를 들은 이스드는 머쓱한 듯 얼굴을 굳혔지만 곧 짓궂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히이익!" 이스드의 손가락이 우현의 목덜미를, 정확히는 그곳에 선명한 울혈자국을 훑었다. 우현이 목을 움츠리며 신음하자 이스드는 기분이 좋은 듯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내가 올 때까지 머리를 묶으면 안 돼." "묶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지금?" 누구누구 덕분으로, 라고 투덜거린 우현은 그러나 이스드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곧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이스드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투박한 문 한 장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다. "...미쳤군." 차이점이 있다면 한 쪽은 당혹감을, 다른 한 쪽은 자조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었다. 미리 대기되어 있는 말에 오른 이스드는 자신의 방이라고 생각되는 쪽을 올려다 보았다. 만약 누군가가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제법 파멸적인 생각을 하면서.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7장 여정 -10- 이스드의 방에 혼자 남은 우현은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있을 수가 없었다. 숨결은 아직도 뜨거워진 채였다. '영주 부인이 아프지만 않았더라면...' 아쉽기도 한, 그러나 어딘지 섬뜩한 생각이었다. 한참 키스하며 더듬고 있을 때에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분명 이스드는 그를 안으려고 들었다. 우현은 이전에 한 번 보았던 남자끼리의 섹스를 떠올렸다. 아래에 깔려있던 종자는 대단히 괴로운 듯 보였다. 게다가 기사의 것을 받아들이던 부위는 다름 아닌 '그 곳'. "으와와와와왁!" 우현은 축축한 채인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이스드의 성격상 깔려줄 가능성은 어떻게 보아도 제로다. 둘 중 하나가 깔린다면 그 것은 자신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우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스드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 역시 남자였다. 침대 위에서 여자의 입장이 되다니, 자존심에 이만저만한 상처를 입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가장 큰 복병은 다름 아닌 우현 자신이었다. 이스드의 손길이 미묘해지면 우현의 이성도 흔들린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장 믿을 수가 없었다. 무릎까지 치렁치렁한 신관복을 급하게 들어올려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던 자신이라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 분명했다. 그는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진짜... 곤란하다니까." 이스드가 돌아왔을 때 우현은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어있었다. 제대로 말리지를 않아 군데군데 축축한 머리카락이 시트 한 구석에 작은 회색빛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감기 걸린다." 나직하게 중얼거린 이스드는 따스한 바람을 만들어 우현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한 올 한 올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이스드는 우현의 머리카락이 다 마르고 나서도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영주관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달은 12월. 이제 곧 묵은 해와 새해가 교차하는 암흑의 주가 온다. 열흘간 빛이라고는 한 점 없이 어둠만이 계속되는 그 기간 동안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은 한 바깥 공기를 접해서는 안 된다. 메토디오 영지를 벗어나면 한동안 마을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을 들은 티스베 공주와 그 호위기사들은 결국 이 영지에서 새해를 맞기로 결정했다. 실내에만 있어야 한다면 이스드도 우현도 여관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단 둘이서 지낼 생각을 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이스드는 우현의 이마에 입술을 떨어뜨렸다. 어느새 제멋대로 움직인 손가락은 우현의 손을 단단히 옭아매어 깍지를 끼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다소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이스드는 곧 나직하게 웃었다. 꽤나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으음... 이스드?" 닿아있는 손가락이 즐겁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부터 찾는 우현이 기쁘다. 이스드는 우현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얹고 속삭였다. "다녀왔다." 우현은 잠에 취한 채로 미소를 지었다. 우현은 손거울을 든 채 거울 앞에 서서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가 거울에 비춰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목덜미. 뚜렷하게 남은 키스 마크가 대단히 요염한 자기 주장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날더러 어쩌라는 걸까, 그 불순 신관은." '불순'에 유독 강세를 주어 투덜거린 우현은 목덜미를 더듬었다. 이렇게 목덜미에 떡하니 키스 마크를 남겨놓으면 머리를 묶을 수가 없게 된다. 우현은 가진 것 중 칼라가 가장 높이 올라오는 셔츠를 입은 후 머리카락을 길게 드리웠다. 등 중간까지 곧게 흘러내린 자줏빛 머리카락은 대단히 근사했지만 그에게는 단지 방해에 지나지 않았다. 몸을 숙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우현이 입속으로 중얼중얼 푸념을 늘어놓을 때였다. 문이 리드미컬한 소리를 냈다. "아직 멀었나?" "나갑니다요, 나가." 방금 전까지 잔뜩 원망하고 있던 사람의 재촉이었다. 우현은 스탠드 칼라의 웃옷을 잘 여미고 망토까지 두른 후 방을 나섰다. 순백색 신관복 위에 잿빛의 망토를 걸친 젊은 신관이 그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한동안 이 영지에서 지내야 한다는 말을 들은 몇몇 사람들은 그 동안의 소일거리를 위한 물건들을 사러 마을 중심가로 나갔다. 우현도 중심가로 가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바늘 가는 곳에 실이 안 갈 리 없다고 이스드도 동행이었다. 우현의 손에 들린 쪽지를 본 이스드는 고개를 우아하게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것은?" "유타랑 다른 종자들이 부탁한 것들을 목록으로 만든 거예요. 내가 나간다니까 우르르 몰려들어서는 이 것 저 것 주문을 해대더군요. 어디 보자... 구두끈, 사탕 한 병, 머리를 묶을 수 있는 가죽끈, 구두약, 올리브 오일... 에? 이런 것은 왜 필요한 거지? 식료품 담당 하인에게 말하면 내줄 텐데?" 그런 것보다 먼저 요리를 하지도 않은 종자가 어째서 기름을 필요로 하는지가 문제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우현과는 달리 이스드는 하, 하고 외마디 웃음을 웃었다. "이스드? 이유를 아는 모양이죠?" "글쎄... 겨울이니 피부가 갈라져서 그런가 보지." 그런 것이라면 따로 구입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너무도 쉽게 납득하는 우현을 본 이스드는 입술 끝을 미묘하게 끌어올렸다. 아직까지는 모르는 것이 약이다. 시골 영지답게 마을은 대단히 분주했다. 농사가 본업인 대부분의 영지민들에게 겨울은 휴식의 계절일 텐데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워낙 볕에서 사는 영지민들인지라 아르세니아인 특유의 창백함 따위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뭇했다. 활력에 찬 표정이 보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런 영지민들이 내내 흘금거리는 곳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끝에는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 신관이 있었다. 이 정도면 얼굴이 따가워질 것이 분명한데도, 신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곁에 선 소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은?" "사탕가게요. 식성들도 다들 제각각이라니까. 하나로 통일하면 어디가 덧나나? 유타는 감초 과자, 제럴드는 레몬 사탕, 클레어는 설탕에 절인 대추, 아민은..." 동료들의 주문을 주워섬기는 소년 역시 꽤나 호감이 가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신관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안개를 사이에 둔 듯 멀게 보이는 분위기가 오히려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래서인지 신관에게 닿았던 시선은 어느새 소년에게도 향하곤 했다. 그러나 그 시선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소년을 바라볼라치면 어느새 희번득거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신관 때문이었다. "이스드?" 우현이 부르자 이스드는 자신이 언제 눈을 부릅떴냐는 듯 온화한 미소를 띄운 채 시선을 주었다. 마을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감정을 담은 눈길이 이스드에게 쏟아졌지만 본인은 유유자적. 우현에게 향하는 것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좋다는 주의다. 두 사람이 마지막 물건까지 모두 구입하여 상점을 나설 때였다. 우현은 근처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분명 어디선가 맡아본 냄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맡아본 거지?' 우현은 냄새의 근원으로 생각되는 골목 안쪽에 시선을 주었다. 높은 담벼락 탓에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둑어둑한 골목은 음침한 느낌이었다. 우현이 안쪽으로 들어가려 하자 이스드가 어깨를 붙들었다. "뭐가 있는 줄 알고 들어가는 거냐?"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 들어가는 거죠." 냄새는 싫었지만 반드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현은 조심조심한 발걸음으로 걸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바닥에 가로누운 가뭇한 물체가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우현은 숨을 삼켰다. 그 것은 땟국이 줄줄 흐르는 지저분한 옷을 입고 있는 아이였다.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까. 아이는 이미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워낙 어두운지라 아이의 피부도 옷도 머리도 온통 새까맣게 보였다. 우현은 떨리는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 색깔을 확인하려 했다. 그 손을 이스드가 잽싸게 낚아챘다. 곧 강한 힘이 우현을 당겨 끌어안았다. "만지지 말아라." 그러나 우현은 볼 수 있었다. 땅을 향해 처박힌 아이의 얼굴은 햇살에 그은 것과는 다른 차원의 가뭇함을 가지고 있었다. 추운 겨울인지라 벌레 한 마리 앉지 않고 다만 조용히 썩어드는 시체. 눈을 질끈 감은 우현은 이스드의 옷자락을 강하게 붙들었다. 이스드는 우현을 안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왜 하필 저 것이 이 곳에 있었는지를 생각하니 영주고 영지민이고 할 것 없이 다 쓸어버리고 싶었다. "내려줘요, 이스드." 차분하고 다소는 기운이 없는 목소리였다. 정신을 차린 이스드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 우현을 들어안은 채라는 것을 깨달았다. 발이 땅에 닫자 우현은 근처를 지나가는 남자를 붙들고 골목 안의 시체에 대해 물었다. 까마득히 잊었던 것을 생각해내는 듯 먼 곳을 보던 남자는 이내 '아!'하며 대답했다. "그거 말이냐? 뭐긴 뭐야, 지고이네르지. 저 골목에 숨어있는 것을 마을 아이들이 발견하고 어른들에게 알렸단다. 내버려 두었으면 무슨 병을 옮겼을지 알 수가 없는... 뭐냐, 사내자식이 심약하기는. 고작 시체 정도로 겁을 먹으면 안 되지!" 남자는 우현의 등등 팡팡 치려다 말고 손을 움츠렸다. 동행인 신관이 마치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떤 남자는 신관이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구르듯이 내달려 도망쳤다. 이스드는 우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파들파들 떨리는 어깨가 안쓰러운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턱을 붙들어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하니 새까만 눈망울에 여러 가지 감정들이 깃들여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분노, 두려움, 원망, 공포. 그러나 우현의 입가는 이상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만 가죠, 라고 덧붙인 우현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곧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보기 좋게 뻗은 손가락이 우현의 팔목을 단단히 거머쥐고 있었다. "이스드?" "너는..." "네?" 되묻던 우현은 멈칫하고 말았다. 이스드의 얼굴이 진심인 분노를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붙잡힌 손목이 강하게 조여들었다. 이를 으드득 간 이스드는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한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너의 강함은 때때로 나를 화나게 한다. 매달려서 운다고 해도 너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순간 우현의 입가가 울듯 일그러졌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이스드는 그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다시금 마주한 남빛 눈동자는 우현의 눈 속을 용서 없이 헤집고 있었다. 우현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웃었다. "그러면 안 돼요, 이스드. 남이 얼마나 힘들게 참고있는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들쑤셔 놓으면 나는 어떡하라고요." "그러니까...!" 노기 충천한 이스드는 다시 입을 열었지만 곧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현이 그에게 기대온 것이다.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한순간에 사라진 분노는 자신도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자조하는 이스드에게 우현이 말했다. "아직은 괜찮아요. 단지 좀 무서워졌습니다. 사실 나는 여기가 내가 살던 곳과는 전혀 딴판으로 선량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들은 단지 지고이네르라는 이유로 저렇게 배척하고 철저히 병균 취급하는 군요. 분명 얼마 전까지는 저들도 지고이네르의 노래를 듣고 그들의 물건을 사며 즐거워했겠지요. 법황청의 명령이 그만큼 강력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겉으로는 좋아하는 체하지만 속으로는 싫어하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우현은 자신의 등을 강하게 끌어안는 팔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서늘한 향이 그를 감싸안고 달래는 듯 했다. 이스드가 말했다. "그 것이 이 대륙의 사람들과 지고이네르와의 관계다. 네가 이전에 있던 세상과는 달리 이 곳은 신분제야. 겉보기에는 순종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단한 불만이 도사리고 있지. 지고이네르 탄압의 이유는 그 것이다. 절대적으로 낮은 대상을 지정하고 그 것으로 사람들의 불만을 푸는 것이지. 이를테면, 그래. 마치 사형을 구경하며 축제처럼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까."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우현은 어깨를 떨었다. "그런 것은 이 곳이나 내가 있던 곳이나 다를 바가 없군요." 약한 대상을 하나 정해놓고 그를 괴롭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니. 중세로 따지면 마녀 사냥이며 현대로 따지자면 왕따다. 각각의 사람들이 어떠한 성품을 지녔다고 해도 사회 내부의 모습이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은 슬프고도 한심한 느낌이었다. "이만 가자." "그래요. 가야지요." 우현은 아이의 시체가 있는 쪽을 흘금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늦었습니다(털썩) 결혼식이라는 거, 누나인 저까지 덩달아 바쁘더군요. 내내 '써야 해, 써야 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자판에는 손도 못 댔습니다. 어제도 하루 종일 고기전과 프라이팬과 더불어 씨름을, 그리고 지금은 손님을 다 맞고 난 후 기진맥진입니다; 찢어진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라 제 7장 여정 -11- 그 날 저녁 이스드는 영주 부인의 간곡한 초청을 받아 영주관으로 갔다. 명목상으로는 부인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날 열리는 연회에 나오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신성력을 갖춘 고위직의 신관에 젊음, 그리고 미모까지 더해지면 조용히 사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우현은 창문가에 턱을 괴고 앉아 신관복 자락이 마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구경했다. 새까만 밤공기 속에서 더욱 선명한 백의와 그에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 남빛 머리카락이 눈에 박히는 느낌이었다. 이 밤의 연회는 티스베 공주를 위한 것이었다. 우현은 금실로 수를 놓고 보석을 단 옷을 입은 사람들의 우아한 행동거지와 말을 상상했다. 그들의 식탁에 올려진 것은 우현으로서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풍성하고 기름진 것이리라. 아낌 없이 뿌린 장미수의 향기는 사람들의 기분을 고양시킬 것이며 호박색과 암적색의 술들은 그들의 입을 매끄럽게 만들 것이다. 동시에 우현은 생각했다. 지금도 골목 안에 누워 조용히 썩어가고 있을 지고이네르의 아이를. 자세히 살피지를 못했으니 아이가 맞아죽은 것인지 아니면 칼을 맞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의 손목, 비쩍 말라 뼈가 툭 불거진 손목이 눈에 선했다. "...모르겠다." 어딘지 단호한 어조로 말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골 마을인지라 포석이 깔려있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계절이었다. 꽁꽁 언 땅은 도무지 삽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우현은 땀이 흥건한 이마를 훔쳤다. "노가다는 소질이 아닌데 말이야." 농조로 중얼거려봐도 기분이 좋아질 리 없다. 그는 발밑을 흘금 바라보았다. 지고이네르 아이가 누워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가족도 아니다. 단지 지고이네르, 그 것뿐. 그럼에도 우현은 아이의 시체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삽을 들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을 땀에 범벅이 되어 삽질을 하던 그는 결국 작은 구덩이를 하나 만들 수 있었다. 긴 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땀을 훔치던 그는 화끈한 아픔에 신음했다. "으읏! 이런, 까졌잖아." 삽자루에 쓸리고 해진 손바닥에서는 피가 나오고 있었다. 우현은 그 것을 핥으며 아이를 보았다. 묻어주는 것과 시체에 손을 대는 것은 다소 별개일지도 모른다. 썩어가는 육신이 걸친 옷자락을 거머쥔 그는 낑낑대며 아이를 끌어 구덩이에 눕혔다. 골목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던 때와는 달리 편안해 보인다. 우현은 아이의 몸을 흙으로 덮어 작은 봉분을 만들었다. 한밤의 마을은 고요하다. 간간이 울리는 가축들의 울음소리가 그 적막을 깰 뿐이었다. 우현은 삽에 몸을 기대고 섰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땀에 젖은 몸을 뒤흔들었다. "이만 가봐야겠다. 안녕, 꼬마야. 잘 있..." 그 때였다. 골목 입구에서부터 들어오던 바람이 이상스럽게 잦아들었다. 본능으로 불길함을 느낀 우현은 검에 손을 얹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코끝에 축축하게 젖은 헝겊조각이 닿았다. 한 번 맡아본 적이 있는 꽃내음이 그의 머리에 경종을 울렸다. '누구...' 우현의 세상이 기울었다. 그는 까만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실루엣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마저도 암흑 속으로 차단되었다. 처음 보는 천장이다. 우현은 흐릿한 머리로나마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그제야 시야가 조금 맑아졌다. "뭐야, 도대체..." 우현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손이고 발이고 옴짝달싹을 하지 않는다. 시선을 내린 그는 자신이 밧줄로 칭칭 묶인 채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 뭐야, 이건? 어떻게 된 거야?" 애벌레 모냥 감긴 밧줄은 상황의 급박함보다는 어이없음을 먼저 떠올리게 했다. 우현은 팔다리를 꼼지락거리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한숨을 푹 쉰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을 떠올렸다. 약기운으로 흐릿한 머리가 생각을 방해했지만 그럭저럭 기억이 났다. 그는 아이의 무덤을 완성하고 난 후 쉬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그만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몰래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꽃향기. 이전에 어느 도시에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수면제의 냄새였다. '그리고 그 때도 그 냄새를 맡고 홀랑 잡혔다가 고난을 당했었지.' 이 쯤 되면 학습능력이 없는 자신에 대한 반성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쩐지 암담함을 느낀 그는 누운 채로 방을 둘러보았다. 아이겐튼 영지의 객실에서 생활했던 전적이 있는 우현의 눈에도 대단히 호화롭게 보이는 방이었다. 그리고 우현이 아는 한 이 마을에서 이 정도의 방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은 영주뿐이었다. '그럼 여기는 영주관인가.' 벽에 걸려있는 호화로운 의복이 누군가가 사용 중인 방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우현은 자신을 납치해온 실루엣을 떠올렸다. 어딘선가 본 듯한 모습이다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에파시오 자작의 종자였다가 주인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잘린 남자와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납치해온 이 곳이라면 우현에게 좋은 곳일 리가 없다. 그는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 없나 살폈지만 방에 있는 것은 쓸데없이 번쩍거리는 가구와 벽에 걸린 옷 몇 벌뿐이었다. 여차하면 돌돌 말린 채 창문으로 몸을 던지리라 생각하는 그 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다. 우현은 점점 가까워지는 그 것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발소리는 우현이 있는 방 앞에서 멈추었다. '적인가.' 문이 열렸다. 묵직하고 느린 걸음으로 마루어 보아 귀족인 것 같았다. 침대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 사람은 흐음, 하는 콧소리를 섞어 중얼거렸다. "그리 미색인 것도 아닌데 말이야. 어째서 아이겐튼도 그 신관도 이 녀석을 싸고도는 걸까?"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게다가 '아이겐튼'에 '그 신관'이라니, 일행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카이엔과 위렌이 주었던 주의를 떠올리고 오싹함을 느낀 우현은 그러나 가만히 있었다. 단단히 묶인 이 상태로는 상대도 그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상대는 이 밧줄을 풀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까, 곧 스릉 하는 소리가 나더니 툭 하고 밧줄이 끊어졌다. 우현은 가늘게 실눈을 떴다. '저 사람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카이엔에게 우현과의 잠자리를 주선해달라고 요구했던 호위기사, 마크리아 백작이었다. 개기름이 번들번들 흐르는 얼굴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우현은 그를 보며 이전의 열 배는 되는 오한을 느꼈다. 우현의 감상이 어쨌거나 마크리아 백작은 밧줄을 풀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얼마나 꽁꽁 싸매놨는지 푸는 것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인내심이라고는 없는 귀족 특유의 성격이 그의 성질을 부추겼다. 결국 백작은 단검으로 밧줄을 전부 끊어버렸다. 후두둑 소리가 나며 밧줄이 떨어지자 소년기 특유의 가늘게 뻗은 신체가 드러났다. 백작은 우현의 망토를 걷어냈다. 소년의 몸은 소녀만큼 부드럽지는 않지만 때로는 그 딱딱함 속에 깃들인 생동감이 더 좋은 때도 있는 법이다. 백작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한 미소가 서렸다. 깔끔한 타격음이 울린 것은 그 때였다. "커흑...!" 우현은 백작의 턱을 향해 날렸던 주먹을 회수하자마자 다시 뻗었다. 목표는 명치 끝. 잘만 치면 기절까지도 가능한 부위다. 그러나 아무리 타락했다 한들 기사는 기사. 거기에 정신이 혼미한 채인 우현의 공격이다. 본능으로 위험을 감지한 백작은 간발의 차이로 주먹을 피했다. "이 발칙한..." 언제나 가해자의 입장에 서있던 사람이 피해자로 전락한 순간의 수치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법이다. 아픈 턱을 문지른 백작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뼛속 깊이 떨릴 듯한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낸 검의 눈부신 은백색이 우현의 눈을 희롱했다. "고작 해야 종자 주제에 감히!" "하여간 귀족들이란. 감히, 라든가 발칙한, 고얀, 뭐 이런 것 이외에는 할 말이 없는 모양... 흣!" 말을 하는 도중 날아든 검에 급히 목을 움츠린 우현은 그 덕분에 혀를 깨물고 말았다. 비릿한 짠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러나 그 것에 대해 가타부타할 시간은 없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명색이 호위기사인 백작의 몸놀림은 상당히 빨랐던 것이다. 어느새 되돌아온 검이 우현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황급히 피하지 않았더라면 심장에 직격이었을 공격이었다. 그 살의에 대한 분노가 우현의 머리를 잠식해 들어갔다. 그런 그의 눈에 백작이 떨어뜨렸던 단검이 들어왔다. 그가 그 단검을 집어들어 백작에게 겨눈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천한 놈이 어디다가 검을 들이대!" 평민은 귀족에게 검을 들이대는 것만으로도 중죄로 처벌된다. 백작은 눈에 불을 켰지만 그 것은 우현도 마찬가지였다. 위협조로 단검을 휘두른 우현은 백작을 똑바로 보려 애쓰며 말했다. "그럼 얌전히 죽기만 기다리란 말이야? 변태인 줄만 알았더니 머리까지 나쁘잖아?" "너...!" 차차창, 하는 긴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검이 대치했다. 장검과 단검. 무기가 짧은 쪽이 불리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다. 게다가 우현은 검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백작은 당당한 기사였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기기긱 소리를 내며 긁히는 검을 있는 힘껏 떨쳐낸 우현은 단검을 휘둘러 백작의 허리를 후렸다. 그러나 흐릿한 정신으로나마 안간힘을 써 시도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여유있는 동작으로 단검을 막은 백작은 그 검을 그대로 돌려 무모한 공격으로 비어버린 우현의 몸에 내리꽂았다. "...!" 우현은 비명을 삼켰다. 소리를 질러봤자 백작을 기쁘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죽어도 입을 다물고 숨이 끊어질 생각이었다. 검이 꽂힌 곳은 어깨 아래. 살이 특히 연약한 부위를 공격한 검은 이내 사정 없는 움직임으로 비틀리며 빠져나왔다. "흐윽!" 아드득 다물린 이가 부러져 나갔다. 우현은 낮은 신음을 내며 주저앉았다. 어깨를 감싸쥔 손가락 사이로 뻘건 피가 뭉클뭉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작의 발이 날아들었다. 정확히 가슴팍을 걷어차인 우현은 순간 숨이 멎을 정도의 충격을 느끼며 나뒹굴었다. "가소로운 것 같으니." 고급스러운 양탄자 위에 긴 핏자국이 끌리듯 나있었다. 마크리아 백작은 그 흔적을 짓밟듯이 걸어와 우현의 손을 밟았다. 단검을 잡은 채였던 손이 으득 소리를 내며 짓눌렸다. 그는 하나뿐인 무기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눈만은 형형한 빛을 내며 백작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것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한 백작은 오히려 괜한 소리를 쳤다. "어딜 그렇게 보는 거냐! 흐음, 그렇지. 네 놈의 눈알을 후벼파 내 영지의 성벽에 걸어놓겠다." 뒤이어 다가온 검은 정확히 우현의 눈을 향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우현은 그러나 뺨에 긴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친 백작은 그러나 아직도 형형한 채인 눈동자를 보며 몸서리를 치고 싶었다. "...잠깐, 너? 눈이 까맣잖아?"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눈썹 역시 검은색. 지고이네르다. 백작의 입가에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다. "호오라, 그 잡종과 한패거리였던 건가? 스스로 라벤다까지 기어들어가 무엇을 획책하려는 거였지? 법황 성하의 암살이라도 하려는 거였나? 버러지만도 못한 인종이." 우현의 눈에 화르륵 파란 불꽃이 일었다. 그 것을 본 백작은 검끝으로 우현의 가슴팍을 헤쳤다. 찌르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아도 죽이려고 마음을 먹은 그 행동에 우현은 남아있는 힘을 전부 끌어모았다. 그런데 순간 백작의 손이 멈칫하며 흔들렸다. "이, 이 것이 왜 여기에? 설마...!" 그 잠깐의 사이 우현은 팔로 몸을 지탱한 채 다리를 움직였다. 솟구친 발이 향하는 곳은 백작의 머리였다. "...!"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관자놀이 부근에 명중한 발등이 백작의 고막을 터뜨렸다. 백작은 평생 생각도 못했던 부위의 아픔에 귀를 붙잡았다. 우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백작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눈을 흡뜬 백작이 비명도 없이 쓰러졌다. 백작의 귓구멍에서 흘러나온 피가 양탄자 위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더니 곧 스며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현은 순간 핑 도는 눈앞에 비틀거렸다. 격렬하게 움직인 덕분에 남아있던 약기운이 제대로 퍼진 모양이었다. 벽을 짚은 그는 백작의 동태를 살폈다. 백작은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있었다. 그 것을 확인한 우현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현기증이 일고 눈앞이 까매지는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여기서 나가야..."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린 그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처음 보는 복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지금의 우현은 피투성이. 누가 보아도 수상한 모습이었다. '누군가 아는 사람을... 카이엔이나 위렌, 아니 공주라도 좋아. 어서...' 그 때였다. 갑작스레 덮쳐든 흰 것이 우현을 끌어안았다. 수면제와는 격이 다른 향기가 전신을 감쌌다. 우현은 눈앞의 백의 자락과 남빛 머리카락을 동시에 움켜쥐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 "우, 우현? 정신차려라!" 다급한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 우현은 그대로 까마득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간만의 휴일...(부르르)